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회관에서 열린 조찬기도회에서 참석자들이 이형관 교협회장의 설교를 듣고 있다.

교회협의회, 한인회·한카노인회 공동

온타리오 한인 교회협의회(회장 이형관 성석성결교회 담임목사)가 토론토 한인회(회장 이기석), 한카노인회(회장 조영연)와 함께 개최한 ‘조국과 동포사회를 위한 조찬기도회’가 지난 8월11일 오전 7시부터 한인회관에서 노인회원 등 6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교협 총무인 박인기 목사(21세기 희망의교회 담임) 인도로 드린 기도회는 국민의례와 찬송가 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을 부르며 시작됐다. 교협 서기 손종호 목사가 기도하고 한카 드림합창단이 특송을 한 뒤 이형관 목사가 사무엘상 7장 3~6절을 본문으로 ‘화합과 단결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어 연합기도에 들어가 한인목사회장인 최태영 목사(충신교회 담임)가 ‘토론토의 단체들과 연합활동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합심 기도를 인도한 것을 비롯, 목사회 부회장 양승민 목사(염암교회 담임)가 ‘교민 가정과 한인 후대를 위하여’, 유충식 목사(중앙교회 담임)가 ‘한인 동포사회와 교계를 위하여’, 그리고 유윤호 목사(성산교회 담임)는 ‘나라와 민족, 남북한 평화통일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각각 참석자들과 연합기도를 이끌었다.
이날 기도회는 조영연 한카노인회장과 이기석 한인회장 등이 축사를 하고 교회협의회 부회장 하영기 목사(아름다운 장로교회 담임)의 축도로 마쳤다.

< 문의: 647-882-0191, 647-218-9090, 416-383-0777, 416-708-4940 >


[평신도 글마당] 아내 생일주간

● 교회소식 2016. 8. 23. 19:48 Posted by SisaHan

지난 7월 27일은 아내의 생일이었습니다. 매년 고민을 하게 됩니다. 무언가 특별한 날을 만들고 싶어서 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이가 되다 보니 특별한 선물이나 이벤트 보다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못난 사람 만나 고생만 하다가, 그리도 예뻤던 모습이, 이젠 누가 봐도 할머니입니다. 아이들 다 독립해 나가고 둘이서 살아가는 매일이 거의 같은 날들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합니다. 그래서 올해는 궁리 끝에 아내의 생일이 들어 있는 주일을 ‘아내 생일 주간’으로 혼자 속으로 정하였습니다. 문득! 어린 시절 가슴에 리본모양을 만들어 ‘불조심 주간’ 이나 ‘간첩 신고 주간’ 같은 것을 달고 다니던 생각이 납니다.


세상은 문명이라는 물결로 너무 변해버렸습니다. TV가 없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래도 TV는 온 가족을 한 방에 가두어 주는 역할도 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방마다 TV가 따로 있고, 컴퓨터에 스마트폰, 거기에 회사마다 다른 소형 노트북까지 다양합니다. 한 집안에 둘이 살든, 열명이 살든 상관없이 모두 각자 따로 놉니다. 저와 아내도, 한 사람은 컴퓨터에, 한 시람은 스마트폰에 하루 종일 놀아도 불편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가정의 역할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부부의 경우 다행인 것은, 아내가 완전 드라마에서 눈을 떼고 성경필사에 시간을 쪼개어 쓰게 된 것과, 낚시에 취미가 생겨 저와 시간이 되면 같이 낚시를 다니는 것 입니다. 저는 이런 변화를 맛보게 된 동기가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 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즉 머리에 항상 생각의 씨앗을 뿌리는 일을 개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번에도 ‘좋은 생각 심기 운동’ 중 하나로 ‘아내 생일주간’을 생각했습니다. 절대 표나지 않게 혼자서 일주일 만이라도 아내에게 불편을 주는 행동을 피하고,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그렇지 않아도 매일 같이 사는 것이 지겨운데…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렇게 불편한 부부관계라면, 일주일 만이라도 아침 일찍 집을 나와서 아내에게 자유의 시간을 주는 방법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매일 책상에 붙어있는 시간을 완전 줄이고 아내와 함께 좋은 프로를 찾아 보기도 하고, 가능한 아내 옆에 같이하는 시간을 늘렸습니다. 낚시도 몸 아픈 것 억지로 참고 같이 나갔습니다. 신경쓰이지 않게 하려니 긴장도 되었습니다. 다행히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혼자 책상에 붙어 있었던 시간 줄이는 방법도 새로 생겼습니다. 오늘은 아내 혼자서 친구들과 낚시를 나가고 제가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낚시터에서 친구들과 마음껏 수다도 떨어 보라는 생각입니다.


