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여만명의 재외동포는 우리나라의 큰 자산이다. 근현대 민족사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했고, 앞으로 통일 과정에서도 이들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하지만 재외동포는 우리가 책임져야 할 부채이기도 하다. <한겨레>가 연재한 ‘카레이스키, 눈물짓는 코리안드림’ 기획은 고려인(카레이스키)의 어려운 삶의 모습과 우리의 책임이 뭔지를 잘 보여준다.
 
고려인은 옛소련 지역에 사는 우리 동포를 말한다. 50만명이 넘는 이들의 역사는 재외동포들 가운데서도 특별하다. 150년 전인 1863년 러시아 극동지역의 연해주에서 첫 마을을 만든 이들은 20세기 초반 항일운동의 한 축이었다. 의병활동을 한 고려인이 11만명에 이르며, 안중근 의사가 의거 준비를 한 곳도 연해주의 고려인 신문사였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명령에 따라 20만명가량이 수천㎞ 떨어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2만여명이 숨졌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뒤에는 이들 가운데 10만명 이상이 다시 러시아·우크라이나와 우리나라 등으로 이주했다.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은 디아스포라(이산)다.
우리나라에 정착한 3만여 고려인들의 삶은 고달프다. 대다수가 저임금·3D 직종에서 근무하고, 대부분 우리말에 익숙하지 못해 많은 불편을 겪는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재외동포 가운데 후발자인데다 비슷한 직종에서 흔히 마주치는 조선족보다 규모가 적어 사회적인 발언권도 낮은 편이다. 그러나 돌아갈 곳조차 마땅찮은 이들은 코리안드림을 이루기 위해 꿋꿋하게 살아간다. 경기도 안산에는 3000여명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을 정도다. 대학에 진학하는 젊은이도 늘어나 최근 열린 서울대 후기 졸업식에서는 고려인 3세 홍야나씨가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했다.
 
고려인들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안산 다음으로 고려인이 많이 사는 광주에서는 이들의 안정적 자립을 돕기 위한 조례가 추진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정부 대책은 미흡하다. 잘사는 동포를 우대하는 정책 탓에, 3년마다 갱신만 하면 사실상 영주할 수 있는 재외동포(H4) 비자를 고려인들이 얻기는 쉽지 않다. 이주 역사가 길다 보니 동포로서 정체성을 인정받는 데서도 불리하다. 우리말 교육 프로그램조차 결혼이주여성에 초점을 맞춰 주로 낮 시간에 편성돼 있어 고려인들에게는 기회가 제한된다. 재외동포들을 모두 보듬는 것은 모국인 우리나라의 책무다. 사실상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아온 고려인들의 설움은 이제 사라져야 할 때가 됐다.


[칼럼] ‘부통령’ 김기춘

● 칼럼 2013. 9. 23. 15:13 Posted by SisaHan
“우리도 남아공처럼 과거의 잘못을 모두 용서하고 화해해야 나라가 앞으로 나가지 않겠어요.”
“그렇죠. 그런데 남아공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먼저 고백해야 용서해준다면서요.”
“….”
 
어색한 침묵 속에 이 얘기는 짧게 끝났다.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 야당 의원 김기춘이 몇몇 기자들과 나눈 대화의 한토막이다. 1998년 정권교체 뒤 정치보복을 않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에도, 뒤가 켕기는 인사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용서받고 싶었던 ‘과거’는 무엇이었을까.
대통령 박정희는 집권 18년간 권력기관을 수족처럼 부렸다. 의원들을 발가벗겨놓고 때릴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던 중앙정보부는 언제든 휘두를 수 있는 박정희의 ‘칼’이었다. 1967년 대선에서 야당의 윤보선 후보가 당선되면 사살하려고 저격수를 집 근처에 배치하고, 실제 71년 대선에서 위협적인 득표력을 보인 김대중 후보의 납치 살해를 시도한 게 칼의 용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권력은 칼만으로 유지되진 않는다. 박정희 정권 핵심부를 심층 취재한 한 언론인은 그의 용인술을 뱀, 소, 개로 요약했다. 뱀의 지혜와 술수로 뒤에서 일을 꾸미는 ‘기술자’와 머리는 좀 모자라도 소처럼 우직하게 맡은 일을 해내는 충성파,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물라면 무는 개 같은 부하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는 뜻이다. 김재규가 소, 차지철이 개라면, 뱀의 대표로 이후락과 함께 김기춘을 꼽았다.
유신헌법을 기초해 독재를 ‘법’으로 포장해준 그는 권력의 부침에 따라 휩쓸리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1977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서 보안사를 손봤던 전력 탓에 5공 시절 검사직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을 때도 실세 허화평 청와대 보좌관에게 ‘충성 맹세’ 편지를 써서 살아났다. 노태우 정권 때 검찰총장에 발탁된 뒤엔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이 터지자 예의 그 ‘능력’을 다시 발휘했다. 먹잇감은 역시 야당. 수사검사에 대한 파격적 지원 속에 김대중 총재를 불고지죄로 기소하는 쾌거를 올렸다. 검사실에서 술판까지 벌이는 이례적 배려가 주효했다. 이어 법무장관까지 지내며 승승장구한 걸 보면 역시 뱀의 지혜는 대단했다.
92년 초원복집 사건으로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았다. 웬만한 인물이었으면 그 정도로 지역감정 조장의 ‘원흉’으로 찍혔으면 모든 걸 포기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김기춘은 달랐다. 위헌소송 끝에 결국 검찰의 공소취소를 이끌어냄으로써 김영삼 정부에서 정치인으로 재기했다.
 
