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quatter’s right
 

여하한 부동산이 나의 명의로 되어있다 해도 아무런 권리주장 없이 10년이 지나면 그것을 점유하고 있던 상대방은 자기의 소유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즉 빼앗길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권리주장이라는 말은, 렌트를 받는다든가, 자기의 소유를 확인할 수 있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이를 ‘Squatter’s Right’ 혹은 ‘Adverse possession’이라고 하는데 온타리오 주의 ‘Limitation Act’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법에도 예외가 있다. 남의 부동산을 자기소유로 돌리기 위한 악의가 있었다면 이를 인정하지 않는 법정의 판결들이다.
 
사례 1 ) 뉴마켓에 살고있던 부모는 자녀가 집을 사는데 20만$의 돈을 보태주고 이를 세컨드 모기지로 등기한다. 갓 결혼한 자녀가 이혼할 경우 재산의 절반이 나누어지게 됨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10년 동안 모기지 납입이 없었고, 그 후 자녀는 이혼하게 되었다. 법원판결에 따라 모기지에 대한 권리는 소멸되었고, 재산은 반분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즉, 자기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행위가 10년 동안 없었다는 이유였다.
 
사례 2 ) Murray씨 부부는 1995년도에 Caledon의 King St.에 있는 대지가 넓은 주택을 구입하였다. 원래 그 집과 대지는 Rutledge씨 명의로 된 99에이커가 되는 농장의 일부였다. Rutledge씨는 전체 대지 중 1에이커 땅을 떼어 분할하였고, 그곳에 살림집(7255 King St.)을 지었으며, 농장에서의 말 사육을 위해 울타리를 설치했다. 그런데 그 울타리는 집과 농장의 정확한 경계선에 설치되지 않았고 농장 쪽으로 0.33에이커 정도 더 침범한 라인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Rutledge씨가 양쪽 땅 모두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 후 Retledge씨는 1995년도에 집을 팔았고, 1998년도에 농장을 팔게 되었으나 울타리는 원래의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집 소유주가 된 Murray씨 부부는 지적도(Survey)를 받아보았기 때문에 현재의 울타리 위치가 남의 땅을 침범해 있다는 것(Encroachment)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존의 울타리를 연장 설치하고 자기 땅인 것처럼 꾸미고 있었다. 또한 Septic Tank(정화조)를 자기네 땅 경계를 벗어난 곳까지 연장 설치하였으며 1997년도에는 Caledon씨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아 4대짜리 차고를 지었는데, 시에 제출한 사이트 플랜에 표시된 위치가 아닌, 경계선을 넘어 농장 쪽 땅으로 침범하여 짓게된다.
반면 농장주인 Lehal씨는 농장 구입 후, 정확한 경계선에 울타리를 새로 세우려 하였으나, Murray씨의 수 차례에 걸친 욕설과 협박에 이를 이루지 못하고 법에 호소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Murray씨 부부는 당당하게 ‘Squatter’s Right’에 의해 이제는 자기들의 소유가 되었다며 맞대응 하게된다.
2001년 11월, 5일간의 법정공방 끝에 농장주 Lehal씨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이 나온다. 판결문의 내용에 따르면, Murray씨 부부의 행동은 명의를 획득하기 위한 선의를 가진 점유가 아닌,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한 꾸준하고 악의적인 점유였다고 비난한다.

< 김종욱 - 부동산 리얼터 / Golden Ridge Realty Inc. >
문의: 416-409-9039

 


29년 베테랑 전문의가 말하는 성형

‘성형왕국’이라는 달갑지 않은 명성을 얻고있는 한국의 성형 붐은 과연 바람직한 현상인가.
무분별한 성형에 대해 권위있는 성형 전문의들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않는 게 좋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성형외과 전문의인 제가 봐도 우리나라 성형, 너무 많이 합니다. 성형으로 완전히 자기 모습을 재건축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초등학생들조차 연예인처럼 성형하겠다고 병원에 오는 세상이니까요. 구순열(언챙이)처럼 신체 기능에 문제가 되지 않는 이상은 만 18살 이전에는 성형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29년 동안 성형 전문의를 해온 조성덕 박사는 최근 ‘관훈초대석’ 강연에서 성형수술에 대한 조언과 함께 현 실태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털어놨다.
강북삼성병원과 강남 차병원 등에서 성형외과 과장을 역임한 성형 수술 분야 권위자인 조 박사는 성형의 종류와 범위가 얼마나 다양한지 구체적으로 사진과 함께 설명했다. 눈 성형, 코 성형, 흉터 성형은 기본이고 안면윤곽 성형, 입술 성형, 유방 성형, 체형 성형, 유두 성형, 질 성형, 모발 이식, 액취증 수술, 눈썹 성형, 주름 개선 등 다양했다.
 
