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민주당 최강욱 대표

 

열린민주당 최강욱 대표는 5일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분리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다음 세대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끝장을 보겠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이날 최고위에서 "전직 검찰총장이 각계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정치행보를 상의한다더니, 이번 재보궐선거가 '정권 심판의 장'이라고 밝히며 정치적 언동을 이어가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어 "그간 공직의 장막에 숨어 정치검찰의 두목으로 행해 온 검찰정치의 실체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소행"이라며 "재임 당시 각종 미사여구를 앞세워가며 벌인 여러 소동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현재의 행보가 그대로 입증해준다"고 말했다.

언론을 향해선 "출근할 일이 없어진 퇴직한 공직자가 굳이 '부친 모시고 사전투표'한다는 소식에 '단독'을 달아 보도하는 모습은 이들이 지향하는 욕망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낸 낯 뜨거운 해프닝"이라고 말했다.

 

교회들 부활절 예배 - 온주교회협의회, 온라인 연합 새벽예배 드려

 

 

지난 4월4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 전세계 각지의 교회와 성도들은 이날 부활절 예배를 드리며, 그리스도 부활의 소망과 능력이 코로나로 고통받는 이들과 온 땅에 소생과 회복의 역사로 나타나기를 기도했다.

교협회장 이요환 목사

온타리오 한인교회협의회(회장 이요환 소금과 빛 염광교회 담임목사)는 이날 아침 6시 연합 새벽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렸다. 교회협의회 부활절 연합 예배를 비대면 온라인으로 드린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이날 예배는 교협 회장이며 이날 예배를 인도한이요환 목사가 기도함으로 시작했다. 찬송에 이어 교협 부회계인 이채원 장로(하늘 씨앗교회)가 대표 기도하고, 한인 목사회장인 김용식 목사(온누리 한인연합교회 담임)가 마태복음 28장 1절에서 10절을 본문으로 ‘두려움에서 기쁨으로’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가 공통적으로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다”면서 “이는 부활이 바로 복음의 결론이며, 핵심이고, 완성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 목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친밀하게 지냈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들은 처음에 두려워했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기쁨과 감격을 누렸다”고 강조하고 “우리도 늘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부활의 큰 기쁨과 감격을 나누고 경배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을 전했다.

예배는 연합기도 순서에 들어가 장성환 목사(런던 한인교회 담임)가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를 주제로 기도를 인도하고, 김성근 목사(미시사가 우리교회 담임)는 ‘캐나다와 조국 대한민국의 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황성광 목사(킹스턴 교회 담임)는 ‘코로나 종식과 고통받는 세계인을 위한 기도’를 인도했다.

예배는 소금과 빛 염광교회 정무성 목사가 부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특송으로 헌금시간을 가진 뒤 교협 부서기인 문경옥 목사(주찬양교회 담임)의 헌금기도와 총무 고승록 목사(참좋은 복된교회 담임)의 광고, 그리고 부총무인 남궁권 감리사(제일 감리교회 담임)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이날 예배는 유튜브로 중계됐으며, 녹화영상은 유튜브에서 ‘온타리오 교회협외회’를 입력하면 볼 수 있다.

한편 교회협의회는 이날 연합예배 헌금은 무궁화요양원 인수기금으로 기부할 예정이라면서 헌금에 대한 기부금영수증도 발급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교협은 아울러 각 교회에도 부활절 헌금의 1%를 교회협의회에 보내주기를 요망했다.

 

헌금은 E-Transfer를 활용 (ckcodonate@gmail.com) 하거나, 수표로 보내면 된다.

수표는 Pay to: CKCO (The Council of Korean Churches in Ontario)를 기입하고 기부자의 영문 성명과 주소를 기재하여 수신처 주소: 2850 John St, Markham, ON, L3R 2W4. Tel 905-415-9115 (토론토 소금과 빛 염광교회 내)로 보내면 된다.       < 문의: 647-886-9020 >

김용식 목사 설교
정무성 목사 특송
고승록 목사 광고
남궁권 목사 축도

 

 

 

부활은 죽은 생명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소생, 혹은 회생을 뜻하기도 한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니 당연히 놀랍고도 기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자연적 기적이다. 그는 죽은 것처럼 보였던 가사상태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 가시 면류관을 쓰고 채찍에 맞고, 손과 발에 못이 박혔고, 창에 찔려 온 몸의 피와 물을 쏟아내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도 자신이 예언한대로 다시 살아났다. 그래서 인간이 아닌 신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신비로움의 대상이다.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신음하는 인간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이 되고 다시 살아났다는 구원과 부활의 섭리는, 전능한 신의 논리가 아니면 믿기지 않는다.

