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기 굴곡된 삶, 창씨명 백천의칙윤봉길이 죽인 일본대장 같아

간도특설대 대게릴라전 한국인 토벌비난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생각

        

10일 타계한 한국전쟁의 영웅백선엽은 일제 시기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단죄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가 간도특설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지금껏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공백은 최근까지 학계에서 백선엽의 창씨명을 특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납니다.(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2009년 보고서에도 그의 창씨명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던 백선엽의 창씨명이 밝혀진 것은 <한겨레> 대기자를 지낸 김효순이 2014년 저서 <간도특설대>를 펴낸 뒤였습니다. 이 책에서 김효순은 백선엽의 상사였던 옌지 헌병분단장 소네하라 미노루의 회고록을 인용해 그의 창씨명이 백천의칙(白川義則)이었다고 밝혀냅니다.

백천의칙을 일본어 이름을 읽는 관행대로 읽으면,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됩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아닌가요?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19324월 상하이 훙커우(홍구, 지금은 루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맞아 죽은 상하이파견군 사령관입니다. 둘의 이름이 한자까지 똑같이 일치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 순 없습니다.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무언가 깊은 곡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1920년에 태어나 평양사범학교를 나온 영명한백선엽이 당시 동아시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윤봉길의 의거와 그 희생자의 이름을 몰랐을 리 만무합니다. 백선엽이 왜 자신의 이름을 백천의칙으로 바꿨는지 너무 궁금하지만, 100살의 나이로 숨지는 순간까지 백선엽은 자신의 창씨명은 물론, 창씨명을 그렇게 정한 이유에 대해 철저히 침묵을 지켰습니다.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의해 숨졌다. 관동군 사령관, 육군 대신 등을 역임했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백선엽은 이듬해 만주국 장교가 될 수 있는 만주 펑톈군관학교에 입교합니다. 당시 똑똑한 조선인 청년에게 일본군 혹은 만주국 장교가 된다는 것은 신분상승을 의미했습니다. 박정희는 신징군관학교 입교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겠다는 편지까지 썼습니다. 박정희도, 그보다 세살 어렸던 백선엽도 매우 출세지향적 인물이었던 셈입니다.

1941122년제인 펑톈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42년 만주국군 보병 제28단에서 견습사관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이후 1942년부터 19431월까지 만주 북부의 자무스에서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하다 19432월 만주 간도성에 있던 항일독립군 탄압부대인 간도특설대에 배치됐습니다.

백선엽은 이후 여러 회고록에서 간도특설대 시절 생활에 대해 짧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조선인(본문에선 한국인)으로 여러 민족적 모순을 느끼면서도,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던 젊은 시절 백선엽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느낄 수 있습니다.


펑톈 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42년 봄 임관하여 자무스 부대에서 1년간 복무한 뒤 간도특설대의 한인부대에 전출, 3년을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그동안 만리장성 부근 열하성과 베이징 부근에서 팔로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간도특설부대에는 김백일, 송석하, 김석범, 신현준, 이용, 임충식, 윤충근, 박창암 등과 함께 근무했다.

나는 4589일 소-만 국경을 돌파해서 만주의 중심부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만나 무장해제를 당했다.<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1989)

 

간도성 옌지현에 있던 간도특설대는 조래의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1938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 일부가 일계 군관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다.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동북항일연군 등 항일무장독립세력)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 임부는 잠임, 파괴공작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중략)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김일성이 포함된 동북항일연군은 19409~11월 사이 관동군과 만주군의 토벌 작전에 못 이겨 고난의 행군을 거쳐 소련 영토로 피신했다-편집자 주)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항상 대서 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 특설대였다.<젊은 장군의 조선전쟁, 백선엽 회고록>(2000, 일본어판)

 

19393월에 촬영한 간도특설대 간부 사진.


(간도특설대는)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던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대 게릴라전-미국은 왜 패배했는가>(1993, 일본어판)


일부 시민단체에서 백선엽은 대한민국 국립현충원이 아닌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능한 일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불가능합니다.

