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소리의 선택

● 칼럼 2011. 12. 23. 19:41 Posted by SisaHan
나는 어떤 소리에 이끌려 오늘 여기까지 왔는가, 한번 생각해 보고 싶은 계절이다.
그러나 생각이 막히고 가슴만 몹시 답답해 왔다. 왜 그럴까 ?
구상 선생의 시문선(詩文選) ‘그분이 홀로서 가듯’ 한권의 책을 책장에서 뽑아 들었다. 
‘인간은 누구나 삶의 보람을 찾고 있습니다...나의 존재와 체험과 그 의문 속에서 오직 확연하다고 여겨지는 게 있다면 아주 진부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양심과 사랑이 인간존재의 본질이란 것입니다...’ 내 답답함 진원의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온다. 마음의 소리는 무어라 말하고 있는가. 마음은 볼 수도, 무게를 달수도, 해부하여 보여 줄 수도 없다. 그러나 마음은 생각의 기능이 있다. 생각의 기능이 양심의 소리로 표출되는가 아니면 어두움의 소리로 표출되느냐에 따라 가는 길이 플러스 인생을 사느냐 마이너스 인생을 사느냐의 갈림 길을 정해줄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머지않은 곳에서 얼마 전에 한인 젊은이들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피살자는 장래가 촉망되는 운동 선수였고 뜻밖에도 존함을 일찍 들었던 분의 손자였다. 가해자의 부모나 피살자의 부모는 어떻게 살라고 이런 일을 저질러야 했던가. 개인적으로는 모르나 지인으로부터 들은 말로는 모두 열심히 이민자의 삶을 살고계신 분들이란다. 그러나 가해자나 그의 부모는 죄인된 심정으로, 피해자 부모는 가슴에 못이 박혀있는 상태로 고통을 감내하며 일생을 살아갈 것이다. 죽이고 싶도록 칼을 들이 댄 가해자의 마음속엔 어떤 소리의 지배를 받았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분노케 했으며 평소 그는 어떤 소리를 들으며 살았었을까. 
어떠한 소리의 선택에 따라 사는가에 인생은 결정된다는 말이 상식적인 표현으로 들릴지 모르나 상식적인 말임에는 틀림없다. 
40여 년 전 내가 낯선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마치 마라톤 선수들이 출발 신호의 총성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마냥 긴장감과 도전의식으로 가득했다. 워낙 가난했던 모국을 뒤로 하고 떠나왔기에 잘 살아 남기위한 시발점에 서있었다. 장거리 마라톤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으나 대부분 첫 번째 주자들은 현장을 뛰는 선수의 자리에서 물러나 있다.
 
장성한 2세들이 마라톤 주자로 나서고 있다. 중간에서 합류한 사람들도 있다. 문화적인 차이 1. 2 세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사고의 괴리는 바른 소리 소통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첫 번째 주자들은 참으로 열심히 끝까지 달려 올인한 결과 뿌리를 내렸다.
소리의 선택에 따라 우리들 삶의 현장은 평화를 추구하고 사랑을 펼치고 남을 배려하는 이타적 중심의 삶. 양심의 소리에 충실한 사람과, 이기적인 삶 비양심적인 소리에 이끌려 살아 온 삶의 모습이 다를 뿐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은 예수탄생을 기점으로 주후 2011년을 마감하고 2012번째를 가리키고 있다. 그 분은 홀로 서 가셨지만 그 분은 사랑과 용서의 씨앗을 온 땅에 심어놓으셨다. 
이른 새벽 아침 잔잔한 음악과 함께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문 소리에 마음을 맞추어본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그릇 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가슴속이 따듯해 온다. 주님 탄생 이유의 메시지가 그분의 말씀의 소리를 따라 일생을 마쳤던 성 프란시스코를 통해 우리들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오고 있다. 사랑과 평화가 내 가정에도 내 이웃에게도 함께 하기 비는 마음의 소리를 다시 듣는다.

<민혜기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경찰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에 대한 디도스 공격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과정에서 청와대가 중요 사실을 숨기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가뜩이나 경찰의 은폐·축소 수사 논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불길이 청와대의 외압 의혹으로 더 커진 것이다. 
<한겨레21> 최근호는 사정당국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경찰은 애초 청와대와 협의를 한 뒤 청와대 행정관 박아무개씨가 선거 전날 디도스 공격 관련자들과 저녁자리를 함께한 사실과 한나라당 관계자들과 공격 주범들 사이의 돈거래 내역을 공개하지 않을 계획이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청와대 수석급 관계자와 경찰 최고 수뇌부 사이에 핫라인이 작동했다고 전했다.
 
