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맹자를 읽으며

● 칼럼 2013. 1. 22. 19:24 Posted by SisaHan
세상은 지금 세계적인 불황속에 격변하고 있으며 중국이 정치, 경제적으로도 어느덧 일본, 독일을 누르고 미국과 거의 대등한 대국으로 자라나면서 세계의 이목이 중국으로 집중되고 있다. 중국이 그 동안 금지하였던 유교적 가르침를 부활시키고 장려하면서 이제는 오바마 대통령이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공자나 맹자의 말씀을 인용하며 연설을 할 정도로 세상이 달라졌다. 
2013년 계사(癸巳)년 새해를 맞이하며 올해의 New Year’s Resolution을 무엇으로 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담배를 끊는다거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더 많이 보낸다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volunteer 일을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올해에는 오래 전부터 마음만 먹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던 ‘고전 읽기’로 정하였다. 
지난해 한국에 갔다가 대학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약학도임에도 대학 때부터 중국의 제자백가 사상에 흥미를 느끼고 꾸준히 공부를 하여 「노자 제대로 읽기」 등 라오쯔에 관한 책만 세권을 낼 정도로 나름대로 그 방면에 대가가 되어 있었는데 그가 돌아오는 내 배낭에 맹자를 넣어주었다. 
고등학교 때에 논어, 대학, 플라톤의 대화 따위의 책들을 수박 겉핡기식으로 읽은 기억이 났지만 맹자는 우선 그 책이 두껍기도하려니와 이름이 풍기는 바 내용이 너무 낡고 무거울 것 같아서 정신이 맑을 때에 정독을 해야지하고 버려두었었다.
 
조선의 개국과 동시에 새로운 정치이념 으로 받아들여져 오백년 동안 우리 조상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오늘의 나의 인생관에도 큰 영향을 주어온 유교사상을 나는 어느정도나 알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문득 부끄러워졌다. 우리는 왜 우리 역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지 백여년 밖에 되지않는 서구 기독문명권의 성경에는 열광하며 통독하다 못해 필사까지 하면서 수백년 동안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동양의 고전은 소수의 사람만이 연구를 위하여 읽고 있는것일까? 물론 이 책들은 한문으로 쓰여져 읽기가 힘들고 배후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다고하나 오늘날과 같이 정보공유가 손쉬운 인터넷시대 에는 클릭 한번으로 한문 원전과 함께 수많은 한글, 영문 번역본을 찾아볼 수 있다. 
맹자의 공생활 15년간의 일들을 기록한 책, 맹자를 읽어보면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신약성경처럼 사려 깊고 신중한 맹자의 행적과 대화들이 문답식으로 적혀 있어 흥미로울 뿐 아니라 읽고나서 사회, 도덕적인면에서 그 뜻을 다시 생각케하는 깊이와 여운이 있다. 그래서 율곡 같은 옛 선비들도 하루에 한장씩 읽고 그 뜻을 음미하였다는 것처럼 맹자는 그러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요즈음 갑자기 인문과학, 동양사상의 붐을 타고 한국에서는 공자, 맹자에 관한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나오고 심지어 소설도 출판되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아직도 최고의 도덕적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 사단칠정(四端 七情) 외에도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이 굶어죽게된다면 왕도 바꿀 수있다는 혁명적인 생각, 백성을 잘 살게하는 것이 곧 왕도라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인본주의, 자기에게 허물을 알려주면 기뻐하라, 지성이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 없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라, 남을 사랑하고 존경 해야 그들도 나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등 인간의 심성을 꿰뜷어보고 개인의 근면을 권하는 많은 말들이 마음에 다가온다. 2400여년 전 춘추전국시대의 험난한 난세에 태어나 제왕들에게 민중을 위한 사람의 길을 설파한, 실패한 Idealist의 담론이 아직도 진리로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아프게 와닿는 이유는 아직도 그때처럼 세상이 어지럽고 모든 사람이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아직 오지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우리는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 이념과 주의의 구분이 무의미한 세상에 살고 있다. 새해에는 어지럽고 혼탁한 시대를 앞서 헤쳐가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지혜를 동양의 고전들을 읽으며 터득하기를 기대해본다.

< 김영제 - 시인, 시.6.토론토 동인 >


민주통합당이 18대 대선에서 패배한 뒤 25일 만인 어제 당의 혁신을 이끌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민주당은 이번 비대위를 혁신의 틀을 만들고 전당대회를 공정하게 관리하는 ‘혁신형 비대위’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문희상 위원장과 박기춘 원내대표를 비롯한 9명의 비대위원 면면을 보면 혁신형이라기보다 관리형에 가깝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파괴 수준의 건설을 담당해야 하는 상황의 엄중성을 생각하면 긴장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그나마 인선에 지역과 세대를 고루 반영했고, 비교적 계파색이 적고 균형감각을 갖춘 사람이 많이 들어간 것은 긍정적이다. 부족한 혁신성은 추후 2명의 외부 인사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보완하길 기대한다. 외부 인사는 장식용이 아니라 민주당에 ‘가장 아프고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을 인물을 삼고초려라도 해서 모셔와야 할 것이다.
 
