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한국엔 인재가 그렇게 없나

● 칼럼 2013. 2. 23. 19:03 Posted by SisaHan
지난 16일 서울에서 열린 신라사학회에서는 서기 774년 당나라 장안(지금의 시안)에서 죽은 신라 왕족 김일용이라는 사람의 묘지명(墓誌銘) 발견 사실이 발표돼 관심을 모았다. 김일용은 당에 들어가 황제를 받드는 종3품 벼슬을 지내다 현지에서 죽었고,「조정을 받들어 섬기는데 만국보다 솔선하니 천자가 칭찬했다」고 세상을 떠난 김 씨를 황제가 크게 칭송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에 중국이 ‘이중국적자’를 황제의 측근 고위직에 거리낌 없이 기용했고 그가 황제의 총애까지 받았음을 묘지명은 입증해주고 있다. 그런데, 바야흐로 글로벌 시대요, 세계적 추세가 이중국적 허용 쪽으로 가는 21세기에, 요사이 우리는 왜 ‘시대착오적’인 이중국적 논란에 시끌벅적 한가?
 
미국에서 벤처성공 기업인으로 유명한, 특히 한국인 이민자로 자랑스런 1.5세인 김종훈 씨가 모국의 박근혜 정부 초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으로 발탁된 뒤 국내외에서 찬반논쟁이 뜨겁다. 미국의 한인총연합회라는 단체는 아예 ‘청문과정에서 이중국적에 시비를 걸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위협까지 하고 있다. 
사실 디아스포라 한인으로 모국의 부름을 받아 공직에 봉사할 기회를 얻은 데 대해 반대하고 기분 나빠할 이유는 없다. 허용해가고 있는 마당에 이중국적으로 장관이 될 수 없다는 명분도 약하다. 더욱이 ‘미래창조과학’이라는 어감에서도 벤처 성공신화를 이룬 IT분야 전문인에 대한 기대 또한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김종훈 씨의 경우 차분히 따져보고 신중히 결정해야 할 근거가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선 그는 엄격히 말해 이중국적자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보도에 따르면 15살 때부터 40년 가까이 미국적으로 살다가 장관후보자로 임명되기 며칠 전인 2013년 2월14일에야, 일반인은 3개월 이상 걸리는 절차를 특혜와 편법으로 불과 3~4일 만에 처리받아 한국국적을 회복했다. 그리고 아직 미국적을 가지고 있으니, 이중국적은 겨우 일주일째다. 그는 가족은 그대로 둔 채 혼자만 한국적을 갖겠다고 당당히 말했다. 수년전 총리후보자가 자녀의 미국적에 트집잡혀 낙마한 전례와 대비될 뿐더러, 장관을 그만두면 다시 미국으로 가겠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의 기업과 삶의 터전이 미국이기 때문일 게다.
 
그는 미국에 살면서 충성스런 미국인으로 활동했다. 미국 해군장교로 7년간 복무하며 핵잠수함에 근무해 정예 기밀도 접했다. 그에게 한국인의 피는 흐를 지언정, 머리와 가슴에는 미국이 자리잡았고, 미국에 대한 애국심도 외쳤다. 공직자에게는 위민위국(爲民爲國)의 영혼과 충성심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국민과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해야 할 핵심부처의 장관이, 미국철학과 미국 충성심에 절어있는 사람이라면 말이 안된다. 
그는 특히 미국 중앙정보국 CIA가 설립한 벤처캐피털 회사창립에 관여하고 이사를 지낸 사실과 자문위원 활동도 확인됐다고 들린다. 그의 인맥들은 미국의 고위인사가 대부분이다. 한국 과학 연구개발 정책을 총괄할 부처의 장관이 미국 정보기관 연계설이 나온다면, 한국의 첨단 과학정보, 정부의 기밀들에 대한 보안에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는 이중국적이 문제가 아니라, 미국정신과 미국 국익속에 살아 온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는 또 벤처기업으로 성공한 기업인일 뿐이다. 일국의 국정을 책임지는 최고 행정기관과 관료사회의 수장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전혀 모른다. 기업성공이 정부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음은 CEO출신에 기대를 걸었다가 너무 큰 낭패를 본 지난 5년의 MB사례 만으로도 설명이 족하다. 사회적 관습과 문화는 물론 한국 관료사회의 특성에 문외한이기에 더욱 불안하다.
 
