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전체 기사보기'에 해당되는 글 10920건

  1. 2011.06.26 [1500자 칼럼] For The Good Times
  2. 2011.06.26 [칼럼] 6.15와 6.25
  3. 2011.06.26 조선 전통 도자예술 토론토 나들이
  4. 2011.06.26 인터넷 도메인 ‘뭐든 맘대로’

[1500자 칼럼] For The Good Times

● 칼럼 2011. 6. 26. 16:22 Posted by Zig
며칠 전에 십 년 동안 인터넷을 모뎀을 쓰다가 하이 스피드로 바꾸었다. 나는 컴퓨터를 글을 쓰는 일과 이 메일을 보내고 받는데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어쩌다 친구가 보내온 노래를 들으려 하거나 사진을 다운로드 받을 때 너무 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 나는 노래를 잃어버리고 산 셈이었다. 먼저 찾아간 곳은 유 튜브였다. 노래를 제목만 두들겨도 나온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나도 몰래 두들긴 첫 제목이 ‘For The Good Times’였다. 한 때 내가 꽤나 좋아하던 노래였다. 특히 이민 초기에 그 노래를 좋아했는데. 아마 이 삭막한 이국 땅도 살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좋은 시절이 온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을지 몰랐다. 처음에 부닥친 문제는 이 노래를 한 두 명이 부른 것이 아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목소리는 분명 아니고, Johnny Cash, Perry Como를 듣다가 Ray Price(처음 듣는 이름이다.)가 부른 것이 나의 기억에 가장 가까운 것처럼 들렸다.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생각해보니 벌써 40년 전의 일이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그냥 뛰쳐나와 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마주친 극장 간판에서 서부의 사나이가 총을 들고 서있는 것을 보았다. 왠지 답답할 때여서 신나는 총 싸움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들어갔는데, 총 한 방 쏘았는지 안 쏘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의외로 조용하고 차분한 영화였다. 당시 서부영화가 그러하듯 주인공이 악당들을 모두 물리치고 말 타고 떠나는 영화가 아니라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을 차례로 잃어버리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간판에 속았다는 사실에 당연히 분노해야 했을 텐데, 나도 모르게 영화에 빨려 들어가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 영화 전체에 깔리는 차분한 음악 때문이었을지 않을까 싶다. 그 노래가 ‘For The Good Times’이었다. 

 “Don’t looks so sad, I know it’s over.
   But life’s go on and this world keep on turning......,
   For the good times.”

한국말로 번역하면 ‘좋은 시절을 위하여’ 또는 ‘좋은 날을 위하여’라고 생각했었다.
 “모든 일이 틀어져도 실망하지 않으리라, 언젠가 반드시 좋은 시절이 오리라.”는 말이 영화 속의 대사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십 년 만에 듣는 노래가 너무 좋아서 나는 듣고 또 듣는데, 뜻밖에 가사의 정확한 뜻은 그 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반대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언젠가 와야 할 ‘좋은 시절’이 아니라 오히려 내일이나 영원을 말하지 말고, 헤어져야 하는 연인에게 지금 좋은 시간을 가지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데도 나는 그 옛날 총소리 울리지 않는 서부영화를 보았을 때처럼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제는 가사보다 차분히 가라앉는 멜로디를 들으며, 모든 것이 영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실에다 제 멋대로 뜻과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감상에 빠진 나의 착각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오랜 착각에서 깨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아직도 나는 좋은 시절이 온다고, 와야만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까? 사람은 누구나 오늘을 살아가지만 오늘 속에 더 나은 내일이 오리라는 기대가 있어 오늘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에게 벌써 왔어야 할 좋은 시절은 보이지 않지만, 아니 언제 올지 막연하고 차라리 점점 멀어져 가며 영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언젠가는…….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칼럼] 6.15와 6.25

● 칼럼 2011. 6. 26. 16:20 Posted by Zig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불린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산화한 이들을 기리고 그 은혜를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현충일이 6월에 있음도 그 때문이리라.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현충일은 극우보수 진영의 궐기대회 날이 되어버렸다. 야당과 민족화해 세력을 싸잡아 종북세력이자 김정일·김정은 비호세력으로 단정해버리는 극렬 보수 인사들은 이번 현충일에도 진보진영과 야권을 비난하는 데 열중했다. 무상급식을 주장해도 빨갱이이고 4대강을 반대해도 친북이며 반값 등록금을 외쳐도 종북세력이다. 순국영령과 호국열사의 뜻을 독점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그들에게 부여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떤 근거로 민주주의와 민족화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반체제 친북이라는 레테르를 붙이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현충일의 참뜻이 일부 수구진영에 의해 이념적 공격과 색깔 공세로 덧씌워져 버린 셈이다.

