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인수위와 새 정부 예고편

● 칼럼 2013. 1. 22. 16:32 Posted by SisaHan
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출범한 지 한 주가 훌쩍 지났다. 인수위는 새 정부의 미래상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인수위 운영 방식과 논의 내용을 미루어 새 정부의 성격과 정책 방향을 엿볼 수 있다. 아직 부처 업무보고도 끝나지 않은 초기라서 인수위 활동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보더라도 박근혜 정부의 5년을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는 있다.
‘전봇대 발언’으로 요란하게 시작한 이명박 정부와는 달리 박근혜 인수위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행보를 하고 있다. 국민과의 약속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박 당선인의 신중한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5년 동안 이런 자세를 견지한다면 국민과의 신뢰를 상당 정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열흘 가까이 진행된 인수위 활동은 기대보다 우려를 더 많이 갖게 한다.
예상은 했지만 박 당선인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던 ‘불통’이 여지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온갖 비판에도 대변인에 ‘막말 윤창중’을 고수한 데 이어 부처 업무보고에 대한 ‘함구령’까지 내렸다. 박 당선인의 이런 행보는 그의 정치적 인식체계에 심각한 결함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먼저 민주주의에 대한 소양 부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란 원래 좀 시끄럽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잖은 비용이 들어가는 정치제도다. 정책 혼선을 이유로 침묵을 강요하고, 효율을 앞세워 논쟁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권위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특히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여러 계층 간에 상충하는 이해와 갈등을 조정하는 게 아주 중요한 과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국민 의견을 수렴하고 절충하는 여러 층위의 논의와 논쟁이 불가피하다. 어찌 보면 소모적으로 보이는 이런 토론의 장을 활짝 열어주는 게 민주주의의 요체다. 공론의 장이 사라지고 일사불란함을 강조하는 인수위 운영을 보면서 박근혜 당선인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더 퇴행시킬지 걱정되는 건 자연스럽다.
공인으로서의 공복(公僕)의식 부족도 빼놓을 수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은 국민을 대신해 국가를 운영할 권한을 위탁받은 심부름꾼이다. 그 권한 행사도 법률에 의해 엄격한 제한을 받는다. 그런데도 정권을 잡으면 국가권력을 전리품처럼 간주해 멋대로 쓰려고 한다. 이런 ‘권력의 사유화’는 이명박 정부에서 두드러졌다. 정권을 잡자마자 힘 있고 돈 되는 자리는 모조리 빼앗아 자기편들끼리 나눠 먹었다.
 
박 당선인이 이 대통령 같은 무지막지한 행태를 보일 것으로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불통 인사’를 자행하고, 인수위에 사실상 함구령을 내린 데서 보듯 권한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이명박 정부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인수위는 박 당선인의 정책 수립에 도움을 주는 사설 자문기구가 아니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이다. 따라서 인수위의 모든 논의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되고 국민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 것이 정상이다.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그의 언론관도 문제다. 박 당선인이 언론, 그리고 언론인을 보는 시각이 어떤지는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 임명에 함축돼 있다. 윤 대변인은 ‘정통 언론인’으로 보기에는 결함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언론계와 정치권을 넘나드는 걸 당연시하고, 정제되지 않은 막된 언어로 편향적인 글을 썼던 대표적인 기자다. 이런 부류의 기자를 어떻게 ‘언론인으로서의 전문성’을 인정해 인수위 대변인에 임명했는지 놀라울 뿐이다. 또한 함구령을 내린 채 대변인의 발언만을 받아쓰게 하는 것은 언론을 일방적인 정책 전달 수단쯤으로 여기는 처사다. 박 당선인의 비민주적인 이런 언론관이 바뀌지 않는 한 정부와 언론 간에 정상적인 관계 형성은 요원하다.

아직 공약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지 않아 박근혜 정부의 정책 방향이 어떻게 설정될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새 정부를 인수위처럼 운영한다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국민의 호응을 받기 어렵게 된다. 지금 같은 인수위 운영 방식이나 인사 스타일이 새 정부까지 이어지지 않길 바란다.
 