무엇보다 왜 우수한 자국인이 많은 데도 미국인을 장관으로 모셔야 하느냐는 것이다. 혈맹도 좋고 친미·종미도 좋지만, 민족적 자존심도 돌아봐야 한다. 미국을 선망하고 좋아하다 못해 한국과 동일시하는 습성에 빠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미국의 국익이 한국의 국익과 일치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전후 일본에 독도를 양보하고 군사 독재정권들을 용인한 미국의 국익은 철저히 그들 중심인데도 말이다. 
앞서 신라의 김일용처럼 외국에 나가 공직을 맡은 사례는 더러 있지만, 외국인을 정승반열에 앉힌 역사적 사례는 일제와 미군정, 식민이나 조공을 바치던 시절 외에는 없었다. 영국이 캐나다 중앙은행장을 스카웃한 것과도 경우가 다르다. 캐나다는 영국여왕이 국가원수인 연방국이다. 
지금 한국이 미국의 속국인가. 따져보면 김종훈 장관영입은 단견이요 국가적 수치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 김종천 편집인 >

 

[1500자 칼럼] 당당함에 대하여

● 칼럼 2013. 2. 18. 20:33 Posted by SisaHan
우리는 지금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다민족, 다문화 사회에 살고 있다. 캐나다의 다른 어느 도시 보다 토론토가 심한데, 이런 다양한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본다. 다른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랑스런 한국인이 되기보다 당당한 한국인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자랑스럽다고 말하면 왠지 남을 존중하기 보다 자신의 우월성을 앞세우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세대차이랄까? 요즘 여기서 태어났든, 한국에서 왔든, 젊은이들을 보면나처럼 나이 든 사람의 눈에는 건방져 보이기도 한다. 건방진 것과 당당함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찌보면 동전의 양면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당함이란 어떤 상황에서 누가 뭐라든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 언제, 어느 장소, 특히 누구 앞에서든…. 솔직히 이 당당함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부족하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 세대에서는 당시의 사회적인 제도와 교육환경 자체가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여건이 아니었다. 어디서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위 아래 질서를 강조하는 유교의 전통 때문인지, 집에서는 집대로, 학교에서는 학교대로 그 어떤 위치의 차이가 있어 알게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뜻을 거스르는 말을 못했고, 선배 앞에선 우리는 아예 입을 다물어야 했다. 튀어 나온 못이 먼저 망치에 머리를 맞는다는 말처럼….
 
인간관계가 수직이 아닌 수평이라는 이곳에 와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할 말 다 하지 못하고 살았다. 새 환경에 적응하는 문제도 문제였지만, 다른 언어와 문화의 차이 때문에 우선 서있을 자리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짧은 언어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경우에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이내 알게 되었지만, 이 사회는 무슨 일이든 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말을 해야 했다. 아무도 점잔 빼느라고 눈치보며 입 다물고 앉아 있는 사람에게 와서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제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세계로 나오고 있다. 공부를 위하여, 취업을 위해, 그리고 예술 공연을 위해, 우리 때와는 달리 나는 그들이 많이 당당해져 있음을 본다. 그만큼 나라가 부강해졌고, 국민들이 자신감을 가진 탓이리라. 나는 사실 K-POP을 좋아하지 않는다. 싸이(Psy)의 말춤 조차 전혀 모르고 있다가 남들이 하도 이야기하고 신문에 나와서 뒤늦게 알았다. 
그래도 관심 밖의 일이지만, 그가 Ellen Show에 출연한 것을 우연히 보고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어느 날 오후 좀처럼 토크쇼를 보지 않는 내가 TV를 켜놓고 있는데, 그 유명한 아메리칸 아이돌의 사이먼이 보이고 싸이가 나왔다. 그가 등장했을 때, 내가 보기에는 엘렌의 실수였다. 관중들이 다 알고 있다 해도 처음 무대에 나온 사람을 소개하는 것이 사회자로서 기본 예의였다. 웬 까닭인지 그녀는 그런 기본 절차를 잊어버리고 프로를 진행하려 했다. 그런 상황에서 싸이가 그녀를 제지하면서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Let me introduce myself.”, “I am Psy from Korea.”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싸이가 너무 당당해 보였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고 상대가 누군가를 떠나서 할 말 하는 것을 보고 참 기뻤다. 만약에 나라면 그런 자리에 초대받을 리도 없고, 설사 초대 받았다 해도 상대방의 실수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그녀가 말하는 대로 따라 했을 것이다. 나는 그 자연스런 그의 행동을 보고, 그가 세계를 향해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자랑스럽게 외친다기보다 그냥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서있는 것 같았다.

우리 젊은이들이 모두 싸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당당하게 서고, 경우에 따라서 주눅 들지말고. 할 말 하는 자신감이 있으면 참 좋겠다. 그것이 진정 세계 속의 한국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기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읽고

● 칼럼 2013. 2. 18. 20:31 Posted by SisaHan
캐나다 한인여성회 발자취 엮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읽고

편안한 베이지색 배경에 자잘한 빨간 꽃을 담은 책 표지. 표지 그림은 내게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일곱 글자가 숱한 이야기 꽃을 피우던 대지를 떠나 어디론가 둥실둥실 올라가는 인상을 주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한때 젊은이들에게 열병처럼 번지며 유행하던 ‘우리들의 이야기’ 노랫말이 꿈인 듯 아련하게 귓전을 울렸다. 
“우리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말간 마음뿐이라오. 밤하늘에 별만큼이나 수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 바람 같이 간다고 해도 언제라도 난 안 잊을 테요…” 
그러나 4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책은 나의 첫인상처럼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사료적인 가치가 돋보이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여성회라는 이름으로 1985년에 발족된 이래 가정과 생업을 제쳐 놓고 현장을 누비며 열정을 태우던 이사들이 일구어낸 20년간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 정도의 터전을 마련하기까지 어떤 정신과 자세로 매진해왔는지 진솔한 언어로 전하고자 과감하게 펜을 들었으리라.
 
