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업무 중단 MBC 아나운서들 기자회견
“2012년 파업 이후 부당전보·출연금지 당해
아나운서국에서 가장 심한 블랙리스트 자행”
김장겸 사장 등 경영진과 신동호 국장 사퇴촉구


“(파업 이후) 출연 거부 당한 일을 딱 50번까지만 세었습니다. 이후에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세는 걸 멈췄습니다.” 2012년 <문화방송>(MBC) 파업 이후 벌어진 일을 회고한 허일후 아나운서의 말이다. 2012년 파업에 참여한 아나운서 대다수는 이렇게 영문도 모른 채 방송 출연에서 배제됐다고 말한다. 27명의 아나운서가 방송·업무 거부와 함께 김장겸 사장 등 경영진의 사퇴를 외치는 이유다.

22일 오전 <문화방송> 아나운서들은 서울 상암동 <문화방송>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2년 파업 이후 <문화방송> 아나운서들은 방송역사상 유례가 없는 비극과 고통을 겪었다”면서 “가장 심각한 수준의 블랙리스트가 자행된 곳이 바로 아나운서국”이라고 밝혔다.

2012년 파업 참여 이후 상당수 아나운서들은 마이크를 잡지 못했다. 다른 부서로 인사 조치됐기 때문이다. <문화방송> 아나운서협회장을 맡은 김범도 아나운서는 이날 “파업 이후 11명의 아나운서가 부당전보됐다. 얼마 전 지속적이고 상습적인 방송 출연 금지 조치에 절망한 김소영 아나운서가 사표를 던지는 등 모두 12명의 아나운서가 회사를 떠났다”고 했다. 신동진 아나운서는 “2012년 파업이 끝나고 사회공헌실에 배치됐다. 부당전보 가처분 소송에서 승소해 아나운서국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한국 아나운서협회장을 하며 협회보에 손석희 <제이티비시>(JTBC) 보도 담당 사장, 박원순 서울시장, 최승호 <문화방송> 해직 피디 등의 인터뷰를 실은 것을 두고 회사 쪽이 문제삼았다”며 “2014년 1월 주조정실로 발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재은 아나운서도 “지난 5년간 동료 아나운서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문화방송> 뉴스를 하는 것이 명예였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멍에’”라고 말했다.

<문화방송>(MBC) 아나운서 27명이 김장겸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과 신동호 아나운서국장 사퇴를 촉구하며 2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문화방송> 사옥 앞에서 ‘방송거부-업무거부 돌입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례발표에 나선 이재은 아나운서가 최근 퇴사한 동기 김소영 아나운서를 비롯한 동료 아나운서들이 받은 부당노동행위를 설명하던 중 울먹이고 있다. 신소영기자

아나운서들은 파업 이후 아나운서국에 복귀하더라도 다수 프로그램에서 배제됐다고 말했다. 손정은 아나운서는 “2015년 저녁 종합뉴스에서 하차 통보를 받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후 고위직 임원에게 내가 인사를 하지 않았기에 하차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나는 그 고위직 임원과 마주친 적이 없다”며 이후 드라마·예능·라디오 디제이 출연을 번번이 거부당했다고 밝혔다. 허 아나운서도 “파업 이후 미래전략실로 전보됐다가 아나운서국으로 돌아왔지만, 3분 라디오 뉴스를 제외한 전 프로그램에서 출연금지를 당했다”면서 “제작진의 출연 요청이 있어도 부서장의 출연허가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앞서 아나운서 27명은 김 사장과 신동호 아나운서국장 등의 사퇴를 요구하며 지난 18일 오전 8시부터 업무·방송 거부에 나섰다.

한편, 21일 밤 <문화방송> 라디오 피디 36명은 총회를 열어 제작거부 및 총 파업에 동참하기로 결의했다. 제작거부 시기와 방법은 라디오 피디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정할 계획이다.