< 한겨레신문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


[한마당] 미국 공화당의 ‘변신’

● 칼럼 2013. 1. 14. 13:36 Posted by SisaHan
미국은 군사력뿐 아니라 경제정책에서도 세계를 주름잡는다. 미국의 경제모델은 다른 나라 엘리트들 사이에선 따라가거나 배워야 할 교과서로 여겨져 왔다. 여기엔 미국이 20세기에 대표적인 경제대국으로 성공해 본보기가 되었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미국이 국제기구 등을 통해 따라하기를 강요한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전세계의 많은 경제학도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한 것도 물론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 모델이 1980년대 이후 전세계에 퍼졌다.

1980년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채택한 이른바 ‘공급주의 경제학’(감세가 노동 공급과 투자 확대를 유도해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세수를 확충한다는 이론)이 한 시대를 풍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집권 당시 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무려 28%로 인하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도 대규모 감세를 단행했다.

그런데 미국식 모델의 핵심인 이 감세 정책이 이번에 된서리를 맞았다. 감세를 정강으로 채택하고 있는 미국 공화당이 20년 만에 증세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감세정책이 세수를 늘리기는커녕 대규모 재정적자를 초래한 것으로 드러난데다, 지난 대선에서 민심이 증세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세제 부문에서 이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두 가지가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연소득 45만달러 이상 가구(상위 1% 소득가구)에 대한 소득세율 인상이다. 과거와 달리 전 소득계층에 대해 세율을 올린 게 아니라 상위 1% 고소득층에 한정해 인상을 한 것이다. 이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의식한 측면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 사회가 최근 30여년간 승자독식 모델을 따르면서 ‘1% 대 99% 사회’로 불릴 만큼 급변한 점이 세제에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소득 상위 1%에 부가 몰린 만큼 이들의 세 부담을 늘린 셈이다.

둘째는 급여세라고 불리는 사회보장세의 인상이다. 미국의 직장인들이 노후연금 등을 위해 매달 월급에서 떼는 이 세금을 4.2%에서 6.2%로 올렸다. 이 세금의 인상으로 늘어나는 세수가 10년간 1150억달러(약 128조원)에 이른다. 대상자는 미국 가구의 77%나 된다. 민주당은 애초 이런 증세가 경제에 미칠 충격을 우려해 인상을 꺼렸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공화당이 여기에 찬성했다는 후문이다. 공화당으로서도 빈부격차 확대와 고령화에 따른 복지 수요를 감당하려면 복지재정의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나는 이를 ‘복지증세’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나라 보수파도 미국의 정치이념뿐만 아니라 경제이념을 따른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다른 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적어도 못하지는 않다. 복지 수요가 팽창하는 와중에도 이명박 정부가 대규모 감세정책을 편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복지 확충을 공약으로 내걸면서도 증세를 통해 복지재정을 늘리는 데는 미온적이다.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비과세·감면 축소를 통해 재원 확충을 하겠다는 얘기는 역대 정부가 매번 해온 것으로, 의미 있는 수준의 복지재정 확충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한국의 보수파가 최소한 미국 공화당이 이번에 변한 만큼만이라도 변했으면 한다.
< 한겨레신문 박현 워싱턴 특파원 >


[창간 7주년에 드리는 인사말씀]

“최고이기 보다 최선을 다하며 겨레의 혼 투영하는 균형잡힌 정보의 창, 
진실과 정성을 담아 가슴을 채우는 독자들께 인정받는 명품전통을 향해”