성형을 하는 사람들의 부류도 과거에는 여성들이 주였다면, 요즘에는 남성들도 관심이 많다고 전했다. 젊은 남성들이 딱 달라붙는 티셔츠를 많이 즐겨 입는데 여성처럼 가슴이 많이 나온 경우 유방을 교정하는 성형을 하기도 하고, 눈썹이 없는 남성들은 모발 이식을 통해 눈썹을 만들기도 한다고도 했다. 
조 박사는 “아이들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부모들의 가치관으로 아이들을 성형외과에 끌고 와 상담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수술도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아이들의 자존감에 엄청난 상처를 주는 일임을 부모들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조 박사는 아이들이 흉터나 혹 때문에 학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다거나 심리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면 의사와 상의해 신중하게 성형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 박사는 또 “성형수술을 너무 어린 나이에 하게 되면 흉이 같이 커지기 때문에 커서 다시 재수술을 해야 한다. 따라서 만 18살 이전에는 수술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특히 코 수술의 경우 코뼈와 골막 사이에 고형물을 넣는데 골막이 떨어지면 뼈 성장에 방해를 받으므로 청소년들은 코 수술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조 박사는 우리나라가 ‘성형 공화국’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내면의 가치를 중시하지 않고, 외모도 실력이다라는 관념이 퍼지면서 무분별한 성형이 판치고 있다고 짚었다. 또 성형외과 전문의가 아닌 일반 병원에서도 성형을 무분별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꼽았다. 성형 전문의에게 성형을 하는 경우는 약 10%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는 “성형은 양 날의 칼을 가지고 있다. 지나치게 의존하지도 말아야하고, 이유없이 배척할 필요는 없다”며 성형을 고려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제시했다. 
화장으로도 충분히 보완이 가능하다면 수술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만약 해야한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부터, 가장 부작용이 없는 방법부터, 원 상태로 복원이 가능한 방법부터 시도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한꺼번에 여러 성형 수술을 하는 경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꺼번에 성형을 하려는 사람들은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 없다고 그는 말했다.
“성형외과 의사가 성형하지 말라고 하니까 이제까지 성형해놓고 무슨 소리 하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29년 성형을 해온 전문의로서 봤을 때 요즘 성형 문화는 문제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습니다.”
무분별한 성형은 자칫 의료 사고와 각종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며 최대한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그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 양선아 기자 >



양악수술 선호… 평생 후회할 수도‥

최근 부정교합 치료와 성형수술을 동시에 하는 양악수술이 인기다. 병원가에서는 개원의 뿐 아니라 대학병원에도 양악수술 문의가 전년대비 20% 이상 늘어났다고 관계자들이 전한다. 요즘 추세는 미용 목적이 크지만 원래는 부정교합 치료가 목적이었다. 위아래 치아의 교합이 맞지 않아 음식물을 씹는 데 문제가 있거나 턱관절이 삐뚤어져 통증이 있고, 소리가 날만큼 상태가 심해 교정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환자가 대상이었다.
 
양악수술은 뼈 외에도 피부와 피하조직, 근육, 치아의 조합까지 고려해야 하는데다 얼굴의 복잡한 혈관과 신경까지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구강악안면외과에서 주로 이뤄졌다. 유난히 한국에서만 예뻐지는 수단으로 각광받는다는 것도 특징이다. 치료와 미용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어서 외국에서도 시술은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은 치료목적이 우선이고, 미용의 경우에도 뚜렷한 이목구비를 위해 아래턱을 밖으로 빼내는 반면 한국은 V라인 얼굴형을 만들기 위해 아래턱을 돌려 집어넣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또 광대뼈 축소술이나 사각턱 수술과 같은 안면윤곽수술을 동시에 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대중화되고 있다해도 그 위험성은 암수술에 뒤지지 않아 자짓 평생 후회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수술의 난이도가 높은 것은 물론 부작용으로 고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불명끝에 사망하거나자살한 사건들, 부작용은 물론 재수술 건수도 증가해 위험성을 말해준다. 얼굴의 주요 신경이 지나가는 위, 아래턱의 뼈를 다루다 보니 자칫하다가는 감각이 돌아오지 않거나 턱관절 장애와 부정교합이 생길 수도 있다. 또 기대했던 모습과 다를 경우 재수술을 해야한다.
전문의들은 만약 수술을 해야겠다면 수술의사가 해당 분야에 수술경험이 많은지, 마취과 전문의는 상주하는지, 응급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지 등을 살피는 것은 필수 고려사항이라고 환기시킨다.


