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종이 편지와 문자

● 칼럼 2013. 10. 6. 15:09 Posted by SisaHan
DAY 1: “아빠~~~” “우리딸? / 잘 잤어?” “네!! 잘 잤어요! / 6:45에 일어나서 / 샤워하고, 준비하고, 정리하고, 아침 먹고 / 인제 orientation 가려고~” “엄마에게 전화하든지” “지금 가야돼~~~ / 이따가 저녁에 할께!!” “카톡 전화 가능해? 물어볼 거 있는데” “응응 / 아니 / 내가” “Calling…” “Call ended” “스카이프로 해” “오케” “지금 phone wifi 안돼”

DAY 2: “Package 보냈다. 목요일쯤 도착할거야.” “♥ Okok thank u appa” “사랑해” “나도” “♥♥♥” 

DAY 30: “Also 돈 부쳐주는 거” “Will send you money asap / Too busy / Still at work / No dinner yet” “AWE DADDY / Eat!!!” “Want to but...” 

둘째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지 한 달이 지났다. 위의 대화는 필자가 딸아이와 주고 받은 문자의 내용이다. 사적인 내용이라 낯이 뜨겁긴 하지만 글의 취지를 전달하기 위해 인용했다. 
옛날 같으면 유학간 자녀는 학자금을 보내달라며 ‘부모님 전 상서’로 시작하는 긴 편지를 썼을 것이고, 부모는 집안살림이 거덜날지라도 ‘다른 건 신경쓰지 말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라’는 격려의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런 편지들은 몇 시간씩 공들여서 차분하고 정겹게 쓰여졌고, 인간적인 체취만이 아니라, 문학적인 향기까지도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학창시절에 주고 받은 편지들을 간직하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빛 바랜 편지들을 읽을 때 받게 되는 추억과 그리움과 감동을 익히 알고 있으리라. 그러고 보면 요즘 세상에도 종이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정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고 서로 인간적인 정을 주고 받는 방법도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소위 ‘문자 (text messages)’라는 것이 처음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미래의 의사소통 수단을 만들어낸 첨단 기술의 혁명이라는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맞춤법과 문법을 무시하고 짤막하게 줄어든 은어적 표현들이 아름다운 우리 글을 파괴하고 있다는 걱정어린 시각도 있었다. 문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던 필자는 당연히 후자에 속했으며, 그런 추세를 ‘aphasia (특정 두뇌 영역의 손상에 기인하는 언어 장애 현상)’라고까지 생각하며 강한 반발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바뀌기 시작했고, 지금은 보다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필자의 지금 생각은 이렇다. 편지는 편지대로, 문자는 문자대로 각자 차지하는 영역이 다르다고. 딸아이를 미국에 보내놓고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편지를 읽을 때 내 가슴은 얼마나 벅차고 기쁠 것인가! 또 정성들여 쓴 답장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에 갈 때 내 발걸음은 얼마나 흥분되어 있을 것인가!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딸아이를 미국 현지에 내려놓고 돌아온 다음날 아침에 위에 인용한 문자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잘 지내는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3일이면 도착하는 속달우편물은 잘 받았는지, 돈은 충분히 남아 있는지, 이런 것들을 바로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 일인가! 종이 편지가 인간적인 체취를 듬뿍 전해주는 좋은 것이라고 해서 어찌 문자(text message)를 필요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문자가 편리하다고 해서 모든 글을 문자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지난 번 이 칼럼에 실은 글에서 ‘순간 만족(instant gratification)’과 ‘지연 만족(delayed gratification)’을 두고 ‘그릇된 이분법(false dichotomy)’에 대해 얘기했었다. ‘종이 편지’와 ‘문자’도 같은 경우가 아닐까? 어쩌면 욕심을 부려서 둘 다 가지는 것이 해결책이겠지만, 문자도 보내고 이메일도 보내고 전화도 하는 딸아이에게 종이 편지를 받는 것은 아쉽지만 기대하지 못할 것 같다. ㅎㅎ

< 노승문 - 시인, ‘시.6.토론토’ 동인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국방대에 교육 파견 중인 외교부 소속 고위 공무원이 국방대 이전과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에 대해 ‘종북세력 음모’ ‘적화통일 사전작업’이라는 글을 올려 충격을 주고 있다. 더욱이 이 외교관은 일부 군인·공무원들과 이미 ‘국방대수도권존치위원회’라는 비공식 조직을 결성했고, 조만간 국방대 안의 사무실에서 현판식까지 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먼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정부 정책에 무조건 빨간 색깔을 입혀 비난하는 ‘색맹증 중환자’가 어떻게 고위 공무원까지 승승장구했는지 공무원 인사제도의 허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법절차를 무시하고 집단적으로 비공개 조직을 만들어 정부 정책 반대운동을 펼치겠다는 고위 공직자들의 기강해이와 집단이기주의는 엄중히 처벌해야 마땅하다.

