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이 18대 대선에서 패배한 뒤 25일 만인 어제 당의 혁신을 이끌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민주당은 이번 비대위를 혁신의 틀을 만들고 전당대회를 공정하게 관리하는 ‘혁신형 비대위’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문희상 위원장과 박기춘 원내대표를 비롯한 9명의 비대위원 면면을 보면 혁신형이라기보다 관리형에 가깝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파괴 수준의 건설을 담당해야 하는 상황의 엄중성을 생각하면 긴장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그나마 인선에 지역과 세대를 고루 반영했고, 비교적 계파색이 적고 균형감각을 갖춘 사람이 많이 들어간 것은 긍정적이다. 부족한 혁신성은 추후 2명의 외부 인사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보완하길 기대한다. 외부 인사는 장식용이 아니라 민주당에 ‘가장 아프고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을 인물을 삼고초려라도 해서 모셔와야 할 것이다.
 
이번 비대위의 과제는 막중하다. 비대위의 성공 여하에 정통 야당의 생사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대위는 대선평가위, 정치혁신위, 전대준비위 등 3개 위원회를 우선적으로 가동하기로 했다. 또 오늘 현충원 참배를 시작으로 설날까지 ‘대선 패배 대국민 사과 버스투어’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고 내용에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비대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질 수 없는 선거’를 진 데 대한 원인분석부터 철저하게 해야 한다. 안철수의 소극성과 이정희에 대한 반발, 인구 구성의 변화, 비주류의 비협조, 친노 패권주의의 전횡 등 패인은 다양하게 나왔으나 공통점은 모두 ‘남 탓’이다. 어느 계파든 사람이든 내 탓을 하는 패인 분석은 보이지 않는다. 비대위는 몇날 며칠 끝장 토론을 하더라도 진정성 있는 자기반성을 내놔야 할 것이다.
 
패인 분석 뒤에는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만 빼고 모두 갈아치운다는 각오로 혁신을 해야 한다. 상대 실수에 기대지 말고 자신의 기량으로 득점하려면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를 실현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 당의 모든 것을 뜯어고쳐야 한다. 지금과 같은 어설픈 계파 안배 공천, 무책임한 지도력, 정권에 대한 무조건 비판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집권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민생과 국가 안위만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비로소 국민의 신뢰도 찾아온다. 제1야당으로서 민주당의 역할은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국민 행복을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환골탈태해야 한다.


[사설] 말의 죽음, 시인의 죽음

● 칼럼 2013. 1. 22. 19:21 Posted by SisaHan
시인의 말은 핍박받는 이들의 무기다. 가난한 이들의 위로이며 소외당한 이들의 벗이다. 말로 말미암아 이들은 다시 일어서고, 저항하고, 앞으로 전진한다. 그의 말마따나 시와 문학은 고통의 산물이고, 시인이 시대의 아픔에 누구보다 예민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런 시인의 맨 앞줄에 새겨진 이름 가운데 하나가 김지하다. 그의 글은 황토에 선연한 땀과 피의 긴장 속에서 튀어나와 독재자와 부역자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었다. 치명성으로 말미암아 그는 사형 선고를 당해야 했다. 당대인들은 그 앞에서 숨죽여 몸서리쳤다.
 
그런 그의 말은 어느 날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 불의에 맞서는 이들에게 수치심이 되었다. 시대의 절망이 강요한 산화를 두고 죽음의 굿판으로 몰아붙였다. 요즘엔 그 자신을 옭아맸던 빨갱이 공산당 따위의 말을 마구잡이로 날린다. 황토를 떠나 허공을 맴돌던 그의 말이 언제부턴가 권력의 추력을 받아 가난한 이들의 가슴을 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치명성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고통을 외면하고 슬픔을 잊은 말이 힘을 가질 순 없기 때문이다. 권력의 요설은 한갓 현혹이고, 협박, 깡통, 쥐새끼, 똥구멍, 찢어죽여… 따위의 말은 ‘오적’과 ‘비어’의 말 그대로지만, 맥없이 코앞 시궁창에 박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가 신앙하는 후천개벽과 여성시대의 도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내공에 대한 믿음 따위를 무작정 비난할 순 없다. 신념은 신념대로 존중해야 한다. 여성성에 대한 판단을 놓고 논란은 있겠지만, 시비를 일도양단할 순 없다. 변신을 안타까워할 순 있지만 훼절이라 매도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졸렬한 증오와 마구잡이 가해는 참기 힘들다. 누군가는 그에게 서푼짜리 분노를 집어치우라고 했다지만, 요즘 그가 토해내는 공연한 분노는 서푼 값어치조차 없다. 상생을 말하면서 저 혼자 옳다 우기고, 섬김을 말하면서 섬기지 않는다고 분노하고, 한때 서운했던 감정 때문에 평생을 저주하는 그의 말들이 어찌 한푼 값어치나 있을까.
 