3선 의원까지 지낸 그가 박근혜 정부의 실세 ‘부통령’으로 부활한 뒤 정국이 요동친다. 엔엘엘, 이석기, 채동욱 등 ‘색깔’과 ‘공작’은 그의 전공분야. 대를 이어 대통령을 지키려는 그에게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 당장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대통령이 두차례나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 검찰이 보충수사를 통해 상당한 물증을 추가해가고 있던 상황에서 검찰총장을 쫓아냄으로써 법원·검찰 전체에 양보 불가의 ‘마지노선’을 재천명한 것도 그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사과를 요구하는 야당 대표에게 판결을 지켜보자는 대통령을 보니, 선거법 무죄가 가능하다는 보고서가 이미 올라갔는지도 모르겠다. 엊그제 판사가 “입증이 부족하다”고 했다니 벌써 효과가 나타나는 것인가.
그러나 낙관은 이르다. 우리 사회의 투명도와 국민 의식수준도 20~30년 전과는 달라졌다. 꺼지지 않는 촛불이 잘 말해준다. 첫 임기제 검찰총장이라는 거추장스런 훈장도 던져버린 채 검찰을 시녀로 만들려는 시도 역시 검사들의 반발에 역풍을 맞고 있지 않은가.

< 김이택 -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


[한마당] 무리수의 끝이 걱정이다

● 칼럼 2013. 9. 23. 14:36 Posted by SisaHan
채동욱 검찰총장 축출은 박근혜 정권의 현재와 미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뻔한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특정 언론과 공모해 채 총장을 쫓아내려 한 것은 박 정권에 그 일이 그만큼 중차대한 사안이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박 정권의 순항 여부도 좌우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통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아버지한테서 보고 배운 게 ‘정치’가 아닌 권위주의적 ‘통치’였으니 크게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의 비민주적인 국정 운영 방식은 갈수록 강화되는 듯하다.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몰아낸다는 것은 단순하게 넘길 일이 아니다. 감사원장과 경찰청장도 임기 중 중도하차시켰다. 이들의 임기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과 법률체계를 깔아뭉갠 것이다. 이는 5년 임기가 보장된 대통령도 임기 중에 그를 선출한 국민들에 의해 쫓겨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는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만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얘기일 테니까.
 
채동욱 총장을 축출함으로써 박 대통령은 국가 권력기관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박 정권 출범 이후 눈에 거슬리는 권력기관은 그나마 검찰이 유일했다. 검찰까지 손아귀에 넣었으니 권위주의적인 박근혜 정권의 실질적인 출범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국정원, 검찰, 경찰, 감사원 등 모든 권력기관을 완전히 장악한다고 국정 운영이 순조롭게 이뤄질까.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가 어떻게 종말을 맞았는지를 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유신독재 때는 사실상 종신 대통령에다 고문이나 폭행·투옥 등 물리적인 폭력을 맘껏 쓸 수도 있었다. 영원할 것 같은 그런 유신독재도 박정희가 수하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도 한참 달라졌다. 박정희식 통치로 다스려질 대한민국이 이미 아니다.
박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국정 운영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는 화사한 미소와 아전인수식 미사여구 몇 마디로 될 일이 아니다. 헌법과 법률에 규정된 대로 각 정부기관에 권한과 책임을 넘겨주고 자율적이고 실질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중립성과 독립성이 생명인 감사원과 검찰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권력기관만 완전히 장악하면 마음대로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착각이고 오만이다. 오히려 ‘아버지의 비극’을 다시 초래할 독이 될 수 있다.
 