최근까지 주러시아대사관 공사참사관 겸 총영사를 지내고 귀국한 이원우 외교부 국장이 국방대의 ‘안보’ 과정 인터넷 클럽에 올린 ‘국방대 지방 이전에 대한 저의 생각’이란 글의 주장과 논리는 두 가지다. 하나는 국방대 지방 이전의 의도가 종북세력이 “민간의 참여가 없는 쓸쓸한 국방대를 만들어 군에 대한 민의 소통 길을 차단하려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미군에게 전작권을 내놓으라고 한 것은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우리 국민을 속이면서 교묘하게 미군의 자존심을 건드려서 철수하게 하는 전형적인 공산주의자들의 수법”이라는 것이다.
둘 다 너무 유치하고 한심한 논리여서 반박하기조차 부끄럽다. 다만, 국방대의 지방 이전이 군과 민의 접촉을 소원하게 해 군민을 이간하기 위한 것이라면, 육해공군의 본부가 서울이 아니고 계룡대로 이전한 것은 왜 문제를 삼지 않는지 묻고 싶다. 또 전작권 환수에 대해서도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걸 지적해 둔다. 이 국장은 “어려운 남의 나라를 도와주러 간 군대는 당연히 자신이 전작권을 가지며 세계 최강의 미국의 경우는 더욱이 그렇다”고 했는데, 우리나라 말고 세계 어디에도 자신의 전작권을 외국 주둔군에 맡기고 있는 나라는 없다.
 
이 국장 등의 집단행동은 서울 소재 국방대 논산 이전 계획을 저지하려는 세력의 집단이기주의에 편승하고 거기에 ‘전가의 보도’인 색깔론을 동원한 셈이다. 이들이 국방대에 사무실까지 내기로 했다니, 국방대 쪽이 뒤에서 관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국방부가 조사를 통해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응분의 조처를 취하겠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이번 일로 군민 화합이 깨지고 공무원에 대한 민의 불신이 더욱 커지게 됐다는 사실이다.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이 박근혜 정부가 요구하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재연기의 대가로 우리나라의 미국 미사일방어(MD) 참여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그는 제45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 참석차 한국으로 오는 도중 전용기에서 수행기자단과 한 기자회견에서 전작권 환수를 위해 한국군이 갖춰야 할 역량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미사일방어”라고 밝혔다. 미 고위 관리가 우리의 MD 참여를 전작권 환수 문제와 하나로 묶어 협상하겠다는 의사를 이처럼 명확하게 표현한 것은 처음이다.
 
반면, 그는 박 정권이 매달리는 전작권 환수 재연기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릴 상황이 아니다”고 한발 물러섰다. 전작권 재연기를 강하게 요구하는 우리의 입장과 미국 안의 재연기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이용해, 미국의 전략 이익을 최대로 확보하겠다는 계산으로 짐작된다. 이런 흐름은 MD 참여뿐 아니라 최근 무산된 차기전투기(FX) 사업과 내년부터 적용할 제9차 주한미군 방위비분담 특별협정(SMA) 협상 쪽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크다. 사실상 보잉사의 F-15SE로 굳어졌던 차기전투기 사업이 최근 막판에 무산된 데는 중국·러시아 등을 견제할 스텔스기 도입을 원하는 미국 쪽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전작권 협상이 미국의 의도대로 흘러갈 경우, 우리 안보 환경은 전작권이라는 주권 확보도 하지 못한 채 중국·러시아 등만 자극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바로 우리가 미·일 대 중·러의 강대국 대결의 최전선에 서게 됨을 의미한다. 미국과 동맹하고 중국과 협력해 북한을 변화시키겠다는 박 정권 대북정책도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미국이 말하는 MD와 한국형 엠디(KAMD)는 다르다는 한가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다. 박 대통령도 1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킬 체인과 한국형 미사일방어 체계 등 핵과 대량파괴무기 대응능력을 조기에 확보하겠다”고 말했다. 미사일에 대한 기초 상식만 있어도 북한이 쏘는 미사일이 우리 상공에 도달하는 6~7분 사이에 어느 미사일이 어디로 떨어질지 알아낼 수 있는 기술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다 아는데도 말이다.
정부는 미국이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밝힌 이상 미국형, 한국형 MD라는 가공의 개념을 방패로 내세우지 말고, 미국이 참여하는 MD에 참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절대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답은 막대한 재정 투입과 미-중 대립을 초래하는 미국 주도의 MD 참여 요구에 단호한 반대 입장을 밝히는 것이다.