이번 비대위의 과제는 막중하다. 비대위의 성공 여하에 정통 야당의 생사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대위는 대선평가위, 정치혁신위, 전대준비위 등 3개 위원회를 우선적으로 가동하기로 했다. 또 오늘 현충원 참배를 시작으로 설날까지 ‘대선 패배 대국민 사과 버스투어’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고 내용에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비대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질 수 없는 선거’를 진 데 대한 원인분석부터 철저하게 해야 한다. 안철수의 소극성과 이정희에 대한 반발, 인구 구성의 변화, 비주류의 비협조, 친노 패권주의의 전횡 등 패인은 다양하게 나왔으나 공통점은 모두 ‘남 탓’이다. 어느 계파든 사람이든 내 탓을 하는 패인 분석은 보이지 않는다. 비대위는 몇날 며칠 끝장 토론을 하더라도 진정성 있는 자기반성을 내놔야 할 것이다.
 
패인 분석 뒤에는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만 빼고 모두 갈아치운다는 각오로 혁신을 해야 한다. 상대 실수에 기대지 말고 자신의 기량으로 득점하려면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를 실현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 당의 모든 것을 뜯어고쳐야 한다. 지금과 같은 어설픈 계파 안배 공천, 무책임한 지도력, 정권에 대한 무조건 비판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집권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민생과 국가 안위만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비로소 국민의 신뢰도 찾아온다. 제1야당으로서 민주당의 역할은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국민 행복을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환골탈태해야 한다.


[사설] 말의 죽음, 시인의 죽음

● 칼럼 2013. 1. 22. 19:21 Posted by SisaHan
시인의 말은 핍박받는 이들의 무기다. 가난한 이들의 위로이며 소외당한 이들의 벗이다. 말로 말미암아 이들은 다시 일어서고, 저항하고, 앞으로 전진한다. 그의 말마따나 시와 문학은 고통의 산물이고, 시인이 시대의 아픔에 누구보다 예민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런 시인의 맨 앞줄에 새겨진 이름 가운데 하나가 김지하다. 그의 글은 황토에 선연한 땀과 피의 긴장 속에서 튀어나와 독재자와 부역자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었다. 치명성으로 말미암아 그는 사형 선고를 당해야 했다. 당대인들은 그 앞에서 숨죽여 몸서리쳤다.
 
그런 그의 말은 어느 날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 불의에 맞서는 이들에게 수치심이 되었다. 시대의 절망이 강요한 산화를 두고 죽음의 굿판으로 몰아붙였다. 요즘엔 그 자신을 옭아맸던 빨갱이 공산당 따위의 말을 마구잡이로 날린다. 황토를 떠나 허공을 맴돌던 그의 말이 언제부턴가 권력의 추력을 받아 가난한 이들의 가슴을 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치명성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고통을 외면하고 슬픔을 잊은 말이 힘을 가질 순 없기 때문이다. 권력의 요설은 한갓 현혹이고, 협박, 깡통, 쥐새끼, 똥구멍, 찢어죽여… 따위의 말은 ‘오적’과 ‘비어’의 말 그대로지만, 맥없이 코앞 시궁창에 박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가 신앙하는 후천개벽과 여성시대의 도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내공에 대한 믿음 따위를 무작정 비난할 순 없다. 신념은 신념대로 존중해야 한다. 여성성에 대한 판단을 놓고 논란은 있겠지만, 시비를 일도양단할 순 없다. 변신을 안타까워할 순 있지만 훼절이라 매도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졸렬한 증오와 마구잡이 가해는 참기 힘들다. 누군가는 그에게 서푼짜리 분노를 집어치우라고 했다지만, 요즘 그가 토해내는 공연한 분노는 서푼 값어치조차 없다. 상생을 말하면서 저 혼자 옳다 우기고, 섬김을 말하면서 섬기지 않는다고 분노하고, 한때 서운했던 감정 때문에 평생을 저주하는 그의 말들이 어찌 한푼 값어치나 있을까.
 
그 자신도 말했듯이, ‘오적’ 이후 말이 육신이 되고 힘과 희망이 되는 그런 시를 그는 쓰지 않았다. 그러니 ‘시인 김지하’는 아주 오래된 전설 속의 이름이다. 하지만 몇몇 시편과 그로 말미암은 수난은 한 시대의 가시면류관으로 우리 기억에 각인돼 있다. 설사 오늘날 그의 말들이 수치스럽다 해도, 그 이름을 쉽게 지울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래도 이제 그를 책갈피에 묻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오늘의 아픔을 담아낼 오늘의 말과 시인을 찾아 나서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