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옛 대공분실서 6.10항쟁 33주년 기념식 열려

문 대통령 가정·직장·경제서 삶 속에 스며드는 민주주의를

 

10일 정부가 서울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6·10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에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를 포함한 12명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사진은 6·10 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자들. (윗줄 왼쪽부터) 고 이소선, 고 박형규, 고 조영래, 고 지학순, 고 조철현, 고 박정기, (아랫줄 왼쪽부터) 배은심, 고 성유보, 고 김진균, 고 김찬국, 고 권종대, 고 황인철. 행정안전부 제공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0일 열린 6·10 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에서는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구심이었던 종교계·학계·시민사회 인사들에게도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됐다. 훈장은 고인이 된 이들을 대신해 가족들이 받았다.

박형규 목사는 군사독재에 맞선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평가된다. 교회 갱신 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2016년 타계했다.

조영래 변호사는 1986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변론하며 국가 권력의 야만성을 폭로했고 한강물 역류로 수해를 입은 서울 망원동 주민 2400가구를 대리해 손해배상을 받아내는 등 약자 변론에 앞장섰다. <전태일 평전>을 썼다.

지학순 주교는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구국선언 등을 주도했다. 1974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문을 발표해 구속됐고, 이 사건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결성의 기폭제가 됐다. 1993년 타계했다.

10일 정부가 서울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6·10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에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를 포함한 12명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사진은 6·10 민주항쟁 33주년 기념식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자들. (윗줄 왼쪽부터) 고 이소선, 고 박형규, 고 조영래, 고 지학순, 고 조철현, 고 박정기, (아랫줄 왼쪽부터) 배은심, 고 성유보, 고 김진균, 고 김찬국, 고 권종대, 고 황인철.

조비오 신부는 1980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수습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맞서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9년 열린 5·18 진상규명 국회 청문회에 나와 신군부의 학살 행위를 증언했으며, 2016년 타계했다.

성유보 전 <한겨레> 편집위원장은 1974<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언론 자유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사무국장 등을 거쳐 1988<한겨레> 창간에 참여해 편집위원장 등을 지냈다. 2014년 별세했다.

김진균 전 서울대 교수는 진보사회과학계의 거목으로 1980년 서울대에서 강제 해직된 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의장 등을 지내며 한국의 민주화와 진보적 개혁을 위해 힘쓰다 2004년 세상을 떠났다.

김찬국 전 상지대 총장은 진보적 신학자로 민주화운동을 펼치다 1972년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돼 옥고를 치렀다. 강제 해직 뒤 재야운동에 헌신했으며, 복직해 연세대 부총장과 상지대 총장을 역임했다. 2009년 별세했다.

권종대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농민운동에서 시작해 통일운동까지 헌신했다. 1978년 가톨릭농민회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한 뒤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을 결성해 초대 의장 등을 지냈고 2004년 별세했다.

황인철 변호사는 1975년 민청학련 사건을 시작으로 1979년 김재규 사건, 1989년 임수경 방북 사건 등 시국사건 때마다 약자 편에 서서 변론을 했다. 이돈명·조준희·홍성우와 함께 인권 변호사 4인방으로 불렸으며, 1993년 타계했다. < 송경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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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꿈 이어받아평생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부모들

