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책들 중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한 책이 있습니다. 
몇 년 전 한국에서도 사회적 열풍이 불었던 ‘정의란 무엇인가?’를 저술한 마이클 샌델 교수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책입니다. 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날이 갈수록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례를 드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전에는 돈으로 살 수 없었으나 지금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유익함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서 제시한 몇가지 예를 소개하자면, 캘리포니아 주의 어느 도시에서는 교도소 감방도 1박에 82달러를 지불하면 개인 감방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또한 미국의 많은 도시의 경우 추가비용을 지불하면2인 이상이 탑승하지 않아도 Car pool lane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험을 만기 전에 현금화하기를 원하는 노인에게 생명보험 증권을 구입해서 훗날 그 노인이 죽게 되면 보험금을 대신 수령함으로 이익을 얻는 생명보험 유통시장이 무려 300억불에 이른다고 합니다.
 
위에 제시된 예들이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죽인 것도, 남의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니니까요. 자기 돈으로 더 나은 서비스를 받고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투자를 하는 것이 비난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시장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을 별 생각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샌델 교수는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들, 예를 들어 생명, 결혼, 성 (性),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종교의식 등등… 절대로 돈으로 살 수도 없고 사서도 안되는 가치들에 가격을 매겨서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든다면 그 가치가 변질되거나 저평가될 뿐만 아니라 도덕적 규범이 와해된다고 지적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된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점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와 성도마저도 이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진리를 시장논리로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이 되어져가는 형세를 보면, 정말 말세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딤후 3장 1,2절 말씀처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는” 현상들이 점점 농후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머지 않은 장래에, 값없이 선물로 주신 구원의 은혜도 돈으로 사고 파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교회사적으로 그런 때가 이미 있었지만 말입니다) 걱정이 됩니다. 이 책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 송만빈 목사 - 노스욕 한인교회 담임목사 >


보수교계 대규모 반대집회

● 교회소식 2013. 11. 4. 20:24 Posted by SisaHan


개막 앞서 부산서 ‥ “성경적 기독교 부인집단”

WCC(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부산 총회 개막을 하루 앞둔 10월 29일 오후 벡스코 컨벤션홀 옆에서 대규모 WCC 총회 반대 집회가 열렸다. 예장합동과 브니엘, 국민의소리 등으로 구성된 WCC부산총회반대운동연대(WCC반대연대:박성기·정판술 공동회장)가 주최했다. 집회에는 예장합동 안명환 총회장과 정규남 총장(광신대), 박영우 목사(광주안디옥교회) 등이 참석했다. 주최 측은 참여 인원을 1만 2000여 명으로, 경찰은 4000여 명으로 추산했다.
이날 3시간여 동안 진행된 집회에서는 WCC를 비하하는 발언이 쏟아졌다. 박성기 회장은 “기독교의 탈을 쓴 패륜아 WCC가 이곳에서 굿판을 벌이려 한다. 좌시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 WCC반대연대 여성위원장 이현숙 목사(기쁜우리교회)는 WCC를 통해 더럽고 악한 사탄의 정체가 드러나게 돼 감사하다고 기도했다. 예장합동 광주·전남협의회 회장 이원재 목사는 바알의 탈을 쓴 WCC는 10차 부산 총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하자고 했다.
 
WCC의 신학적인 입장을 문제 삼는 발언도 나왔다. 박영우 목사는 WCC가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한다며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면 예수가 피 흘려 우리를 대신해 죽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격려사를 전한 안명환 총회장은 WCC를 적그리스도에 비유하며 WCC반대연대의 활약에 조국 땅의 미래도 밝아질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반대운동연대는 이날 성명을 발표하고 “WCC는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를 부인하는 종교집단“이라며 “WCC는 동성애를 허용하며 동성애자를 목사로 안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WCC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문학서나 역사서와 같이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WCC는 예수그리스도 밖에도 구원이 있으며 하나님에게 이르는 많은 길이 있다는 비성경적 다원주의를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들을 먼저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살 맛 나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버지의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아들의 체취가 뭍은 물품들, 아들의 어린 시절이 새겨진 놀이터, 마을, 동네, 고향.. 아버지의 아픔은 지워질 수 없는 것이어서 차라리 정든 고향을 떠나기로 작정한다. 살아온 삶의 자리를 떠나는 일이 힘든 일지만,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지우기 위해서는 그렇게라도 해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누가 알랴!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다른 아들이 눈치 챈다. 묵묵히 짐을 싸며 고향을 떠나겠다는 아버지를 지켜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와 함께 길을 가기로 자청하고 아버지의 길에 동참하며 순종한다. 아니, 아버지의 무언의 부탁을 들어드리는 것이다. 나라도 함께 아버지와 고향을 떠나서 아버지의 슬픔을 달래드리는 것이 효이며, 자식 된 도리이며, 순종의 삶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브람은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무작정 가나안을 향했다. 하란이란 곳에 도착, 아직은 가나안에 갈 길이 먼데 마음의 병이 육신의 병이 된 것일까,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타향 하란에서 그만 이 세상과 작별한다. 아브람은 당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비록 아픔을 잊기 위해 떠난 고향이지만, 그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그 날 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신다. “그냥, 계속 가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우리는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 순종의 사람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의 순종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영적 캐릭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앞서 육신의 아버지께 순종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믿음생활의 패턴이나 캐릭터가 영적 변화의 한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를 하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음을 성경을 통해서 배운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는가는 하나님이 우리보다 이미 더 잘 알고 계신다. 

