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겨울 한파 속에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결정과 동시에 정당 하나가 공중분해되었고, 국회의원 5석도 단번에 날아갔다. 반대 집회만 해도 처벌되니 입에 재갈까지 물렸다. 그 효과 면에서 유신 때의 긴급조치와 동급이다.
재판관 중 압도적 다수가 정당해산에 손을 들었으니 집행력 확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결정문의 설득력은 다른 차원이다. 논리의 승부와 진실의 전투는 가담 인원 다수로 판가름나는 게 아니다. 1명의 반대의견은 8명의 다수의견보다 훨씬 높은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다.
정당해산권을 헌재에 부여한 것은,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 달라는 것이다. 정당해산의 요건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라는 추상 문구다.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에도 현저히 미흡한 요건으로 헌재의 판단에 맡겨놓은 것은, 헌재가 권력 남용을 않으리라는 높은 기대를 깔고 있다. 사법부 판결과 달리 3심도 아닌 단심으로 결판나기에 그 신중성의 요청은 더욱 엄중한 것이다.


헌재는 그런 요청에 제대로 부응했는가. 사실인정 부분에선 확실한 증명 대신 가설과 억측,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법원에서 유죄 입증에 이르지 못한 부분도 확정사실처럼 비약한다. 가설과 비약에 의한 허술한 사실확인을 토대로, 국가비상사태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판결문이라기보다는 공소장 같다.
김이수 재판관의 반대의견은 그런 성급한 논리비약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북한의 주장·용어에서 일부 유사점을 들어 “북한 추종성이 곧바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그의 지적은 지극히 온당하다. 정당원의 일부가 저지른 일탈들이 개탄스럽긴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형사처벌을 받으면 그만이다. 무슨 ‘주도세력’이 몇년간 몇만명을 꼭두각시인 양 조종해간다는 것은 망상일 뿐이다. 이러한 무리한 연결은 “부분을 갖고 전체를 매도”하는 것으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사실 정치과정은 사법 판단보다 훨씬 복잡다단하다. 여러 과오를 노출시킨 통합진보당은 선거를 통한 유권자의 심판으로 축소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정치적 자유의 방파제가 되어야 할 헌재는 성급히 정치적 당사자의 일원인 양 처신하여, 국민의 정치인 선택과 정당심판권을 선제적으로 제약해버렸다. 헌재가 빼든 칼날은 이제 개별 정당의 명운을 넘어 정치권 전체를 옥죄고, 국민들에게 정치적 자유의 위축을 강요한다.


정당해산 결정은 법리 검토에 그치지 않고 정치 판단을 본질적으로 내포한다. 통합진보당의 해체가 대통령의 의중에서 시발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대선 과정에서 ‘다카기 마사오’로 상징되는 역린을 건드린 데 대한 치졸한 정치보복이란 의혹도 따라붙는다. 어쨌든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헌법재판소를 이용하여 깔끔하게 차도살인을 한 셈이다. 정치적으로 볼 때 헌재는 권력의 칼춤을 대행한 데 지나지 않는다.
박한철 소장은 이 결정으로 “소모적인 이념 논쟁을 불식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는 독선과 오만의 발로일 뿐이다. 심지어 2인 재판관의 보충의견은 섬뜩한 적대감까지 여과없이 드러낸다. 왕조시대 의금부의 친국장인 듯 ‘대역행위’의 언급까지 덧붙였으니, 승자의 쾌감에 취한 나머지, 재판관이 지녀야 할 절제와 품위를 저버렸다.


헌재 결정에 대한 검증은 이제 대한민국의 주권자이자 최종심급자인 국민들의 몫이다. 정치적 타살을 초래한 사안일수록 국민과 역사의 심판은 더욱 예리해져야 한다. 재판 평가작업이 비교적 용이한 것은 김이수 재판관의 반대의견 덕분이다. 그의 의견을 독해해보면 미국 헌법사에서 홈스, 브랜다이스 등 ‘위대한 반대자들’(great dissenter)의 면면이 떠오른다. 엄청난 내외적 중압감을 홀로 감당하며 썼을 김이수의 반대의견은 민주주의의 학습 자료로 손색이 없다.
판결은 정권보다 더 오래간다. 역사적 심판 앞에, 다수의견은 갈수록 초라해질 것이다. 왕년의 진보당, 인혁당 재판이 그랬듯이 말이다. 독재와 독선으로 치닫는 정권 아래서, 이 반대의견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어디서 숨쉴 공간을 찾아낼 것인가.