‘독재자의 딸’과 ‘민권변호사’의 백중 대결로 세계인의 주목을 끈 한국대선 이후 이른바 ‘멘붕(멘탈붕괴)’ 등 후유증이 번졌습니다. 가장 눈길을 모은 안타까운 현상은 SNS(사회관계망 서비스)를 달군 ‘국민방송을 만들자’는 서명과 50억 모금 운동입니다. 포털사이트에 한 시민이 제안한 ‘공정 보도를 위한 방송사 설립 청원운동’이 단 이틀 만에 5만 명의 동참자가 생겼고, 이후 계속 불어나고 있습니다. 
이 청원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공정한 방송사가 없는 것 같다. 공영기관이며 국민의 눈과 귀가 되었던 방송사들의 편향된 보도들은 국민들이 바른 판단과 합리적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수단일 뿐….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을 주축으로 국민들이 만들어준 한겨레신문 같은 우리의 방송국을 세워보자” 
지난해 총선에 이어 대통령선거를 겪으며, 모든 방송과 다수 신문이 특정 당과 후보의 홍보 기관처럼 전락해버린 언론현실에 분노했던 시민들의 참 언론 여망이 분출한 것입니다. 
비단 정치·사회만이 아니었습니다. 종교 쪽을 보면, 일례로 교계 신망을 떨어뜨린 단체와 유력 목회자들의 일탈을 외면하고 비호까지 한 언론이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직과 공의를 솔선수범해야 할 성직자들의 부조리를 지적하기는 커녕 아예 눈감은 일부 언론도 ‘사이비’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론이라는 창문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창이 작으면 세상이 작게 보이고, 창 유리가 흐리면 흐릿한 세상을 봅니다. 색유리가 끼워져 있으면 모두가 그 색깔로 보입니다. 대명천지 넓은 세상을 작고 흐릿하고 색유리가 끼워진 창으로만 보고 있다면, 그야말로 눈 뜬 장님 신세지요. 한정된 정보만 접할 수 있는 감옥살이나 다름없습니다. 창이 편협하고 비뚤어졌는데, 그 조망이 세상의 전체요 참 모습인 줄 알고 사는 것은 참 우매하고 불행한 일 입니다. 
횃불처럼 사회를 밝히는 곧고 바른 펜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창이 있는가 하면, 비수로 변해 찌르고 할퀴는 일그러진 창도 있습니다. 그래서 멋진 창을 설계할 철학이 필요하고, 냉철한 지성과 판단력이 요구되고, 따뜻한 가슴, 정직한 심장을 지녀야 한다고 말들 합니다. 언론과 언론인의 필수 덕목들을 가르쳐 줍니다.
이민사회라고 뭐가 다르겠습니까. 맑고 깨끗하고 넓고 큰 창이 있어야 합니다. 기울고 비뚤어진 우물안 개구리 같은 창틀이 아니라, 바깥의 넓고 푸른 세상을 바르고 생생하게 보여주는 ‘진실의 창’ 말입니다. 
우리 한인들은 특히 주류사회 동화가 더딘 반면 모국 지향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바른 언로(言路)의 창은 더욱, 또 갈수록 절실하다고 믿습니다. 지구촌 위상에 걸맞는 정체성, 그리고 다민족 복합문화에서 자존을 세우는데 바탕이 될 겨레의 혼을 투영하는 창, 폭넓은 사고로 공동 선(善)의 구현을 뒷받침할 균형잡힌 정보의 창이 요청되는 이유입니다. 
주변에서 자칭 최정상의 정론지이고, ‘최다·최대’ 라며 독자들을 유혹하는 ‘허세의 창’도 많이 접합니다. ‘최고의 창’을 향한 선의의 발로라면 탓할 일도 아니겠지만, 차분히 선별의 지혜로 따져보면 금세 허실이 드러날터이니 외화내빈이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어느 덧 칠년 째, ‘겨레의 창, 정보의 샘’을 향해 땀을 쏟아 온 지면들을 돌아보며 시사 한겨레는 과연 최고를 향해 달려왔는지 스스로 물어봅니다. 독자 분들을 작은 창틀에 머물게 하지는 않았는지, 동포들의 눈과 가슴을 채워 줄, 맑고 곧고 선한 창으로 소임을 다해 왔는지-, 
부족하고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꿈과 현실의 벽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많은 독자와 광고주와 동포들의 뜨거운 성원은 저희의 큰 빚이며 자산이고 새 힘과 용기입니다. 
그래서 7주년을 맞는 이 아침, 다시 묵묵히 나아가기를 다짐합니다. 
최고를 내세우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 정성과 영혼을 담아 낸 명품의 창으로 독자들께 인정받는 시사 한겨레 전통을 만들어가자!…. 그렇습니다. 더욱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 독자여러분 사랑,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분께 새해 평강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 김종천 (金鍾天) - 발행인 겸 편집인 >