미국발 경제위기가 지구촌 전체로 확산된 지난 6년 동안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집권 정당이 바뀌었다. 위기의 구조적 요인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기도 한 현상이다. 그 와중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기민당의 의석수를 크게 늘리며 3선에 성공했다. 경제가 다른 나라보다 순항하는 이유가 크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한마디로 ‘엄마 리더십’으로 불리는 중도적 실용주의의 승리다. ‘유연성, 포용, 신중함’이 그를 수식하는 수사다. ‘뉴라이트’나 ‘네오콘’과는 구별되는 ‘통합형 보수’다.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켈과 가깝다고 하지만 두 사람은 여성이라는 점 이외에 공통점이 거의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유연성 대신 대결, 포용 대신 위계(또는 지배), 신중함 대신 밀어붙이기(본인은 ‘원칙’이라고 할 것이다)를 앞세운다. 게다가 이런 경향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불과 취임 7개월 만에 자신의 복지 공약 가운데 핵심인 기초연금, 4대 중증질환, 무상보육 등의 사안에서 공약 파기를 공식화하고 있다. 여기에 사회적 차원의 진지한 토론도, 야당과의 타협도 없다. 정부가 해직자의 조합원 가입을 이유로 전교조의 노조설립 취소 수순에 들어간 것은 노동 문제에서도 대결 기조로 가겠다는 선언이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역사전쟁’을 사실상 주도하는 사람도 박 대통령이다. ‘역사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불을 지폈던 그는 뉴라이트 성향의 부실 교과서가 큰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이 교과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을 새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대결과 지배의 무대가 역사관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국가정보원의 불법 대선 개입 사실이 속속들이 드러났는데도 사과와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는 야당에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민주당이 서울시청 앞에 천막당사를 설치하고 54일 동안 장외투쟁을 했다고는 하지만, 민주당의 요구 내용은 박 대통령에게 ‘부탁’하는 수준의 온건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야당이 자신의 정통성과 권위에 부당하게 도전하는 것처럼 야당의 굴복을 요구해 왔다.
 
남북 관계도 다시 기약 없는 냉각기에 들어갔다. 현상적으로는 예정된 이산가족 상봉을 북쪽이 일방적으로 연기시킨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 이면에는 대결과 지배를 추구하는 정책기조가 깔려 있다. 새누리당 소속 안홍준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엊그제 “최근 개성공단 가동 재개 협상에서 7차 회담까지 진행된 끝에 북한이 재발 방지에 합의한 것은 북한으로서는 굴욕에 가까운 것이었다”며 “박근혜 대통령 취임 뒤 소신 있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지금은 주도권이 한국에 있다”고 했다. 북쪽이 남쪽의 ‘하위 주체’임을 분명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북 관계도, 핵 문제를 풀기 위한 대화도 필요하지 않다는 이런 태도는 정부 안에서 일반적이다.
재벌과의 관계에서는 위계가 정반대다. 재벌들이 집요한 로비로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 경제민주화 공약들이 후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대통령이 직접 재벌 총수들을 만나 고개를 숙이고 투자를 ‘구걸’하기에 이르렀다.
 
박 대통령은 8월 초 청와대 개편을 전후해 여권 안 수직적 위계질서 구축을 끝내고 이제는 이를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려 한다. 앞서 이명박 정권은 ‘한국 사회 전체의 시장화’를 추구했으나 거센 역풍을 맞았다. 현 정권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굴복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명박 정권보다 더 폭력적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대에 형성된 보수 본류의 본색이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다.
메르켈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 폐기를 선언해 녹색당 바람을 가라앉혔고, 22일 치러진 총선에서는 가정복지 정책 강화와 징병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어 사민당의 표를 가져갔다. 박근혜 정권은 이와 반대로 낡은 보수의 본색을 강화해 나간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당분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큰 대결과 갈등을 불러 부러지거나 내파할 가능성이 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생한 사례다.
< 김지석 -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