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이, 신이 창조한 자연의 오묘함을 규명하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가 과학이라면 최근의 자연과학의 발달은 그 원래의 목적을 넘어 신의 영역인 창조의 과정에까지 간여하게 된 것 같다. 일반적으로 과학의 발달속도는 기하급수적이어서 현재의 과학 지식들의 90% 가 지난 10년간 발견 또는 개발되어진 것이라고 한다. 컴퓨터의 발전과 응용은 의료부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는 모든 병원에서 일반화 되어버린 CT scan, MRI 는 물론, 많은 기계들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함으로써 인간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의 국방성의 과학자들은 입으면 초능력을 발휘하며 백 kg 이 넘는 짐을 한 손으로 들고 거친 오르막 길을 재빠르게 달릴 수 있는 장비와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는 적외선 특수안경 심지어 공상과학소설 속의 투명외투 등의 기술을 개발 하였고 이미 실용화하고 있다고 한다.

그 동안 우리가 알던 육백만 불의 사나이나 원더우먼 등의 초능력인간의 이야기가 오늘날 현실이 되어 최근에는 사람들이 필요한 신체의 각 부분을 컴퓨터화한 인공 장기들로 대체하고 있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팔 없는 이가 이식수술 대신 인공 팔을 옷 입듯이 입으면 컴퓨터 칩이 뇌파를 받아 그가 뜻하는 대로 그 팔을 움직이게 하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사고로 다리가 절단된 여인이 마치 부츠를 사 신듯 몇 벌의 인공 다리 ( prosthetic limbs)를 사서 매일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갈아 신고 아무 불편없이 보통사람 보다 더 완벽하게 걷고 뛰는가 하면 이것 덕분에 키가 커졌음을 부러워하는 이들이 일부러 다리를 절단하고 인공다리를 달고자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는 황당한 소식들도 들려온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뇌에 컴퓨터를 이식하고 전기자극을 가하여 파킨슨병이나 강박신경증 등의 난치병들을 치료하는 방법이 실용화 되고있으며 이곳 캐나다에서도 뇌에 전자기(電磁氣) 자극을 주어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치료 하는 TMS (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 경두개 자기자극술) 등이 이미 실시되고 있다. 따라서 공상과학소설에서만 보았던 cyborg 등은 더 이상 공상 속의 이야기가 아니며 앞으로는 뇌를 포함한 인간의 신체를 기계로 치환할 때, 어디까지를 얼마나 기계로 바꾸었을 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등, 인간과 기계에 대한 정의 조차 모호해질지 모른다. 더 오래, 더 건강히 잘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니 최근에는 노화방지 및 수명연장에 대한, 그야말로 진시황이 찾던 불로장생의 기술들도 연구되고 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인공자궁이 실험단계에 있으며 앞으로 태어날 아기들을 원하는 스펙에 맞추어 아기의 눈, 머리, 피부 색 등 신체조건은 물론 지능, 성격, 재능 까지 선택하여 디자인하고 인공자궁에서 배양하여 전달하게 되는 아기공장의 산업화가 조만간 이루어지리라는 보도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과학의 발달은 신의 영역인 생명탄생에 인간이 관여하여도 되는가에 대한 물음,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놀랍게도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여성들의 반정도가 여성도 난자만 제공하면, 임신과 출산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남성처럼 사회활동과 여가를 즐길 수 있으므로 이러한 아기공장의 설립에 찬성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술을 개발하고 주창하는 이들은 과학기술이 우생학적인 면에서 장애아의 출산을 막고 우수한 인간을 계속 선택하여 인류발전에 공헌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명이란 우연한 배합에 의하여 태어나며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전제로 한다고 할 때 과연 이런 것이 없는 삶이 최선의 삶일까를 생각해보게 한다.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인 죽음을 거부할 때, 질병을 치료하고 환자를 고통에서 해방시킨다는 면에서는 환영받아 마땅한 의과학의 발전이, 태어날 때부터 계획되고 선택되어 삶을 완전히 지배한다면, 그 프로그램 대로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재미없을까? 우리의 삶은 살아가면서 우연히, 뜻하지않게 부딪히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 사건 사고들, 어려움에 도전하고 장애를 극복하는, 그러면서 더 기쁘고 슬프고 풍요롭고 행복하여지는 것은 아닌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천국에서의 삶이라면 지루함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겠다는 어떤 이의 말이 생각난다. 최근의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여 가는 과학 기사들을 접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자연의 작은 한 부분임을 인식하여 생로병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다가 떠나간, 신의 섭리에 순응했던 옛 선인들의 지혜가 더 절실히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내가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낡은 세대이기 때문인가?

