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무리수의 끝이 걱정이다

● 칼럼 2013. 9. 23. 14:36 Posted by SisaHan
채동욱 검찰총장 축출은 박근혜 정권의 현재와 미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뻔한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특정 언론과 공모해 채 총장을 쫓아내려 한 것은 박 정권에 그 일이 그만큼 중차대한 사안이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박 정권의 순항 여부도 좌우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통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아버지한테서 보고 배운 게 ‘정치’가 아닌 권위주의적 ‘통치’였으니 크게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의 비민주적인 국정 운영 방식은 갈수록 강화되는 듯하다.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몰아낸다는 것은 단순하게 넘길 일이 아니다. 감사원장과 경찰청장도 임기 중 중도하차시켰다. 이들의 임기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과 법률체계를 깔아뭉갠 것이다. 이는 5년 임기가 보장된 대통령도 임기 중에 그를 선출한 국민들에 의해 쫓겨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는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만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얘기일 테니까.
 
채동욱 총장을 축출함으로써 박 대통령은 국가 권력기관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박 정권 출범 이후 눈에 거슬리는 권력기관은 그나마 검찰이 유일했다. 검찰까지 손아귀에 넣었으니 권위주의적인 박근혜 정권의 실질적인 출범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국정원, 검찰, 경찰, 감사원 등 모든 권력기관을 완전히 장악한다고 국정 운영이 순조롭게 이뤄질까.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가 어떻게 종말을 맞았는지를 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유신독재 때는 사실상 종신 대통령에다 고문이나 폭행·투옥 등 물리적인 폭력을 맘껏 쓸 수도 있었다. 영원할 것 같은 그런 유신독재도 박정희가 수하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도 한참 달라졌다. 박정희식 통치로 다스려질 대한민국이 이미 아니다.
박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국정 운영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는 화사한 미소와 아전인수식 미사여구 몇 마디로 될 일이 아니다. 헌법과 법률에 규정된 대로 각 정부기관에 권한과 책임을 넘겨주고 자율적이고 실질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중립성과 독립성이 생명인 감사원과 검찰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권력기관만 완전히 장악하면 마음대로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착각이고 오만이다. 오히려 ‘아버지의 비극’을 다시 초래할 독이 될 수 있다.
 
채 총장 축출은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이 박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은 18대 대선의 공정성 여부와 직결된 사안이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대통령은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 사건은 최근 점차 그 핵심이 드러나는 중이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재판이 진행되면서 국정원과 경찰, 그리고 새누리당과의 연결고리가 추가로 밝혀진 것이다. 검찰이 국정원 수사를 제법 꼼꼼하게 해놓은 덕분이다. 앞으로 더 직접적인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지난 18대 대선 불복 움직임이 본격화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더 이상의 국정원 대선 개입 증거들이 공개되는 걸 막아야 하는 시급한 과제가 박 정권 앞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청와대가 조급하게 무리수를 두어가며 검찰 총수 제거 작전에 나선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박 정권의 앞날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건을 제대로 풀지 않으면 국정원 개혁도, 검찰의 독립성도, 정상적인 국정 운영도 기대할 수 없다. 
국정원 대선 개입 전모를 소상히 밝히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겠다는 쪽으로 박 대통령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답이 없다. 그런데도 어렵게 열린 ‘3자 회담’에서 아무런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자신의 무관함만 되풀이 주장한 것은 유감이다.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박 대통령이나 국민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한겨레신문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


[1500자 칼럼] 오래된 수첩

● 칼럼 2013. 9. 16. 18:48 Posted by SisaHan
나는 비겁하다고 지인들에게 가끔 얘기한다. 누구나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은 나를 위로해준다. 하지만 나는 비겁하다. 오래된 기억의 수첩을 들춰보면 내가 비겁한데는 정당한 이유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군대생활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것은 무의식으로 숨어 나를 괴롭히곤 한다. 
얼마전 모국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세포들이 감전된 듯 한순간 정지됐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옛 기억이 떠올랐다. 
허일병 조작살인사건이란 이름으로 30년을 끌어온 법정 싸움이 그 뉴스였다. 
지난 1984년 발생했던 사건을 살펴보자. 이 사건을 파헤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4월2일 중대본부에서 술파티가 열렸다. 당시 모 중대장이 “라면이 맛이 없다”며 모 선임하사를 질책하자, 문제의 하사관은 만취상태에서 중대본부를 나와 행패를 부리다 허일병을 향해 우발적으로 자신의 M16 소총을 발사, 허일병은 오른쪽 가슴에 총을 맞고 숨졌다. 당시 사건 은폐를 위해 대대급 간부까지 참여한 대책회의가 열렸고, 허일병의 피살현장을 목격한 사병들을 대상으로 “알리바이 조작” 등을 위한 특별교육까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법원은 그러나 이것을 자살이라고 판결했다.
 
