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만남, 기약없는 작별…

● COREA 2014. 3. 4. 12:54 Posted by SisaHan

▶남북 이산가족 상봉 후 작별에 앞서 김용일 씨(82)가 북으로 돌아가는 누나 김민혜 씨(85)에게 엎드려 큰절을 하고 있다.


남북 이산 170가족 2박3일 1·2차 상봉

3년4개월 만에 열린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25일 끝났다. 이산가족들은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기약 없는 그리움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이번 상봉은 1985년 첫 행사 이래 스무번째(2000년 본격화 이후 19차)로 남북 170가족(1차 82가족, 2차 88가족) 700여명이 각각 2박3일씩 만났다.
 
이산가족들은 아침 9시부터 1시간 동안 금강산호텔 대연회장에서 마지막 만남인 ‘작별상봉’을 했다. ‘10분 뒤 단체상봉을 종료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남쪽 동생 김용일(82)씨는 북쪽 누나 민례(85)씨에게 큰절을 하며 “누나, 이렇게 다시 만나니 진짜 행복해요. 아프면 약 꼭 챙겨드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라고 말했다. 누나 민례씨는 “고맙다”며 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작별상봉이 끝나고 북쪽 가족들이 버스에 오르자 남쪽 가족들은 버스 옆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족들은 “아버지, 오래 사세요”라며 창문을 통해 맞잡은 손을 놓지 못했고, “오빠 없이 나 어떻게 살지?”라며 눈물지었다. 
이번에 혈육을 만난 이산가족들은 상봉의 정례화는 물론 상봉 이후 서신 교환을 통해 계속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또 아직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들은 생사라도 확인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 정부는 아직 상봉의 정례화나 생사 확인, 서신 교환 등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다.
 
이날 북쪽 동생 박창순(85)씨를 만난 남쪽 형 형순(93)씨는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을 만나는 일은 이제 내 생애에는 끝인 것 같다. 직접 만나지 못해도 자유롭게 연락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차 상봉 행사에 참석한 김명복(65)씨는 “이게 무슨 장난 같은 짓이냐. 2박3일 만나고 헤어지게. 남북 정부가 서로 화해해서 가족들이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
올해 1월 기준 남한의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모두 12만9287명에 이르지만, 실제로 가족을 만난 이는 1만2000여명에 불과하다. 5만8000여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6만여명은 여전히 가족의 손이라도 잡아볼 날을 고대하고 있다.
< 최현준 기자 >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3.1독립만세운동 재현 체험 행사 참가 시민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명칭살리기 추진위 결성

1938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절 기념식에서 “3.1운동은 프랑스 대혁명에 비교해도 손색없는 민족운동”이라며 3.1운동의 ‘혁명성’을 강조했다. 일제 식민지배에 대항한 독립운동이자 군주제에 반대하며 ‘민주공화국’ 이념의 씨앗이 된 반봉건 혁명이라는 규정이었다. 이후 3.1운동은 해방 뒤까지 ‘3.1혁명’으로 불렸다. 제헌헌법 초안에도 ‘3.1혁명’으로 표현됐다. 하지만 제헌헌법에는 결국 ‘3.1운동’이란 명칭이 사용됐다. 반봉건 투쟁의 의미가 축소된 것이다.
‘3.1혁명’이란 이름을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시민·사회·종교단체 회원들이 나섰다. 강만길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과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 김우전 전 광복회장 등 70여명은 26일 서울 중구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3.1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3.1혁명추진위) 결성식을 가졌다. 3.1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재정립하고 이름을 ‘3.1혁명’으로 바꾸려는 모임이다. 학계에서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논한 적은 있지만 3.1운동을 혁명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본격적인 운동은 이번이 처음이다. 3.1운동은 2019년 100주년을 맞는다.
 