야스쿠니신사는 1868~1869년 보신전쟁 이후 일본 내외의 여러 전쟁에서 일왕을 위해 숨진 이들을 모시기 위해 만든 신사입니다.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일왕의 이름으로 수행된 여러 전쟁에서 숨진 이들이 합사돼 있습니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이들은 2466000여명으로 이 가운데 21000여명이 조선인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백선엽은 자연사했으니 야스쿠니 신사의 합사 대상이 아닙니다. 재미 있는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순직한 자위대 대원들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가 어떤 성격의 신사인지 잘 보여줍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이 일왕의 이름으로 수행한 여러 침략 전쟁을 미화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이런 시설에 전후 순직한 자위대원들이 들어올 자리는 없습니다. < 길윤형 기자 >

민족문제연구소 '백선엽 현충원 안장 금지' 가처분 신청

13일 오후 대전 서구 대전지법 별관 2층 민사신청과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관계자가 "백선엽 장군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을 금지해 달라"는 취지의 가처분 신청서를 제출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는 고 백선엽 장군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을 금지해 달라는 취지의 가처분 신청을 준비했다고 13일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날 오후 대전지법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신청서에서 "수많은 독립군을 사살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현충원에 안장될 수 없다""헌법 전문에 규정된 3·1운동 정신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이어 "향후 친일행위자들의 묘가 (현충원에서) 이장되더라도 국민들이 느낀 정신적 고통은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며 "민족정기를 훼손하지 않도록 가처분 신청을 인용해달라"고 법원에 호소했다.

다만, 가처분 신청자 적격성 문제 때문에 실제 신청서 접수가 이뤄지지는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런 내용의 가처분을 신청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부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취지다. 대전지법 관계자는 "신청 당사자를 누구로 할지에 대한 부분 때문에 곧바로 문서가 받아들여지진 않았다"고 전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문서 보완을 마무리하는 대로 가처분 신청 절차를 밟을 방침이다.

백선엽 장군 안장식은 15일 오전 1130분 대전현충원에서 육군장으로 거행된다.

6·25 전쟁에 참전한 백 장군 현충원 안장 자격에 문제는 없다는 게 정부 입장이지만, 일각에선 그의 친일 행적을 이유로 현충원 안장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14일 오후 2시 대전지방보훈청 앞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광복회 대전충남지부·독립유공자유족회 대전지부 주관으로 백선엽 장군 대전현충원 안장 반대 기자회견이 진행된다.

안장식 당일인 15일 오전 10시에는 대전현충원 앞에서 시민대회가 예정돼 있다.

15일 육군장대전현충원 안장, 문 대통령 조화, 노영민 실장 조문

보수 쪽 “6·25 영웅 냉대하나친일파 이장 법안 두고도 대립할 듯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가운데)12일 오후 서훈 안보실장, 김유근 안보실 1차장, 김현종 안보실 2차장과 함께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씨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며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10일 밤 세상을 떠난 백선엽씨는 대한민국에 공을 세운 친일파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를 두고 우리 사회를 양분해놓았다. 백씨의 장지는 대전현충원으로 결정됐다. 다만 국회엔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파의 묘를 강제 이장하는 국립묘지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어, 법안 처리가 시도될 경우 극한 대립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육군은 백씨가 숨진 지 하루 만인 11일 자료를 내어 “‘6·25 전쟁영웅백선엽 장군이 10일 밤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영결식은 15일 오전 730분 서울아산병원에서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열리며, 안장식은 1130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육군장으로 거행한다고 밝혔다. 관심을 모았던 매장지는 동작동 서울국립현충원이 아닌 대전현충원으로 정해졌다. 유족은 부인 노인숙씨, 아들 남혁·남홍씨, 딸 남희·남순씨 등이고,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이다. 유족은 대전현충원도 대한민국이라며 만족한다고 밝혔다.