<박준용 기자>


백범이 독립운동가 묘역 조성 뒤 자신도 묻힌 곳
역대 대통령 중 문 대통령이 유일하게 광복절 참배
이승만은 축구장 건립, 박정희는 골프장 건립하려 해
노무현, 효창독립공원 만들려다 축구계 반대로 무산
임시정부와 촛불 계승한 이번 정부에서 어떤 변화 맞을까


광복절 제72주년인 15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는 세종문화회관으로 가기 전에 서울 용산구에 있는 효창공원부터 들렀다. 문 대통령은 백범 김구 선생 묘역에 이어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묘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는 삼의사 묘역, 이동녕·차리석·조성환 선생 등의 묘가 있는 임시정부 요인 묘역을 차례대로 참배했다. 문 대통령이 묘역 앞에서 고개를 숙일 때마다 하늘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대통령이 광복절에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있는 효창공원을 찾는 것은 상식적인 일로 보인다. 청와대~효창공원~세종문화회관의 동선이 복잡하다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유일하다. 문 대통령의 발길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잦았다. 지난 3월 대선 출마 공식 선언, 2012년 10월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확정, 2015년 9월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선출 직후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점마다 이곳을 찾았다. 이전 대통령 11명은 저마다 속내나 사정이 달랐겠지만, 그들 마음의 내비게이션은 예외없이 청와대에서 곧바로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하도록 안내했다. 재임 중 이곳에 참배한 이는 김대중 대통령뿐인데, 광복절이 아닌 백범 49주기 기일(1998년 6월26일)이었다.

효창공원에 대한 역대 대통령들의 태도에서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한 이곳의 상징적 위상이 이상하리만치 낮은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사실, 많은 이들에게 이곳은 그저 산책하기 좋은 고요한 숲길이다. 1980년대까지는 효창운동장이 훨씬 유명해서, 효창공원은 운동장의 부속시설처럼 여겨졌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땐 음주가무와 고성방가도 흔한 풍경이었다. 닭과 달걀의 관계는 명확하다. 일부 대통령은 효창공원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을 넘어 적극적인 상징 지우기에 나섰고, 결과는 얼마간 성공적이었다.

광복절 제72주년인 15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이 효창공원 안에 있는 백범 김구 묘소 앞에서 비를 맞으며 참배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1959년 6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한국이 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를 유치하자 효창공원에 축구장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백범 묘소를 이장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서울에 축구장 지을 자리는 널려 있었다. 독립운동가 유족들과 시민단체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백범 묘소 바로 앞에 운동장을 짓게 했다. 15만 그루의 나무를 베고 연못을 메워 1960년 개장한 효창운동장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효창공원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1968년 애국지사 묘소들을 경기 고양 서오릉으로 옮기고 이곳에 골프장을 지으려다가 유족 등의 강한 반대로 뜻을 접었다. 그 뒤 박 대통령은 북한반공투사 위령탑 등 독립운동가 묘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념물들을 잇달아 세웠다. 1972년엔 대한노인회 건물을 지어줬고, 대한노인회는 그 보답으로 육영수 여사 경로 송덕비를 세웠다.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이 효창공원을 대했던 태도는 백범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에 대한 태도와 정확히 일치했다. 친일파를 대거 권력의 자리에 불러들였던 이 대통령은 누구보다 백범을 경계하고 질시했다. 이승만 정권은 백범 묘소를 참배하려는 시민들뿐 아니라 백범 유족들까지도 공원 입구에서 검문했다.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박 대통령은 이곳에서 항일의 상징을 한사코 지우려고 했다.