리칭업 미니스트리 자원봉사팀이 초청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한 어린이들.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파티
Reaching Up Ministry 봉사자·교회들 섬김

우범지대로 알려진 토론토 제인-핀치의 80여개 다민족 거주지역에 있는 유니버시티교회(담임 김진혁 목사: 1830 Finch Ave W.)를 중심으로 어린이와 주민들을 위해 ‘Reaching Up Ministry’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과 후원교회들이 지난 12월19일 저녁 아름답고 뜻깊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2008년부터 시작된 Reaching Up Ministry는 방과 후 숙제 및 학과 공부를 도와주는 Homework Program과 음악 레슨을 하는 Music School 프로그램을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 어린이들과 주민들을 섬기는 사역으로, 김애령, 김혁 씨 등 6명의 피아니스트로 구성된 ‘피아르모니아’멤버들을 비롯, 다수의 한인 자원 봉사자와 많은 교회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날 파티에는 120 여명의 어린이가 참석해 성황을 이룬 가운데 크리스마스 장식이 예쁘게 꾸며진 테이블에서 스파게티, 미트볼, 치킨, 샐러드, 빵 등 맛있는 식사와 다양한 음료가 어린이들을 즐겁게 했다. 또 페이스 페인팅과 스토리 타임, 싱 어롱 시간 등으로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날 특히 밀알교회 어린이들이 준비한 뮤지컬 ‘A play in a manger’ 공연이 눈길을 모으며 마지막 곡은 유니버스티 교회 어린이들과 함께 한 합창으로 모두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어린이들은 가든 교회와 밀알 교회에서 준비한 선물을 한아름 안고 귀가, 모처럼 흥겹고 기쁜 크리스마스를 맞이 했다.


Reaching Up Ministry 자원봉사팀은 평소 음악교실 등 프로그램 외에 여름캠프와 기금모음 음악회 등 다양한 사역으로 어린이와 주민들을 돌보고 있다. 뜻을 함께 하며 자원봉사에 나설 헌신자들이 많이 필요하며 언제든 환영한다고 RUM팀은 밝혔다.


< 문의: 647-746-7380 >



지금 내 곁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고 너무 기뻐하거나 자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또한 내 곁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고 너무 슬퍼하거나 힘들어하지도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고, 박수를 쳐 준다고 해서 어깨에 너무 힘주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외면하고 있다는 이유로 너무 크게 낙심하지도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 이것 하나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내 주변의 상황은 분명 이제까지의 나의 삶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는 사실입니다.
내 곁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부담을 주지 않은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주고, 박수를 쳐 준다면 꽤 괜찮은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내 곁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면 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면 나는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못한다면 결코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에 사람이 많거나, 적다는 사실보다, 때로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며, 내가 바라보는 방향이 어디인가 하는 점입니다. 내가 선 자리가 바르지 않고, 내가 바라보는 방향이 옳은 방향이 아니라면 오늘 나를 바라보며 환호하던 그 사람들의 뒷모습을 쓸쓸히 바라보는 내일이 곧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바른 분별력입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것을 분별해 내는데 지혜롭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많은 사람이 그의 주변에 모여 있고,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바른 자리에 서 있다고 착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나고,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가 자신이 바른 길을 바르게 걷고 있기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른 자리에 서 있지 않아도 사람이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때로 그에게서 무엇인가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별 부담스럽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몰려 들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은 때로 불편함을 주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독선적이고, 이기적일 때,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럽고 불편할 때...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이유는 대부분 그럴 때입니다.
그래서 분별력은 참 쉽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비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만하지도 않을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로 본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듦을 깨닫습니다.
얼마전 새벽 예배에서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머물러 계시지만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 왔다”(막1:45)는 말씀이 도전이 되었습니다.


한적한 곳에 있어도 사람들이 찾아 나오는 분, 예수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지만 사람들이 그 불편한 장소에서 불편한 소리를 듣기 위해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왔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 장성환 목사 - 런던 한인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