백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정치권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날 선 공방이 이어졌다.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11일 백씨를 진정한 국군의 아버지라 이르며 백 장군을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모시지 못한다면, 이게 나라인가라고 되물었다. 김은혜 통합당 대변인도 12일 정부가 대전현충원에 안장하겠고 발표한 데 대해 영웅의 마지막 쉴 자리조차 정쟁으로 몰아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종철 정의당 대변인은 백선엽씨는 일본이 조선독립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세운 간도특설대에 소속되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장본인이라며 현충원 안장 자체를 반대했다.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냈고, 노영민 비서실장과 서훈 안보실장, 김유근 안보실 1차장 등이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192011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난 백씨는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에서 특이한 삶의 궤적을 남겼다. 1940년 만주 봉천군관학교 9기로 입교한 백씨는 이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에서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의 장교가 되어 독립군을 무력으로 탄압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행적을 문제 삼아 2009년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단죄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 뒤인 19506월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해 8월 국군 제1사단장으로 낙동강의 다부동 전투등에서 공을 세웠고, 10월 한·미 양국군을 합쳐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다. 새로 부임하는 주한미군 사령관은 최근까지 백씨를 찾아가 한-미 동맹의 상징으로 추어올렸고, 보수세력은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왔다. 백씨를 둘러싼 이런 인식 차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19458해방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찾으려는 세력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향한 이승만의 결단과 그 결과물인 19488건국에 두려는 세력 사이의 대립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씨는 생전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사죄나 유감 표명을 한 적이 없다. 1993년 일본에서 펴낸 자서전에서 간도특설대 경력에 대해 한국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책략에 그대로 끼인 모양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논란은 백씨의 사후에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친일파 파묘등의 내용을 담은 국립묘지법 개정안 처리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 길윤형 기자 >

       

군인권센터 친일 백선엽현충원 안장 철회해야

백선엽 갈 곳은 현충원 아닌 야스쿠니정의당도 거들어

             

1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장군 빈소에서 조문객들이 추모하고 있다.

광복 전 간도특설대로 독립군을 토벌하는 등 친일 행적이 있는 고 백선엽 육군 예비역 대장의 국립현충원 안장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한국군 최초 4성 장군에 올랐던 고인은 10일 밤 11시께 세상을 떠났다.

군인권센터는 12일 논평을 내어 백 장군의 현충원 안장 등 의전을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센터는 한국 독립을 꿈꾸는 세력을 절멸시키는 것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길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이 조선인 일본군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전쟁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숱한 세월이 지나도록 친일 행적에 대해 사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비판했다. 백 장군은 1943년부터 일제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중위로 복무한 바 있다. 간도특설대는 친일 활동 중에서도 중대한 반민족 행위로 꼽힌다.

이를 두고 센터는 대한민국 정부와 군이 이런 사람을 현충원에 묻어 전 국민이 자손대대로 그를 추모하고 기억할 것을 강요한다. 일제 침략 전쟁이 평화로 가는 길이라 믿었던 백 씨가 갈 곳은 현충원이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다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육군참모총장에겐 육군장을 중지하고 조기 게양을 중단할 것을, 국가보훈처엔 현충원 안장 계획을 백지화할 것을 촉구했다.

정의당도 현충원 안장에 반대하고 있다. 정의당 김종철 대변인은 앞서 논평을 통해 일부 공이 있다는 이유로 온 민족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일제의 주구가 되어 독립군을 토벌한 인사가 국립현충원에 안장된다면 과연 앞서가신 독립운동가들을 어떤 낯으로 볼 수 있나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이번 조치에 큰 유감이라고 덧붙였다. < 엄지원 기자 >


후지주택 혐한문서 야생동물표현 잡지 수록도

위안부, 독실있는 2층 가옥서 사치생활등 왜곡

오사카 법원, 제소 5년만에 허용한도 남어1228만원 배상판결

             

후지주택이 배포한 한국인 혐한 문서를 보고 직원이 적은 감상문의 일부분. “(한국은) 거짓말이 만연한 민족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헤이트하라스먼트(특정 집단 차별·괴롭힘) 재판을 지지하는 모임

            