올해 33돌을 맞은 6월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모란장이 수여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1929~2011)와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고 박정기(1928~2018),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80)씨는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우다 스러져간 자식들을 가슴에 묻고 평생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이들이다. 세 사람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중심으로 함께 활동하며 동지애를 키웠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20056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열린 제16회 민족민주열사 범국민 추모제에서 아들의 영정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소선 여사는 197011월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 준수 등 노동자 권리 보장을 외치며 분신해 숨지자, 아들이 꿈꾼 세상을 만드는 데 투신했다. 아들의 친구들과 함께 평화시장에서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설립한 게 시작이었다. 이씨는 1978~1979년 동일방직과 와이에이치(YH)무역 노동자 투쟁에 나섰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땐 진상규명 투쟁에도 나섰다.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민가협) 설립을 주도했고, 의문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1998~1999년 국회 앞에서 422일 동안 장기간 농성을 했고,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 등의 노동 현장도 계속 지켰다. 이런 활동들로 인해 4차례 옥고를 치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이소선 여사가 별세한 20119월 정부에 훈장 추서를 건의했으나 기각됐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개인 활동 업적보다는 전태일 열사 어머니로서의 의미가 더 크기에 다른 사람과 업적을 비교하기 곤란해 훈장을 추서하지 않기로 했다는 설명을 내놓았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가 1990822일 서울 홍제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에서 아들의 고문치사 및 범인 은폐조작 사건에 연루된 피고인들에 대한 무죄판결에 항의하다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고 박정기씨는 19871월 막내아들 박종철 열사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숨지자 6월 민주항쟁의 선봉에 서게 됐다. 1988년과 1998년 장기 농성을 통해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 제정을 이끌었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치사사건 때는 법정소란죄로 석달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20183월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은 박정기씨를 찾아 사과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 피해자에게 사과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넉달 뒤 그는 고인이 되었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최루탄부상자전국연합 의장으로 활동하던 1989510일 국회 앞에서 최루탄 사용 금지를 위해 여야가 노력할 것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876월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어머니 배은심씨는 한열이의 이름으로유가협과 함께 전국의 시위 현장을 찾아다니며 정권 차원의 사과와 인권보호 대책 마련에 목소리를 높였다. 군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자리, 용산참사 피해자들의 가족들이 슬퍼하는 자리엔 어김없이 찾아가 함께 눈물을 흘렸다. 배씨는 이날 기념식에서 서른세번째 610일에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며 다시는 민주주의를 위해 삶을 희생하고 고통받는 가족들이 생기지 않는 나라가 됐으면 한다고 간절한 소망을 표현했다. < 성연철 송경화 기자 >

남영동 그곳에서문재인 대통령 일상 민주주의 이루자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그곳에 붉은 꽃이 걸렸다. ‘살인기계’ ‘고문공장으로 불렸던 곳. 김근태와 박종철 등 숱한 민주 인사들의 몸과 영혼을 파괴한 곳. 꽃은 33년 전 박종철이 물고문 끝에 숨진 509호 조사실, 고문받는 자들의 투신을 막으려고 검은 벽돌 외벽에 좁고 길게 낸 창문 위에 붉게 피었다. 그 꽃 아래서 대통령은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하자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에서 열린 33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민주주의는 제도를 넘어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포용과 상생, 연대와 협력으로 민주주의를 우리 삶에 스며들게 하자고 말했다. 행사가 열린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는 과거 치안본부 대공분실 자리다. 문 대통령은 2년 전 기념사에서 이곳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6월 항쟁으로 세운 민주주의가 촛불 혁명과 코로나19 극복을 이끌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시민과 노동자 등 6월 항쟁의 주인공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되어 가정의 민주주의를 뿌리내렸다는 평가였다. 그러면서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 촛불을 들었고, 코로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연대와 협력의 민주주의를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이날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일상의 민주주의였다. 그는 민주주의는 제도를 넘어 우리 삶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가정과 직장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다라고 말했다. 지난달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때도 정치, 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넘어 가정, 직장, 경제에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지속가능 사회를 향한 상생과 협력의 중요성도 거듭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마음껏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있지만 남의 몫을 빼앗을 자유는 갖고 있지 않다지속가능하고 평등한 경제가 우리가 지향할 실질적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전날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반드시 깨겠다고 말한 것의 연장이다.

코로나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협력과 통합의 중요성도 역설했다. 문 대통령은 갈등과 합의는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갈등 속에서 상생의 방법을 찾고 불편함 속에서 편함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반도 평화에 관해서는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민주주의로 이뤄야 한다고 간략히 언급했다. 최근 북한이 남한과의 연락선을 끊은 데 대한 곤혹스러움이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이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 조영래 변호사, 지학순 주교 등 민주화 운동 유공자 12명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청와대는 민주화 공로를 독립과 호국과 동등한 차원에서 예우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철 열사 숨진 509호실 창문에 붉은 꽃문 대통령 기적 같다

배은심씨 ‘33번째 6·10에 보내는 편지낭독 경찰청장 국가폭력사과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아 숨진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 외벽에 꽃이 달려 있다.