6월의 현충일이 민주진보 진영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계기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6.15 남북공동선언의 정신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외부의 침략과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것이 현충일의 정신이라면, 남북의 화해와 한반도 평화를 통해 미래의 대한민국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6.15의 의미이다. 건국과 호국의 역사와 노력이 소중하고 귀한 것처럼 민족화해와 통일한국을 위한 노력 역시 소중하고 절실하다. 건국과 호국이 북한과의 대결과 경쟁을 통해 가능했다면, 미래의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통해 평화를 정착시키고 북한의 변화를 이뤄냄으로써 통일의 완성이 가능하다. 6.15의 대북 접근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우리 주도의 평화통일을 이뤄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북정책인 것이다.
따라서 건국과 호국의 정신이 6.15의 정신과 배치되고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왜곡된 역사인식이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역사적 퇴행으로 안내하는 과거지향적 편가르기의 전형이다. 결국 건국과 호국의 성과를 바탕으로 6.15의 정신이 결합함으로써 미래의 대한민국은 온전한 통일국가로 완성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6.15의 역사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올해 6.15는 그 어느 때보다 초라하고 침체된 분위기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가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대규모 방북단이나 남북 공동행사는 이제 가능치도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민족화해와 남북관계 개선 대신에 민족대결과 남북관계 파탄의 현실을 맞고 있는 현 시기 6.15의 힘은 그만큼 약해진 것이다. 오히려 지난해 이명박 정부는 6.25 발발 60주년을 전국가적 차원의 대대적 행사로 치러내고 각종 기념사업을 정부 예산으로 거행했다. 동시에 10주년을 맞았던 지난해의 6.15는 6.25의 그늘에 밀려 볼품없는 민간 차원의 행사로만 치러졌다.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내고 전쟁에서 사수해낸 6.25는 분명 호국과 순국의 핵심이자 토대이다. 6.25의 비극과 교훈은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전쟁의 원인과 책임을 놓고 북을 비난하고 규탄하는 것만으로 6.25가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 전쟁의 참혹함과 민족상잔의 안타까움을 재확인하고 미래 한반도 평화를 진전시키고 평화체제를 구축해냄으로써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6.25는 발전해야 한다. 결국 6.25의 미래지향적 극복은 6.15의 정신과 접목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가 고수한 ‘반6.15’의 접근, 즉 남북관계 중단을 통해 대북 제재와 압박으로 북을 굴복시키고 변화시키겠다는 희망적 사고는 완벽하게 실패했음이 이미 드러났다. 북은 괴로워하지도 굴복하지도 않았고 북한의 도발은 오히려 증가했으며 평화는 더더욱 위협받았고 북핵문제는 해결난망의 최악으로 치달았다. 6.25식 접근방법에 올인하는 이 정부의 대북정책이 백전백패의 총체적 실패로 귀결되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건국과 호국을 넘어 대한민국을 완성하고, 6.25의 되새김을 넘어 6.25의 아픔을 온전히 극복하기 위한 일관되고 합리적인 전략이 곧 6.15의 시대정신임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6.15의 힘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것은 결국 올바른 정치세력을 선택하고 정치권력을 교체하는 길 외에 현실적 대안이 없음 또한 실감하고 있다.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였던 6.10의 정신이야말로 우리에게 6.15의 정신을 되돌려주는 지름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김근식 - 경남대 교수, 정치학>

김경식 이조관요 8대손, 7월4~9일 총영사관 전시회


“섬세한 손과 우직한 발놀림으로 도예에 젊음을 불사르는 그는 해탈을 구하는 종교적 수행자 같다. 그의 작품들은 정녕 자유에 대한 그리움이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비상하는 몸짓으로 여겨진다”
어느 평자가 도예가 우남(牛湳) 김경식 씨와 그의 작풍을 소개한 글이다. 김경식 작가는 중요 무형문화재 105호인 부친 백산(白山) 김정옥 사기장(沙器匠)에게 도자예술을 전수받아 이조 청화백자와 분청사기의 맥을 잇고있는 문경 ‘염남요’ 의 2세 중견 도예가다.