일본의 부동산 대기업인 후지주택이 장기간 한국인은 거짓말이 만연한 민족” “자이니치(재일 한국·조선인) 죽어라같은 혐한내용이 담긴 문서를 사내에 배포하다 법원으로부터 배상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회사 쪽은 피해자에 대한 사과나 재발 방지책을 내놓기는커녕 사상의 자유에 큰 제약이 가해질 것이라는 논리를 펴며 항소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오사카지방재판소는 지난 2일 혐한 문서를 지속적으로 배포한 후지주택과 이마이 미쓰오 회장에 대해 사회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한도를 넘었다110만엔(1228만원)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이번 판결은 후지주택 직원인 재일 한국인 3세 여성이 소송을 제기한 지 5년 만에 나왔다. 이 여성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일본 이름을 쓰지 않고 한국 이름을 유지하고 있으며, 일본 남성과 결혼한 뒤에도 이름과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이 여성은 승소 뒤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재일’(재일 한국인·조선인)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일본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싸웠다자식에게 증오와 편견에 굴복해 침묵하는 미래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후지주택은 매출 11044400만엔(12419억원)에 이르는 규모 있는 회사로, 950여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이 회사는 20132월부터 20159월까지 2년 반 넘게 한국인 혐오 발언을 담은 문서를 전 직원에게 배포하고, 직원들에게 감상문을 제출하도록 해오다 이번 소송을 당했다. 이번 재판을 도왔던 일본 헤이트하라스먼트(특정 집단 차별·괴롭힘) 재판을 지지하는 모임에 따르면, 이런 문건이 다 합쳐 세 상자 분량이나 된다고 한다. 이 문서에는 자이니치 죽어라라는 극단적인 표현부터 한국인을 거짓말쟁이야생동물따위로 모욕하는 잡지나 인터넷 기사 등이 포함돼 있다. 역사를 왜곡하는 내용도 다수 포함됐다. “위안부들의 경우 독실이 있는 대규모 2층 가옥에서 숙박하고 생활했다생활이 사치스럽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회사는 문서를 읽은 뒤 직원들이 한국은 역시 거짓말을 해도 책임지지 않는 거짓말이 만연한 민족성을 갖고 있다고 써낸 감상문을 모아 다시 배포하기도 했다. 또 이 회사는 식민지배와 아시아 침략 전쟁을 미화한 중학교 교과서를 지지하는 설문조사에 나서라고 직원들에게 강요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를 지원한 변호인단은 최근 성명을 내어 후지주택과 이마이 회장이 이 판결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노동자들의 인격적 자율을 위협하는 행위를 중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후지주택 쪽은 판결 결과에 대한 회사의 견해라는 자료를 내어 이 판결 때문에 앞으로 회사가 직원들에게 무엇을 배포하면 안 되는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항소 뜻을 밝혔다. < 김소연 기자 >


한국전쟁 영웅추앙불구 간도특설대 친일 경력 평생 논란

 

6·25전쟁 때 주요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한국군 최초 4성 장군에 올랐던 백선엽 육군 예비역 대장이 10일 밤 11시께 타계했다. 향년 100.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1년 만주군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특히 1943년부터 간도특설대로 옮겨 사회주의 계열 민족 해방세력인 동북항일연군 세력 등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월남해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뒤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한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한다. 미군정 하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육군 정보국장으로 재직하며 남로당 토벌과 군내 좌경 인사 숙군 작업에 진력한다.

한국전쟁은 승승장구하던 그의 이력에 날개를 달아줬다. 패색이 짙던 경북 칠곡 다부동전투 전세를 가까스로 역전시킴으로써 이름을 알린 그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평양 점령의 선봉에 섰다. 1952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19534성 장군이 된 그는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1960년 예편했다. 퇴역 후 주중화민국(대만)대사, 주프랑스대사 등을 비롯해 교통부 장관·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등 외교관·기업인 등을 지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경력으로도 친일 활동 중에서도 중대한 반민족 행위로 꼽히는 간도특설대 경력을 덮을 순 없었다. 그는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명박 정부 시절 한국전쟁 60주년’(2010)을 맞아 그를 명예 육군 원수로 추대할 계획이 보도되자, 언론과 시민단체 학계가 그의 친일 경력을 문제 삼아 결국 무산됐다. ‘베트남전쟁의 영웅채명신 장군을 비롯해 일부 한국전쟁 참전 원로들의 반대 목소리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건강이 악화되면서 장지 문제가 논란이 되자 이를 계기로 국립묘지에 친일파를 안장시킬 수 없도록 하는 법 개정안이 추진될 만큼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친일 활동 인물로 꼽혀 왔다.