10일 제33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이 열린 서울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 마당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단체 대표와 유공자 등이 자리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서울광장에서 열린 기념식 이후 3년 만에 행사에 다시 나왔다. 오랫동안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린 이곳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6년 건축계 거장 김수근의 설계로 탄생했다. 애초 5층이던 건물은 1983년 전두환 정권 때 7층으로 증축됐다. 이곳에서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22일 동안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다. 1987114일에는 서울대생 박종철씨가 509호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2년 전 이곳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문 대통령은 기적 같다는 소회를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 불행한 공간을 민주주의의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것은 마치 마술 같은 위대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엄혹한 시절을 이겨내고 끝내 어둠의 공간을 희망과 미래의 공간으로 바꿔낸 우리 국민과 민주 인사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날 훈장을 받은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는 세상을 떠난 이소선 여사와 박정기씨에게 ‘33번째 610일에 보내는 편지를 낭독해 참석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그는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이 옆에 가 계시고, 종철 아버지도 아들하고 같이 있어서 나 혼자 오늘 이렇게 훈장을 받습니다. 나 혼자 이래도 되는 건가 싶네요. 종철이 아버지도 이런 날 보고 거서 뭐 하고 있는 거요라고 하실 거 같아요라고 했다.

기념식을 마친 문 대통령은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박종철 열사가 숨진 509호 조사실을 찾아 헌화하고 묵념했다. 문 대통령은 조사실에 설치된 고문용 욕조를 보며 “(보는 순간) 공포감이 온다. 철저한 고립감 속에서 (저항 의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했다. 김 여사는 6월 항쟁 당시 시민들이 거리에서 건넸던 장미와 카네이션, 안개꽃, 손수건을 박종철 열사 영정에 올렸다. 행사에는 민갑룡 경찰청장도 참석했다.

병상의 백기완 다시 일어나라는 역사의 함성

유월항쟁은 이 참도 내 가슴 속에 불타오르네-백기완

올들어 5개월째 서울대병원에 입원중인 백기완 선생.

6월항쟁을 이끌었던 투사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0일 서울대병원 병상에서 ‘6월항쟁 33돌 기념 말씀을 친필로 써보냈다. ‘유월항쟁은 이제 다시 일어나라는 역사의 함성’, ‘유월항쟁은 이 참도 내 가슴 속에 불타오르네’, 두 개의 글이다.

지난해 심혈관 수술에서 회복해 잠시 대외 활동을 했던 백 소장은 지난 1월말 폐렴 증상으로 입원한 이래 지금껏 투병중이다. 통일문제연구소의 채원희씨는 젊은 시절 폐결핵을 앓은 적이 있으신데 지난해 수술 후유증으로 체력이 약화되자 재활성화해서 중환자실도 몇차례 오갈 정도로 위험한 고비를 겪고 있다고 전했다. 백 소장은 19875월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으로 문익환 목사와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해 호헌철폐 투쟁을 비롯 6·10 시민 항쟁의 선봉에서 싸웠다. < 김경애 기자 >


 


마지막까지 길원옥 할머니 걱정 식사 잘하십니다

정의연 이사장 손 소장 문자공개에 참여 시민 등 곳곳 울음 터져나와

참담하고 비통, 지키지 못해 죄송 위안부운동 폄훼에 끝까지 맞설것

 

이사장님, 수고가 많으셔서 어쩌나요? 할머니 식사 잘하시고 잘 계십니다.”

문자메시지를 읽어내려가는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쉼터를 16년 동안 지켜온 고 손영미(60) ‘평화의 우리집소장의 장례가 마무리된 10, 수요시위에 선 이나영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이사장은 손 소장이 보낸 마지막 문자메시지 내용을 공개했다. 마지막 메시지에서도 손 소장이 쉼터의 마지막 생존자인 길원옥(92) 할머니와 정의연 활동가들을 걱정했다는 사실을 전하자 시위 현장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이날 아침 정의연 활동가들은 손 소장의 발인 절차를 엄수하고 수요시위 현장으로 향했다. 이날 수요시위는 손 소장을 추모하는 자리로 진행됐다. 12시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모인 100여명의 시민들은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손 소장을 기렸다.