채 총장 축출은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이 박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은 18대 대선의 공정성 여부와 직결된 사안이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대통령은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 사건은 최근 점차 그 핵심이 드러나는 중이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재판이 진행되면서 국정원과 경찰, 그리고 새누리당과의 연결고리가 추가로 밝혀진 것이다. 검찰이 국정원 수사를 제법 꼼꼼하게 해놓은 덕분이다. 앞으로 더 직접적인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지난 18대 대선 불복 움직임이 본격화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더 이상의 국정원 대선 개입 증거들이 공개되는 걸 막아야 하는 시급한 과제가 박 정권 앞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청와대가 조급하게 무리수를 두어가며 검찰 총수 제거 작전에 나선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박 정권의 앞날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건을 제대로 풀지 않으면 국정원 개혁도, 검찰의 독립성도, 정상적인 국정 운영도 기대할 수 없다. 
국정원 대선 개입 전모를 소상히 밝히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겠다는 쪽으로 박 대통령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답이 없다. 그런데도 어렵게 열린 ‘3자 회담’에서 아무런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자신의 무관함만 되풀이 주장한 것은 유감이다.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박 대통령이나 국민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한겨레신문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


[1500자 칼럼] 오래된 수첩

● 칼럼 2013. 9. 16. 18:48 Posted by SisaHan
나는 비겁하다고 지인들에게 가끔 얘기한다. 누구나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은 나를 위로해준다. 하지만 나는 비겁하다. 오래된 기억의 수첩을 들춰보면 내가 비겁한데는 정당한 이유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군대생활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것은 무의식으로 숨어 나를 괴롭히곤 한다. 
얼마전 모국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세포들이 감전된 듯 한순간 정지됐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옛 기억이 떠올랐다. 
허일병 조작살인사건이란 이름으로 30년을 끌어온 법정 싸움이 그 뉴스였다. 
지난 1984년 발생했던 사건을 살펴보자. 이 사건을 파헤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4월2일 중대본부에서 술파티가 열렸다. 당시 모 중대장이 “라면이 맛이 없다”며 모 선임하사를 질책하자, 문제의 하사관은 만취상태에서 중대본부를 나와 행패를 부리다 허일병을 향해 우발적으로 자신의 M16 소총을 발사, 허일병은 오른쪽 가슴에 총을 맞고 숨졌다. 당시 사건 은폐를 위해 대대급 간부까지 참여한 대책회의가 열렸고, 허일병의 피살현장을 목격한 사병들을 대상으로 “알리바이 조작” 등을 위한 특별교육까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법원은 그러나 이것을 자살이라고 판결했다.
 
이 사건을 내 경우에 대입해보자. 
1978년 여름 내가 복무하던 서울의 한 부대에서 취침점호시 갓 전입한 이등병이 사망했다. 점호시 나는 행정반에 있었고 얼마후 1소대 내무반장이 찾아와 한 이등병이 죽은 것같다고 전했다. 장시간 축구를 해도 멀쩡했던 내무반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사태파악에 나섰다. 한 이등병이 운전업무후 점호시간 조금 전에 도착했고 한 고참병이 군기를 잡기 위해 복부를 가격했다는 것이다. 몇 대 맞은 이등병은 갑자기 얼굴이 파랗게 질려 침상에 쓰러졌다. 이때 당직사관이 점호를 위해 내무반에 들어오는 바람에 이등병 얼굴을 담요로 덮었다. 그리고 난 후 다시 확인해보니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부대는 발칵 뒤집혔고 퇴근한 중대장이 돌아오고 곧 대대본부와 보안대에서도 요원들이 파견됐다.
물론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피해자는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정리됐다. 모든 중대원들에게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특별교육이 실시됐다. 병사가 한 명 사망하면 기록하고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16가지가 넘는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사고를 낸 고참병은 특별 감시 대상이 됐다. 혹 스트레스로 인해 사고를 칠 수도 있다는 걱정때문이었다. 그후 그는 외박을 나간 뒤 며칠씩 부대복귀를 하지 않아 부대간부들의 가슴을 조이기도 했다. 그는 제대 후 시청의 공무원으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사람을 죽인 죄책감으로 힘들게 살고 있을 것이다.
 
허일병을 쏜 것으로 알려진 하사관은 어떻게 됐을까. 사건발생 직후 아무 징계조처도 당하지 않고 사단내 다른 중대로 전보된뒤 승진해 90년초 상사로 예편했고, 이 하사관은 위원회 조사에서 “술에 만취해 총을 잡은 것 같지만 그후 기억이 없다”고 진술했다.
S.프로이트는 의식에 있어 고통스러운 것, 허용될 수 없는 것, 온당치 못한 것은 억제되어 무의식의 세계로 추방된다고 말했다. 
나는 내게 묻는다. 아무에게도 말못했던 이 사건을 이제서야 말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폐쇄된 한 조직의 일사분란한 행동에 그냥 따라갈 수 밖에 없었던 불쌍한 나를 용서해본다. 그 무의식을 끌어올려 화해를 청한다. 내가 비겁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어쩔 수 없었던 것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폭력이 있다 나도 폭력 앞에서는 아버지! 하고 무릎 꿇는다 멍텅구리 배안에선 어쩔 수가 없다.”
-이성복 시인의 시 <멍텅구리 배 안에선> 부분.

< 김형주 - 시인, 해외문학 신인상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부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