먼저 인간이 되어, 참 인간이 되어 자신의 도리를 다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패턴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우리를 쓰실 곳을 찾으신다. 직함과 명예에 목숨을 걸고 자신의 참된 인간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보시면서 어떻게 생각할까? 
요즘 자문하는 가장 많은 질문은 “난 참 인간인가?”이다. 목사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 하며 아빠가, 아내가 되기 전에 먼저 참 사람이 되어야 함을 절실하게 느낀다. 조금 못나고, 조금 늦고, 조금 작아도. 비록 크지 않고, 대단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내 스스로가 먼저 참 인간이 되어야지. 40대 후반을 보내며 이제야 이런 생각이 드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 최규영 목사 - 토론토 Back to Bible교회 담임목사, 온타리오 한인목사회장 >


마태복음 5장의 산상 수훈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신 모든 말씀의 집약판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한번쯤 생각해 볼 부분이 있어서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38절 이하를 보면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현재 상황이라해도 뺨을 때린 자가 당황하게 될 말씀을 하셨습니다. 뉴욕 오번 신학대학의 성서학 교수인 ‘월터 윙크’(저서: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사탄의 가면을 벗겨라, 예수님과 비폭력 저항)의 연구에 의존 하자면, 그당시 로마인들은 유대인을 동급의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왼손을 사용하지 않았던 관습에 따라 오른손등을 사용하여 뺨을 때렸습니다. 이것은 멸시를 나타내며 동등의 신분자들끼리 사용하는 손바닦이나 주먹을 사용하지는 않았던 점을 생각해 본다면, 오른손등으로 상대의 들이미는 왼쪽 뺨을 때릴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비폭력으로 로마인들에게 저항하라는 하나의 메세지 였던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피래미’라는 글을 통하여 피래미의 끝없는 저항을 이야기 한적이 있습니다. 피래미가 한자리에 머물러 살기 위해서는 끝없는 지느러미 운동을 통하여 흐르는 물에 저항 하여야만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물결에 떠밀려 내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끝없는 움직임이 필요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퇴보되어 세상에 빠져서 구별된 삶을 살아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 명하셨던 것입니다. 5장40절에는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 보아도 저항의 극치 입니다. 가난했던 그시절, 악덕 지주들이나 악덕 사채업자들은 옷까지 담보로 빼았아 갔었습니다. 그렇다고 발가벗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속옷을 달라 하니까 것옷까지 벗어 버린다면 그 상황은 감당할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 이사야 20장을 살펴 보아도 발가벗긴다는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옷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저녁에는 돌려 주어 그가 추워 떨게 하지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또한 로마인에 대한 비폭력적인 저항 이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5장 41절에는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리를 가라고 명한 사람을,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는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도 됩니다. 그 당시 점령지에서의 로마인들 착취가 극에 달하자 많은 유대인들의 저항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법령으로 하루 노역을 1마일(우리 성경에는 오리)이상 시키면 죄를 묻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1마일의 노역을 시켰는데 1마일 분량의 일을 해 버리면 그 일을 지시한자는 벌을 받게 됩니다. 얼마나 통쾌한 말씀입니까! 
예수님 께서는 우리에게 절대로 손해가 나거나 불행해지기를 원치 않으시며, 불이익을 당할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대로 순종하면 반드시 하늘의 축복과 마음의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5장42절 이하의 말씀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42절:”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말씀 하셨습니다. 지혜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의 비폭력 저항에 대한 귀한 말씀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