백범은 1945년 환국한 뒤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을 조성했다.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쓴 이도 백범이었다. 그리고 1949년 암살된 뒤 백범 자신도 이곳에 묻혔다. 효창공원의 옛 이름은 효창원이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은 어린 나이에 사별한 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 의빈 성씨 등을 이곳에 묻었다. 일제는 조선 왕가의 묘역인 이곳을 1924년 공원으로 만들고, 왕실의 무덤도 경기 고양 서삼릉으로 옮겼다. 근처에는 유곽도 만들어졌다. 백범이 항일운동의 상징으로 효창공원을 주목한 건 이런 역사적 맥락과 닿아 있었다.

효창공원에는 우리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군부독재가 종식된 뒤인 1989년, 효창공원은 사적 제330호로 지정됐다. 1990년엔 이곳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7위를 안치한 의열사와 공원 정문인 창렬문이 건립됐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10월엔 백범김구기념관이 준공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엔 효창운동장을 용산 미군기지 터로 옮기고 공원과 합친 17만여㎡을 2008년까지 ‘효창독립공원’으로 조성하는 계획이 수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축구계의 반대에 부닥쳐 표류하다가 결국 좌초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정부 차원의 이렇다 할 사업이 없었다. 멀게는 상해 임시정부에서부터 가깝게는 촛불 정신까지의 계승을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 들어 효창공원은 어떤 변화를 맞게 될까.

<안영춘 기자>


12·28 합의 TF가 밝혀야 할 쟁점

일본정부 법적책임 인정 못받고 20년 전 사과 수준 추락한 합의
막판에 청와대가 타결주도 의혹
일본정부가 내놓은 10억엔과 소녀상 철거 이면합의 여부도

오태규 위원장 “필요하면 모두 면담”

2015년 12월28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회담을 마친 뒤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상이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를 위한 태스크포스(위원장 오태규·이하 티에프)가 31일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국가 간 맺은 외교적 합의에 대해 외부 전문가로 이뤄진 티에프가 검토 작업을 벌이는 것 자체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12·28 합의를 둘러싼 의혹과 쟁점이 많은 탓이다.

12·28 합의의 치명적인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노 담화(1993년)-무라야마 담화(1995년)-간 나오토 담화(2010년)를 거치며, 사과와 반성을 넘어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다가서던 일본의 태도는 12·28 합의로 다시 20년 전 ‘사과’ 수준으로 떨어졌다. 박근혜 정부가 2015년 왜 이런 내용에 서둘러 합의했는지에 의혹이 쏠리는 이유다.

티에프가 밝혀내야 할 쟁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일 양국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풀기 위해 2014년 4월 국장급 협의를 시작했다. 당시 협의의 주체는 외교부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막판에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이병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직접 나서 합의 협상·타결을 주도했다는 의혹이 나왔다.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이 ‘석달만 시간 여유를 주면 개선된 합의를 이끌어내겠다’고 박 전 대통령에게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증언까지 나온 터다. 협상의 주체가 누구였는지, 왜 서둘러야 했는지 밝혀내야 한다.

12·28 합의는 인권에 관한 내용인데도 군축협상에서나 나올 법한 용어가 등장한다. 합의 발표 당시 정부는 일본 정부의 (합의 이행) 조처를 전제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 지난 1993년 8월 발표된 고노 담화는 ‘위안부’ 제도의 비극을 “오래도록 기억한다”는 게 뼈대였다. 하지만 12·28 합의가 공개된 직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기자들과 만나 “우리 아들이나 손자들에게 계속 사죄를 할 숙명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2·28 합의가 ‘망각을 위한 합의’로 비판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종적·불가역적’이란 말이 합의에 들어간 과정이 밝혀져야 할 이유다.

