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세 새누리당 선대위 종합상황실장이 며칠 전 참으로 희한한 발언을 했다. 권 본부장은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회동 제안 이후 대선 후보 3명의 보도 비중이 형평성을 잃는 등 방송의 편파 및 불공정 보도가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권 본부장은 심지어 “세 후보에 대해 3분의 1씩 보도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 후보 단일화할 쪽을 50%, 박근혜 후보를 50% 보도하는 게 맞다”는 억지까지 부렸다.
 
권 본부장의 주장은 우선 사실관계부터 명백히 왜곡하는 것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의 분석을 보면, 후보 단일화와 관련된 지상파 방송 보도는 오히려 새누리당 쪽에 유리한 ‘편파성’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방송>의 경우 단일화 회동 제안이 나온 5일 저녁 다른 방송사들과 달리 이 소식을 톱뉴스가 아니라 네번째 기사로 처리했다.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만난 날에도 <한국방송>은 두 사람의 회동 뉴스보다 이를 ‘사기극’이라고 비난한 새누리당 소식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문화방송>은 7일부터는 새누리당의 후보단일화 공격 내용을 먼저 보도한 뒤 그 뒤에 단일화 협상 소식을 전하는 비상식적 편집을 하고 있다. 편파·불공정 보도를 비판할 쪽은 오히려 야권인데 새누리당이 적반하장으로 편파 시비를 걸고 나온 것이다.
지금의 지상파 방송 체제가 집권여당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구도임을 모를 사람은 없다. <문화방송>은 최근에도 무리하게 ‘안철수 논문 표절 의혹’ 보도를 했다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경고 처분을 받고서도 이를 깔아뭉개고 있다. 김재철 문화방송 사장 해임안 부결이나, 한국방송 사장에 길환영씨를 지명한 것도 모두 친여권 방송 구조를 온존시키려는 청와대와 박근혜 후보의 합작품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이 ‘방송 3사 보도가 박근혜 후보한테 유독 편파적’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지나가는소도 웃을 일이다.
 
새누리당이 뜬금없이 편파방송론을 들고나온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방송사들을 다그쳐 선거 관련 뉴스를 아예 ‘친박근혜 일색’으로 도배하겠다는 목적에서다. 새누리당의 비뚤어진 잣대로는 방송 보도가 최소한의 기계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마저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새누리당의 주장이 단순한 푸념 정도로 끝나지 않고 실제 ‘보도지침’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방송사들이 새누리당의 위세에 눌려 박근혜 후보 쪽에 더욱 기운 편파·불공정 방송으로 치닫지 말라는 법이 없다. 유권자들이 방송사들의 선거 보도를 더욱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아야 할 상황이다.


재벌의 순환출자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을 통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경제민주화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박 후보가 지난 8일 경제단체장 간담회에서 순환출자 문제와 관련해 “신규 출자는 규제하고 기존 출자분은 자율에 맡긴다”고 밝힌 것이 계기가 됐다. 이를 두고 새누리당 안에서도 재벌에 보호막을 쳐주는, 기존의 재벌 보호정책이란 비판이 일었다.
박 후보 발언은 최근 캠프 내부에서 박 후보에게 보고된 ‘기존 출자분도 의결권을 제한한다’는 내용의 공약 초안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한다. 그의 이런 태도는 최근 경제위기를 강조하면서 경제민주화와 동시에 성장을 추구하는 이른바 ‘투트랙’ 전략을 강조하는 쪽으로 돌아선 것과 맥이 닿아 있다. 대선이 40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야권 단일화에 맞서 보수층 표를 확보하기 위해 경제민주화에서 한발 빼는 셈이다.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박 후보와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의 신경전이 위험 수위에 이른 것은 그런 까닭이다. 박 후보는 어제 선대위 회의에서 “기존 순환출자 유지는 내가 경선후보 시절부터 누차 얘기한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김 위원장과 결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발언이라는 해석이다. 
김 위원장은 “박 후보 주변에 경제민주화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까 영향력을 끼칠 수 있고, 로비도 있고 하니까…”라며 재계의 로비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김 위원장은 한발 더 나아가 “박 후보가 집토끼 잡는다고 성장 얘기를 자꾸 꺼내면 확장을 못 하고 대선에서 질 수밖에 없다”는 말까지 했다.
 
