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엘리야(Elijah) 공연을 보고나서

● 칼럼 2012. 11. 25. 15:46 Posted by SisaHan
지난주 토요일 저녁 토론토 아트쎈터에서 있었던 토론토 한인합창단 (이사장: 송완일)의 멘델스존 오라토리오 ‘엘리야’ 공연은 필자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음악회였다. ‘엘리야’는 5년전 한인합창단이 같은 장소에서 한번 연주했던 곡 이다. 그 당시에 필자는 한인합창단 단원으로서 이 곡을 무대에서 불렀다. 합창단원으로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 청중의 한사람으로서 똑같은 곡의 연주를 감상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노래를 하는 합창단원들은 전체의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청중에게는 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특히 합창단원으로서 노래를 했던 바로 그곡을 청중의 입장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지극히 드물게 온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엘리야와 같은 대곡의 경우에는 더구나 그렇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특별한 음악감상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은 음악 평론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음악 평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지난 30여년 동안에 걸쳐 대학 합창단원으로서, 컴뮤니티 합창단원으로서, 뉴욕 카네기홀을 비롯해서 영국 윈체스터와 요크 대성당 등을 돌아다니며 원정공연을 한 경력이 있다고 해서, 대학교에서 음악학점 몇점을 땄다고 해서, 음악 평론의 자격을 소지하게 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이다. 이 글은 단지 인상적인 음악 감상의 기회를 갖게된 데에 대한 소감일 뿐이다.

필자가 느끼기에는 이번 한인합창단의 엘리야 공연은 성공적인 높은 수준의 연주 였다. 미국으로부터 초빙된 명성있는 솔로이스트들 (박숙형, 신혜정, 진철민, 김기봉)은 물론이고 ‘신포니아 토론토’교항악단도 이 곡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한치의 부족함이 없이 합창을 뒷받침 해주었다. 보이 소프라노(김륜)의 청아하면서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신비스러운 목소리는 작곡가가 의도하는 바를 그대로 전달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것 같았다. 합창 그 자체는 지휘자 김훈모 박사의 음악에 도취된 몸과 마음을 바친 지휘 스타일과 일체가 되어 다양한 감정의 표현이 요구되는 낭만파 시대의 이 어려운 곡을 환상의 극치로 끌어올리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무대에 서서 합창단원으로서 노래하는 대신 청중의 일원이 되어 이 아름다운 음악에 도취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던지.
 
멘델스존의 ‘엘리야’는 헨델의 ‘메시아’와 하이든의 ‘천지창조’와 함께 3대 오라토리오 중의 하나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낭만파 시대에 작곡된 엘리야는 메시아나 천지창조같은 바로크나 클래식 시대의 음악과는 달리 그 곡이 웅장하며 섬세하기 때문에 대형 프로 교향악단과의 협연 없이는 그 진수를 보여줄 수 없는 곡이다. 따라서 엘리야 같은 대형 오라토리오를 제대로 공연할 수 있는 합창단은 극히 드물다. 토론토에 크고 작은 수많은 대학 합창단과 지역사회 합창단이 있으나 이곡을 제대로 할 수있는 합창단은 토론토 한인합창단과 멘델스존 합창단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대형 프로 교향악단을 고용하는데 만해도 수만불의 비용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음악적인 수준과 재정능력을 겸비한 합창단은 그리 많지않다. 미국에서 온 솔로이스트들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수준과 능력을 갖춘 한인합창단을 가지게 된 것은 토론토 한인사회의 행운이라는 것이다. 뉴욕이나 LA에서도 이러한 수준의 한인 합창단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미국의 다른 한인합창단과 협연하는 기회와 토론토 한인합창단과 협연하는 기회가 겹치게 되면 주저하지 않고 토론토를 택할 것이라고. 수준이 높은 합창단과 협연하고 싶은 예술가 다운 생각인 것이다. 