2013년 금년에도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묵상 한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시기에 수천 년 전부터 아니 창세전부터 오늘날까지 앞으로도 모든 인간들 사이에서 그분에 관해서 관심 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성경은 구약 신약을 통틀어 온통 이 분에 관한 말씀으로 채워져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분 없이는 세상 만물이 창조된 것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이 자기의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시고 이 분만을 통해서만이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리라.
 
하나님께서 영혼을 우리 속에 지어주신 것이다.(슥12: 1). 따라서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육체는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전12:7). 죽음에는 육체적인 사망과 영적 사망이 있다. 육체적인 사망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며 영적 사망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것이다.
영원한 영을 받은 인간에게 왜 사망이 왔는가? 이는 인간이 죄를 지으므로 생긴 것이다. 만일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아니하였더면 사망도 없었을 것이다. 로마서 6장23절을 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육의 사망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반드시 겪어야 하지만 영적 사망은 인간만이 맞이하게 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차마 보시지도 못하는 거룩하신 분이시며 죄를 발견하시면 가차없이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자비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무한하신 지혜로 공의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죄인들에게 값없이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 길을 고안하여 내셨다. 이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인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무한 광활하신 사랑과 그의 영원 불변하신 공의와 전지전능하신 능력이 연합하여 믿는 자의 구원을 가능케 한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올해도 사순절 그리고 고난주간에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묵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구원계획을 완료하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법도(율법)에 따라 인간이 죄를 지으면 수명이 제한되어 있고 영이 없는 육만의 동물을 화목 제물로 삼아 회개하며 속죄의 번제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일시적이나마 하나님과 교제는 할 수 있으나 계속 할 수가 없고 죄를 지을 때마다 매번 반복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영이 본체이신 예수님을 독생자로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육과 영을 겸비한 성육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삼아 십자가 상에서 단 한번의 영적 제사를 드리고 완전히 모든 죄를 사함받게 하셨다. 따라서 영원한 영적제사로 죄 사함 받고 영적 영생의 생명을 다시 찾게 하셨던 것이다. 따리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서 죄 사함 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육과 영이 함께 동시에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칼과 기근과 온역으로 심판하시면서 인도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사랑의 은혜로써 오래 참으시다가 마지막 백보좌 심판대에서 모든 인간들을 심판 하시고 죄인들에게는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못 속에서 영원히 벌을 받게한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세상에서도 죄를 지으면 법에 따라 사형 또는 징역 등의 죄과를 지불하게 되는데 하물며 죄를 제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세상에서의 죄의 대가는 죽지않는 상태에서 영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천년 만년을 묵상해도 끝이 없으리라.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눅24: 5-7).
 
