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엠마오로 가는 길

● 칼럼 2013. 1. 4. 19:19 Posted by SisaHan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뒤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끝도 모를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 절망은 곧 죽음이었다. 예수의 죽음, 예수가 상징하던 구원의 죽음이었다. 이스라엘 민중에게 예수는 영혼의 구원뿐 아니라 로마의 지배, 유대 종교 기득권 세력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다. 예수는 종교적·정치적 메시아였다.
그런데 그는 힘없이, 무참하게 죽었다. 고문을 당하고, 온갖 능욕과 모멸을 받으며 죽었다. 제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으며,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다. 예수를 따르던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예루살렘을 떠나 시골로 도망을 갔다.
엠마오로 가는 길. 예수를 따르던 두 사람이 예수 죽음 이후 절망에 빠져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깊은 절망에 빠져 있어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동행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이, 곧 죽음을 넘어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벌써 다섯명의 노동자, 노동활동가가 죽어갔다. 네 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절망의 깊이가 얼마나 되었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 최강서씨는 노조 파괴와 158억원 손해배상소송이라는 악령 같은 고문에 시달려왔다. 선거 결과는 그런 ‘악령’으로부터의 해방이 좌절되었음을 뜻했을 터다. “박근혜 대통령 5년을 또…”라고 채 말도 끝내지 못했던 그의 유언은 끝 모를 그 절망의 깊이를 조금 헤아리게 할 뿐이다. 최강서씨만이 아니다. 대선 이후 목숨을 끊은 분들뿐 아니라 선거 전, 쌍용자동차 해고자와 가족 가운데 스물세분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 박사는 선거 전 ‘죽음’의 경고를 여러 차례 했다.
“쌍용 해고노동자들이 지난 3년 동안 20명 넘는 사람이 죽었어요. 이들은 마지막 희망을 잡다가도 기력이 달리고, 지탱할 힘이 없는 것 같아요. 대선 결과에 따라서 죽을 사람이 더 있다고 느껴져요. 우리나라에서 밀려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번 선거는 목숨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라는 극한의 상황은 아니라 하더라도 끝 모를 좌절과 절망을 느끼는 이들, 사회적 강자, 권력, 자본에 밀리고 쫓겨나 차가운 벌판에서 벌거숭이로 서 있는 이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사법 고문의 대상이 되고, 평생의 일터에서 쫓겨나고, 갖은 불이익을 당하는 이들이 주변에도 넘쳐난다.
 
그들에게 “유신 때는 끝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도 바위에 계란 던지는 심정으로 싸웠다. 희망의 씨앗을 심기 위해, 아니 그게 최소한 사람 사는 도리였기에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역량만 잘 키우면 언제든지 이길 수 있다. 보궐선거도 있고, 지자체 선거도 있고, 총선도 있고, 5년 뒤에는 또 대선도 있다”는 말을 해본다. 그러나 이런 말이 지금은 위로가 되기는커녕 속만 뒤집어 놓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달리 할 말도 없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의 두 사람을 포함하여 예수를 따르던 이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참담한 실패였다. ‘메시아 예수’의 모습은 찬란한 승자의 그것이 아니라, 죽음의 바닥에까지 떨어지는, 고난과 절망, 실패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이렇게 바로 그 바닥에까지 이른 고난과 절망에서 피어난 것이었다. 그게 ‘메시아 예수’가 보여준 구원의 모습이었다.
이제 절망과 좌절을 딛고, 희망의 씨앗을 다시 가꾸어 가야겠다. 그리고 그 희망의 출발은 함께 나누는 것, 특히 아픔과 슬픔과 절망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해고자들, 가진 자들과 강자들이 난폭하게 지배하는 이 시대를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 뿌리가 뽑힌 이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다시 일어서는 일이다. 부족한 것을 서로 채워주고,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해고노동자를 위한 기금에 도움을 주고, 왜곡된 언론조건을 바꾸기 위해 힘들게 일하고 있는 많은 독립언론들을 열심히 도와주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정말 죽지 말고 힘차게, 당당하게 살면서 이겨내는 일이다.

