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 함석헌 옹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씨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씨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참 나, 내 안에 있는 말씀과 성령의 씨앗/얼/뜻/정신을 가리킵니다. 씨앗의 껍질이 깨질 때 거기에서 생명이 자라듯이 나의 껍질이 깨지고 내 안에 있는 참 나, 하나님의 형상, 말씀과 성령의 씨앗/얼/뜻/정신이 자랄 때 거기에서 참 생명이 자랍니다. 사회의 눈으로 보면 씨알은 세상의 밑바닥에서 궂은 일을 하면서 생명을 이어가는 민초/민중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밑바닥 민초/민중들은 고난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많은 피해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그런 면에서 밑바닥 민초/민중들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씨알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씨알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합니다. 씨앗이 스스로 싹을 틔우듯이 씨알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자기관리/자기혁명/자기성장이 씨알의 정신입니다. 둘째로 씨알은 고난을 통해서 새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삶에 고난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있지만 그 고난을 통해 연단받아서 더 단련되고 성숙되는 삶이 씨알의 정신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씨앗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씨가 처음에는 길가에 뿌려지고 돌짝밭에 뿌려지고 가시덤불에 떨어졌지만 나중에는 옥토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고 말씀하셨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일꾼들이 땅에 씨를 뿌렸는데 원수들이 가라지를 뿌려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는 씨앗이 땅에 떨어졌는데 사람이 일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낮과 밤이 바뀌는 동안 땅이 일을 해서 씨앗이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말씀하셨고,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는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그것이 땅에 떨어지면 크게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그늘 아래서 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키가 큰 백향목이 아니라 겨자씨입니다. 백향목은 성전에 쓰일 정도로 키가 큰 나무이지만 겨자씨는 다 자라면 1미터 정도 되어서 작은 덤불을 이룹니다. 하나님 나라는 혼자만 크게 자라는 나무가 아니라 키는 작지만 함께 자라서 빽빽한 덤불을 이루어서 새들이 그늘 아래서 쉬고 알을 낳는 곳과 같습니다. 이 겨자씨가 바로 씨알입니다. 함께 자라면서 함께 서로를 붙들어주고 지켜주는 삶이 바로 씨알의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땅에 떨어질 때 이 땅의 역사는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역사로 바꾸게 됩니다. 물론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이 땅의 역사가 퇴보하기도 하고 거꾸로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3번 실패했어도 네 번째 씨앗이 땅에 떨어졌을 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남북한 정상회담이 4월에 있고 북미 정상회담이 5월에 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한두 달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뉴스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 민족을 지켜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좌절하고 실패하면서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씨앗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자라게 될 것입니다. 씨알에는 고난과 좌절 가운데서도 역사를 바꾸고 미래를 개척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씨앗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우리 마음에 떨어질 때 우리 마음은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우리 마음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어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헛된 유혹과 욕망에 빠지는 이유는 내 안의 속사람/씨알이 영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이 땅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내 마음에 떨어져서 나의 속사람이 성장하고 내 마음이 하나님을 모시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정해빈 목사 - 알파 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


‘칼라일’이 인물전을 쓰면서 세상에 있는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 쓰면서도 그 속에 예수님의 이야기는 쓰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깊고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그 높은 본체를 보면서“야아!”하고 감격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믿음이란 별 것 아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어느 땐가는 한 번 예수님의 인격과 사상 앞에서 “야아!”하고 감동하고 감격해 보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야아!”라고 하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성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은 이성의 차원을 넘어설 수밖에 없다. 이 이성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이성의 차원을 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믿음의 사람, 그리스도인이라면 일생에 한 번은 이 이성의 차원을 넘어 예수님에 대해서 “야아!”하고 한 번 뒤집어지는 감격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연인을 ‘사랑’하고,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고 산다는 말을 하는데 그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는 감격하고 사는 것을 말한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고 “야아!”할 수 있을 때 백합화가 내 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 “야아!”하는 한 마디에 그만 내 가슴이 터지는 것이다. 그래서 내 속에 기쁨이 충만해 진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항상 기뻐하라는 기쁨의 생활이고 이 기쁨의 생활이란 감격을 느끼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실존이란 쉽게 말하면 신성(神性)이라고 한다. 신성을 느끼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성을 넘어서는 실존주의를 ‘엑지스탄스(existence)’란 말을 쓰는데 이 ‘엑스(ex)’라는 말은 ‘밖으로’란 말이고, ‘시스탄스(sistence)’라는 말은 ‘밖에 나가선다’는 뜻이다. ‘황홀’이라는 말로도 번역하는데 오묘하다, 아찔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야아!”감탄하는 것은 오묘하고 아찔한 것이다. 우리가 꽃을 보고 “야아!”하는데 사람이 이 꽃을 만들 수 있겠는가? 이 꽃 한 송이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이 꽃 한 송이를 보고 “야아!”라는 감동을 통해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에 감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속에는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있는데 어려운 말로 하면 ‘탈자적 실존(脫自的實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커 철학의 핵심인데 ‘탈자’란 자기 자신이 없어진다는 말이고, ‘실존’이란 십자가를 졌다는 말이다. 바로 탈자적 실존이 되어야 존재(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실존이 되고 자기가 죽어 탈자가 되어야 부활하여 존재의 소리를 듣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말로 하면 40에 불혹(不惑), 50에 지천명(知天命), 60에 이순(耳順) 인데 불혹이 십자가요, 지천명이 부활이요, 이순이 승천이라 말할 수 있다. 스승이란 탈자적인 실존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일생에 한 번은 “야아!”하고 감탄하며 무릎 꿇는 그런 체험이 있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람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내 영안을 열어 주셔야 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유데모니아(eudemonia)”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 한지는 오래 되었건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못했다면, 속히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야아!”하는 감동의 체험으로 믿음, 소망, 사랑, 기쁨이 넘치는 복 있는 삶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 정태환 목사 - 한인은퇴목사회장 >