12·28 합의 이전부터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이전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해왔다. 합의문 발표 당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소녀상에 대해 “적절히 이전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일본 언론 쪽에선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내놓은 ‘10억엔’이 소녀상 이전과 연계돼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소녀상 철거·이전에 대한 이면합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합의 이행 과정도 눈여겨봐야 한다. 합의 체결 이듬해인 2016년 1월 피해 할머니들은 “사과 없는 일본 쪽 10억엔은 필요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정부는 같은 해 7월 말 이 자금을 바탕으로 화해·치유재단을 출범시켰다. 한달 뒤인 지난해 8월 강일출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 할머니 12명은 12·28 합의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입었다며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반면 일본은 12·28 합의 때 밝힌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이어갔다. 합의 발표 당시 일본 쪽은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후 일본 정부는 “위안부 강제 동원의 증거가 없다”는 취지의 답변서를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 제출한 바 있다. 지난 5월 유엔 고문방지위원회가 12·28 합의 수정을 권고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티에프의 오태규 위원장은 “결론을 상정하고 활동하는 게 아니다”라며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관계자는 어디 소속이든 모두 면담하자는 게 기본적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12·28 합의 과정에 있는 모든 걸 검토한다고 이해하면 된다”며 “법 절차를 준수하는 범위 안에서 외교문서도 들여다볼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 사정에 밝은 한 일본 전문가는 “12·28 합의의 내용도 문제지만,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불투명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며 “티에프가 해법을 내놓을 순 없지만, 합의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합의 과정의 불투명성을 해소하면 붕괴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은 이날 성명을 내어 “외교부는 피해자·지원단체와 소통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이 문제를 연구해온 법·역사·여성학자들은 배제한 채 국제정치·외교 전문가 위주로 티에프를 구성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재단 쪽은 이어 △12·28 합의 졸속 발표 이유 △합의 도출 과정 △10억엔 거출 경위 △소녀상 관련 일본 쪽 요구사항과 한국 정부 대응 등 7개항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촉구했다.

< 정인환 김미향 기자 >


지난 대선 당시 국민의당 공명선거추진단 단장을 맡았던 이용주 의원이 6월28일 오후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문재인 대통령 아들 문준용씨에 대한 제보 조작 사건과 관련해 조작 당사자인 이유미씨와 이준서 전 최고위원이 범행을 공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26일 이용주 의원을 소환 조사한다.

서울남부지검 공안부(부장 강정석)는 지난 대선 당시 국민의당 공명선거추진단 단장을 맡았던 이 의원을 26일 오후 3시께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할 계획이라고 25일 밝혔다. 남부지검 관계자는 “26일 3시께 이 의원에게 검찰에 나와달라고 했다”면서 “이 의원 본인은 3~4시 사이에 오겠다고 답을 했다”고 말했다.

김유정 국민의당 대변인은 이날 기자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대선 당시 국민의당 공명선거추진단장이었던 이용주 의원은 26일 오후 경에 제보조작 사건과 관련, 검찰에 자진출석 하겠다는 뜻을 당에 공식적으로 밝혀왔다”고 밝혔다. 이어 “이 의원은 비록 참고인 신분이지만 검찰조사에 성실히 임할 것을 약속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검찰은 공명선거추진단 핵심 관계자인 김인원 전 부단장(변호사)과 김성호 전 수석부단장(전 의원)을 차례로 소환해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이들은 구속된 이유미씨가 조작한 제보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지난 5월5일과 7일 두 차례에 걸쳐 기자회견을 통해 공표한 혐의(공직선거법의 허위사실공표)를 받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김 전 변호사와 김 전 의원의 수사는 마무리가 됐다. 이 의원 조사를 마친 뒤, 김 전 변호사와 김 전 의원의 신병 처리 방침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제보조작 사건 외에도 지난 4월24일 국민의당이 ‘고용정보원에서 문준용씨 특혜채용 10여건을 발견했다’라는 취지로 열었던 기자회견과 관련해 이용주 의원이 고발당한 사건을 수사중이다. 또 지난 5월3일 김 변호사가 ‘권재철 전 고용정보원장이 문재인 후보의 청탁으로 고용정보원 감사 시 압력을 행사했다'라는 취지의 기자회견을 했다가 고발당한 사건 등에 대한 수사도 이르면 28일께 함께 마무리할 계획이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