그들은 우리 수준의 합창단이면 자기들이 관여하고 있는 시카고의 한인합창단과 합세하여 합창곡 대곡중의 대곡인 베르디의 ‘레퀴엠’도 공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구체적인 구상을 해보기로 하였다. 이 곡을 하기위해서는 최소 80여명의 합창단원들과 대형 프로 교향악단을 필요로 한다. 이 일이 성사되어 토론토 한인사회의 음악 애호가들에게 베르디 레퀴엠 공연을 선사할 수 있게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기회가 오면 필자도 다시 무대에 서서 이 곡을 열창할 것임을 이 지면을 통해 약속한다.
이번 엘리야 공연은 임마뉴엘 토론토 한인연합교회 정성민 목사님의 성공적인 공연을 기원하는 기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 기도의 일부를 소개하면서 이글을 마친다.

(윗부분 생략)
선지자 엘리야 처럼 하늘의 음성을 듣고
하늘의 소리를 노래하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멀리서 초대 손님으로 오신 분들,
박숙형, 신혜정, 진철민, 김기봉님,
그들의 영을 주관하시고 마음껏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이 음악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당신이 살아 있음을 경험하게 하소서.
무대 위에서 그리고 무대 아래에서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아래 생략) 

< 유종수 - 전 알고마대 교수 >

 

[사설] 새정치 공동선언, 말보다 실천

● 칼럼 2012. 11. 25. 15:44 Posted by SisaHan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가 새정치 공동선언도 발표했다. 두 후보 쪽이 “새정치 선언은 개혁의 시작”이라고 말했듯 정치개혁은 이제 첫 발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다.
두 후보는 새정치 선언에서 경제민주화 등 5대 국정 현안에 대한 여야정 국정협의회 상설화, 좋은 일자리를 위한 노사정 협약,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인사제청과 해임건의권 보장,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처 신설, 공천권을 국민에게 완전히 환원하는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두 후보의 새정치 선언을 지난 6일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내놓은 정치쇄신안과 비교하면 박 후보가 상향식 공천을 위해 국회의원 후보 선출을 위한 여야 동시 국민참여 경선을 제안했고, 두 후보는 국회의원 공천권을 국민에게 완전히 환원하겠다는 선에서 화답했다.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 보장, 국회 윤리위와 선거구획정위의 외부인사 구성 등도 양쪽이 같다. 이 사항들은 대선 뒤 한시라도 빨리 입법을 서두르면 될 일이다. 박 후보가 검찰 개혁 방안으로 상설특검제를 제시한 데 대해 두 후보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제안했다. 박 후보가 4년 중임제 개헌을 언급했지만 두 후보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두 후보가 여야정 국정협의회 등 협치 방안을 내놓은 반면 박 후보는 대통령의 정기국회 연설 정례화 정도를 내놓는 데 그쳤다.
 
두 후보가 새정치 실천을 위한 방안으로 정권교체와 국민연대를 제시했지만 추상적인 수준일 뿐 국민연대의 구체적 방안이 나오지 않은 것은 미흡한 점이다. 진보정당 등에서는 두 후보의 비례대표 확대 주장에서 더 나아가 독일식 정당명부제와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논란이 됐던 국회의원 정수 문제는 ‘비례대표 의석을 확대하고 지역구를 줄이는 과정에서 의원 정수를 조정한다’는 선에서 일단락됐다. 합의문 발표 뒤에도 이 문장이 의원 정수 축소를 의미하는지를 놓고 양쪽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면 이 부분은 합의라기보다는 봉합에 가까워 보인다.
사실 새정치, 정치개혁이라는 게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정말 어려운 과제다.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정권교체가 된다 해도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치개혁을 추진하기란 녹록지 않다. 새정치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기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


[1500자 칼럼] 유서 유감(有感)

