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판정을 받은 인사들이 되살아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가 뉴라이트 성향의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에서 마치 항일 활동을 한 것처럼 미화되었다고 한다. 법원이 “(김성수가) 강압으로 (친일 기구에) 이름만 등재한 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 협력한 것으로” 판단한 것마저 무시했다고 한다. 친일 잔재 청산의 성과를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참으로 부당한 일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김희선(70) 전 의원의 경우가 생각난다. 김 의원은 2001년 국회에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의원모임을 만들어 회장을 맡았다. 이 단체는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했다. 김성수와 방응모 전 조선일보사 사장을 포함해 친일 인사 708명의 명단을 추려 발표했다. 정치인으로서 당대의 언론권력을 건드리는 데는 꽤 용기가 필요했다.
이들의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법적 기구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이 위원회는 2009년까지 1005명의 친일 반민족행위자 명단을 확정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이 동원한 경찰의 습격으로 활동이 중단된 뒤로, 몇 차례 국가 차원의 친일 잔재 청산이 시도됐으나 그때마다 좌절을 겪었다. 프랑스나 독일에서 2차 대전 직후 단호하게 실시한 과거사 청산 작업이 우리는 이 시기에 뒤늦게나마 이뤄진 것이다.
김희선 의원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이 일에 달려들었다고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민주화 물결 덕분에 나름대로 여건도 뒷받침되었다. 
하지만 김 의원은 얼마 못 가 정치적 시련에 부닥치게 된다. 무엇보다 보수언론한테 집중공격을 당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부친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친일파였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당시 나는 이 논란을 취재하면서, 김 의원의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는가 친일파였는가보다는 김 의원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데 몸을 던진 행위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는 정치적 평판이 추락했고 국회의원 연임에 실패했다. 나중에는 형사 사건에 휘말려 몇 달 감옥살이까지 했다.
 
그는 3살 때 아버지와 생이별하고 삼촌들한테 의탁해 떠돌다가 대전여상 중퇴에 그친, 배경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 정치활동까지 나름대로 당당하게 펼치다가 이제 평범한 생활 여성으로 우리 주변에 되돌아왔다. 그의 평판 추락과 선거 실패에 본인의 부족한 점이 분명히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가 친일 잔재 청산에 앞장섰다가 보수언론한테 집중 공격당한 것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믿는다.
교학사판 고교 교과서는 김성수뿐 아니라 최남선의 친일 행위도 물타기했다고 한다. 이런 행위는 뒤늦게나마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 한 국가적 노력을 거꾸로 되돌리는 처사다. 
친일 잔재 청산에 앞장섰던 김희선 같은 이가 정치적으로 영락하고, 국가기구를 통해 공인되었던 ‘친일 김성수’가 검정 교과서를 통해 항일 인사로 둔갑하는 것은 분명히 시대의 배반이다.
하긴 거꾸로 돌아가는 일이 어디 이것뿐인가. 국가정보원이 대선에 개입했다가 들통나자, 비난과 처벌을 모면하려고 내란음모죄 정국을 꾸몄는데 그것이 뜻밖에 강렬한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은가. 국면이 성공적으로 전환되고 국정원 개혁은 이미 실종되고 있지 않은가.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이 사라지고 남북관계와 평화가 위태로워져도 정부의 인기는 더욱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 박창식 - 한겨레 신문 연구기획실장 겸 논설위원 >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 사건 수사가 진행되면서 사건과 관련해 정치권의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이 의원의 시대착오적인 상황인식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그중에는 막가파식 색깔론, 막무가내식 책임론과 같은 억지 주장도 많다. 주로 새누리당 의원들이 이 의원에 대한 수사를 틈타 야권을 몰아세우기 위해 내놓는 것들이다.
새누리당이 이 의원 사건을 야권연대 탓으로 돌리는 엉뚱한 주장을 하거나 통합진보당 해산과 같은 섣부른 색깔론을 내놓는 것은 공당답지 못하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3일 “민주당은 야권공조라는 미명하에 내란을 획책한 집단을 원내로 진출시킨 데 대해 책임의 일단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통합진보당은 주요 인사들의 혐의가 확정되면 자발적으로 해체 수순을 밟거나 나라에서 해체 수순을 밟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의원 사태를 야권연대와 연관짓는 주장은 상황을 호도하기 위해 선거의 전 과정을 뭉뚱그려 생략한 정략적 왜곡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선거에서 정당 간 연대는 정책이 조율되고 이해타산이 맞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지난해 총선에서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은 후보단일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정책 합의 과정을 거쳐 야권연대를 성사시켰다. 두 당의 비례대표 후보가 선정되기 이전에 야권연대가 이뤄진 만큼 이 의원을 비례대표 후보로 내세운 것은 민주당과 무관한 통합진보당의 내부 결정이다. 이 과정에서 경선부정 문제가 불거진 것 역시 통합진보당의 내부 사정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새누리당이 이 의원의 국회 진출을 야권연대를 주도한 민주당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이 의원의 상황인식이 시대착오적이라고 해서 통합진보당 전체를 이적단체 대하듯 해서도 곤란하다. 이 의원의 혐의와 직접 관련이 없는 통합진보당 의원이나 당원들을 모두 빨갱이라며 척결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전형적인 매카시즘이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선 후보가 청와대 민정수석을 할 때 이 의원이 가석방된 것을 문제 삼는 것 역시 과도한 몰아붙이기다. 이 의원의 가석방은 법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을 뿐 문 전 후보가 이 의원에게 특혜를 베풀었다고 볼 근거는 현재로선 없다.
이 의원 사건은 국회가 체포동의안 표결을 앞두는 등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정치권은 필요한 경우 조처를 취해 가면서 차분히 이를 지켜보면 된다. 새누리당이 이 사건을 기화로 온갖 군데를 들쑤시며 과도한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를 하는 것은 민주사회를 책임지는 집권당의 모습이 아니다.