태극무공훈장(2),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미국 은성무공훈장, 캐나다 무공훈장 등을 비롯해 미국 코리아소사이어티 '2010 밴 플리트 상' 등을 받았다. <군과 나>(1989) <실록 지리산>(1992) <한국전쟁,,>(2000),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2010) <노병은 사라지지 않는다>(2012) 등 회고록을 비롯해 많은 저작을 남겼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 이주현 기자 >

 


 

    

재판부 피고인 나이 등 고려양측 재상고 안하면 확정

 

박근혜(68) 전 대통령이 10일 국정농단과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상납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모두 합해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앞서 대법원 판결 전에 2심이 선고한 징역 30년보다 10년 줄어든 형량이다.

공직자는 뇌물 수수와 그밖의 혐의를 따로 선고해야 하고, 특활비 사건에서 일부 무죄 판단한 사건을 유죄로 본 대법원 판결 취지를 따르면 형량이 높아질 것이란 전망도 있었지만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감형을 택했다. 검찰이나 박 전 대통령 쪽이 재상고하지 않으면 징역 20년이 확정된다.

서울고법 형사6(재판장 오석준)는 이날 국정농단 사건과 전직 국정원장들에게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상납받은 혐의로 기소된 박 전 대통령의 선고 기일을 열었다.

재판부는 공직선거법상 박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뇌물 수수 혐의는 다른 혐의와 분리해 선고해야 하는 원칙에 따라 뇌물 혐의에 징역 15년 및 벌금 180억원을, 특활비 상납과 직권남용, 강요죄 등에 대해 징역 5년을 선고하며 35억원의 추징금도 물렸다.

대법원 판결 전에 징역 30, 벌금 200억원, 추징금 27억원을 선고한 것과 비교하면 형량은 10, 벌금은 20억원 줄어들고 추징금만 8억원이 늘어났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벌금을 내지 않을 경우 3년간 노역장에 유치할 것도 명했다. 201710월부터 자신과 관련된 모든 재판에 불출석했던 박 전 대통령은 이날도 건강상의 이유라며 불출석 사유서를 내고 나오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대통령으로서의 헌법상 책무를 다하지 못해 국정에 커다란 혼란과 난맥상을 연출했다. 그 결과 (박 전 대통령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겠으나 정치권은 물론 국민 전체에 걸쳐 여러가지 분열과 갈등, 대립이 격화됐고 그로 인한 후유증이 지금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해 8월과 11월 국정농단과 특활비 상납 사건을 각각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국정농단 사건은 뇌물죄 분리선고 원칙에 따라 다시 형량을 정하라며 사건을 돌려보냈고, 특활비 상납 사건은 2심에서 일부 무죄로 본 혐의도 유죄로 인정해 다시 심리하도록 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2016년 국정원장들에게 35억원의 특활비를 상납받은 혐의를 받았는데, 2심은 특활비를 대가성 있는 뇌물이 아닌 것으로 보고 27억원만 국고손실 피해액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국정원장도 회계관계직원이라며 대통령이 받은 금액 중 33억여원이 국고손실에 해당하고, 20169월 이병호 전 국정원장에게 받은 2억원은 뇌물이 맞다고 판단했다.

두 사건을 병합하여 심리한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이러한 대법원 취지를 따르면서도 형량은 10년을 깎아 재판부가 봐주기를 한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취득한 이득액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이고, 피고인은 정치적으로 파산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라며 형의 집행이 종료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에서 피고인의 나이도 고려했다고 했다. 또 롯데그룹으로부터 받은 70억원은 이미 반환됐고 국정원 자금도 부정한 목적을 갖고 요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점 등도 고려했다고 밝혔다.

박 전 대통령 쪽 변호인도 재판 과정에서 수천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징역 17년형을 확정 판결 받은 노태우 전 대통령 사례 등과 견줘 박 전 대통령의 양형이 과중하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재판부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삼성 등 기업들에 대한 후원 요구에 따른 강요죄 혐의 대부분을 직권으로 무죄 판단을 내려 이 점도 감형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공범인 최서원씨가 대법원에서 강요죄 부분 무죄 취지 판결을 받아 박 전 대통령도 그 영향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앞서 2018년에 새누리당 공천 불법 개입 혐의로 징역 2년형도 확정돼 이번 선고로 모두 22년의 형량을 선고받게 됐다. 검찰 관계자는 유무죄 대부분이 대법원에서 정리한 대로 (선고)된 듯하다판결문을 검토해 재상고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 장예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