풍요한 쾌락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며 많은 사람에게 사치와 육정, 주하나님과 떨어져 나가는 이생 (離生) 에로의 ‘치명적’인 유혹이다. 육신에 매달리고, 그 편안한 쾌락을 좇음은 많은 영혼을 파멸케 하며, 영혼의 이익을 해친다. 고기를 먹고 좋은 옷을 입음은 사실 타당한 것이나, 때때로 그것들이 교만과 사치의 재료와 연료가 되어 죄로 이끄는 것도 사실임을 알자! 자기와 친구들을 위해 잔치를 열면서 동시에 가난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주하나님을 매우 노(怒)하시게 하며 영혼에게 저주가 된다. 부자의 죄는 그의 옷이나 음식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었다(눅16:19~31-부자와 나사로). 즉 불쌍하고 신앙깊은 사람들이 천대받고 소외 당하다가 죽음으로 그 불행을 벗어나 천국에 가서 축복과 기쁨을 누림을 알자!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은 ‘수고’로 그들을 도와야 마땅하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가 최선을 다해 임무를 행하겠다는 겸허한 약속과 아울러 주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만 한다. 특히 우리 자신이나 남을 위해서 주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할 때엔 그 은총을 얻기 위하여 열심으로 그 <기도>대로 살아야 한다. 포도원의 과원지기(눅 13:6-9)는 ‘자기의’ 할 일에 충성을 다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역자(목회자)들은 각자 맡은 바 일에 충성 하여야 될 줄로 믿는다. 이처럼 나무에 거름을 주듯 교인들을 싸매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복음>의 약속된 바를 들려 줌으로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인이 <성도>로 바뀌는 열매 맺는 주하나님의 사역이 성취되는 것이다. “만일 실과가 열면” 주인과 과원지기가 얼마나 기뻐할 것인지! 주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인에 대해서 그렇게 무한정으로 참고 계실 분은 아님을 알고 살아가자! 그분의 참는 것도 언젠가 끝이 있을 것이니 그분의 인내를 악용한 자에겐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진노의 형벌을 내리실 것이다.

열매 맺지 못한 나무들은 마침내 ’찍혀’ “불 속에 던지움”을 당할 것이다. 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엔 우리들의 가장 친절한 친구들도 마지 못해 정의의 심판의 결과를 인정 할 것이다. <성도>들은 그 심판을 찬양하며 환영하게 될 것이다.(계15:3-4). 주 하나님께서는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 <겸손할 것을 요구하신다>(눅14:7-14). 우리는 우리 식탁에서 굶주린 무리처럼 떠들어 대는 위선자들의 무리들의 대화처럼 저속한 대화를 금해야 될 뿐아니라, 그저 평범한 대화의 한계를 넘어서 식탁에서도 주하나님의 <선> 하심을 말하고 평상적인 일들을 통해 ‘영적인’지혜를 얻을 수 있는 그런 복스러운 대화가 이루어 지도록 힘써야 될 줄 믿는다. 그렇게 되면 의로운 자의 입술은 “많은 사람들을 먹이게” 될 것이다. 평범한 일상 생활에서도 우리<주님>은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주님은 신앙적인 집회에서 뿐만 아니라 식탁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행동을 지켜 보시며, 그것을 기억해 두신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또한 주님께서는 많은 경우에 이처럼 적극적인 자들이 종종 <수치스럽게>밀려나 창피를 당하며, 오히려 겸손하게 있던 자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그 겸손으로 ‘존경 받는’ 것을 보셨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그 곳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세상적인 지위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소양과 그 업적 등으로 우리보다 ‘더 명예로운’ 자들이 얼마나 있는가 늘 눈여겨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좌석을 권하는 자들이 많다고 자만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좌석을 권해야 하는 자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겸손>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본분을 모른 채 더 높은 대우를 받으리라고 생각 했던 것이 부끄러울 것이다. 자만은 ‘창피’를 낳게 되며 마침내 <타락>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자랑과 욕심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과 <자기부인>은 진실로 명예로운 것이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 지리라”(눅14:11). 우리는 다른 예를 통해서도 <인간의 자랑은 그를 낮추며 마음으로 겸손한 자에게 명예가 주어지고 , 겸손한 자가 명예를 얻게 된다.> 는 사실을 목격하게 됨을 알자! <사역>은 때때로 세상이 천하게 보고 멸시하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일과 그의 봉사를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주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참 사랑의 표시다.

