지난 1월부터 불기 시작한 아랍세계의 거센 민주화 바람이 미국의 앙상한 중동정책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친미정권 지원, 반미정권 압박’이라는 단순구도가 깨지고 나라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정책 방향이 바뀌면서 혼란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곧 발표할 새 중동정책을 두고 버락 오바마 정권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 돌아선 시리아 정책 왜? 백악관은 25일 시위대에 대한 무력진압으로 사망자가 속출하는 시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토미 비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폭력적 진압행위는 용인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제재 방안을 포함해 광범위한 정책수단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그동안 시리아 제재에 소극적이었다. 시리아를 미국 편으로 끌어들이면 이란을 고립시키고, 이스라엘 평화 유지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어 오바마 행정부는 경제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을 비난하면서도 하야를 촉구하지 않은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미국은 대테러 정책의 전진기지 구실을 하는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정부에 대해서도 비슷한 경로를 거쳤다. 상황이 심각해지고 나서야 살레 정권의 퇴진을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시리아와 예멘 사태는 미 중동정책의 고민스런 현주소를 보여준다. 전임 조지 부시 행정부의 중동정책은 단순했다. 이라크를 기지로 중동 전역에 서방식 민주주의를 펼친다는 외생적 중동민주화론에 입각한 정책이었다. 이에 견줘 오바마 대통령은 ‘아랍’이 아닌 ‘이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이슬람 세계 전체에 접근하면서, 중동의 내재적 가치에 강조점을 두는 새로운 중동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중동 민주화 혁명이 번지자, 미국은 친서방 국가는 옹호하고 리비아와 같은 반미국가는 억압하는 전형적인 ‘더블 스탠스’를 노출하고 말았다. 데니스 맥도너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은 지난달 28일 “리비아 군사개입이 시리아, 예멘 등에 대해서도 미국이 개입 정책을 갖고 있음을 뜻하는 건 아니다. 미국의 국익이 최선으로 구현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 미국 ‘국익’의 딜레마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은 ‘국익’이다. 중동에서 미국의 국익이란 ‘이스라엘, 석유, 테러 대응’으로 요약된다. 지금까진 미국의 국익을 위해 이집트, 바레인, 예멘 등의 독재정권을 사실상 지지했다. 미국으로선 ‘허약한 민주정권’보다 ‘강력한 독재정권’이 국익에 유리했다. 하지만 중동의 민주화 사태는 미국, 특히 진보를 표방하는 오바마 행정부에 딜레마를 던졌다. 민주주의, 인권이라는 ‘가치’(이상주의)와 기존 ‘실익’(현실주의)이 충돌한 것이다.
초기에 이집트, 예멘 정권을 지지하던 미국이 돌아선 것도 해당 국민들의 퇴진 요구가 거세지면서 반미 분위기를 불러일으켜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미 해군 5함대가 주둔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바레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권 유지에 주력하는 등 이중잣대를 거둬들이지 않고 있다. 중동 전문가인 라이언 리자는 <더 뉴요커>에서 “미국은 중동정책에서 늘 도덕적 원칙보다 국익을 먼저 생각했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조만간 새로운 중동정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새 정책에는 중동 국민들의 민주화 개혁을 지원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유럽에 안보 책임과 비용 부담을 분담시키려는 다자적 집단안보체제를 내세울 것으로 예상된다. 중동의 변화에 적극 부응하는 한편, 더이상 미국이 혼자서 중동을 책임질 능력이 없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앞으로 미국의 중동정책은 급격한 정권교체(이집트 모델)나 군사개입(리비아 모델)보다는 기존 정권에 민주개혁을 압박하는 형태의 이른바 ‘바레인 모델’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워싱턴의 한 외교관계자는 “미국의 중동정책은 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미국 중동정책의 변화는 변화된 중동 여건에 미국이 새로이 적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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