● 칼럼 2012. 11. 17. 16:23 Posted by SisaHan
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유서 쓸 생각을 한다. 우린 유서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 한 많은 세상을 인위적으로 끝맺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남겨 놓는 글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유서가 내포하고 있는 섬뜩함이 있기에 선 뜻 화두에 올리게 되지 않는다. 철인 칸트는 “유서는 가장 불행한 기록이고 또 가장 효력있는 기록이다.” 라고 말했다. 불행하다했음은 그 글이 절대절망의 순간에 쓴 마지막 남긴 글이라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서를 삶의 정리 차원에서 쓰여 진 글로 간주한다면 불행한 기록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가장 진실한 자기 고백이요 그러기 때문에 삶의 길벗들을 향한 애정이 가득 담긴 선물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제까지 남에게 이야기 할 수 없는 진실을 전할 매체로서 유서 이상의 효과는 없을 것이다.
뒤에 남아 세상을 더 살다 올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신적인 유산의 일부라 생각한다면 유서가 반드시 끔찍한 기록만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삶의 결정체는 어디에 가치관을 두고 살아왔느냐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적어도 삶의 씨앗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 밭에 심겨져 싹이 틀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일생을 통해 삶의 참의미를 한마디로 답을 내리기란 어렵다. 모를 일들이 알면 알수록 점점 많아진다. 때에 따라서는 객기도 부려보며 자신을 마음 것 풀어주고 싶을 때도 있다. 긴장에서 해방되고 싶고 유유낙낙 유랑도 해보고 싶다. 그러다 인생이 너무 고단하면 삶이 참 지루하단 생각도 해본다. 유서 쓸 마음이 생겼으면 삶이 지치기 시작했다는 암시가 들어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때때로 찾아드는 유서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흐트러진 삶을 재정비시켜준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체성에 대한 호된 평가를 스스로 내리기도 한다. 꼬박 꼬박 유서라 생각하고 한 자 한 자 글자로 박아낸다.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 한 올 한 올 털장갑을 짜듯 말이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기 책임을 다한 뒤에 오는 성취감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취감은 성취욕과는 다르다. 성취하겠다는 욕심에서가 아니라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결과로 얻어지는 축복이다. 책임감은 용기가 사그라질 때 용기를 주며 믿음이 무너지려 할 때 믿음을 심어주고 희망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 다시 희망을 주는 힘이 된다. 책임감과 함께 꼭 따라야 할 것은 사랑하는 마음가짐이다. 슬기로움이 함께 함이다. 그리하여 마음과 마음의 만남의 소중한 보물을 얻게 되는 기쁨도 있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는 베토벤의 개인철학이 담긴 유명한 유서이다. 1801년 베토벤은 의사로부터 청각을 잃을 수도 있다는 얘기와 함께 시골에서 요양할 것을 권유받고 교외의 하일리겐수타트로 갔다. 그곳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연과 시골에 애정을 느끼게 되었으나 귓병이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자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고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였다. 그래서 유서를 쓰고 자신이 죽은 후에 개봉하라는 지시문을 남겼다. 두 명의 동생 앞으로 쓴 장문의 유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심경을 솔직히 피력했다. 그는 이곳에 머물면서 그 유명한 [전원교향곡]을 작곡하였다. 베토벤은 짐작컨대 매일을 오늘이 마지막이란 그런 심정으로 살지 않았을까. 그의 사망 뒤에 발표된 유서는 불멸의 음악예술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이해인 시인의 ‘미리 쓰는 유서’ 한 연이 마음에 와 닫는다.
누구나 한 번은/ 수의를 준비하는 가을입니다./ 살아 온 날을 고마워하며/ 떠날 차비에 눈을 씻는 계절/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약속의 땅으로 뛰어가고 싶습니다.

< 민혜기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


[칼럼] 젊은 여성들의 반란

● 칼럼 2012. 11. 17. 16:18 Posted by SisaHan
지난 9일치 <한겨레> 1면에는 ‘미국 대선 흔든 여성의 힘’이라는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렸다. 전통적으로 투표율이 높았던 늙은 백인 남성들이 퇴조하고, 젊은 여성들이 대거 투표장으로 몰려간 게 오바마 당선의 배경이라는 내용이다. 
한겨레만 유독 이 기사를 비중 있게 다룬 데에는 편집국장의 이 한마디가 있었다. “내가 딸을 키워보니 여자가 더 우수한 거 같아.”