3일은 제50주년 방송의 날이다. 방송의 날은 1947년 9월3일 우리나라 방송이 국제무선통신회의에서 일본 호출부호 대신 독자적인 호출부호를 배당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64년 제정됐다. 이른바 전파 독립, 방송 독립을 기념하는 날인 셈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라면 방송인뿐 아니라 온 국민이 매우 축하를 해야 마땅한 날이다. 더구나 50주년은 자주 오지 않는 특별한 기념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방송의 현실은 축하를 받기엔 너무나 참담하다. 2일 저녁 열린 방송의 날 50주년 기념 축하연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과 이경재 방송통신위원장 등 박 정권의 고위인사들과 방송사 사장 등 간부들이 무엇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를 자르고 손뼉을 쳤는지 알 길이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시청자의 사랑을 받는 공정방송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최근 이른바 ‘공영방송’이라고 자부하는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는 이들 방송이 단순히 국민을 위한 방송이길 포기한 데 그치지 않고 얼마나 뼛속까지 권력과 정권의 시녀로 전락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방송은 지난달 31일 방영 예정이던 <추적 60분>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전말’ 방송을 내보내지 않았다. 담당 국장이 내세운 이유가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사건 수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방송 시기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별개의 사건을 연계하는 창의성이 놀라울 뿐이다. 이에 앞서 23일에는 문화방송의 <시사매거진 2580>의 3편 중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을 다룬 ‘국정원에 무슨 일이?’ 편이 통째로 날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권 때 해고된 뒤 아직도 거리를 헤매고 있는 해직기자 18명 가운데 문화방송, <YTN> 등 방송기자가 절대다수인 14명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도 방송의 날 50주년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
 
박 대통령은 축하연 연설에서 ‘방송산업을 창조경제의 핵심 산업으로 육성하겠다. 방송산업을 저해하는 규제를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공정성과 언론의 책임은 방기한 채 편파와 왜곡, 시청률만을 좇는 선정적 프로그램을 남발하는 종합편성채널의 허가를 앞두고 당시 정부·여당이 내놓았던 논리와 너무 흡사하다. 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은 공정성을 상실한 방송은 창조경제의 핵심이 되기는커녕 그 이전에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흉기’가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방송의 공정성을 위해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그의 대선공약을 이행하는 데 주력할 때다.


