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에서 증거조작에 가담한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28일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간첩을 잡아야 할 국정원이 간첩을 만들어낸 이 사건은 국정원의 존립 기반을 흔드는 엄중한 사안이다. 정보기관이 숱한 간첩사건을 조작했던 어두운 과거사가 밝혀지고 이를 청산하자고 했던 게 불과 몇해 전인데, 또 이런 일이 벌어진 걸 보면 중앙정보부에서 안기부, 국정원으로 이어지는 정보기관의 음습한 체질은 변할 수 없는 것이냐는 한탄마저 나온다.
 
국정원이 이런 무리수를 둔 것은 조직 보호 차원이었을 수 있다. 국정원은 지난해 불거진 댓글 사건으로 가뜩이나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런 참에 ‘서울시 공무원 간첩’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기소된 유우성씨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어떻게든 2심에서 재판 결과를 뒤집어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증거조작이라는 초법적인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부메랑이 됐다. 더구나 국정원은 진지한 반성 대신 잘못을 또다른 잘못으로 덮으려는 자충수를 뒀다. 증거조작이 드러나 따가운 비판을 받던 지난 3월 ‘직파 간첩’ 홍아무개씨 사건을 발표했지만, 홍씨 역시 지난달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도 ‘끼워맞추기식 수사’의 정황이 농후했다.
이쯤이면 누구도 국정원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른 간첩사건들도 신뢰를 받지 못하는데다, 일각에서는 국정원이 유씨나 홍씨 같은 탈북자들을 간첩사건 건수를 올리는 데 이용하고 있다는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다. 탈북자 간첩사건을 들여다보면 실제로 뚜렷한 증거가 없거나 간첩이라고 보기엔 어수룩한 인물인 경우가 눈에 띄기도 한다.
 
이런 의심에 대해 국정원으로선 억울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초래한 결과임을 인정해야 한다. 증거조작 사건에서 ‘윗선’들이 처벌받지 않았다고 해서 이를 처장·과장급 간부의 돌출행동 정도로 여기는 국민은 없다. 이날 재판부가 “국정원에 막중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 국민의 기대와 신뢰를 훼손했다”고 지적한 대목을 뼈아프게 새겨야 할 것이다.
국정원 스스로 진지한 반성을 통해 위법•탈법적인 수사 관행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래서 간첩조작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벌어진다면, 국정원에 대공수사권을 줘선 안 된다는 주장이 더 큰 힘을 얻을 수밖에 없다. 검찰도 이번 증거조작 사건에서는 형사책임을 피해갔지만, 간첩사건을 다룰 때 국정원에 의존하는 습성을 버리고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칼럼] 김구 선생의 대한민국

● 칼럼 2014. 11. 3. 19:26 Posted by SisaHan
얼마 전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가로는 훌륭하지만, 대한민국 건국에는 반대했기에 대한민국 공로자로 거론하는게 옳지 않다”는 발언이 나왔습니다. 이인호 <한국방송> 이사장의 말입니다. 또한 “상해(상하이)임시정부는 임시정부로 평가받지 못했고, 우리가 독립국민이 된 것은 1948년 8월15일 이후”라고 했습니다.
이 발언을 접하고 우선 황당했습니다. 우리 역사의 소중한 부분이 더럽혀진 듯한 불쾌감이 더해졌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생각해봅니다. 김구 선생은 어떤 분이고, 그와 대한민국의 관계는 어떠한가요?
 
누구나 알다시피 선생의 호는 백범입니다. 백정과 범부에서 한 글자씩 따왔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옥살이하면서, 그는 독립정부가 되면 청사의 문지기로 뜰을 쓸고 죽을 수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낮은 위치에서 독립에 헌신하겠다는 그 자세만으로 마음에 울림을 안겨줍니다.
1919년 3월1일부터 온 동포가 독립만세를 부르고 피를 흘렸습니다. 그 함성과 피흘림을 토대로, 그해 4월 중국 상하이에 애국지사들이 모였습니다. “민주공화제”로 다스려질 “대한민국”이 거기서 탄생했습니다. 일본은 이를 가짜정부라 칭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대한민국 정부”였습니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몇십년간 주지(主持)해온 절대공로가 있습니다.
 
1948년 제헌헌법에서는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고,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을 밝혔습니다. 1919년 건국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이를 재건한 게 1948년입니다. 이렇듯 대한민국은 1919년부터 1948년까지의 독립운동 과정의 산물입니다. 나아가 현행 헌법(1987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법통을 지켜낸 김구 선생을 삭제한다는 것은 역사 말살이고 헌법 왜곡입니다.
일제가 물러난 1945년 8.15는 불행히도 분단을 내포한 해방이었습니다. 강대국이 일방적으로 그은 38선을 지우고 온전한 한 몸으로 독립함은 절대과제가 되었습니다. 선생이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은 “나의 소원”이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미-소 냉전에 편승한 남북의 정치세력들은 한 몸을 둘로 쪼개는 데 가담합니다. 어차피 쪼개질 수밖에 없다면 반쪽이라도 차지하자는 게지요. 그러나 선생으로서는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한 아이를 쪼개어 갖자는 엄마가 진짜 엄마일까요.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구차한 안일을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는 선생의 읍소는 솔로몬 재판에서 진짜 엄마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김구와 김규식의 북행길도, 분단을 막기 위해선 최후의 일각까지 분투하겠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가능성이 아닌 당위성의 차원입니다. 북측과의 교섭도 무위로 끝난 뒤, 그들은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서울에 머문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에 안겨준 후광효과도 적지 않습니다.
 