골로새서를 필사하라는 목사님 말씀에 제가 쓰고 있는 성경 필사와는 따로 골로새서를 필사 했습니다. 문득 3장 18절과 19절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18절은 내 가슴에 담아 숨기고, 19절만 열 번 복창합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X 10.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


[기쁨과 소망] 믿음과 창의력

● 교회소식 2016. 8. 23. 19:46 Posted by SisaHan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창조의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겐 하나님처럼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창조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있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재창조하는 능력은 이 세상의 어떤 생명체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인간 문명의 역사는 창조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미 존재하는 자연 만물들을 모방하고 재해석하면서 예술과 문학, 과학, 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오고 있습니다. 특별히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창의력이 성공을 좌우하는 시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단순한 지식이 아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느냐의 창의력으로 승부가 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창의력에 관한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5년 전에 유명을 달리한 스티브 잡스이겠지요. 스티브 잡스가 검은색 긴 팔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채 신제품을 들고 프리젠테이션 하던 모습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박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애플만의 독특함과 창의성을 구축했을까요? 그의 리더십을 연구한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내린 결론이, 스티브 잡스가 자유로운 상상을 통해 겉보기에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물들을 연관 짓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런 창의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적으로 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첨단기술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엉뚱한 장소에서 그리고 혁신과는 동떨어진 평범한 경험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한 예로, 잡스가 대학을 중퇴하고 서예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이 때의 경험이 훗날 매킨토시 컴퓨터의 매력적인 글씨체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력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사물들을 연관짓는 능력인 것입니다.


창의력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능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인즉슨, 주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과 땅, 말 그대로 천지 차이일 만큼 전혀 연관성이 없는 두 세상을 조화와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간다는 것, 앞서 스티브 잡스의 예를 들어 이야기했듯이, 이것 자체가 창의적인 행위인 거에요. 히 11:1 하반절에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눈에 보이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지요.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것 속에 창조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눈에 보이는 증거, 둘 사이에는 어떤 연관 관계도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이 둘 사이를 연결해 줍니다. 서로 관련 있게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믿음은 창조적 행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에는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 가운데에서 보여주는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불의와 악으로 가득 찰 수 있느냐”라는 의문을 쏟아냅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논리적인 반론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증명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땅에 복음의 씨앗을 심고 하나님의 나라를 심으라는 것이에요. 모든 성도들이 믿음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송만빈 목사 - 노스욕 한인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멀리 바라보기

● 교회소식 2016. 8. 2. 07:18 Posted by SisaHan

「우리는 난쟁이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다. 우리는 작지만, 때론 거인보다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말을 생각해봅니다. 소설은 중세의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유리세공을 하는 니콜라라고하는 인물이 수도원의 수사에게 한탄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자기는 지금 이 수도원의 유리와 같은 것을 만들수 없다면서 무려 2세기나 전에 만들어진 유리를 그저 고치는 것도 힘들어 하는 자기를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거인들의 시대는 갔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수사가 대답을 합니다. 물론 우리는 난쟁이들이라고 그러나 그것으로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선 난쟁이들이기 때문에 때로는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 가운데서는 거인으로 표현되는 것이 전통일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대단한 업적이나 건축물들을 보면서 느끼는 경외심에 대한 표현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들이 보고 기대했던 것 보다 더 멀리 바라보고 더 나은 것을 만들거나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미 여러곳에서 재 사용되었습니다. 그 원 출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라는 표현은 12세기 프랑스의 수도사 베르나르 드 사르트르가 처음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누가 제일 처음 썼든지에 상관없이 이 말은 꽤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뉴턴은 자신의 업적이 이미 그 전에 수많은 이들의 연구위에 얻어진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말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은 분명 한 개인으로는 역량이 작은 존재들일지 모릅니다. 사람마다 편차가 있고 그 능력이나 지식에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이나 사회적 분위기가 다르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들 역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미 역사 가운데 살아 왔던 수많은 이들의 삶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든 싫든 그들이 이루어 놓은 사회 위에서 살아가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삶의 방식에 적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이 발명하고 발견한 것들을 사용하여 조금 더 유익하고 편리한 것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우리가 사는 사회를 조금씩 바꾸어 가며 살아갑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은혜를 다 알아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그렇고 또 우리의 게으름이나 지혜 없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는 것을 막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브레이크를 겁니다. 그럴때에 우리들은 우리보다 먼저 믿음의 삶을 산 이들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그들이 믿고 경험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고 그들의 고백을 따라 그 말씀을 묵상하고 또 그 위에서 나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은혜를 누림으로 그들보다 풍성한 믿음의 삶을 살게됩니다.
비단 우리의 선조들뿐 아니라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회의 성도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같은 도움을 얻습니다. 먼저 믿음으로 시련을 이겨낸 이들로부터 위로를 얻고 담대하게 길을 걸어가는 이들로부터 도전을 받습니다. 함께 걸어가며 손을 잡아주는 이들 때문에 오늘도 믿음의 삶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 김요환 목사 - 런던 제일장로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