장례의 상주를 맡은 이 이사장은 발언에 나서 당신을 잃은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며 벼락같은 비보와 가족을 잃은 아픔 속에서도 오히려 저희를 위로하며 함께해주신 유가족 여러분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그러면서 검찰과 언론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이 이사장은 고인의 죽음 뒤에도 각종 예단과 억측, 무분별한 의혹 제기, 책임 전가와 신상털이, 유가족과 활동가들에 대한 무분별한 접근과 불법촬영까지 언론의 여전한 취재 행태가 이어지고 있다참담하고 비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수요시위의 주관을 맡은 한국여신학자협의회의 이은선 실행위원은 “30년 동안 수요시위를 이어왔지만, 그 어느 날보다 비통하고 엄중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지난 한 달 동안 갖가지 왜곡과 거짓, 폭력이 수요시위와 정의연의 활동을 왜곡, 폄하, 비방하던 와중에 위안부 운동의 토대인 할머니들을 보살피고 온갖 뒷바라지를 하신 손 소장을 잃은 날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공동 설립자 중 한명인 김혜원 정의연 고문도 시위에 참여해 “1992년 처음 수요시위를 감행했을 때 정부는 부정적 눈초리로 봤고 시민들은 싸늘했다. 용기를 다해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그 외로운 싸움이 여성 인권과 세계 평화를 주장하는 운동의 중심이 됐다고 했다. 김 고문은 이 공든 탑을 무너뜨리려는 불순한 반대 세력이 우리를 집요하게 공격한다. 결코 물러서지 않고 일본이 할머니에게 사죄하고, 전쟁범죄를 사죄하는 그날까지 씩씩하게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수요시위가 시작되자 시위대를 둘러싼 보수단체들은 확성기로 소음을 내며 시위를 방해했다. 경찰이 충돌을 막기 위해 보수단체들을 둘러싸고 소리를 줄일 것을 요구했지만, 이들은 왜 우리만 가둬놓느냐. 시위 신고를 했다. 우리도 집회·시위의 자유가 있다며 항의했다. 양쪽에서 들리는 소음에도 수요시위 참가자들은 내내 엄숙한 분위기에서 손 소장을 추모했다. < 채윤태 기자 >

 

 


지시대로 증거인멸한 삼성 임직원 사안 중대하다구속 수감

오너 치부 충분한 심리와 공방 필요감춰준 직원은 회사에서 축출

        

202069일 새벽 2.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불구속 재판의 원칙에 반하여 피의자들을 구속할 필요성 및 상당성에 관해 소명이 부족하다.” 1시간쯤 지난 새벽 3시께 이 부회장의 변호인 일동은 입장문을 냈다. “법원의 기각 사유는 기본적 사실관계 외에 피의자들의 책임 유무 등 범죄 혐의가 소명되지 않았고, 구속 필요성도 없다는 취지입니다.” ‘대법관 0순위’, ‘전설의 특수통등 최고의 법률가들이 모여 호화롭다는 말도 부족한 변호인단이 내놓은 해석이라 그런지 은근한 권위가 묻어났다. 이 부회장 영장이 기각되면서 서초동에서는 천문학적인 돈벼락이 쏟아졌다는 소문이 돈다. 재벌과 검찰·법원 전관이 연합팀으로 참전한 건곤일척의 승부가 이렇게 끝났다.

201958일 밤 1150.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의 직원이 구속됐다. 법원은 범죄 사실 중 상당 부분 혐의가 소명되고 사안이 중대하며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있다고 했다. 보안 업무를 담당했던 이 직원은 삼성바이오의 공장 마룻바닥을 뜯어 회사 공용 서버와 직원 노트북 수십대를 숨긴 죄로 구속됐다. 이에 앞서 삼성바이오에피스(에피스)의 상무와 부장은 직원들의 노트북에서 이 부회장을 지칭하는 ‘JY’합병’, ‘미전실이라는 낱말이 들어간 문건들을 삭제하도록 해서 역시 구속됐다.