선생에게 민족분단은 전쟁을 초래할 “시한폭탄”이었습니다. 그가 흉탄에 쓰러진 지 만 1년 뒤, 그의 우려대로 “시한폭탄”은 6.25전쟁으로 터지고 말았습니다. 엄청난 참화를 빚은 뒤에도,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분단의 사슬에 발목잡히고 가위눌려 있습니다. 선생의 발걸음은 민족적 재앙의 항구화를 막기 위한 충정이었습니다.
현행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평화적 통일정책을 추진”함을 명시했습니다. 40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우리 국민은 분단 아닌 통일, 무력 아닌 평화를 추진하자고 합의했습니다. 선생의 깃발을 이어가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듯 선생의 생애는 대한민국의 바탕이고 상징입니다. 현실정치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뚜렷한 이정표를 남겼습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가면서 발걸음을 어지럽게 말라, 오늘 내가 디딘 발자국은 뒷사람의 길이 되리라”는 말씀과 함께 말입니다.
선생의 삶을 감히 흉내 내기도 어렵습니다만, 그의 애국충정에 재 뿌리는 짓은 막아야 합니다. 선생의 헌신에 터 잡아 만들어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한 의무이기도 할 테지요.

< 한인섭 -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구름을 그리면 자연스럽게 달이 드러난다 ‘라는 말이다. 
홍(烘)이란 단어는 ‘부풀린다’ 라는 뜻이며 그래서 ‘홍운(烘雲)’ 이란 ‘구름을 퍼트린다’는 의미가 된다. ‘탁월(拓月)’ 은 ‘달을 드러나게 한다’는 표현이어서 결국은 그 뜻이 완성된다. 이는 중국 전통의 회화법으로 ‘달 주변에 퍼지는 달무리를 구름에 표현해서 달을 그리지 않고도 달을 그리는’ 기법이다.

드러냄이 없는 ‘숨김의 미학’은 서양의 미술 기법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아포파시스(apophasis)’ 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겉으로는 어떤 일을 부정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말하는 일’ 이다. 중세 비잔틴 시대의 아이콘(icon) 회화에서는 필수적인 기법이었으며 이는 보는 이나 그린 이를 중심하지 않고 그림속의 인물의 관점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종의 동양의 ‘홍탁(烘拓)’ 과 같다.

신앙 생활에 어쩌면 홍탁(烘拓)같은 부분이 좀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예수를 믿소’ 라고 그렇게 외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삶을 보면서 예수가 보이는.. 마치 달을 그리지 않아도 달이 보이고, 도를 말하지 않아도 도가 들리는(道可道 非可道·도가도 비가도; 도를 말하는 순간 그것은 도가 아니다) 삶. 물론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에 말하는 이가 있어야 하겠지만 꼭 입으로 말하는 것만이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신이란 존재 자체가 표현 불가능하기에 말이 많아지는 목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나에게 ‘홍운탁월(烘雲拓月)’ 은 ‘믿음의 삶이란, 사는 모습으로 보여주며 말로는 침묵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 사이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언어처럼 다가온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말이 참 많다.

< 최규영 목사 - 토론토 B2B교회 담임목사 >



디모데장로교회, 창립18돌 예배서 장로 5명 임직

디모데 장로교회(담임 김인기 목사)가 10월26일 주일 창립 18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고 한·영어권 장로 장립식도 가졌다. 이날 김동환 장로가 취임하고 최진우 집사가 장로로 장립했다. 영어권에서는 Peter D. Park (박동기), Brian Park (박 범식), Steve Lee (이상우) 집사가 장로로 장립했다. (위 사진 선포장면)
 
이날 오전 10시 한국어권 감사예배는 손동휘 목사의 찬양인도로 시작, 조충호 장로가 기도하고 정수진 목사가 성경 베드로전서 5장 1~5절을 봉독한 뒤 김인기 목사가 ‘겸손한 종’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다. 겸손은 인생의 원칙으로, 직분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개념이며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 김 목사는 ”예수님이 섬김의 본을 보이신 것처럼, 크리스천 리더쉽은 돌보고 섬기는 것“이라고 겸손의 리더쉽을 강조하고 ”겸손은 자신을 내려놓고 편안하며 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것으로 연약이 아닌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고, 겸손한 섬김에서 기쁨과 평화, 사랑의 힘이 나와 모두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며 ”변화하고 변화시키는 겸손의 리더쉽을 발하는 임직자들이 되라“고 당부했다.
 
임직식은 김인기 목사의 집례로 당회서기 심태섭 장로의 경과보고 후 임직자들과 교우들의 서약, 최진우 집사 안수, 악수례와 선포 등 순으로 이어졌다. 영어권 예배와 임직식은 12시부터 진행됐다. 이날 예배는 김인기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 416-626-6282, 416-626-77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