이 사건을 내 경우에 대입해보자. 
1978년 여름 내가 복무하던 서울의 한 부대에서 취침점호시 갓 전입한 이등병이 사망했다. 점호시 나는 행정반에 있었고 얼마후 1소대 내무반장이 찾아와 한 이등병이 죽은 것같다고 전했다. 장시간 축구를 해도 멀쩡했던 내무반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사태파악에 나섰다. 한 이등병이 운전업무후 점호시간 조금 전에 도착했고 한 고참병이 군기를 잡기 위해 복부를 가격했다는 것이다. 몇 대 맞은 이등병은 갑자기 얼굴이 파랗게 질려 침상에 쓰러졌다. 이때 당직사관이 점호를 위해 내무반에 들어오는 바람에 이등병 얼굴을 담요로 덮었다. 그리고 난 후 다시 확인해보니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부대는 발칵 뒤집혔고 퇴근한 중대장이 돌아오고 곧 대대본부와 보안대에서도 요원들이 파견됐다.
물론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피해자는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정리됐다. 모든 중대원들에게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특별교육이 실시됐다. 병사가 한 명 사망하면 기록하고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16가지가 넘는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사고를 낸 고참병은 특별 감시 대상이 됐다. 혹 스트레스로 인해 사고를 칠 수도 있다는 걱정때문이었다. 그후 그는 외박을 나간 뒤 며칠씩 부대복귀를 하지 않아 부대간부들의 가슴을 조이기도 했다. 그는 제대 후 시청의 공무원으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사람을 죽인 죄책감으로 힘들게 살고 있을 것이다.
 
허일병을 쏜 것으로 알려진 하사관은 어떻게 됐을까. 사건발생 직후 아무 징계조처도 당하지 않고 사단내 다른 중대로 전보된뒤 승진해 90년초 상사로 예편했고, 이 하사관은 위원회 조사에서 “술에 만취해 총을 잡은 것 같지만 그후 기억이 없다”고 진술했다.
S.프로이트는 의식에 있어 고통스러운 것, 허용될 수 없는 것, 온당치 못한 것은 억제되어 무의식의 세계로 추방된다고 말했다. 
나는 내게 묻는다. 아무에게도 말못했던 이 사건을 이제서야 말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폐쇄된 한 조직의 일사분란한 행동에 그냥 따라갈 수 밖에 없었던 불쌍한 나를 용서해본다. 그 무의식을 끌어올려 화해를 청한다. 내가 비겁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어쩔 수 없었던 것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폭력이 있다 나도 폭력 앞에서는 아버지! 하고 무릎 꿇는다 멍텅구리 배안에선 어쩔 수가 없다.”
-이성복 시인의 시 <멍텅구리 배 안에선> 부분.