이들 삼성바이오·에피스 임직원은 죗값을 치른 뒤에 감사 대상이 됐고 직급이 강등되거나 회사를 떠나야 했다. 반면, 증거인멸을 주도해 구속됐던 삼성전자 사업지원티에프 상무는 집행유예로 풀려나 다시 계열사 경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 사정을 잘 아는 업계 관계자는 에피스의 그 직원들은 누구보다 창설 단계에서 회사에 기여한 개국공신들인데, 시킨 일을 실행한 것 때문에 갑자기 모든 책임이 전가되고 회사가 의도적으로 문제 인력으로 낙인찍는 게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오너의 치부에 대해선 재판에서 충분한 심리와 공방이 필요하지만, 그 치부를 숨긴 죄는 중대하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증거인멸을 주도했던 사업지원티에프 상무가 슬그머니 현업으로 복귀한 일에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은 준법감시위원회에 나와 부끄럽고 참담하다고 했다. 며칠 뒤 이 부회장의 초호화 변호인단은 승계 작업이 없었고, 있었더라도 별일이 아니라고 했다. 승계 작업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닌지 묻기에 앞서, 직원들이 왜 ‘JY·미전실·합병이란 낱말을 삭제해야 했는지, 삼성은 그들의 삶을 어떻게 보상할 건지 궁금하다. 부끄러움과 참담함의 주어도 명확히 했으면 좋겠다. < 임재우 기자 >

[칼럼] ‘이재용의 시간이 말하는 것

경상남도 의령 태생 이병철이 마산에 협동정미소간판을 내건 때가 1936, 나이 스물여섯 되던 해다. 22녀의 막내아들에게 부모는 사업 종잣돈으로 토지 6만평을 대줬다. 2년 뒤엔 청과물과 건어물을 중국에 내다 파는 삼성상회가 대구에서 문을 열었다. 삼성이란 이름의 대하드라마가 시작된 순간이다.

동북아시아 질서를 뒤흔든 중일전쟁(1937) 전후의 격변기 세상은 1910년생 청년 사업가 이병철의 더듬이를 건드린 자극제였다. 한국 경제에 한 획을 그은 기업들의 역사가 유독 이 시기 비슷한 또래 인물에게서 시작된 건 우연이 아니다. 경남 함안의 조홍제(1906년생·효성), 경남 진양의 구인회(1907년생·LG), 강원도 통천의 정주영(1915년생·현대)이 대표적이다. 두산그룹의 씨앗을 뿌린 박승직상점의 박승직(1864년생)이나 전라북도 고창 대지주의 아들로 경성방직을 세운 김성수(1891년생연수(1896년생) 형제 정도가 조금 앞선 세대다.

이병철로 상징되는 창업자 세대의 행보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다른 나라, 특히 서구의 후발 산업화 국가의 경험과는 조금 다른 공통된 궤적을 발견할 수 있어서다. 단순화하자면 기술보다는 영업, 제조(콘텐츠)보다는 장사(마케팅)에 좀 더 무게가 실린 행보다. 우리나라 대표기업들의 원시적 축적 과정은 말하자면 기술자본주의(발명가·개발자)가 아니라 상인자본주의(장돌뱅이)에 가깝다. 합리성과 규범은 애초부터 들어서기 어려웠다. 그 빈자리는 인맥과 수완, 변칙과 같은 비시장적 요소가 채웠다. 장사로 불어난 돈은 그제야 기술 투자와 제조업 진출의 밑거름이 됐고, 군사정권의 개발독재 시기를 거치며 기업은 날개 단 듯 무한 팽창했다. 하지만 창업자 세대에 뿌리내린 한국식 자본주의의 원형은 마치 문신과도 같이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우리 경제에 새겨져 있다.