[한마당] 은밀하게 찌질하게

● 칼럼 2013. 9. 9. 16:22 Posted by SisaHan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작은딸이 “강추”하던 웹툰인데, 내내 못 보다가 영화로 보았다. 
줄거리는 이렇다. 잘 훈련된 간첩들이 남파된다. 하지만 그들의 임무는 고작 달동네 바보나 가수 지망생으로 ‘암약’하는 것이다. 게다가 지령도 몇년째 내려오지 않는다. 그러던 중 남북관계가 화해 분위기로 나아가자 남파된 간첩들을 부담스럽게 여긴 북한 당국은 이들에게 자결을 명령한다.
이렇게 해서 코믹하게 시작한 영화는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다. 남파 시점부터 마땅한 임무마저 없던 이들은 남북 화해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이 시대착오적인 제거 대상이 된다. 그런데도 그들이 “위대해” 보이는 것은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는 달동네 이웃에 대한 이들의 살가운 마음 씀씀이 때문이다.
 
이 영화는 정부간 협상으로 간첩이 소모품처럼 내버려지는 비인간적 상황에 저항하는 기관원의 모습도 다룬다. 국정원 직원 서수혁(김성균 분)의 행동이 그렇다. 그는 원류환(김수현 분)이나 리해진(이현우 분) 같은 ‘멋진’ 간첩을 억울한 희생에서 건져내려 한다. 이런 모습 때문에 서수혁의 유니폼 한가운데 새겨진 NIS가 근사하게 보이기조차 한다.
영화 ‘비슷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개성공단 재가동, 이산가족 상봉 합의, 금강산 관광 재개 논의가 이뤄지고 있고, 황당해 보이던 DMZ 평화공원조차 안 될 게 뭐 있나 싶은 게 요즘 남북관계의 분위기다. 
이런 화해 분위기 속에서 또 하나의 시대착오적인 집단, 정확히 말하면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남발했다는 통합진보당원들이 국정원에 의해 제거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것은 거기까지다. 통합진보당이나 국정원이 은밀한지는 모르겠으나 위대하진 않다. 위대하기는커녕 “찌질하다.”
 
영화에서 간첩들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과 고난을 전혀 회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석기 의원은 압수수색이 시작된 그 시점에 곧장 자신의 결백을 당당하게 주장하지 않고 하루 뒤에 나타났다. 변장하고 도주했다는 보수언론의 보도는 소설로 보이지만, “달동네 바보”로 암약하는 것도 아닌데 하루 뒤에 나타나는 건 찌질했다.
이상호 경기진보연대 고문은 “장난감총을 가스쇼바로 개조하면 사람을 조준하는 일반총”이라며 “인터넷에 무기를 만드는 기초가 나와 있다”고 말했단다. 내란 모의는 고사하고 은행강도 모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정보를 새로운 이야기인 양 말하는데, 인터넷에 핵폭탄 만드는 법마저 나오는 세상인 걸 생각하면 검색 능력마저 찌질하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 국정원 직원은 서수혁을 닮은 데가 있는가? 전혀 아니다. “대북”인지는 모르겠다만, 인터넷이 여론을 주도하는 세상에서 댓글은 나름 급소를 파고든 “심리전”이었다.
 
하지만 천막 뒤라곤 해도 청문회에 불려나온 “김직원”으로서는 댓글 공작을 스스로 찌질한 것으로 포장해야 했다. 그러니 수치스러운데다가 조직에 위협적인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위대한” 무언가가 필요했을 법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댓글 공작보다 더 찌질하다. 법원의 감청 허가를 얻어 몇 년을 감청하고도 쓸 만한 것을 못 건졌는지, 몇몇 신문 기사에 따르면 정작 내란음모 혐의를 엮을 근거가 된 것은 뉴질랜드 이민 갈 돈을 주고 제보자에게 사들인 것으로 추정되는 녹음파일이란다. 감청 실력이 엄청 찌질한 셈이고, 그걸 위해서 내 세금이 쓰였다고 생각하니 댓글 때보다 더 아깝게 느껴졌다.
아무튼 지금 벌어지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대착오적인 우익 조직이 가장 시대착오적인 좌파 집단을 수사하고 있는 것인데, 유일하게 위안 삼을 것은 이제 이들의 찌질함이 은밀하진 않게 된 것인 듯하다.
<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