박 후보가 선거전략상 경제민주화 구호를 뒷전으로 밀어놓는다면 일종의 ‘대국민 사기극’이란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박 후보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국민 행복을 위한 3개 핵심 과제 중 경제민주화 실현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지난 4월 총선 때도 경제민주화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제1당을 차지했다. 이제 와서 경제민주화로 얻을 표는 웬만큼 확보했으니 그만하겠다는 식은 곤란하다. 보수층을 잡기 위해 재벌에 보호막을 쳐준다면, 이제 경제민주화 구호를 대선 슬로건에서 제외하는 게 옳다.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박 후보의 애매모호한 줄타기는 한두번이 아니다. 과거사 문제를 두고 사과했지만 진정성을 의심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민주화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 결국은 속 빈 강정이 되어가고 있다. 박 후보는 이제 경제민주화, 즉 재벌개혁을 하겠다는 것인지 말겠다는 것인지, 유권자에게 분명히 말해야 할 것이다.

 

[한마당] 대통령의 염치와 법치

● 칼럼 2012. 11. 17. 16:10 Posted by SisaHan
이명박 대통령 일가의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의혹을 둘러싼 특별검사의 수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특검의 의지는 뚜렷하지만, 청와대 쪽의 수사 방해가 암초로 작용했다. 피의자 쪽이 수사에 소극적이거나 회피적일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대통령이라면 차원이 다르다. 
특검은 청와대 경호처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법원에서 발부받았지만, 경호처의 사실상의 거부 탓으로 거의 성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쪽은 형사소송법 제110조(군사상 비밀압수), 제111조(공무상 비밀과 압수)를 들어 압수수색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곡동 비리가 무슨 “군사상” 혹은 “공무상”의 비밀일 수가 없다. 공권력의 사적 남용은 애초에 군사상 목적도 아니고 공무도 아니다. 또한 이 조항에는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압수수색을 거부하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기까지 하다. 
우리 헌법상 법관의 영장에 의하지 않고는 압수수색을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달리 말해 법관의 영장이 있으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비바람이 들이치는 오두막도 영장이 없이는 들이닥칠 수 없지만, 영장이 있으면 왕궁이든 요새든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 법관의 영장을 저지하는 공권력은 헌법적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영장을 손쉽게 무력화해버리는 것은 법치주의를 무너뜨리는 반헌법적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취임선서대로 “헌법을 준수”해야 할 대통령은 영장주의를 “엄숙히” 지켜가야 할 무한책무를 진다.
 
더욱 문제는 특검의 수사기간 연장 신청을 대통령이 거부한 것이다. 특검의 짧은 활동기간에 주요 당사자들은 외유를 나가거나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의혹의 중심에 선 대통령은 정식으로 조사도 하지 못한 상태다. 그럼에도 수사기간 연장 신청을 거부한 것은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수사 방해에 다름 아니다. 거부 사유 중 압권은 “수사가 충분히 이루어졌다”는 청와대 공보수석의 발표다. 이런 말로써 변명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세는 실로 놀랍기까지 하다.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심기가 편할 리 없다. 수사기간 연장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적 정리로 볼 때는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공인 중의 공인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염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을 둘러싸고 특별검사의 수사를 받은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엄청난 망신살에도 불구하고 수사에 응했고, 수사 내용이 인터넷에 공개되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특별검사의 수사를 끝으로 그는 성추문 스캔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자금 의혹에 대해 검찰의 무제한 수사를 보장했다. 국민검사라는 애칭이 생겨날 정도로 가열찬 수사의 결과 그는 탄핵의 위기까지 몰렸다. 이처럼 대통령이라면 자기를 향한 수사의 칼날을 납득할 수 없는 방법으로 회피해서는 안 된다. 