[1500자 칼럼] 새해, 새아침, 새날에…

● 칼럼 2013. 1. 4. 19:25 Posted by SisaHan
사람들은 한 해가 갈 때면 더욱 밝아진 거리에 흐르는 노래소리를 들으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왠지 기쁜 일이 있을 것 같고 아이들은 선물을 받을 것 같아. 크리스마스만 지나면 탄생의 의미를 전하던 거룩한 노래는 귓전에 맴돌아도 플라스틱 나무 위에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다. 나무 위에 매달린 꼬마전구들도 눈을 뜨기보다 감고 있다.
언제나 겨울은 춥고 길지만, 우리가 피부로 느끼기 시작할 때, 새해가 온다. 날마다 아침이 옴은 축복이지만, 우리가 또 아침을 맞이하기도 지쳤을 때 새해가 온다. 다시 새날을 맞이하라고…
사람들은 한해의 끝무리에서 그리고 시작하는 마당에서 흔히들 말하곤 한다. 지난 한해는 다사다난했다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부지런히 걷다가 이맘 때 쯤이면 멈추어 서서 돌아보며 말한다. 참 사건도 많았고 큰일도 많았지만 무사히 또 한해를 보냈다고. 이제 지난 한해를 뒤로 두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해야 한다고, 그리고 새해는 반드시 지난해보다 나아야 한다고. 아무도 내일의 일을, 내년의 일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지난 해보다 나으리라고, 나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뜻깊은 희망과 소망의 계절에 ‘시사 한겨레’가 창간을 한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개인에게 있어 이민생활이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민지에 있어 한국어로 신문을 발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리라. 그동안 수많은 신문들, 주간지들이 탄생했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소멸해갔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7년 동안 끊이없이 시사지로 자리매김을 하고 성장해온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민사회에서 신문의 역할이란 때로는 정보제공이나 오락을 떠나 너무 많은 그리고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포사회의 방향제시,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독자가 읽고 싶은 글만 아니라 읽어야 하는 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7년 동안 꾸준히 한 걸음을 걸어온 시사 한겨레의 창간 7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인사를 주고 받는다. 여기서야 누구나, ”Happy New Year!”라고 같은 말을 주고 받는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 말이 시대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오래 전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누구나 말하곤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말은 지금도 계속 쓰이고 있다. 이 말이 좀 애매모호하기도 하지만 한국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사람들은 “부자 되세요.”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당시는 아마 이것이 한국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었을까? 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었을까? 사실 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가치 기준이 경제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아….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던 한국사회에서 이제 이 말은 욕이 될지도 모른다.
 
“대박나세요.” 영화나 출판 업계에서 자주 하는 말인데, 뭐든지 싹쓸이 하여 혼자 다 차지하라는 말처럼 들려 나는 왠지 씁쓸하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이 제일 좋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날마다 새벽이 옴은 축복이듯 지난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옴은 축복이다. 새해가 온다고 무엇 크게 달라질 것 없지만, 새해, 새 아침에는 내일보다 새 날이 왔으면 좋겠다. 어제, 오늘의 꼬리를 물고 그림자로 따라오는, 벽에 걸린 달력의 숫자가 아닌, 세상 고통 물러가고 오는 새날이 아닌, 피해가던 세상 고통 껴안는 날. 내가 먼저 바뀌어 오는 새 날. 새날은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하는 것 아닐까요?
동포 여러분 새해에는 ,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