오래전 김선주 선배(편집인: 바로 그 명칼럼니스트!)한테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일본 고지마섬의 원숭이들은 원래 고구마를 흙이 묻은 채 먹었는데, 한 젊은 암컷이 바닷물에 씻어 먹기 시작했다. 다른 암컷들이 따라 배우더니, 나중에는 섬 전체로 퍼졌다. 그런데도 늙은 수컷들은 끝까지 씻어 먹지 않더라는 것이다. 젊은 암컷의 적응능력과 늙은 수컷의 고집불통을 대비시킨 것이다.

여성들의 집단적인 힘이 세상을 바꾼 사례는 많다. 빅토리아 시대에 젊은 남성들이 식민지를 찾아 떠나다 보니, 영국에는 50만명의 ‘잉여 여성’이 생겨났는데, 그 숫자 때문에 여성 재산권, 여성 참정권, 여성의 대학 입학 같은 법이 만들어졌다. 딸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도 크다. 미국에서는 딸을 둔 하원의원이 낙태를 지지하는 경향이 높고, 딸이 많을수록 투표 전력이 더 진보성향을 띠는 것으로 조사됐다. 독일에서는 소속 정당을 바꿀 경우, 아들이 하나 있는 부모 중 3분의 2는 우파 쪽으로 이동한 반면, 딸을 하나 둔 부모 가운데 3분의 2는 좌파 쪽으로 움직였다.(맬컴 포츠 <전쟁 유전자>)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다른 여성과 연대하고 소통하며 사회복지를 지지하는 경향이 크다는 게 대체적인 연구 결과다. 아마도 사바나에 살던 선조 여성들이 함께 채집을 하고 자식들을 돌볼 때, 수다를 떨면서 정서적 유대를 형성했던 적응이 유전자로 이어진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여성이라고 다 평화적이고 진보적인 건 아니다. 이건 어느 외교관한테 들은 얘기인데, 파푸아뉴기니를 가보니 코밑에 수염이 난 원주민 여자들이 제법 되더란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극도로 자원이 부족한 환경에서 서로 약탈을 일삼다 보니, 여자들도 전쟁에 나서게 되고 그 결과 남성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수염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애 자체가 전쟁이었고, ‘불통’ 이미지에 갇힌 박근혜 후보가 ‘여성 대통령’을 주창하는 것은 왠지 아귀가 맞지 않아 보인다. 한국의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지표는 없다. 그러나 이제 변화의 시점이 오지 않았나 싶다.

88만원 세대가 다 어렵다지만 특히 여성 청년층의 비정규직 비율은 남성 청년층보다 훨씬 높다. 옛날에는 시집이라도 갔지만, 요즘은 남자들도 약아서 맞벌이만 찾는다. 설사 어렵게 취직하고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애 키우고 집안일 하느라 직장에서 남자 동기들에게 밀리기 십상이다. 그게 싫으면 ‘독한 것’이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그러니 무슨 구국의 강철대오 같은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엉겁결에 떠밀려 결혼 파업, 출산 파업에 동참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여성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 젊은 여성들에게 걸리는 부하는 그 윗세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남자들한테 밀리지 않는 교육을 받았고, 학교 다닐 때 성적은 훨씬 좋았기에 그 박탈감이 더 큰 것이다.

일찍이 엥겔스는 ‘인류의 모든 혁명은 여성해방을 동반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가장 응축된 젊은 여성들이 먼저 떨치고 일어섰으면 한다. 미국 대선처럼 모두 다 투표장으로 몰려가 낡은 질서를 뒤엎어보라는 것이다.

< 김의겸 - 한겨레신문 정치 사회 에디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