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말의 죽음, 시인의 죽음

● 칼럼 2013. 1. 22. 19:21 Posted by SisaHan
시인의 말은 핍박받는 이들의 무기다. 가난한 이들의 위로이며 소외당한 이들의 벗이다. 말로 말미암아 이들은 다시 일어서고, 저항하고, 앞으로 전진한다. 그의 말마따나 시와 문학은 고통의 산물이고, 시인이 시대의 아픔에 누구보다 예민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런 시인의 맨 앞줄에 새겨진 이름 가운데 하나가 김지하다. 그의 글은 황토에 선연한 땀과 피의 긴장 속에서 튀어나와 독재자와 부역자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었다. 치명성으로 말미암아 그는 사형 선고를 당해야 했다. 당대인들은 그 앞에서 숨죽여 몸서리쳤다.
 
그런 그의 말은 어느 날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 불의에 맞서는 이들에게 수치심이 되었다. 시대의 절망이 강요한 산화를 두고 죽음의 굿판으로 몰아붙였다. 요즘엔 그 자신을 옭아맸던 빨갱이 공산당 따위의 말을 마구잡이로 날린다. 황토를 떠나 허공을 맴돌던 그의 말이 언제부턴가 권력의 추력을 받아 가난한 이들의 가슴을 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치명성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고통을 외면하고 슬픔을 잊은 말이 힘을 가질 순 없기 때문이다. 권력의 요설은 한갓 현혹이고, 협박, 깡통, 쥐새끼, 똥구멍, 찢어죽여… 따위의 말은 ‘오적’과 ‘비어’의 말 그대로지만, 맥없이 코앞 시궁창에 박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가 신앙하는 후천개벽과 여성시대의 도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내공에 대한 믿음 따위를 무작정 비난할 순 없다. 신념은 신념대로 존중해야 한다. 여성성에 대한 판단을 놓고 논란은 있겠지만, 시비를 일도양단할 순 없다. 변신을 안타까워할 순 있지만 훼절이라 매도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의 졸렬한 증오와 마구잡이 가해는 참기 힘들다. 누군가는 그에게 서푼짜리 분노를 집어치우라고 했다지만, 요즘 그가 토해내는 공연한 분노는 서푼 값어치조차 없다. 상생을 말하면서 저 혼자 옳다 우기고, 섬김을 말하면서 섬기지 않는다고 분노하고, 한때 서운했던 감정 때문에 평생을 저주하는 그의 말들이 어찌 한푼 값어치나 있을까.
 
그 자신도 말했듯이, ‘오적’ 이후 말이 육신이 되고 힘과 희망이 되는 그런 시를 그는 쓰지 않았다. 그러니 ‘시인 김지하’는 아주 오래된 전설 속의 이름이다. 하지만 몇몇 시편과 그로 말미암은 수난은 한 시대의 가시면류관으로 우리 기억에 각인돼 있다. 설사 오늘날 그의 말들이 수치스럽다 해도, 그 이름을 쉽게 지울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래도 이제 그를 책갈피에 묻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다시 오늘의 아픔을 담아낼 오늘의 말과 시인을 찾아 나서야 할 것 같다.


[칼럼] ‘레미제라블’과의 동행

● 칼럼 2013. 1. 22. 19:19 Posted by SisaHan
<레미제라블> 이야기로 뜨거운 요즈음이다. 영화 관객은 500만에 달하고, 완역본 소설도 15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뮤지컬도 만석이고, 앨범 판매량도 기록적이다. 해설기사도 넘쳐난다. 즈음하여, 나 자신의 레미제라블을 한번 이야기하고 싶다. 자격은? 한평생 그 책과 함께 살아온 “독자”로서 말이다.
열살 때 시골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촌놈이라 놀리는 텃세 아래서, 거의 왕따가 되었다. 도망갈 곳은? 학교 도서실밖에 없었다. 자주 가다 보니 책 읽는 재미가 붙었다. 책벌레 동생을 위해 누나가 사온 책이 <레미제라블>이었다. 그대로 빨려들어갔다. 거의 매일, 읽고 또 읽었다. 저녁에 미리엘 주교를 접하고, 자정이 가까우면 물 길으러 나온 불쌍한 코제트를 만나고, 코끝 시린 새벽에 이르면 하수도 속의 장 발장과 떨며 만났다. 이렇게 주인공들과 함께 쫓기고 아파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암울한 유신체제하에 대학생이 되었다. 캠퍼스는 때로 최루탄 얼룩진 전장이 되었다. 학우들이 처절하게 끌려가는 가운데, 변혁을 꿈꾸는 대학생들은 각국의 혁명사를 탐독했다. 혁명의 고전인 프랑스혁명이 빠질 수 없었다. 완역본으로 대한 <레미제라블>은 한마디로 민중의 다채로운 삶을 녹여낸 프랑스혁명사였다. 낡은 체제, 전쟁의 참상, 수도원의 역사, 도시의 부랑아들, 심지어 하수도의 역사에까지 전방위적 지식이 펼쳐졌다.
청년 시절을 사로잡은 장면은 바리케이드의 밤이었다. 1832년 6월5일, 항쟁에 나섰다가 장렬히 산화한 청년들은 바로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청년들뿐만 아니었다. 생애 마지막에 숨겨둔 정열을 불태우고 죽어간 마뵈프 노인, 어려운 환경에서도 시종 유쾌했던 부랑아 소년 가브로슈, 마리위스를 구하기 위해 신명을 내던진 장 발장까지. 그들의 비극이 우리의 현실과 겹쳐지면서 청년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30대 초반에 런던에서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처음으로 봤다. 극장 제일 뒷자리에서도 감동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노랫말이 전달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내 나름대로 수십번씩 그려낸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사악한 환경에서 때로 나쁜 짓을 거들면서도 연정을 소중히 간직했던 에포닌의 존재가 새삼 부각되어 왔다. 청년기까지는 자신을 주연급이나 조연급으로 생각하다 나이가 들수록 엑스트라에게도 눈길이 간다. 그런 관점에서 책을 다시 보면 작가가 엑스트라 한명 한명에도 어떻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지 생생한 느낌이 온다.
 