김 작가의 조상은 조선시대 관아에서 쓰는 백자와 다기 등을 굽던 이조관요의 김취정 명인이다. 부친 김정옥 무형문화재가 7대, 자신은 8대째 가업을 계숭해 도자기를 빚고있다. 부친 김정옥 작가의 도자작품은 온타리오 왕립박물관(ROM)에도 전시돼 있다.
거장인 부친의 그늘에 가리울 법도 하지만, 그는 불가마에 젊음을 불사르며 전통 도예기술을 그대로 전수받아 조선백자의 전통을 뿌리내리고 있는 촉망받는 후계자라는 평을 듣는다.
그동안 25회 현대 미술대전 특선(2004), 한국 미술창작협회 대상(2004), 대한민국 전통에술 문화상(2005), 민족예술대상(2006, 글로벌 명장(2009) 등 많은 수상경력과 함께 5차례의 개인전과 일본 도쿄의 케이오(京王)백화점 전시회 2회, 베를린 한국홍보원 특별초대전 등도 가진 바 있다.

도예는 ‘영혼이 녹아드는 흙과 불의 조화’라고 비유된다.
김 작가는 청화백자의 고결미와 분청사기의 질박한 아름다움을 섬세하면서도 안정감 있게 표현해 조선 전통도예의 풍취를 그대로 살려내는 ‘오묘한 불꽃의 (도자)예술가’로 불리운다고 한다.
그가 모처럼 토론토에 들러 오는 7월4일(월)부터 9일(토)까지 일주일간 다운타운 총영사관(555 Avenue Rd.,) 전시실에서 도예전을 갖는다. 다기를 포함해 백자와 청자, 분청사기 등 작품 30여점을 전시한다. 벌써 ROM에서도 관심을 보이며 큐레이터가 방문할 것으로 전해진다. 오프닝 리셉션은 4일 오후 4시에 열리며, 관람시간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5시, 토요일은 오전 10시부터 낮 12시까지다.

< 문의: 416-636-7959 >

인터넷 도메인 ‘뭐든 맘대로’

● 토픽 2011. 6. 26. 13:38 Posted by Zig
주소관리기구 ICANN, 내년 1월12일부터 허용 결정
 
앞으로 인터넷 주소에 ‘.apple’ ‘.eco’ ‘.journalist’ 등 상표나 직업, 지명, 정치의제 등을 원하는대로 쓸 수 있다. 또 영어뿐만 아니라 어떤 언어로도 가능하다.
인터넷 주소를 관리하는 비영리단체인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아이칸)는 20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총회에서 인터넷 최상위 도메인을 사용자가 원하는대로 쓸 수 있도록 허용하는 안을 통과시켰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이는 1984년 인터넷 주소 체제가 성립된 이후 최대 변화이다. 아이칸은 새로운 도메인 이름 신청을 내년 1월12일부터 받을 예정이다. 인터넷 주소 체계가 이렇게 변경되면, 기업 등 단체는 물론이고 개인들도 자신의 이름에 원하는 최상위 도메인명을 붙일 수 있게 된다. ‘.seoul’ ‘.hankyoreh’, 혹은 ‘.한겨레’ 등의 도메인이 가능한 것이다. 또 ‘홍길동.의사’ 등의 주소도 가능하다. 이런 인터넷 주소 체계의 변경은 기업이나 단체 등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피터 스러쉬 아이칸 회장은 “인터넷에서 전혀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정부나 기업 등 단체들 사이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메인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도 자아낼 수 있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특히 정치적, 종교적 명칭을 둘러싸고 민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