3.1혁명추진위는 제헌헌법에서 ‘3.1운동’이라는 명칭이 확정되며 ‘군주제와의 혁명적 단절과 민주공화국 지향’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빠진 채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독립운동’으로 한정됐다고 지적했다. 이준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3.1혁명 당시 각계각층은 독립과 함께 군주제가 아닌 근대국가를 만드는 미래를 꿈꿨고, 이 정신을 임시정부가 이어받으면서 민주공화국 정치체제를 만들게 됐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3.1혁명을 민주와 평등이라는 근대국가의 가치를 추구한 민주혁명으로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제정된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은 ‘민주공화제’ 정체를 확실히 했다. 이후 1919년 9월 대한민국임시헌법, 1927년 대한민국임시약헌, 1944년 대한민국임시헌장 등에서도 민주공화국 이념은 유지됐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사학)는 “대한민국임시헌장에서 민주공화제를 규정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야 민주공화국이라는 용어가 헌법에 들어간 유럽보다도 이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결국 ‘운동’으로 규정된 데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제헌헌법 초안과 헌법기초위원회의 초안 등에선 ‘3.1혁명’으로 표현됐지만, 1948년 7월 속기록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혁명은 우리나라 정부를 전복하자는 것인데, 원수의 나라(일제)에 와서 있는 것을 뒤집어 놓는 것은 혁명이 아닌 항쟁”이라며 ‘혁명’ 규정을 반대했다. 여기에 일부 의원들도 힘을 보태면서 ‘운동’으로 정리됐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은 기미년 사건을 3.1혁명으로 파악했고, 해방 뒤에도 3.1혁명이란 용어가 더 빈번하게 사용됐다”고 말했다.
< 박승헌 기자 >


[1500자 칼럼] 베토벤의 초상화

● 칼럼 2014. 2. 24. 13:55 Posted by SisaHan
대학 1학년 때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베토벤을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어느 날 학교 앞 서점에서 로망 롤랑이 쓴 <베토벤의 생애>를 발견하고는 당장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이 나에게 줄 엄청난 감동과 흥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채. 그런데 책의 서문을 끝내자마자 나는 잠시 읽기를 멈춰야 했다. 우연히 아주 소중한 어떤 것의 단서를 발견했을 때처럼, 뒤이어 발견하게 될 그것을 감지하면서 숨을 가다듬어야 했던 것이다. “생활은 냉엄하다. 영혼의 평범함에 자기 자신을 떠맡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생활은 나날의 고통스러운 싸움이다. 그리고 흔히 그것은 위대함도 행복도 없는 고독과 침묵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우울한 싸움이다.” 서문의 이 한 귀절은 서서히 나의 방어벽을 허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두 구절들은 순식간에 내 심장을 관통하고 말았다. “사상이나 무력으로 승리를 거둔 사람들을 나는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내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음으로 위대했던 사람들 뿐이다.” “성공은 우리에게 중대한 것은 아니다. 참으로 위대한 것이 중요한 것이고, 위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베토벤의 생애>에 푹 빠져들게 된 나에게 베토벤은 내 정신세계의 한 우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해 여름방학, 고향인 익산에 내려가게 된 나는 베토벤 사랑앓이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익산에서 전주까지 직행버스를 타고 가서 액자에 담긴 베토벤의 초상화를 구해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초상화는 대학 시절 내내 나와 함께 자취방과 하숙방을 전전하게 되었다. 그 초상화에 그려진 베토벤의 모습은 이랬다. 헤어드라이어로도 도저히 길들일 수 없을 것 같은 사자 갈기 머리칼에, 굳게 맞물린 턱과 꼭 다문 입. 이 세상의 모든 비애와 홀로 맞서는 듯한 비장한 표정. 로망 롤랑의 표현을 빌자면, 감내(堪耐)하는 반신(半神)의 강철 의지의 표상이라고나 할까? 힘들 때마다 내게 용기와 영감을 주었던 이 초상화는 아쉽게도 결혼 후에 ‘꿈자리 사납다’는 불가사의한(?) 이유로 어느 박스 속으로 은퇴 당했다가 결국 분실되는 운명을 맞고 말았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다 보니 지금은 베토벤의 머리카락으로 DNA 검사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베토벤의 사망 원인에 대해 많은 추측이 오랫동안 난무해왔는데, 매독이 사망의 원인이었다는 것이 오랜 정설이었다. 그러나 러셀 마틴이 쓴 ‘베토벤의 머리카락(Beethoven’s Hair)’이라는 책과 동명의 다큐멘터리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에 근거해서 납중독이 사망원인이었다는 결론을 내어놓았다. 1827년 3월, 베토벤이 사망할 무렵, 15세의 독일계 유대인 페르디난트 힐러는 평소 존경하던 베토벤을 문상하러 갔으며, 며칠 후 그가 숨을 거두자 그 당시의 관례에 따라 그의 머리카락을 간직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 머리카락은 그의 아들에게 선물로 주어졌고,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마침내 경매장에서 이를 사들인 미국인 이라 브릴러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으며, 그의 분석의뢰로 인해 연구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머리카락은 우리 몸에서 뼈 다음으로 신진대사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이고, 따라서 세포 안에 담긴 다양한 정보들을 매순간 빠르게 기록한다고 한다. 특히 머리카락의 외부에는 큐티클이라는 코팅층이 있어서 안에 담긴 정보들이 빠져나가지 않고 간직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모발분석기술은 마약 복용 여부를 밝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 기술을 이용한 연구 결과, 정상인의 100배인 평균 60ppm의 납이 검출되었던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그 자체로서 매우 흥미롭고, 나아가 베토벤의 사망 원인과 그의 삶의 일부였던 만성 복통과 소화불량, 우울증 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베토벤의 음악이 단지 그가 겪고 있던 그런 고통을 표현한 것이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베토벤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초월하는 방법을 음악을 통해 표현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로망 롤랑은 쓰고 있다. “불행하고 가난한 병자인 고독한 한 사람의 인간, 마치 고뇌 그 자체와도 같은 인간, 세상 속에서 환희를 거부당한 그 인간이 스스로 환희를 창조해낸다. 그것을 전 세계에 선물로 주기 위해서.” 지금은 영영 잃어버리고만 그 초상화의 뒷면에 내가 연필로 옮겨 놓았던 다음 구절은 내 영원한 좌우명이 되었다. “고뇌를 뚫고 나가 환희에 이르라!” (Durch Leiden Freude.)