학자로서 형사법의 세계를 탐구하면서, 고집스런 냉혈한으로만 보였던 자베르에 대한 생각도 도전받았다. 직분에 누구보다 충실하고, 오류에 대해 사표로 책임지고, 양심의 가책 앞에서는 끝내 자살을 택하는 그런 공직자도 흔치 않을 것이다. 장 발장의 입장에서 형사제도는 잔혹하고 불공정한 것으로 탄핵될 수 있다. 전과자에 대한 냉대가 오히려 그를 더욱 나쁜 길로 내모는 건 아닌가. 사랑이 없는 억압이 과연 어떤 개선효과를 가져올까. 이 시대의 장 발장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런 의문이 나를 묵직하게 누르고 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보잘것없는 군상들이다. 세속적으로 보면 장 발장은 전과자이자 도망자, 팡틴은 미혼모와 창녀, 코제트는 버림받은 고아, 가브로슈는 도시의 부랑아, 마리위스는 폭도다. 경제적 궁핍에 더하여 각종 편견과 낙인 속에서 살아가는 처지다. 열악한 처지에서도 그들은 사랑하고, 보살피고, 연대하고, 항거한다. 사악한 제도와 관습의 굴레 아래서도 자애와 연민, 사랑을 통해 살아갈 만한 세상으로 변주시킨다. 비난받아 마땅할 듯한 사람들이 펼쳐내는 치열한 삶의 몸부림을 통해, 작가는 누구나 나름대로 의미 있는 존재임을 역설한다.
영화와 뮤지컬, 소설을 비교하면 어떤가 하는 물음을 종종 접한다. 취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에게 이 소설은 읽을수록 재미를 더하고, 생각거리가 더해지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국 어디든, 완독한 독자가 열명이라도 모인다면, 거기 달려가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은 심정이다.

< 한인섭 -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한마당] 인수위와 새 정부 예고편

● 칼럼 2013. 1. 22. 16:32 Posted by SisaHan
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출범한 지 한 주가 훌쩍 지났다. 인수위는 새 정부의 미래상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인수위 운영 방식과 논의 내용을 미루어 새 정부의 성격과 정책 방향을 엿볼 수 있다. 아직 부처 업무보고도 끝나지 않은 초기라서 인수위 활동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보더라도 박근혜 정부의 5년을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는 있다.
‘전봇대 발언’으로 요란하게 시작한 이명박 정부와는 달리 박근혜 인수위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행보를 하고 있다. 국민과의 약속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박 당선인의 신중한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5년 동안 이런 자세를 견지한다면 국민과의 신뢰를 상당 정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열흘 가까이 진행된 인수위 활동은 기대보다 우려를 더 많이 갖게 한다.
예상은 했지만 박 당선인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던 ‘불통’이 여지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온갖 비판에도 대변인에 ‘막말 윤창중’을 고수한 데 이어 부처 업무보고에 대한 ‘함구령’까지 내렸다. 박 당선인의 이런 행보는 그의 정치적 인식체계에 심각한 결함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먼저 민주주의에 대한 소양 부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란 원래 좀 시끄럽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잖은 비용이 들어가는 정치제도다. 정책 혼선을 이유로 침묵을 강요하고, 효율을 앞세워 논쟁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권위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특히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여러 계층 간에 상충하는 이해와 갈등을 조정하는 게 아주 중요한 과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국민 의견을 수렴하고 절충하는 여러 층위의 논의와 논쟁이 불가피하다. 어찌 보면 소모적으로 보이는 이런 토론의 장을 활짝 열어주는 게 민주주의의 요체다. 공론의 장이 사라지고 일사불란함을 강조하는 인수위 운영을 보면서 박근혜 당선인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더 퇴행시킬지 걱정되는 건 자연스럽다.
공인으로서의 공복(公僕)의식 부족도 빼놓을 수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은 국민을 대신해 국가를 운영할 권한을 위탁받은 심부름꾼이다. 그 권한 행사도 법률에 의해 엄격한 제한을 받는다. 그런데도 정권을 잡으면 국가권력을 전리품처럼 간주해 멋대로 쓰려고 한다. 이런 ‘권력의 사유화’는 이명박 정부에서 두드러졌다. 정권을 잡자마자 힘 있고 돈 되는 자리는 모조리 빼앗아 자기편들끼리 나눠 먹었다.
 