그 자신도 말했듯이, ‘오적’ 이후 말이 육신이 되고 힘과 희망이 되는 그런 시를 그는 쓰지 않았다. 그러니 ‘시인 김지하’는 아주 오래된 전설 속의 이름이다. 하지만 몇몇 시편과 그로 말미암은 수난은 한 시대의 가시면류관으로 우리 기억에 각인돼 있다. 설사 오늘날 그의 말들이 수치스럽다 해도, 그 이름을 쉽게 지울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래도 이제 그를 책갈피에 묻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오늘의 아픔을 담아낼 오늘의 말과 시인을 찾아 나서야 할 것 같다.


[칼럼] ‘레미제라블’과의 동행

● 칼럼 2013. 1. 22. 19:19 Posted by SisaHan
<레미제라블> 이야기로 뜨거운 요즈음이다. 영화 관객은 500만에 달하고, 완역본 소설도 15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뮤지컬도 만석이고, 앨범 판매량도 기록적이다. 해설기사도 넘쳐난다. 즈음하여, 나 자신의 레미제라블을 한번 이야기하고 싶다. 자격은? 한평생 그 책과 함께 살아온 “독자”로서 말이다.
열살 때 시골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촌놈이라 놀리는 텃세 아래서, 거의 왕따가 되었다. 도망갈 곳은? 학교 도서실밖에 없었다. 자주 가다 보니 책 읽는 재미가 붙었다. 책벌레 동생을 위해 누나가 사온 책이 <레미제라블>이었다. 그대로 빨려들어갔다. 거의 매일, 읽고 또 읽었다. 저녁에 미리엘 주교를 접하고, 자정이 가까우면 물 길으러 나온 불쌍한 코제트를 만나고, 코끝 시린 새벽에 이르면 하수도 속의 장 발장과 떨며 만났다. 이렇게 주인공들과 함께 쫓기고 아파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암울한 유신체제하에 대학생이 되었다. 캠퍼스는 때로 최루탄 얼룩진 전장이 되었다. 학우들이 처절하게 끌려가는 가운데, 변혁을 꿈꾸는 대학생들은 각국의 혁명사를 탐독했다. 혁명의 고전인 프랑스혁명이 빠질 수 없었다. 완역본으로 대한 <레미제라블>은 한마디로 민중의 다채로운 삶을 녹여낸 프랑스혁명사였다. 낡은 체제, 전쟁의 참상, 수도원의 역사, 도시의 부랑아들, 심지어 하수도의 역사에까지 전방위적 지식이 펼쳐졌다.
청년 시절을 사로잡은 장면은 바리케이드의 밤이었다. 1832년 6월5일, 항쟁에 나섰다가 장렬히 산화한 청년들은 바로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청년들뿐만 아니었다. 생애 마지막에 숨겨둔 정열을 불태우고 죽어간 마뵈프 노인, 어려운 환경에서도 시종 유쾌했던 부랑아 소년 가브로슈, 마리위스를 구하기 위해 신명을 내던진 장 발장까지. 그들의 비극이 우리의 현실과 겹쳐지면서 청년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30대 초반에 런던에서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처음으로 봤다. 극장 제일 뒷자리에서도 감동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노랫말이 전달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내 나름대로 수십번씩 그려낸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사악한 환경에서 때로 나쁜 짓을 거들면서도 연정을 소중히 간직했던 에포닌의 존재가 새삼 부각되어 왔다. 청년기까지는 자신을 주연급이나 조연급으로 생각하다 나이가 들수록 엑스트라에게도 눈길이 간다. 그런 관점에서 책을 다시 보면 작가가 엑스트라 한명 한명에도 어떻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지 생생한 느낌이 온다.
 
학자로서 형사법의 세계를 탐구하면서, 고집스런 냉혈한으로만 보였던 자베르에 대한 생각도 도전받았다. 직분에 누구보다 충실하고, 오류에 대해 사표로 책임지고, 양심의 가책 앞에서는 끝내 자살을 택하는 그런 공직자도 흔치 않을 것이다. 장 발장의 입장에서 형사제도는 잔혹하고 불공정한 것으로 탄핵될 수 있다. 전과자에 대한 냉대가 오히려 그를 더욱 나쁜 길로 내모는 건 아닌가. 사랑이 없는 억압이 과연 어떤 개선효과를 가져올까. 이 시대의 장 발장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런 의문이 나를 묵직하게 누르고 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보잘것없는 군상들이다. 세속적으로 보면 장 발장은 전과자이자 도망자, 팡틴은 미혼모와 창녀, 코제트는 버림받은 고아, 가브로슈는 도시의 부랑아, 마리위스는 폭도다. 경제적 궁핍에 더하여 각종 편견과 낙인 속에서 살아가는 처지다. 열악한 처지에서도 그들은 사랑하고, 보살피고, 연대하고, 항거한다. 사악한 제도와 관습의 굴레 아래서도 자애와 연민, 사랑을 통해 살아갈 만한 세상으로 변주시킨다. 비난받아 마땅할 듯한 사람들이 펼쳐내는 치열한 삶의 몸부림을 통해, 작가는 누구나 나름대로 의미 있는 존재임을 역설한다.
영화와 뮤지컬, 소설을 비교하면 어떤가 하는 물음을 종종 접한다. 취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에게 이 소설은 읽을수록 재미를 더하고, 생각거리가 더해지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국 어디든, 완독한 독자가 열명이라도 모인다면, 거기 달려가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은 심정이다.