<목회직(사역)>은 ‘영광스런’직분이다. 사역자(목회자)들은 주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들이요 주하나님의 ‘신비’를 맡은 <청지기>로써 그들의 일 그 자체만 가지고도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내 직분’은 <나의 사역(목회)> 이라는 뜻이다. 나의 지배력, 나의 통솔력이 아니라, 나의 <봉사>인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1500자 칼럼] 우리의 소원은

● 칼럼 2018. 3. 21. 14:47 Posted by SisaHan

우리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는 자주 불렀던 노래였다. 이 노래를 부르노라면 어린 마음에도 왠지 숙연해지며, 마치 우리 손으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듯이 그리고 그 일이 가능한 것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곤 했다. 그리고 특히 이곳 토론토에서는 작곡가인 안병원 선생님께서 사셨던 연유로 모임이 끝나면 ‘고향의 봄’을 같이 부르기도 했지만 선생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지휘하면서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기를 잊어버렸다. 아마 우리 살아 생전에 통일이 되기는 어렵다고 판단을 했기 때문일까? 통일의 날은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지난 10년 보수정권 아래서 남북간의 소통이 단절된 채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북한은 핵실험을 가속하여 경쟁의 면으로 치달았고 남한 정부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통일이나 북한과의 대화를 논할 게재가 아니었다. 한때는 조금만 말을 잘못하면 종북으로 몰아 부치던 때도 있었다.


오히려 요즘 들어서는 통일이 된다기보다 전쟁이 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핵전쟁이… 만약에 핵전쟁이 나면 승자도 패자도 없이 둘 다 파멸 당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북한이 핵개발에 집중을 하고 미국에 대륙간 탄도탄을 발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미국이 나름대로 선제공격을 할지 모른다는 설이 지난 연말까지 심각하게 제기된 상황이었다. 한국신문 보다 이곳 신문에서 더 심각하게 다루어 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평화의 올림픽으로 기억될 평창올림픽도 끝나고 패럴림픽이 열리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 보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남도 아닌 우리의 야당 정치인들이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부르며 틈만 나면 꼬투리를 잡아 꼭 망하기를 바라는 듯한 발언들을 서슴없이 해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계 올림픽은 흥행하기 힘든 올림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물론 경제적인 손실은 나중에 다시 계산해 보아야 할 일이지만 큰 탈없이 세계의 언론들이 칭찬하는 올림픽으로 끝났고 뒤늦게라도 우리 국민들이 참여하고 즐기는 올림픽으로 끝난 점이 다행이라는 이야기다. 사실 개막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무관심했고 남의 일 보듯 한 것도 사실이다.

신년사로 김정은이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발표를 했을 때, 나의 솔직한 느낌은 그것이 진심일까 하는 의심이었다. 한마디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과의 전쟁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림픽이 끝나면 연기되었던 한미군사 훈련이 재개되고, 북한은 그걸 빌미 삼아 다시 원점으로, 냉전상태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 나의 추측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의외로 빨리 돌아가 특사가 파견되고 남북간의 정상회담, 그리고 북미정상회담의 가능성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이런다고 곧 통일이 된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시점에서 북한이 원하는 것은 남북회담 보다는 북미회담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들의 체제 보장을 원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미국의 군사적인 위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도 높은 경제적인 압박에 체제유지의 한계를 느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들은 미국의 압박에 의한 중국의 경제적인 압력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현실이다.


북미정상회담이 꼭 성공리에 이루어져 그 반사이익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남한과의 평화관계를 유지한다면 그 보다 좋은 일이 있을 수가 없다. 어차피 통일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질 수 없으며, 한쪽이 다른 한 쪽을 쉽게 통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먼저 서로 적대감을 버리고 평화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아직도 통일의 길은 멀지만, 이 번 일을 기회로 잊혀진 통일의 노래를 부르며 통일의 불씨를 살렸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우리의 소원은…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