사정당국 관계자의 발언 내용은 충격적이다. 청와대가 선관위 공격의 실체 규명에 핵심적인 두 가지 단서를 은폐할 것을 경찰에 종용한 셈이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조율을 거친 사안을 경찰이 자체적으로 뒤집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청와대와 조현오 경찰청장은 외압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조 청장은 “청와대 고위 관계자와 두 차례 통화를 해 수사 상황을 설명한 일은 있다”고 밝혔을 뿐이다. 조 청장과 통화한 당사자로 알려진 김효재 정무수석 쪽도 “압력을 넣은 일이 없고 넣을 입장도 아니다”라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경찰은 박희태 국회의장의 의전비서였던 김아무개씨가 범행을 주도한 공아무개씨에게 1000만원을 건넨 사실을 지난 7일 오전 청와대에 보고했고, 그날 오후에는 박 행정관의 저녁자리 동석 사실을 청와대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김 정무수석이 조 청장과 통화한 시점이 7일과 8일이고, 경찰 수사 결과는 그 직후인 9일 발표됐다. 두 사람의 통화가 발표에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있는 상황이다.
 
이 사건은 어설픈 해명으로 은근슬쩍 뭉갤 사안이 아니다. 청와대 외압이 사실이라면 디도스 공격 이상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명박 정부 도덕성에 스스로 치명적 손상을 입히는 일이기도 하다. 청와대는 외압 의혹에 대한 사실관계를 분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몰락한 것은 도청 자체보다 닉슨의 거짓말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 검찰도 성역 없는 수사로 진상을 철저히 밝혀내야 한다.


정부의 대북 정보력이 심각한 허점을 드러냈다. 원세훈 국가정보원장과 김관진 국방장관은 어제 국회에서 북쪽 방송을 보고서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처음 알게 되었음을 인정했다. 김 위원장이 숨진 것도 모른 채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한다고 나라를 비웠다. 그동안 북쪽 사정을 훤히 들여다보는 척하면서 김 위원장의 건강 관련 정보를 슬며시 흘리곤 하던 정부기관들의 체면이 말씀이 아니다. 
더욱 문제는 정부가 구체적인 정보를 놓친 것에 그치지 않고 공개된 정보조차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북은 그제 정오에 ‘특별방송’을 할 것임을 아침부터 예고했다. 특별방송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때 한차례 한 게 전부임을 근거로 일부 민간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의 유고 가능성을 예견했다.
 
반면에 통일부 당국자들은 우라늄 농축 중단 발표 아니겠느냐고 헛짚고 있다가 허둥댔다. 김정일 사망 소식을 전하는 특별방송을 앞둔 상황에서 이 대통령이 고깔모자를 쓴 청와대 직원들한테 둘러싸여 자신의 생일축하 잔치를 벌이는 웃지 못할 희극을 연출한 것은 이런 외교안보라인의 무능 탓이다. 정부의 상황파악 능력이 이 정도이니 국민이 불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런 상황은 이명박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선 다양한 남북 교류와 인적 접촉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정보가 비교적 활발히 소통되었다. 아울러 한-중 외교 경로를 통해 핵심적인 정보가 교환됐다. 그런데 이 정부 들어 미국 편중 외교를 벌이고 대중국 외교를 소홀히 한 결과 비상 상황에서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동안 정탐활동을 강화한다며 막대한 정보예산을 쏟아부은 게 무색할 지경이다.
 
한반도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북 지원이든 뭐든 하려 해도 돌아가는 걸 알아야 판단을 하는 법이다. 북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은 곧 상황 관리를 위한 지렛대를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북한 상황과 관련한 국제 협의 자리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우리가 정보력이 없다면 주도적인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대북 정보력의 허점은 정세관리 능력의 부재로 직결된다. 국정원장은 허점을 드러낸 일차 책임자로 당연히 문책해야 한다. 아울러 문제의 근원이 범정부 차원의 그릇된 대북정책 기조에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