검찰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상대로 청구한 구속영장이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서 기각됐다. 적용된 혐의는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및 시세조종, 외부감사법 위반 등이다. 구속영장은 일단 기각됐으나 불법행위에 면죄부가 내려진 건 아니다. 법원은 두 회사의 불공정 합병,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등 기본적 사실관계는 모두 인정했다.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에 처음 몸담은 건 나이 스물셋 때. 눈여겨봐야 할 건 아버지를 회장으로 둔 회사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는 시샘 어린 시선이 아니다. 그의 시대는 창업자 할아버지 때와도 회장 아버지 때와도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외환위기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우리 사회는 법과 원칙, 시장 규범을 지키고 따르는 행동만이 기업과 국가 경제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깨달음에 다다르고 있었다. 부정거래와 분식회계는 시장 규범을 무너뜨리고 시장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다. 이 부회장과 삼성은 새로운 토양에서 옛 씨앗을 버젓이 싹틔운 셈이다.

정미소(협동정미소)와 자동차(삼성자동차), 기술벤처(e삼성). 이병철과 이건희, 이재용으로 이어진 삼성 3세대가 본인의 판단으로 가장 먼저 뛰어든 사업 분야다. 이 부회장이 보여준 퇴행적 행태는 삼성을 둘러싼 세상은 천지개벽하듯 변했으되, 여전히 낡은 울타리 안에서 숨 쉬는 무리들의 몸부림이다. 우리 모두가 발 딛고 선 건강한 시장과 사회를 무참히 파괴하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2014년 이후 삼성을 이끌어온 총수이 부회장의 6년 세월이 불법 승계를 위한 고뇌와 준비의 나날이었다는 사실은 허탈하기 그지없다. 나라 잃은 세상에 살던 할아버지는 기업을 일으켜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힘을 보탰고 지구촌 변방의 사업가 아버지는 우리 기업을 글로벌 무대의 중심으로 올려 세웠다 치자. 21세기 최첨단 세상을 사는 최고경영자 아들이 가장 기초적인 시장 규범조차 짓밟아버리는 기괴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로지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제가 그 역할을 수행할 때 삼성은 계속 삼성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달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이 부회장은 말했다. 창업자 세대부터 질기게도 이어져온 한국식 자본주의의 악습의 고리를 끊어내고 문신을 지워낼 적임자이자 책임자가 아니라, 외려 상징이자 계승자임을, ‘이재용의 시간은 스스로 증명한 게 아닐까.

< 최우성 한겨레신문 산업부장 >

민갑룡 경찰청장이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 한열 동산에서 열린 고 이한열 열사 33주기 추모식에 참석해 행사 시작 전 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에게 인사하고 있다.

        

민갑룡 청장 9일 연세대 추모식 참석해 참회합니다

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씨에경찰 수장의 사과는 처음

             

너무 늦었습니다. 참회합니다.”

민갑룡 경찰청장이 9일 이한열 열사 33주기를 맞아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에게 사과했다. 경찰청장이 이 열사의 유가족을 직접 만나 사과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민 청장은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신촌캠퍼스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33주기 추모식에 참석했다. 정복 차림으로 추모식을 찾은 민 청장은 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에게 다가가 너무 늦었습니다. 저희도 참회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민 청장은 저희가 죄스러움을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마음을 풀어주시니 저희가 마음 깊이 새기고 더 성찰하면서 더 좋은 경찰이 되겠다고 말했다. 연세대 학생이었던 이 열사는 198769일 민주화시위 중 경찰이 직사한 최루탄을 머리에 맞아 숨져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앞서 이철성 전 경찰청장이 2017616일 경찰개혁위원회 발족식 자리에서 2015년 민중총궐기 집회 중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숨진 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다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를 언급하며 사과한 적이 있다. 이 전 청장은 당시 그간 민주화 과정에서 경찰에 의해 유명을 달리하신 박종철 님, 이한열 님 등 희생자분들과 특히 2015년 민중총궐기집회시위 과정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고 백남기 농민과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와 함께 진심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 열사 추모식은 사단법인 이한열기념사업회 주관으로 해마다 69일 열려왔다. 지난해부터는 연세대 공식 행사로 치러지고 있다. < 오연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