< 김형주 - 시인, 해외문학 신인상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부이사장 >


남북관계가 조금씩 풀리면서 6자회담 재개 문제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관련국들이 이견을 해소해 회담을 빨리 시작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을 때다.
6자회담 주최국인 중국은 회담 조기 재개와 관련해 미국 쪽 동의를 얻으려고 시진핑 국가주석까지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은 분위기 조성을 위해 9.19 공동성명 8주년 하루 전인 18일 베이징에서 참가국 모두가 참여하는 반관반민(1.5트랙) 회의를 열자고 제안한 상태다. 앞서 우다웨이 외교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는 8월 말 북한을 방문해 의견을 조율한 바 있다. 중국의 이런 움직임에 발맞춰 미국도 지난주부터 대니얼 러셀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글린 데이비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한·중·일 등 관련국을 순방 중이다. 언뜻 보면 2008년 12월 이후 중단된 6자회담이 곧 재개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회담 조기 재개를 바라는 북한·중국·러시아와 북한의 ‘비핵화 선 조처’를 요구하는 한국·미국·일본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러셀 차관보는 7일 “협상 재개가 완전한 비핵화에 이르는 신속한 로드맵(청사진) 도출에 성공할 것이라는 확실한 신호를 바란다”고 밝혔다. 회담 재개보다 북한의 구체적인 행동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미국 정부의 이런 정책기조는 지난 몇 해 동안 북한 핵 문제를 악화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전략적 인내’의 연장선에 있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지금 시리아 군사개입 문제에 몰두하고 있어 대북정책과 관련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도 회담 재개에 소극적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최근 올해 안에 6자회담이 재개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조기 회담 재개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부가 베이징 반관반민 회의에 고위 관리를 보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민간 전문가의 참석을 만류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돈다. 회담 재개 동력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리려는 무책임한 태도다. 과거 경험에서 보듯이 우리나라가 적극적 의지를 갖고 미국·중국 등 참가국들을 추동해야 핵 문제가 진전될 수 있는데도, 정부의 행태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위험요소만 관리하며 기다린다는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는 북한 핵 문제를 풀 수 없다. 대북 압박에만 기대서는 사태가 오히려 악화하기 쉽다는 점도 분명하다. 북한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핵 문제 해결이라는 6자회담의 핵심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회담 재개는 논의 진전의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정부와 미국은 모처럼 다가온 회담 재개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말기 바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큰아들 전재국씨가 10일 기자회견을 열어 아버지의 미납 추징금 완납을 위해 가족들의 재산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대법원 확정판결로부터 무려 16년이 흐른 뒤에야 감춰둔 재산을 내놓겠다고 했으니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것도 검찰 수사의 칼날이 압박해 들어오고 여론의 비난이 홍수처럼 밀려들자 마지못해 두 손을 든 인상이 짙다.
이번 추징금 완납은 크라우드소싱을 통해 국민적 관심을 이끌어낸 <한겨레>를 비롯한 언론의 집중보도와 특별팀까지 편성한 검찰의 집요한 추적이 이끌어낸 성과다. 권력을 이용한 부당한 축재는 결국 꼬리 잡히고 만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긴 것으로, 그동안 환수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낸 민심의 승리라고도 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남아 있다. 우선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탈세 등 여러 불법행위를 그대로 둘 것이냐 하는 점이다. 검찰은 “원칙대로 수사하되 자진납부 등 여러 정상을 감안해 처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선처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래선 안 된다. 부정축재한 비자금을 종잣돈으로 해서 불린 재산이 1조원에 이른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천문학적 축재를 해놓고도 “29만원밖에 없다”며 국민을 우롱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돈을 감추는 과정에서 온갖 불법을 다 저질렀음도 드러났다. 불법행위는 법대로 엄정 처리함으로써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이는 것만이 권력형 비리의 재발을 막는 길이다.
조세회피처에 유령회사를 두고 돈을 빼돌렸다는 의혹을 받는 전재국씨와 미국 캘리포니아에 1000억원대 포도주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는 셋째아들 전재만씨 등의 해외재산이나 금융재산은 이번 납부재산 목록에 하나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대신 서울 연희동 집과 경남 합천군의 선산을 목록에 올려놓았다. 선산까지 팔아서 납부하는 모양새를 통해 여론에 호소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그러나 2004년 둘째아들 전재용씨 소유의 채권 73억원이 아버지의 비자금으로 드러났듯이 감춰둔 금융자산과 해외재산이 여전히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만일 부정축재한 종잣돈을 이용해 불린 재산이라면 추징금 완납과 별개로 이 역시 어떤 형태로든 사회에 환원하는 게 맞다.
그동안 열심히 수사해온 검찰은 이런 점들을 두루 고려해 마지막까지 엄정한 잣대를 유지해 유종의 미를 거두기 바란다. 또 이번 기회에 차명계좌를 개설해준 금융기관만 처벌하게 돼 있는 금융실명제법이나, 체납하더라도 가산금이나 이자가 붙지 않는 형사소송법상의 추징금 제도 등도 손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