< 정연주 - 언론인 >


이런 당부 하지 않기 바랐다. 이 나라가 더 이상 과거 악몽의 질곡에 매여 있지 않기를 바랐던 까닭이다. 박근혜 후보의 당선은 유신의 기억, 그 연장선상의 5공과 권위주의 정권의 악몽이 앞으로도 우리를 민주와 반민주, 평화와 냉전, 소외와 특권의 갈등 속에 잡아두리라 봤다. 반대로 박 후보의 낙선은 유신의 퇴장과 함께 그로 말미암은 트라우마도 치유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제 그 바람은 박 후보가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사라졌다. 이제 그가 꿈꾸던 유신의 명예회복과 특권사회의 강화라는 악몽이 성큼 현실로 다가왔다. 불행하게도 이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오래된 싸움이 계속되어야 할 것임을 뜻한다. 이제 말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하나, 오랜 세월 선한 이들을 괴롭혔던 그 악몽의 기억을 박 당선인이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화해와 통합을 이야기하는 그 역사적 희비극 앞에서 실소했다. 하지만 유권자가 그 손을 들어주었으니, 어찌하겠는가. 미봉책이라도, 기억의 공유가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우회로가 되기를 바랄 수밖에.
 
독일의 미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했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의 기억은 인간의 야만을 남김없이 까발렸고, 신과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전복시켰다. 더 이상 사랑과 믿음을 노래할 순 없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들 역시 몸은 자유를 얻었지만, 평생 영혼은 그 악몽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그곳은 신뢰와 존중, 연민 등 인간 존엄성의 말살 현장이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이런 가치를 상실한 이들이 어떻게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생존자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들은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인간에 대한 불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곤 했다. 작가 장 아메리는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프랑스 귀르 수용소에서 탈출한 뒤 레지스탕스 활동을 계속했던 그는 1943년 다시 체포돼, 생질(신트힐리스) 수용소를 거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됐다. 주검으로 나오기까지 평균 3개월이었다는 수용소 생활을,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거치며 2년 동안 요행히도 살아남는다. 이후 작가로 성가를 날렸지만 1978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는 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밖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그것은 하나의 구원이다.” 그것이 왜 구원인지에 대한 물음의 실마리는 1966년 펴낸 <죄와 속죄의 저편>에 나온다. “고문을 경험한 자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편하지 않다.”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에서 레지스탕스 빨치산 활동을 하다 역시 1943년 체포돼 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 그는 그곳에서 수용소의 야만을 전하기 위해, 오로지 증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소설가, 시인의 길을 걷는다. “그대들은 그동안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고통만으로는 정녕 부족하단 말인가./ 손가락 하나로 폭탄 단추를 누르기 전에/ 잠깐만, 아주 잠깐만 멈추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아우슈비츠의 소녀’에서) 그의 증언은 계속됐지만, 1987년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유대인마저 그와 같은 야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인간 현실은 그를 절망케 했다. “세월이 흘러도 증오와 복수만 거듭되는 이 허망한 역사/ 나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울부짖는다네.// 아- 세월은 흘러가노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코끼리의 유언’에서) “그대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고통 너머 그 무엇,/ 그 무엇을 믿고 싶”었지만, 그런 믿음을 확인하기엔 악몽의 트라우마가 너무 컸다.
인간 존엄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 존엄의 파괴에 맞서 인간 존엄을 지키려 몸부림쳤던 선한 인간의 이야기다. 박 당선인이 인간 존엄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부채를 털고, 피해자의 멍에를 풀어내기 바란다. 그러자면 문재인 후보의 ‘사람이 먼저’라는 슬로건은 이제 당신이 들어야 한다.
 
