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경쟁력 지수와 관련해 세계적인 공신력을 갖고 매해 주요 국가별 순위를 발표하고 있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서 2011년 국가경쟁력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한국의 교육경쟁력은 59개 국가 중 29위로 나타났다. 이 결과를 기준으로 교육과학기술부는 한국의 교육경쟁력이 2010년에 비해 6단계 상승했기 때문에 한국의 교육경쟁력이 크게 높아졌다고 선전을 했다.
하지만 이는 국민을 속이는 발표다. 한국의 교육경쟁력은 2007년에 29위였으나 이명박 정부 들어온 이후 2008년 35위로 떨어졌고, 2009년 36위, 2010년 35위를 하다가 2011년 들어 겨우 2007년 수준을 회복했다. 즉, 이명박 정부 들어 학교교육이 황폐화될 정도로 과도한 경쟁으로 몰아넣었지만 교육경쟁력은 더 떨어졌거나 이전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의 경쟁력을 높이지 못하는 과도한 경쟁 교육에 대해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번 교육경쟁력 평가에서는 덴마크가 1위를 했고, 아이슬란드·핀란드·스웨덴·벨기에 등 북유럽 국가들이 상위권을 형성했다. 이 북유럽 국가들은 교육에서 경쟁을 추구하지 않고, 초·중학교 과정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교육과정의 수준에 도달하도록 돕고, 고등학교 과정 이후는 각자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진로를 제대로 찾아가도록 돕는, 교육의 본질에 충실한 나라들이다. 그런데도 이들 나라가 모두 교육경쟁력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구미 국가들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경쟁을 강조하는 영국이나 미국은 17~18위권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국제경영개발원이 교육경쟁력의 지표로 삼고 있는 요소들이다. 정량적 평가지표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지출 교육비, 영어 숙달도, 중등학교 취학률,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성적 등을 보고 있고, 정성적 평가에서는 기업인들의 평가를 중요 평가지표로 반영하고 있다. 철저하게 교육 내적 지표가 아닌 교육 외적 지표를 중시하고, 학생이나 교사, 학부모 등 교육 당사자가 아닌 기업인들이 평가하는 방식이다. 그 나라 교육이 국가경제 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는가를 중심에 둔 평가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북유럽 나라들이 수위에 오른 결과는 교육의 경쟁력이 ‘경쟁’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다는 우리의 신화에 경종을 울린다.

같은 북유럽 국가들도 나라별로 조금씩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이번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덴마크 교육을 보게 되면 모든 교육이 철저하게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기를 찾아가며 자신에게 맞는 공부를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전체 교육의 20%를 차지하는 대안교육(자유교육)에도 75%의 재정지원을 해 아이들이 원하는 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선택 폭을 넓혀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 ‘애프터스쿨’이라는 1년제 대안학교를 두어 고등학교에서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 진로를 못 찾고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 아이들이 쉬고 방황하며 탐색할 수 있도록 해준다. 고등학교와 대학 사이에도 ‘포크스쿨’이라는 과정을 두어 비슷한 역할을 하게 한다. 아이들을 절대로 채근하거나 경쟁시키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공부를 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덴마크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 성적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못한 중위권을 맴돌고 있다. 그런데 기업들은 이러한 덴마크 교육체제를 덴마크 경제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매우 높게 평가하면서 신뢰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는 변함없이 교육에 대해 높은 비율의 공공지출을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덴마크 교육경쟁력은 물론이고 국가경쟁력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교육의 경쟁력이 경쟁을 통해서 달성된다는 신화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한 아이 한 아이가 자기에게 맞는 교육을 자신에게 맞는 시기에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주는 방향으로 교육을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도 살고 우리 교육의 경쟁력도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정병오 - 좋은 교사운동 대표>

정부 일각에서 슬금슬금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의 위험성을 제기하고 있다고 한다. 한-미 동맹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캠프 캐럴의 고엽제 매립 의혹이 터지면서 소파 개정 요구가 줄기차게 제기됐지만 침묵으로 일관했다. 여론의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생각이었겠지만, 이제는 여론의 봇물이 터질 지경이라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미 동맹을 위해서도 소파의 환경조항은 개정돼야 한다. 동맹은 호혜적 관계 속에서 양국민이 서로 신뢰할 때 굳건해진다. 한쪽은 군림하면서 불평등을 강요하고, 다른 쪽은 불이익을 감수하며 불만을 쌓아간다면 동맹은 허약해진다. 불행하게도 소파 환경조항은 우리가 주권국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일방적이고 불평등하다. 환경 피해의 조사, 자료 공개, 치유와 배상 등 모든 면에서 미군의 선의에만 기대도록 되어 있다.
2003년에 개정·시행된 소파는 합의의사록에 ‘한국의 환경법령을 존중한다’는 문구를 포함시키고 특별양해각서도 체결해 미군의 환경관리 지침을 한국 법에 맞춰 2년마다 보완토록 했고, 건강에 대한 긴급하고 실질적인 위험에 대해 미군이 치유하도록 했다. 의미있는 진전이었다. 그러나 내용은 하나같이 추상적인데다 처벌과 책임 규정이 없어 미군으로선 불편할 게 없었다.