< 이승고 - 토론토 영락교회 장로 >


과일 진열대 앞을 지나다 고향 석류를 만났다. 굳이 생산지가 어디냐고 묻지 않아도 주먹만 한 크기에 볼품없는 모양새가 어릴 때 자주 보던 놈들과 흡사하게 닮았다. 빛깔 좋은 수입 농산물에 치여 존재 자체도 불분명한 그 놈들이 이곳 캐나다까지 상륙했을 리 만무하고, 세상 어딘가에 고향 통영 빛, 통영 바람을 닮은 곳이 있어 이렇게 흡사하게 지어냈는지 감사할 따름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큼직한 석류가 검붉은 빛으로 유혹해도 곁눈질만 했는데 뒤늦게 잔챙이들 앞에서 마음이 멎어버렸다. 여성의 인체에 석류가 그만이라는 사실을 아는 듯, 좀 더 나은 알맹이를 고르느라 열성인 여인들 옆에 나도 슬며시 끼어들어 이것저것 들었다가 놓는다. 여느 과일들처럼 쉽게 장바구니에 담을 수 없는 석류, 해풍과 태풍을 견뎌내며 아버지의 눈길 안에서 소담하게 익어가던 열매를 찾던 나는 이미 어린 날 그 언저리를 돌고 있었다. 히말라야 그 주변이 본향이라는 석류가 오랜 세월동안 사방팔방으로 세를 뻗어 우리 집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나는 석류는 우리 집만의 전유물인줄 알았던 시절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옛집엔 해묵은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직한 언덕을 받치고 섰던 나무는 자태도 고왔지만 주홍색 꽃눈이 열리는 봄부터 속내를 내비치는 가을까지 동네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울창한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자란 고목의 허리는 여섯 아이들의 발바닥을 받아내느라 늘 반질반질했다. 게다가 대여섯 평 되는 나무 밑은 언제나 넉넉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우리 형제들의 놀이마당으로는 그만이었다. 아버지의 완고한 성정 탓에 동네 마실 이라고는 꿈도 못 꾸시던 어머니까지 가세한 그곳은 늘 아늑했으며 놀 거리가 매일 샘솟듯이 솟아나는 곳이었다. 어쩌다 태풍이라도 다녀간 날 아침이면 마당 곳곳에 빨갛게 떨어진 석류꽃을 치마폭이 미어지도록 주워 담던 기억이 엊그제처럼 선연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오 유월 태풍은 우리들의 소꿉놀이를 풍성하게 했지만 칠 팔월 태풍은 아버지의 마음을 썰렁하게 만들었을 것 같다.
 
아버지는 통영 나전칠기 장인이셨다. 한옥을 개조하여 조그만 공장을 들여 놓고 몇 안 되는 직공들과 밤낮으로 일에 파묻혀 사셨다. 젊은 나이에 아홉 식구의 생계를 혼자 감당한 아버지는 석류나무 밑에서 뛰고 솟는 자식들을 보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지 싶다. 그 낙이 힘겨운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도 되고 때론 당신의 어깨를 더 떨어뜨리게 하는 짐도 되었을 테다. 
‘숙이야!’ 하는 아버지의 부름에 동생들과 함께 툇마루로 달려가면 당신은 가을 햇살에 한껏 벌어진 석류를 까고 계셨다. 입안에 고이는 침을 꼴깍이며 아버지의 손길을 따라가면 불그레한 알갱이가 반짝이며 튀어나왔다. 섬세한 감각이 주 무기였던 당신의 손에서는 알맹이가 터지는 법이 없었으며 한 입 가득 넣어주시는 손맛에는 고소함과 짭조름함이 섞여 있었다. 그때는 신맛, 단맛에 자동으로 가미되는 간기가 신기했는데 나중에야 바다에서 올려 진 갖가지 조개껍질을 타느라 자연히 녹아든 삶의 녹이었음을 알았다.
 
요즘 따라 작은 아이의 얼굴에서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 자주 오버 랩 된다. 자신의 일신만을 생각하며 뜬구름 쫓던 아이가 결혼을 하고 식구가 불어나니 한결 진중해진 이면에 불안함과 초조함 깃들어 있다. 늘 부모의 보호 속에 있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딸린 가족을 책임져야 하니 그 짓눌림은 상상 이상이리라. 아버지는 완고한 성정으로 가장의 힘겨움을 위장하셨지만 아이는 그 경지까지 아직 미치지 못했나보다.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심정을 이해한다더니 아이가 일가를 이루고 나니 이제야 대가족을 이끄느라 노심초사 하신 아버지의 고뇌가 가슴에 와 닿는다. 
시인 서정주님은 그의 시 ‘석류꽃’에서 ‘다홍치마 입고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이라 했고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시 ‘석류’에서 ‘영혼의 숨겨진 비밀을 보았노라’고 했다. 거장들의 시선에서는 아름다움의 극치, 내밀함의 극치로 비춰진 석류가 젊은 가장의 손에서는 생활고를 해결하는 고마운 소재로 자주 애용되었으며 나에게는 소박한 동심과 젊은 아버지를 만나는 산물이기도 하다. 
석류나무 사이사이로 송골송골 매달린 아이들의 모습이 어제처럼 가깝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