‘우리들의 이야기’는 최기선, 이정준, 장정숙, 박영화, 백경자 등 다섯 전직 회장들이 편집위원이 되어 각기 맡은 분야를 자신만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세월의 힘에 밀려 누렇게 변색된 엄청난 문서와 기록들을 하나씩 헤집어 들춰내며 작업하던 과정에서 얻게 된 자부심 어린 결실일 것이다. 일년 남짓한 시간 속에서 그들은 잠들었던 과거의 흔적을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단호한 어조로 흔들어 깨우기에 이른다.
초기 설립자들이 감내한 열악한 환경에 대해 불평할 시간조차 없던 그들의 이야기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낮은 곳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한 성실한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최근의 이민과는 의미가 다른, 잡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발을 디딘 초창기 이민자들의 삶을 조명한다. 이민자들이라면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하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정착하도록 일일이 손잡아 일으켜 세우던 기억들. ‘우리들의 이야기’는 특히 여성이기에 경험하게 되는 심리적 불안과 정체성 상실, 그로 인한 부적응 사례를 전문인을 활용한 교육과정과 적극적인 자원봉사로 극복해낸 기억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펼친 헌신적인 활동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하다. 여권을 중심 과제로 삼아 취업뿐 아니라 가정폭력과 인종차별, 국제결혼과 정체성 문제, 정신대 사건과 건강세미나 등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고국의 전통을 남녀평등에 근거한 캐나다 사회에 접목하는 과정에서 여성으로서 겪는 갈등과 아픔을 최소화시키는 일도 그들의 몫이었다. 캐나다 정부로부터 비영리 자선단체로 인정받은 후에도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이 여성회 이사들만의 힘으로 가능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들의 치열한 노고가 눈물겹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숨은 그림자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민 덕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성공담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여성회는 다 자란 나무가 아니다. 튼실한 뿌리를 내려 왕성한 성장을 하고 있는 푸른 나무에 물을 주고 가지치기를 하고 벌레를 잡아주는 등 정성을 다해 가꾸어갈 일들이 산재해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지나간 그들의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한인 1세뿐 아니라 이 땅에 자리잡은 2세 3세의 의식 속으로 파급되는 첫 걸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김영수 - 수필가, 한국문협 / 캐나다문협 회원 >


살아있는 교황이 사임을 발표한 경우는 1415년 그레고리우스 12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정통성을 둘러싼 분쟁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순수한 자진사임은 1294년 교황 첼레스티노 5세로 더 올라간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엊그제 ‘28일 사임’을 직접 발표한 일이 가톨릭은 물론 세계인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이런 전통 때문이다. 작은 전례 하나를 바꾸더라도 교회 전체가 수십 수백 번의 논의를 거치는 게 가톨릭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보수적이었다는 교황이 바로 베네딕토 16세였다. 오랜 전통을 깬 선종 전 사임과 이와 관련한 자기고백이 지극한 용기와 자기성찰의 결과로 받아들여지는 건 그래서 당연했다.
 
교황은 세계 가톨릭신도들의 영적 지도자에 머무는 건 아니다. 그의 언행은 다른 종교에도 영감과 감화의 원천이 되었다. 그 역시 7년10개월의 길지 않은 재임기간이었지만, 원칙에 충실한 삶과 언행일치로 종교계의 모범이 되었다. 쿠바를 방문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해 성공회와 유대를 회복하고,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에까지 이해와 교류의 폭을 넓히는 등 세계 평화에도 일정하게 기여를 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역사적 과오를 참회하는 데 인색했으며, 지구적 차원의 긴장과 분쟁, 빈곤과 기아 그리고 그 배후인 선진국의 문제를 드러내고 극복하는 데는 소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네딕토 16세의 사임 용기는 가톨릭이 본래의 소명을 되살리고 거기에 천착하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신도라면 당연히 빛과 소금의 직분에 충실했는지 돌아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후임으로 유럽계 백인을 벗어나 남미 출신이나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 출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것은 주목된다. 단지 피부색과 출신 지역 문제가 아니다. 생명과 평화와 정의에 목말랐던 이들이야말로 그 소중함을 알고, 이를 실현하는 데 온몸을 던질 것이라는 공감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