< 한겨레신문 곽병찬 논설위원 >

 

[한마당] 박근혜 타임, 박정희 타임

● 칼럼 2012. 12. 16. 13:29 Posted by SisaHan
1970년대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 등은 한국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외국 언론이었다. 요즘이야 외국에서 생산되는 뉴스와 정보들이 인터넷 등에 감당할 수 없이 넘쳐나지만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옆구리에 타임 잡지를 끼고 다니는 것은 영어깨나 하는 먹물 든 지식인의 표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끔 <타임>의 기사 일부분이 까맣게 먹칠이 돼서 나오는 때가 있었다. 당시 시퍼렇게 작동하던 사전 검열은 외국 언론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정권에 조금이라도 불리한 기사, ‘나라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기사는 독자들과 철저히 차단했다.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표지 인물로 실은 <타임>의 제목 ‘the strongman’s daughter’ 번역을 놓고 한바탕 소동이 일었지만 사실 그것은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다. ‘힘을 이용해 통치하는 정치 지도자’라는 사전의 일반적 풀이가 말해주듯 strongman이 ‘독재자’의 에두른 표현임은 상식에 속한다. <타임> 쪽이 점잖게 완곡어법을 구사한 의도까지 고려해 양보해도 ‘철권통치자’ 정도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것을 ‘권력자’니 ‘강력한 권력자’니 심지어 ‘실력자’로 옮기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다. 멀리 갈 것도 없다. ‘North Korean strongman Kim Jong-il’을 ‘북한의 실력자’ 따위로 번역했다가는 새누리당 사람들이 ‘종북세력’이라고 벌떼처럼 덤볐을 것이다.
 
사실 새누리당은 더 좋은 번역을 놓쳤다. 그것은 바로 ‘강력한 영도자’다. 실제로 그 당시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그렇게 불렀다. “민족의 강력한 영도자이신…”으로 시작하는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런 호칭 자체에 당시의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통치 분위기가 잘 깃들어 있으니 그런대로 괜찮은 번역 아닌가.
생각해보면 새누리당의 ‘의도된 오역’을 탓할 바는 못 된다. ‘불리한 영어’를 정확하게 번역할 정도의 바른 심성을 가진 집권 여당이라면 나라가 이런 꼴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사슴을 보고 말이라고 우겨온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당사 간판만 새누리당으로 바꿔달고 당이 통째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 내내 나라를 다스려온 사람들이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정치교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재집권, 정권연장, 정권승계 등의 적확한 표현은 어디로 실종해버렸다. 언어에 회칠·분칠을 해서 현실을 거꾸로 비틀어버리는 놀라운 능력이다.
문제는 이런 ‘지록위마(指鹿爲馬)’ 전략이 현실에서 먹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새누리당의 능수능란한 프레임 짜기에 놀아나는 야당의 무능함 탓이 크다. 하지만 더 큰 원인은 언론에 있다. 이 땅의 보수신문과 방송사들도 strongman의 올바른 번역이 ‘권력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안다. 새누리당이 간판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한나라당이며, 이번 대선이 정권교체 대 정권연장의 대결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도 짐짓 모른 척한다. 그리고 ‘누리꾼들 사이에 strongman 번역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며 본질을 흐린다. 이런 언론 환경에서 새누리당은 마음 놓고 사슴을 말이라고 우긴다.
 
박정희의 ‘타임’과 박근혜의 ‘타임’은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본질이 완전히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원천 차단’에서 ‘간접 차단’으로 수법이 교묘히 바뀌었을 뿐 진실은 여전히 국민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강압 대신에 등장한 교묘한 통제와 순응이 훨씬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박정희 시대를 뒤이은 박근혜 시대의 위험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리고 ‘strong queen의 등극’은 이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표지 제목을 둘러싼 논란은 <타임>이 인터넷판 제목을 ‘dictator’s daughter’로 명확히 명기해놓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끝을 맺었다. 오역을 들이밀었던 새누리당과 일부 언론들도 머쓱해졌다. 하지만 지금 새누리당과 수구언론이 합작해서 벌이는 의도된 ‘정치 오역’에는 누가 유권해석을 내릴 것인가. 그것은 결국 12월19일 투표장으로 향하는 유권자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 한겨레신문 김종구 논설위원 >