캠프 캐럴에서 고엽제 매립과 토양 및 지하수 오염이 확인되더라도 피해 주민은 미군으로부터 치유와 배상을 받을 수 없다. 한국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고, 한국 정부는 미군에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다지만, 그림의 떡이다. 1999년 캠프 롱 사건 때 강원도 원주시민들이 수개월간 천막농성 끝에 배상을 받은 것처럼 실력행사가 현실적이다. 조사 역시 고엽제 의혹이라는 긴박한 사태 앞에서도 미군의 동의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미국내 여론과 고엽제 피해 문제가 겹치지 않았더라면 미군이 양보했을지 의심스럽다. 문제가 심각한 캠프 마켓 등에 대해 미군은 여전히 오불관언이다.  독일과 미국 소파 본문엔 ‘독일의 환경법규를 준수한다’고 명시돼 있고, 보충협약에선 미군기지의 환경 조사, 정화 기준, 비용 책임 등을 독일 국내법에 따르도록 했다. 문제는 ‘국내법 준수’다. 미국내 한국인이 그러하듯이, 주한미군도 한국의 환경법을 준수하고 오염자 책임 원칙을 지키면 된다.

독일 정부가 지난 30일 17기의 원전을 2022년까지 완전히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가동이 중단된 7기 등 총 8기를 즉각 폐쇄하고, 2021년까지 대부분의 원전을 폐쇄한 뒤 비상사태용으로 3기만 1년간 더 연장가동한다고 한다. 이로 인한 전력 부족분은 풍력 등 재생에너지, 가스 등 화석연료, 그리고 장차 지금의 절반으로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에너지 효율 향상 등으로 보완할 방침이다.
독일의 이번 결정은 세계 원전산업의 장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며칠 전 원전 의존율이 40%에 이르는 스위스도 2034년까지 단계적으로 원전을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독일의 이번 결정에 대해 독일 산업계가 반발하고, 일부에선 후쿠시마 원전사고 후폭풍을 피해 가려는 정치적 결정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이틀 전 정부 에너지정책 자문위원회도 “탈원전은 10년 내에 가능하다”는 최종결론을 내렸고, 그에 앞서 열린 16개 주정부 환경장관회의에서도 결론은 같았다.

독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탈원전 장기계획을 수립하고 치밀하게 대비해왔다. 1998년 출범한 게르하르트 슈뢰더의 사민당·녹색당 적록 연립정부 때 이미 “원자력 사용을 최대한 조속히 종료한다”는 원전 포기 방침을 정하고 그것을 자연친화적 에너지로 대체하기 위해 재생에너지법까지 제정했다. 이에 따라 전력생산에서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9년까지 5%대에서 2009년에는 16.4%까지 올라갔다. 그 뒤 기민련 주도의 연립정부도 원전 가동 기한을 8~14년 더 늘리는 등 계획을 일부 수정했으나 원전 포기라는 큰 틀은 유지했다. 지난해 수립된 기민련·자민당 연립정부의 원전 가동 12년 연장 조처도 원전 포기 틀 자체를 부수진 않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며칠 뒤 메르켈 정부는 부랴부랴 가동 연장 철회를 선언했지만 뒤이은 지방선거에서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총리 자리를 58년 만에 녹색당에 내주는 등 참패를 당했다. 시민들이 원한 것은 후퇴 없는 탈원전이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번 결정에는 물론 메르켈 정부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하지만 독일의 탈원전 정책은 이미 1990년대부터 치밀하게 준비돼온 것이다. 그것을 실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결국 깨어 있는 시민의 힘이었다. 에너지 전략에 대한 장기전망 수립과 시민적 논의가 우리에게도 시급한 까닭이다.