특검의 활동 기한이 끝난다고 모든 의혹이 덮어지는 것도 아니다. 현 대통령의 잔여 임기는 불과 3개월 남짓이다. 권력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고도 더하여 사실상 수사 방해까지 했다는 의혹이 남아 있으면, 퇴임 후엔 수사를 재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밀어닥칠 수 있다. 그때엔 특검이 아니어도 검찰이 나설 것이다. 지금의 검찰이야 알고도 덮어버렸다는 정치적 편향성의 비판을 받고 있지만, 정치적 영향력이 사라진 가까운 장래에 수사 재개의 가능성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대통령은 법 앞에 어떤 특권을 인정받는 지위에 있지 않다. 재직 중 형사 기소를 받지 않는다는 불소추 특권만 가질 뿐이다. 그 특권은 대통령이 재직 중 수사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더욱이 대통령에겐 국민의 법 준수를 선도할 책무가 있다. 법질서 수호를 누구보다 자주 언급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자신은 법관이 발부한 영장의 집행을 방해하고, 최단기의 수사 이외의 추가 수사를 거부하면서 국민에겐 법 준수를 말할 때 그 영이 제대로 서겠는가. 대통령의 권한이 아무리 크더라도, 자신을 향한 수사를 막기 위해 쓰일 수 있는 권한은 하나도 없다.

<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1500자 칼럼] 징검다리

● 칼럼 2012. 11. 13. 15:42 Posted by SisaHan
탈북자와 같은 소외된 분들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목사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의 여러 가지 수고와 그에 따르는 고충을 들으면서 나는 진심에서 우러난 마음으로 참으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고 과찬이 아닌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겸양의 말씀으로 하시는 말씀이 “저는 그저 징검다리로 생각하고 섬깁니다” 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징검다리, 징검다리라! 참 오랜 만에 듣는 단어다. 예전에는 참 많이 썼던 단어다. 개울을 건널 수 있도록 사람의 보폭에 맞추어 띄엄띄엄 물속에 박아둔 돌이다. 몇 개씩 이어지면서 다리처럼 건넌다고 징검다리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에는 웬만하면 다리가 놓여져 실제로 징검다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나루를 건네주던 쪽배도 있었고 작은 개울에는 이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요즘은 거의 볼 수가 없는 것이 역사의 흐름인가? 문화의 발전인가? 그렇기 때문에 징검다리처럼 사는 분도 사라지고 그 단어마저 생소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징검다리로 놓여진 돌은 몸을 물 속에다 박고 그 위로 사람들이 물에 빠지지 않으려 한 발 한 발 그 위를 딛고 지나간다. 진흙이 묻은 신도 있고 예쁜 구두도 있고 신발도 없는 사람이 맨발로 그냥 밟고 지나간다. 개울을 건너면서 징검다리 때문에 잘 지나왔다 또는 징검다리 덕에 물에 안 빠졌네 하고 고마워하면서도 그것으로 끝난다.
징검다리가 고마웠다고 그 돌들을 쓰다듬어 주거나 말뚝을 세워 고맙다 하고 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냥 밟고 지나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징검다리는 누군가 자신을 물 속에 넣어둔 그 모습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때로는 개와 같은 짐승들에게도 밟히면서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가 고맙다고 안해도. 

사회에 봉사하고 교회를 섬기는 봉사자 헌신자의 삶이 그렇지 않을까? 그들은 자신을 남들이 들여놓기 싫어하는 물과 같은 험한 곳에 자신을 들여놓고 남이 자신을 밟고 지나가고 자신을 이용해서 출세를 한다고 해도 그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밟히는 삶이 어디 쉬우랴? 그 목사님이 징검다리라는 단어를 말씀하실 때, 왜 나는 엔도 슈샤꾸가 쓴 ‘침묵’ 이란 소설이 생각이 날까? 
고문을 견디다 못한 로드리고 신부는 후미에(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을 밟으려 할 때 하도 많이 밟아 이미 찌그러진 그 예수님의 얼굴. 그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시는 말씀. “밟아라 밟아라. 나를 밟고 지나가라. 나는 원래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땅에 왔느니라.” 이 말씀을 읽을 때 코가 찡하고 왜 눈물이 흐를까? 
예수님은 스스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밟히러 오셨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이 밟히심을 당당히 말씀하실 때 감격스러워서 그럴까? 아니면 그러지 못하는 우리가 부끄러워서 눈물이 흐를까? 그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는 밟히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남을 밟고 그를 딛고 일어서고 그 위에 내 집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징검다리는커녕 예수의 정신은 저 멀리 가버리고 없는 것이다.
 
교회를 본다. 세상을 본다. 징검다리처럼 봄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언제나 자신을 물 속에 담그고 어떤 발로 밟고 지나가든 묵묵히 그 시간을 지나는 징검다리. 참으로 고맙다. 또한 그렇게 사시는 분들이 참으로 고맙다.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