< 한인섭 -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한마당] 인수위와 새 정부 예고편

● 칼럼 2013. 1. 22. 16:32 Posted by SisaHan
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출범한 지 한 주가 훌쩍 지났다. 인수위는 새 정부의 미래상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인수위 운영 방식과 논의 내용을 미루어 새 정부의 성격과 정책 방향을 엿볼 수 있다. 아직 부처 업무보고도 끝나지 않은 초기라서 인수위 활동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보더라도 박근혜 정부의 5년을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는 있다.
‘전봇대 발언’으로 요란하게 시작한 이명박 정부와는 달리 박근혜 인수위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행보를 하고 있다. 국민과의 약속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박 당선인의 신중한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5년 동안 이런 자세를 견지한다면 국민과의 신뢰를 상당 정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열흘 가까이 진행된 인수위 활동은 기대보다 우려를 더 많이 갖게 한다.
예상은 했지만 박 당선인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던 ‘불통’이 여지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온갖 비판에도 대변인에 ‘막말 윤창중’을 고수한 데 이어 부처 업무보고에 대한 ‘함구령’까지 내렸다. 박 당선인의 이런 행보는 그의 정치적 인식체계에 심각한 결함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먼저 민주주의에 대한 소양 부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란 원래 좀 시끄럽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잖은 비용이 들어가는 정치제도다. 정책 혼선을 이유로 침묵을 강요하고, 효율을 앞세워 논쟁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권위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특히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여러 계층 간에 상충하는 이해와 갈등을 조정하는 게 아주 중요한 과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국민 의견을 수렴하고 절충하는 여러 층위의 논의와 논쟁이 불가피하다. 어찌 보면 소모적으로 보이는 이런 토론의 장을 활짝 열어주는 게 민주주의의 요체다. 공론의 장이 사라지고 일사불란함을 강조하는 인수위 운영을 보면서 박근혜 당선인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더 퇴행시킬지 걱정되는 건 자연스럽다.
공인으로서의 공복(公僕)의식 부족도 빼놓을 수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은 국민을 대신해 국가를 운영할 권한을 위탁받은 심부름꾼이다. 그 권한 행사도 법률에 의해 엄격한 제한을 받는다. 그런데도 정권을 잡으면 국가권력을 전리품처럼 간주해 멋대로 쓰려고 한다. 이런 ‘권력의 사유화’는 이명박 정부에서 두드러졌다. 정권을 잡자마자 힘 있고 돈 되는 자리는 모조리 빼앗아 자기편들끼리 나눠 먹었다.
 
박 당선인이 이 대통령 같은 무지막지한 행태를 보일 것으로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불통 인사’를 자행하고, 인수위에 사실상 함구령을 내린 데서 보듯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이명박 정부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인수위는 박 당선인의 정책 수립에 도움을 주는 사설 자문기구가 아니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이다. 따라서 인수위의 모든 논의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되고 국민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 것이 정상이다.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그의 언론관도 문제다. 박 당선인이 언론, 그리고 언론인을 보는 시각이 어떤지는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 임명에 함축돼 있다. 윤 대변인은 ‘정통 언론인’으로 보기에는 결함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언론계와 정치권을 넘나드는 걸 당연시하고, 정제되지 않은 막된 언어로 편향적인 글을 썼던 대표적인 기자다. 이런 부류의 기자를 어떻게 ‘언론인으로서의 전문성’을 인정해 인수위 대변인에 임명했는지 놀라울 뿐이다. 또한 함구령을 내린 채 대변인의 발언만을 받아쓰게 하는 것은 언론을 일방적인 정책 전달 수단쯤으로 여기는 처사다. 박 당선인의 비민주적인 이런 언론관이 바뀌지 않는 한 정부와 언론 간에 정상적인 관계 형성은 요원하다.

아직 공약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지 않아 박근혜 정부의 정책 방향이 어떻게 설정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새 정부를 인수위처럼 운영한다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국민의 호응을 받기 어렵게 된다. 지금 같은 인수위 운영 방식이나 인사 스타일이 새 정부까지 이어지지 않길 바란다.
 
< 한겨레신문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