[1500자 칼럼] 흐뭇한 비누거품

● 칼럼 2011. 6. 6. 13:17 Posted by Zig
엄마 손에는 지팡이 대신 부피가 큰 헝겊 양산이 들려있다. 언제부터 짚고 다녔는지 꼭지 부분의 고무가 다 닳아서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가 난다. 작년에 엄마를 만났었으니 양산으로 바뀐 것은 아마 그 후 부터였을 것이다. 가벼운 지팡이를 다시 써보도록 권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나는 그쯤에서 물러서며 ‘노인’이라는 호칭이나 ‘지팡이’라는 단어와 연상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엄마가 혹시 상처를 받으신 게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다. 나이에 순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인이 엄마 개인의 심리적인 요인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사회적인 변화의 물결 때문일 수도 있다. 젊고 예뻐지는데 대한 강박에 가까운 집착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편안함을 반납하는지도 모른다.
타박타박 걸으며 양산 지팡이에 의지해 차에서 내려서 찜질방까지 들어가는 길이 마치 지구 한 바퀴를 도는 만큼이나 멀고 길게 느껴진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 턱은 왜 그리 높은지, 인도의 보도블록은 또 왜 그리 울퉁불퉁하고 고르지 못한지, 나는 오늘에서야 지팡이 짚은 노인의 시각으로 주변을 인식하며 새삼 가슴이 저린다.
그렇게 탈의실까지 왔다. 그런데 세상에, 5월 중순에 누비바지에 내복이라니. 그나마 덜 여위어 보이던 몸집이 내복과 누비바지 덕분이었음을 알아차리고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한 줌 부피로 줄어든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게 엄마는 수줍은 듯 변명처럼 말을 흘리신다.
 “추워서 입는 게 아니야, 이래봬도 이게 안주머니까지 있어 얼마나 편하다고.” 두꺼운 껍질을 차례로 벗어놓자 엄마의 몸이 가벼워지는 만큼 내 가슴은 무거워진다. 나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싶은 자책 때문일 것이다.

누구의 도움도 마다하고 혼자 휘적휘적 욕탕으로 걸어 들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위태로워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욕탕까지 또 한 고개를 넘었다는 듯 엄마는 굽었던 허리를 펴신다. 잠시 동안이지만 엄마 입장에서 행동해보니 당연한 줄 알고 살던 세상이 불편한 것 투성이다. 욕탕의 깔개 의자는 자질이 플라스틱인데도 노인이 들기에는 턱없이 무겁다. 목욕은 시작도 안 했는데 기진한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어 샤워버튼을 누르신다. 샤워기는 한 번 누르면 잘해야 십여 초 동안만 물이 나오게 되어 있어 수없이 눌러야나 제대로 씻을 수 있다. 아마 물을 절약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인 듯하다. 에너지 자원을 생각하면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오늘따라 노약자에 대한 무심함에 속을 끓이게 된다. 보다 못해 샤워기를 빼앗아 엄마 머리에 대 드렸다. 빳빳하던 고집이 슬그머니 수그러들더니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맡기고 다소곳이 앉아계신다. 머리를 감겨드리고 내친 김에 몸까지 씻겨드렸다. 살갗이 이리저리 밀려다녀서 비누칠하기가 쉽지 않다. 하얗게 비누거품이 이는 때수건을 살그머니 앞쪽 가슴께로 가져가니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절하며 움츠리다가 포기한 듯 힘을 빼셨다. 탄력을 잃어 쳐진 살갗을 한 켜씩 들추어가며 비누칠을 했다. 흐뭇한 비누거품들이 안개꽃처럼 피어났다가 스러져갔다. 손끝에 전해오는 말캉거리는 촉감이 참 좋았다. 어린아이가 제 엄마 몸에서 느낄 것 같은 행복감에 잠이 오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엄마와 목욕하러 다녔는데도 나는 엄마의 젊은 몸은 기억하지 못한다. 수증기가 뽀얗게 서려있어 숨이 차던 기억과 물이 너무 뜨겁던 기억, 그리고 살갗이 얼얼하도록 밀어 아프던 기억밖에 없는 걸 보면 내게 목욕하는 일은 그리 즐거운 추억이 아니었나 보다.
“이제 됐다, 그만해라”는 소리에 놀라 버튼을 눌러 맑은 물로 헹궈드렸다.
샤워를 마치고 찜질방에 나란히 누워 오래된 기억들을 꺼내어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과거라는 길 위에 이민을 떠난 후 내가 버리고 간 시간들이 조용히 쌓여있다. 엄마의 볼이 홍옥처럼 빨갛게 빛난다. 나는 엄마의 발갛게 익은 얼굴이 싱그럽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엄마의 한때 꽃 같던 젊음을 나는 지금 그렇게 만나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발그레한 혈색이 행복한 노년의 빛깔이기를 조심스레 빌어본다.

<김영수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한국 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