< 김영제 - 시인, 시.6.토론토 동인 >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의 거짓말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이념적 편향성과 더불어 국사편찬위원장으로서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는 아들의 공공기관 특혜 채용과 관련된 의혹도 받고 있다.
유 위원장은 지난 4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 국정감사에서 뉴라이트 단체인 교과서포럼이 펴낸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자신의 강의에서 사용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교과서 사용 여부는 학문적 균형이 요구되는 국사편찬위원장의 자격을 가름할 판단 기준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위증을 한 것으로 29일 확인됐다. 김상희 민주당 의원이 한동대에서 제출받은 강의계획서를 보면, 유 위원장은 2008년 이 책을 주교재로 정해 한 학기 수업을 모두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내용으로 채웠다. 그는 지난 2일 국정감사에서도 ‘건국절 제정을 주장한 적이 없다’고 위증을 했다.
 
그는 아들의 미국 국적 취득과 병역 기피 의혹에 대해서도 “한국어를 못하고 취직도 안 돼 미국으로 갔다”고 했으나 역시 거짓말이었다. 아들(41)은 2006년 공공기관인 한국콘텐츠진흥원 입사 때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하다”고 적었으며, 그 전에 일한 <아리랑티브이>의 인사기록표에도 한국어 회화 수준이 ‘상’으로 적혀 있다. 홍상표 한국콘텐츠진흥원장은 이 아들의 채용과 관련해 “절차상 하자가 있었다”고 29일 시인했다. 당시 콘텐츠진흥원은 이 아들이 경력 요건을 전혀 갖추지 못했는데도 20명 중 1등으로 합격시켰다. 또 콘텐츠진흥원은 그가 입사 7개월 만에 개인 사정으로 퇴직하자 결원 채용 공고를 낸 뒤 그를 다시 채용했다. 이때도 경력 요건에 전혀 맞지 않았다. 유 위원장이 힘을 썼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유 위원장은 지난 15일 새벽까지 진행된 교문위 국정감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친북이고, 미국에 당당해야 한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은 반미’라고 강변한 바 있다. 그는 교과서포럼 고문으로 대안교과서 출판에 관여하는 등 역사 왜곡에 앞장선 뉴라이트 세력과 행보를 같이해왔으며, 이승만 전 대통령을 ‘아시아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찬양해온 극단적인 ‘이승만주의자’다. 애초부터 우리나라 유일의 국립 한국사연구기관이자 역사 교과서 검정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의 수장으로는 부적격자인 것이다. 거기에다 거짓말까지 일삼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 위원장의 임명을 밀어붙이고 역사 왜곡 교과서에 힘을 실어주는 등의 방식으로 ‘역사 쿠데타’를 꾀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먼저 유 위원장부터 경질하기 바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34주기를 맞아 도를 넘어선 찬양과 미화 발언들이 쏟아졌다.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 더욱 도드라지는 박정희 미화 움직임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살아있는 권력에 편승한 독재 미화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해칠 뿐이다.
서강대 총장까지 지낸 손병두씨의 박정희 추도사는 듣는 이의 귀를 의심케 한다. 그는 “서민들은 간첩이 날뛰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유신시대가 더 좋았다고 부르짖는다” “5.16과 유신을 폄훼하는 소리에 각하의 심기가 불편하실 걸로 생각한다” “조국 근대화의 길로 질주하는 따님의 국정 지지율이 60%를 넘었다”는 등의 궤변을 늘어놓았다. 하나같이 시대착오적이고 권력에 아부하는 듯한 발언들이다.
 
손씨 발언은 한마디로 독재 시대로의 회귀를 부추기는 것이다. 헌정을 유린한 5. 16 쿠데타와 유신체제가 지금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보다 낫다는 것이다. 총칼로 반체제 세력을 때려잡은 박정희 시대로 돌아가자는 식이다. 나치를 찬양하는 독일의 극우 파시즘 행태를 보는 것 같아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간첩이 날뛴다는 표현도 억지춘향식 해석이다. 지금처럼 북한 체제를 추종하는 세력이 남한 내에서 고립된 적이 없다. 먹고살기 바빠 서민이 독재를 그리워한다는 식의 발언은 서민을 모독하는 일이다.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적 소양을 폄훼하는 것이다.
경북 구미에서 열린 추도행사에서도 정치인들은 “구국의 결단” “아버지 대통령 각하” 등의 단어를 써가며 미화를 넘어서 권력에 아부하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서울 강남의 한 대형교회에서는 ‘제1회 박정희 대통령 추모예배’라는 생뚱맞은 행사까지 열렸다. 34년이 지난 지금에야 첫 추모예배를 했다니 무슨 곡절인지 알 수 없다.
 
지금 박정희 전 대통령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움직임은 상당부분 권력에 편승해 무언가 득을 보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정희를 추모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공과를 가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나라 경제를 일으킨 그의 업적을 부인하는 이는 별로 없다. 그렇다고 유신 독재까지 미화해서는 곤란하다. 옥석을 가리지 않고 유신이 더 좋았다는 식으로 마구 달려들면 본래 공적까지도 훼손될 수 있다.
박정희 미화 움직임이 증폭되는 저변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권위주의적인 통치 스타일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아버지 시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과거로 회귀하는 듯한 박 대통령의 모습이 우리 사회 전체를 과거로 되돌리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자신부터 아버지를 어떻게 모시는 것이 제대로 된 길인지 곰곰이 따져보길 바란다.