< 노승문 시인 - ‘시.6.토론토’동인,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칼럼] 안현수 대 빅토르 안

● 칼럼 2014. 2. 24. 13:53 Posted by SisaHan
러시아 소치에서 열리고 있는 겨울올림픽에서 안현수 선수가 빅토르 안이라는 이름으로 쇼트트랙 남자 1500m 동메달을 획득한 데 이어 쇼트트랙 10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개인으로서도 대단한 성취이지만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 기쁜 소식이다. 안 선수가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고 러시아로 귀화하게 된 직접적 이유가 빙상연맹의 고질적 문제로 올림픽 출전이 막혔기 때문이었다고 하니 무척 아쉬운 일이다.
안현수 선수가 빅토르 안이라는 러시아 국적 선수로 러시아의 메달 수를 하나 더 늘리는 것을 보면서, 국적을 바꾼 안 선수의 삶에는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 하는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을 해 보게 된다. 안현수 선수의 한국 국적은 그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는 순간 자동으로 소멸되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이제 그는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중간지대에 서 있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국적을 바꾸는 일이 간단치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안현수는 귀화의 조건으로 매우 좋은 대우를 보장받았고, 금메달을 딴 뒤 러시아의 국민적 환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귀화한 사람으로서 그가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문화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아 보인다. 안 선수가 동메달을 딴 뒤 기자회견에서 우리말로 질문에 답변을 하고 그의 여자친구가 통역을 했더니, 러시아 일각에서 귀화를 했으면서도 왜 러시아말을 쓰지 않느냐고 힐난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갈 안현수는 아마도 다문화인으로서 여러 문화 장벽을 맛보게 될 것이다.
며칠 전 하와이대에서 ‘한인 이민과 다문화’라는 주제로 국제 콘퍼런스가 열렸다. 그곳에는 함경도 출신 이민 5세인 중국 옌볜(연변) 학자, 카자흐스탄 한국계 4세 교수, 하와이의 한국계 이민 3세, 그리고 미국, 중국, 한국, 일본 등 각지의 이민과 관련한 학자와 전문가들이 모여 한국인이란 무엇인가를 논의했다. 보통 이민이라고 하면 이민 1세나 2세를 떠올리기 쉽지만, 세계의 한인 이민들 중에는 이민 3세, 4세, 5세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정체성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꽤 거리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1900년대 초반에 이주한 초기 이민의 후예는 한국과 단절된 상황에서 살아오면서 정체성에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콘퍼런스에 참여한 한 발표자는 논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밝힌다며, “만약 운동경기에서 한국팀과 미국팀이 맞붙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아마 미국 깃발을 들고 응원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다양한 층위의 한인 사회를 고려하면 그들에 대한 효율적 정책을 마련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외국인의 귀화나 다문화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기고 있다. 우리 국적법 제5조는 외국인이 대한민국 귀화 허가를 받으려면 “국어능력과 대한민국의 풍습에 대한 이해” 등 “국민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규정하여 매우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외국인 이주노동자, 다문화 가정 구성원, 또는 탈북 이주민 등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응도 여러 면에서 편견과 차별의 요소를 갖고 있다. 전통적인 우리 사회의 구성원과 다른 사람들을 널리 용인하고 그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잡고 살 수 있도록 좀 더 넉넉한 다문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빅토르 안이 러시아 사회에 동화되어 살아가게 될지, 어느 시점엔가 다시 한국인으로 돌아오게 될지, 아니면 러시아에 살지만 정신적으로는 한국인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빅토르 안의 이민자로서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무척 궁금하다.

< 백태웅 - 미국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