[1500자 칼럼] 옛날 옛적에

● 칼럼 2012. 12. 4. 21:22 Posted by SisaHan
첫 손녀를 본 지 어언 일 년이 지났다. 며느리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 말 할 수 없는 기쁨아래 곧 할머니가 된다는 황당함도 스멀거렸다. 오십 후반의 첫 손자는 그렇게 이른 편도 아니었건만 초가을 어디쯤으로 착각하고 있던 내 인생의 계절이 갑자기 겨울로 전환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삼십 여년 만에 집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던 날, 그 쏴아 했던 감정은 나도 모르게 사라지고 할머니란 소리가 술술 저절로 나왔다. 정겨운 호칭이 하나 더 주어졌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이의 탄생으로 썰렁했던 집안에 훈기가 돌고 메말랐던 감성이 봄비 맞은 들녘처럼 촉촉해졌다. 나날이 달라지는 아이의 재롱으로 활력이 생겼고 팍팍하던 삶에 윤기가 돌았다. 그렇게 나의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던 녀석이 지금은 장거리 출타 중이다. 
대구의 친정에 다니러간 며느리에게서 종종 아이의 일상을 담은 동영상이 온다. 비록 단편적이긴 하나 아이의 부재로 인한 허전함을 메우기엔 안성맞춤이다. 오늘도 새로 보내온 동영상을 보고 또 보며 그 속으로 빠져들다가 신기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녀 서현이가 홀 한 가운데에 깔린 매트리스 위에서 비틀 베틀 걷고 있었다. 젖먹이를 안고 빙 둘러 앉아있던 아이엄마들의 시선이 모두 서현에게 쏠렸다. 어떤 아이엄마는 부러운 듯, ‘저기, 언니 걷는 것 좀 봐.’ 하는 음성이 들리기도 했다. 펼쳐진 상황이 상상되지 않아 아들에게 물었더니, 엄마와 함께하는 생후 6~7개월 반, 유아 조기교육실의 전경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한 돌짜리 서현이가 동생들 반에 침입하여 아장걸음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된 상황이었다. 동영상을 몇 차례 더 돌려보며 이 기이한 현상을 관찰하다가 머리가 띵 해 옴을 느꼈다. 조기교육 열풍이 젖먹이들에게 까지 뻗쳐있음이 확연해서였다. 무한경쟁시대에 교육이 대세라지만 유아들의 성장발육까지도 교육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게 씁쓸했다. 
한국의 영유아교육의 현주소가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을 했다. 시대에 맞는 할머니 역할을 하려면 현재 돌아가는 추세는 알아두어야 할 것도 같았다. 한 사이트에서 영유아교육의 적정 시기에 대한 설문조사가 있어 보았더니 놀랍게도 육십프로가 넘는 응답자가 생후 6개월부터 12개월 전후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답했다. 또한 교육의 지표는 창의력과 신체발달, 인성에 역점을 두었고 감성적인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오감을 골고루 자극할 필요성이 있다고 피력하였다.
 
하나하나 짚어보니 모두 바람직한 이론을 바탕한 목표설정이었으나 정형화된 방법이 마음에 걸렸다. 교육의 시기도 태아교육을 생각하면 이르다고 볼 수 없지만 교육기관에 의한 교육시기를 그렇게 잡는다는 게 의아했다. ‘배움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속담을 실천시키는 시발점으로 보아야 할 지 아리송하기까지 했다. 꼭 전문교육기관을 거쳐야 아이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 젊은 엄마들의 사고가 위험스럽고 틀에 박힌 시스템 안에서 얼마마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오늘따라 할머니와 함께 한 나의 어린 시절이 그립다. 어머니의 매운 회초리를 피해 할머니 치마 속으로 숨어들던 기억이며 올망졸망한 형제들 입에 박하사탕 하나씩 물려놓고 옛날 옛적에……. 로 시작한 할머니의 옛이야기는 어린 소견에도 참 재미있었다. 충렬왕전, 박 혁거세전, 홍길동전 등등 할머니의 이야기엔 오늘날처럼 인성, 감성, 창의력을 강조하지 않아도 그 속에 모두 녹아있었다. 특별히 오감을 자극 시키는 방법을 터득하지 않아도 산으로 들로 뛰고 놀면서 자연히 해결되었던 그 시절을 내 손녀에게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시대를 거스르는 할머니가 되면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다. 
나의 할머니 같은 할머니가 되기 위해 이야기 창고부터 불려야겠다. 아이가 돌아오기 전에.

< 임순숙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에세이스트’로 한국문단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