[칼럼] 자녀를 평생 데리고 살 것인가?

● 칼럼 2013. 11. 4. 20:32 Posted by SisaHan
언제부턴가 대학생들이 매우 온순해졌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가 그렇다. 사춘기를 거치지 않은 것 같아서 물어보면 초등학교 5학년 때 “잠시 거쳤다”고 한다. 중3 아들을 둔 제자가 “요즘 애들은 사춘기도 안 거치나요?”라고 물어온 적이 있다. 그는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이다. 그때 나는 답했다. “부잣집 아이들은 안 해. 강아지처럼 잘 따르지.” 또 다른 제자는 자기만 아는 남편에 질려서 이혼을 하려고 아이에게 의논을 했더니, 놀란 기색도 없이 아이가 곧바로 지금 사는 집에 누가 살 것인지만 알고 싶어 하더라고 했다. 자기만 아는 아이를 보고 기가 막혀버린 그는 지금 남편과 계속 살고 있다. 누군가의 표적이 될까 봐 조신하고, 적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늘 유순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 ‘생존’과 ‘안전’에 대한 강박을 가진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누가 날 낳으랬어요?”라며 부모에게 대들던 90년대 학번 형이나 언니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최근 <속물과 잉여>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는데 그 책에서 백욱인 교수는 “애비는 속물이 됐고 그 자식들은 잉여의 나락에” 빠졌다고 말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은 노크도 없이 방문을 덜컥덜컥 여는 부모가 참을 수 없어 부모에게 반항하고 또래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은 부모의 속물성에 편승한다. 운동은 자기들이 대학 때 다 했으니 너희는 공부만 하라는 아버지의 이중성에 놀라지만 그에게 순종하기로 했고, 중학교 때 록 공연에 데려가 준 ‘쿨’한 부모의 ‘관리’가 고맙다며 그들의 기에 눌려 산다. 이들의 삶의 목표는 안정된 직장을 얻고, 제때에 결혼하고 탈 없이 사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 구조로 보면 그들은 잉여적 존재가 될 확률이 아주 높다.
얼마 전 일본 도쿄에서 열린 ‘니트의 날’ 행사에서, 서른살이 가까워진 은둔형 외톨이는 대학 졸업 뒤 겨우 직장을 얻었지만 힘들어 퇴사한 뒤에는 집에 틀어박혀 산다고 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쫓아내려 했지만 잘 버텨내서 지금은 꽤 편하게 지낼 수 있다고 했다. 부모의 연금에 빌붙어 사는 이 친구에게 짓궂은 평론가가 물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려고? 자살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는 그렇게 되면 자살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사실 어떻게 자살할 것인지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청년의 모습은 일본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핫’한 운동권 부모와 ‘쿨’한 신세대 부모들은 자기 방식의 사랑과 투자로 자녀들을 열심히 키웠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들을 평생 먹여 살려야 할 것 같다. 당신은 그럴 만한 경제력과 널브러져 있는 성인 자녀를 보아낼 충분한 덕성을 쌓아놓았는가? 아니라면 지금부터 그들의 자활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주말 서울의 한 청소년 센터에서는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전환과 연대’라는 주제로 청소년 축제가 열렸다. 그 행사에서 청소년들은 폐자전거로 멋진 자전거를 조립하고, 버려진 목재로 의자를 만들며, 태양광 음식물쓰레기 건조기를 제작했다. 퇴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손작업 워크숍에서 소품들을 만들고 요리를 해서 임시 장터에서 팔기도 했다. 노동하는 몸을 발견하고 또한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자리, 그리고 함께하는 즐거움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아이를 평생 먹여 살릴 자신이 없는 부모들은 슬슬 동네에 작업장을 만들고 작업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동네 빈터에 펼쳐둘 평상을 만드는 목공방이나 자전거 공방을 협동조합으로 차려도 좋을 것이다. 청소년들이 자신이 만든 자전거로 동네 심부름도 다니고, 직접 만든 소품을 구청 열린 장터에서 팔고, 동네 어른들과 친해진다면 이들도 자신감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어른들은 아이를 좀비로 만드는 제도 교육을 바꾸어내면서 동시에 새 일거리들을 만들어내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 새 일거리란 실종된 ‘상호 돌봄의 사회’를 찾아내는 일, 그리고 지속가능한 삶을 가능케 할 산업, 곧 에너지와 물, 농사와 집짓기 등과 관련된 적정기술 분야가 아닐까 싶다.

< 조한혜정 - 연세대 교수, 문화인류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