박 당선인이 이 대통령 같은 무지막지한 행태를 보일 것으로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불통 인사’를 자행하고, 인수위에 사실상 함구령을 내린 데서 보듯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이명박 정부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인수위는 박 당선인의 정책 수립에 도움을 주는 사설 자문기구가 아니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이다. 따라서 인수위의 모든 논의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되고 국민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 것이 정상이다.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그의 언론관도 문제다. 박 당선인이 언론, 그리고 언론인을 보는 시각이 어떤지는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 임명에 함축돼 있다. 윤 대변인은 ‘정통 언론인’으로 보기에는 결함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언론계와 정치권을 넘나드는 걸 당연시하고, 정제되지 않은 막된 언어로 편향적인 글을 썼던 대표적인 기자다. 이런 부류의 기자를 어떻게 ‘언론인으로서의 전문성’을 인정해 인수위 대변인에 임명했는지 놀라울 뿐이다. 또한 함구령을 내린 채 대변인의 발언만을 받아쓰게 하는 것은 언론을 일방적인 정책 전달 수단쯤으로 여기는 처사다. 박 당선인의 비민주적인 이런 언론관이 바뀌지 않는 한 정부와 언론 간에 정상적인 관계 형성은 요원하다.

아직 공약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지 않아 박근혜 정부의 정책 방향이 어떻게 설정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새 정부를 인수위처럼 운영한다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국민의 호응을 받기 어렵게 된다. 지금 같은 인수위 운영 방식이나 인사 스타일이 새 정부까지 이어지지 않길 바란다.
 
< 한겨레신문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


[한마당] 미국 공화당의 ‘변신’

● 칼럼 2013. 1. 14. 13:36 Posted by SisaHan
미국은 군사력뿐 아니라 경제정책에서도 세계를 주름잡는다. 미국의 경제모델은 다른 나라 엘리트들 사이에선 따라가거나 배워야 할 교과서로 여겨져 왔다. 여기엔 미국이 20세기에 대표적인 경제대국으로 성공해 본보기가 되었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미국이 국제기구 등을 통해 따라하기를 강요한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전세계의 많은 경제학도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한 것도 물론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 모델이 1980년대 이후 전세계에 퍼졌다.

1980년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채택한 이른바 ‘공급주의 경제학’(감세가 노동 공급과 투자 확대를 유도해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세수를 확충한다는 이론)이 한 시대를 풍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집권 당시 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무려 28%로 인하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도 대규모 감세를 단행했다.

그런데 미국식 모델의 핵심인 이 감세 정책이 이번에 된서리를 맞았다. 감세를 정강으로 채택하고 있는 미국 공화당이 20년 만에 증세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감세정책이 세수를 늘리기는커녕 대규모 재정적자를 초래한 것으로 드러난데다, 지난 대선에서 민심이 증세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세제 부문에서 이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두 가지가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연소득 45만달러 이상 가구(상위 1% 소득가구)에 대한 소득세율 인상이다. 과거와 달리 전 소득계층에 대해 세율을 올린 게 아니라 상위 1% 고소득층에 한정해 인상을 한 것이다. 이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의식한 측면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 사회가 최근 30여년간 승자독식 모델을 따르면서 ‘1% 대 99% 사회’로 불릴 만큼 급변한 점이 세제에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소득 상위 1%에 부가 몰린 만큼 이들의 세 부담을 늘린 셈이다.

둘째는 급여세라고 불리는 사회보장세의 인상이다. 미국의 직장인들이 노후연금 등을 위해 매달 월급에서 떼는 이 세금을 4.2%에서 6.2%로 올렸다. 이 세금의 인상으로 늘어나는 세수가 10년간 1150억달러(약 128조원)에 이른다. 대상자는 미국 가구의 77%나 된다. 민주당은 애초 이런 증세가 경제에 미칠 충격을 우려해 인상을 꺼렸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공화당이 여기에 찬성했다는 후문이다. 공화당으로서도 빈부격차 확대와 고령화에 따른 복지 수요를 감당하려면 복지재정의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나는 이를 ‘복지증세’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나라 보수파도 미국의 정치이념뿐만 아니라 경제이념을 따른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다른 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적어도 못하지는 않다. 복지 수요가 팽창하는 와중에도 이명박 정부가 대규모 감세정책을 편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복지 확충을 공약으로 내걸면서도 증세를 통해 복지재정을 늘리는 데는 미온적이다.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비과세·감면 축소를 통해 재원 확충을 하겠다는 얘기는 역대 정부가 매번 해온 것으로, 의미 있는 수준의 복지재정 확충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한국의 보수파가 최소한 미국 공화당이 이번에 변한 만큼만이라도 변했으면 한다.
< 한겨레신문 박현 워싱턴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