그렇게 인간 세계에선 불가능한 생명의 부활이기에, 신성(神性)의 예수와 구원의 역사를 믿으면 죄와 사망을 이기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부활신앙이 확증적으로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부활을 기뻐하고 영생의 소망을 품으며 부활절을 축하하고 찬미한다.

 

비단 예수의 경이롭고 신령한 부활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사에서 흔히 접하는 부활이라는 단어는 반갑고 기뻐할 일들에 많이 쓰인다.

패가망신 했던 사람이나 가문이 다시 일어나 흥성하면 부활이라고 한다. 쫄딱 망했던 회사나 사업이 되살아나 번창하면 부활한 것이다. 한 때 날리던 선수가 형편없이 추락했다가 각고의 노력 끝에 예전의 기량을 다시 뽐내는 것도 부활이라고 한다. 프로골프를 평정해 ‘황제’ 별칭을 얻은 타이거 우즈가 중년에 접어들고 몸이 고장나며 차츰 하위로 쳐지자 사람들은 이젠 끝났다보다 여겼다. 그런데 14년만인 2019년 상금 207만 달러를 거머쥐는 마스터즈 대회를 제패해 엄청난 부활의 환호를 받았다. 최근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그가 재활에 성공해 다시 부활하게 될지, 또 구름떼 갤러리를 몰고 다닐 수 있을지, 골프팬들은 궁금해 한다.

‘부활’의 어의(語意)가 지닌 긍정적인 의미 그대로 반갑고 좋은 부활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제발 부활하지 말고,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과 현상들 또한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다.

 

요즘 불안과 공포의 대상인 COVID-19 팬데믹이 중세 페스트나 스페인 독감, 그리고 사스와 메르스 같은 전염병의 재현이라는 사실은 익히 거론됐으니 차치해 두자.

40여년 전 광주에서 보고 겪었던 쿠데타 군인들의 무자비한 학살 망령이 미얀마에서 되살아난 것을 본다. 그런 비인간적인 만행에도 손을 쓰지 못하는 유엔이나 국제사회의 대립구도 역시 옛날의 되돌이 판 같다. 몸집이 커진 중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격화되는 대립상은 30여년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였던 냉전의 부활이라는 시각이 나온다. 한동안 훈풍이 불던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도 그렇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동키호테식 처신과 바이든 대통령의 ‘원칙주의’에다 ‘방해꾼’ 일본까지 끌어들이면서 다시 냉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참 답답한 분단민족의 현실이다. 백인 우월주의와 유색인종 차별을 격화시킨 ‘거짓선동’ 정치인 트럼프가 대선 패배 이후 재기와 부활을 노린다는 소식은 전혀 반가울 수가 없다.

태평양전쟁의 패퇴로 숨이 끊어졌던 일본의 군국주의가 질긴 생명력으로 되살아 난 것 또한 우리를 불유쾌하게 만든다. 독도문제, 군대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 동해문제, 무역제재와 국제기구(WTO) 수장 반대…사사건건 걸고 넘어지는 졸렬함에서 한때 고개를 숙인 듯 했던 저들의 극우적 마각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부활의 국제적 폐해를 본다.

 

역시 해방이후 지리멸렬했던 친일 세력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킨 이승만의 반민족적 ‘공로’로 부활한 것은 한국 근대사에 ‘천추의 한‘으로 남고 말았다. 친일의 독버섯은 민족정신을 오염시켰고, 대대로 특권과 이권을 누리면서 나라를 병들게 하고 국민을 이간질했으며 분단대결을 심화시켰다. 민주주의를 압살한 연이은 개발독재 군사독재와 토건비리 · 정경언 유착, 그리고 국정농단에 헌정유린까지… 동학과 삼일정신, 민주항쟁의 기개로 무장한 깨시민들이 분기하여 이제 겨우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들 독버섯의 속성과 카르텔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최근 선거열기로 뜨거운 한국의 정정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그 슬프고 짜증나는 부활현상에 답답해진다. 사람들은 다시 저들이 설치는 세상으로, 옛날 그 시절의 부활을 원하는 것일까?.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

 

주교돈 목사

다운스뷰 장로교회 담임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역시나 저 멀리 보이는 무덤 앞에는 큰 돌이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큰 돌이 자리해야 할 곳이 아닌 옆으로 움직여져 있지 않습니까? 큰 돌로 막혀있을 무덤을 생각하며 어떻게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릴 수 있을까 염려하며 걷던 그들의 무거운 발걸음에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내 그 발걸음이 무거워집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있어야 할 그 자리, 하지만 그 곳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보내신 것 같아 보이는 흰 옷 입은 천사가 말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이 말 자체에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부활이라는 것은 막연한 바램이었던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기대해온 완벽한 시나리오가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절망을 털어낼 수 없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건, 이들 눈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없고, 그저 빈무덤만 남아있다는 겁니다. 빈 무덤, 사라진 예수님, 그리고 그가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이야기… 이 가운데에서 두 가지 상징이 함께 떠 오릅니다. 절망과 소망, 애통과 환희, 죽음과 부활… 함께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두 가지가 함께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모순적 공존, 하지만 이는 분명한 외침과도 같습니다. ‘너희가 절망의 자리에 있으나 이곳에 소망이 있다고, 너희가 애통의 순간을 마주했으나 거기에서 환희가 다가오고 있고, 너희가 죽음을 보았으나 너희는 곧 부활을 확인케 될 것’이라고 말이지요.

 

미국 감리교 신학교인 에즈베리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벤 위더링턴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2012년 1월 11일 늦은 밤, 위더링턴 교수는 서른 세 살 된 딸 크리스티의 남자친구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딸의 남자친구는 전화기에 대고 말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연락이 되지 않아 문을 뜯고 들어간 집 안에서 크리스티는 쓰러져있었고, 구급차가 왔지만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는 것이지요. 사인은 폐색전증, 곧 혈전이 폐동맥을 막아서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병이었습니다. 벤 위더링턴 교수는 열정어린 자신의 강의 말미에 딸을 잃은 아픔에 대해 고백합니다. 그 이야긴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희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희망을 가진 사람처럼 슬퍼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또한 모순적인 표현같습니다. 그는 이를 두고, 슬픔 중에도 눈 하나를 종말론적인 지평 곧 역사의 끝에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역사의 끝에는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 이야기했을까요? 거기엔 세상의 어떤 절망과 위기도 침범할 수 없는 회복과 승리의 순간, 곧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부활의 능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삶 속에서 절망을 봅니다. 슬픔을 보고 불가능을 봅니다. 소망이 꺾이는 아픔을 겪고, 여전히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인생의 무게 앞에 힘겨워합니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팬데믹의 거대한 음지 속에선 어느 누구도 앞날을 알 수 없어 답답합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 삶의 자리에도 분명 부활은 소망의 향기를 풍깁니다. 갈릴리로 제자들보다 먼저 찾아오신다고 하셨던 것처럼, 소망 없는 것 같은 우리 일상의 자리, 아직은 해결되지 않은 그 절망의 문제 속에서도 소망을 품으라 하시는 그 딜레마의 일상 속으로 우리 주님, 부활하신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으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생명력입니다. 때론 천둥 같은 힘찬 소리로, 때론 내 가슴을 찡하게 움직이는 따스한 속삭임으로… 너희에게 소망이 있다고, 너희에게 다시 살아난 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빈 무덤 앞에서 듣는 부활의 소식 앞에 망설이거나 흔들리지 마십시다. 빈 무덤과도 같은 당황스럽고 절망스러운 일상도 현실이지만, 그 가운데 일어난 부활은 영원히 변함없는 사실이요, 능력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내 삶의 아픔을 더 큰 아픔으로 느낄 수 있게 하심 조차 감사합니다. 또한 그 아픔을 이기고 영원한 소망을 품을 수 있음이 더 큰 은혜임을 깨닫게 하심 또한 감사합니다. 아픔이라는, 애통함이라는 견고한 알을 깨고 소망과 영원한 삶이 그 안에 있음을 보게 하신, 그리고 확인케 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