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에 본 영화가 하필이면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1966년 작 <페르소나>였다. 영화 속에서 여자주인공이 경악을 하며 보고 있는 텔레비전 화면은 1963년 베트남에서 일어난 승려의 분신 전과정을 끈질기게 비추고 있었다. 월남의 응오딘지엠(고딘디엠) 정권이 사찰을 폐쇄하고 무차별 폭압정치를 할 당시 월남에선 서른명이 넘는 스님이 길거리에서 분신했다. 미국과 세계 여론이 월남에서 등을 돌리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
50년의 세월이 지났다. 베트남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호찌민 묘에 조신하게 헌화하는 모습을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본다. 호찌민은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가 빨갱이 나라 월맹을 무찌르기 위해 월남 파병을 했던 그 월맹의 괴수였고 지금은 베트남의 국부이자 베트남 국가정통성의 아이콘인 인물이다.
 
그렇게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다. 호찌민도 박정희도 김일성도 묻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역사고 그렇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현존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베트남 국가주석이 ‘사돈 나라’라는 외교적 언사를 쓴 것도 실은 숱한 민간인 학살에 간여했던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하기에는 베트남 사람들 입장에선 쓰린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 간의 현실적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새롭게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길이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엔 과거의 망령이 어른거리고 과거로의 회귀 조짐이 스멀스멀, 아니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모르겠다. 러시아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의 정치철학과 국가관이 자신에게 가장 영향력을 끼쳤다고 발언한다. 자세한 인터뷰 내용을 보니 그의 아버지는 그지없이 훌륭하다. 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떼어내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란 걸 모를 정도로 순진한 건지 아니면 의도된 것인지 경악스럽다.
 
자신에겐 비할 수 없는 훌륭한 아버지였을지 몰라도 그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엄연히 살아 있다. 20년 독재정권을 이끌었던 아버지가 자신의 ‘워너비’가 되어서는 박근혜 대통령에겐 희망이 없다. 아버지를 반면교사 삼아야 하는데도 왜 자꾸 닮아가려 하는 것인지. 우리 사회가 긴급조치 시대로 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의 해답이 여기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와 아버지의 시대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의중이 이런 방식으로 자꾸 표현되기 때문이다.
늙은 남자들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팔을 휘두르며 설친다. 빨갱이 잡으러 간첩 잡으러 가자고 길 가는 시민들을 위협하고 가스통을 들고 난동이다. 이들에게 누가 완장을 채워주었는가. 영화상영 중단이라는 일제 때에나 있었을 법한 일이 벌어진 것도, 대학생이 자본론을 가르친 교수를 국가정보원에 고발한 것도, 역사교과서 왜곡도 다 같은 맥락이다. 국정원이 온갖 공작을 하는 것도 일일이 지시하지 않았어도 알아서 긴 것이다. 적어도 신변이 위험하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보이지 않는 손의 비호가 있고 어쩔 수 없이 그 정점에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 실제로 지시하지 않았어도 의중을 헤아려 딱 그만큼 하는 거다. 대통령 말씀과 의중은 곧바로 정책이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과 아버지의 정치철학과 국가관에 가장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본격적으로 박정희의 정치철학과 국가관을 토론해보면 박근혜 대통령도 아버지가 역사에 대한 반동의 정치를 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박정희가 저세상 사람이 된 때가 예순세살이었다. 박근혜 대통령도 내년이면 예순셋이다. 곧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사람으로, 대통령으로, 아버지가 가보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지나 유럽까지 가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했다. 어쩌다 보니 대통령의 꿈과 나의 꿈이 같다. 북한을 건너뛰고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그냥 한번 해본 농담이 아니라면 재임 기간에 그걸 하면 된다. 박정희 딸이 호찌민의 묘에 헌화하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았다. 모든 게 박근혜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대통령이 진정으로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하면 된다.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본다.
< 김선주 - 언론인 >


[한마당] 누가 자유민주주의의 적인가

● 칼럼 2013. 9. 16. 18:26 Posted by SisaHan
새누리당의 김무성 의원이 지난 4일 근현대역사교실이란 의원모임을 출범시켰다. 
출범식에서 그는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가 못난 역사로 비하되고 한국을 부정하는 역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질 때 국론이 분열되고 나라가 어지러워져 이석기 사건 같은 현상으로 나타난다”며 “역사를 바로잡을 방안을 모색해 좌파와의 역사전쟁을 승리로 종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가 역사전쟁의 진군나팔을 분 다음날 우편향 사실왜곡으로 비판받는 교학사 역사 교과서 집필자들과 그들이 속한 신우익 계열의 한국현대사학회 회원들은 심포지엄을 열고, 기존 역사 교과서들이 대한민국을 극복 대상으로 보고 있다며 싸잡아 비판했다. 그들은 현장을 찾은 새누리당 의원에게 지원을 요청하면서 교학사 교과서 비판자를 반민주세력으로 몰아가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잠깐! 자학사관에 빠진 기존 역사교육을 바로잡아 자랑스런 역사를 전해야 한다는 이 주장,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일본의 전후 역사 교육은 … 일본인의 긍지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근현대사에서는 일본인이 자자손손까지 계속 사죄할 운명을 타고난 죄인과 같이 취급되고 있다. 냉전 종결 후는 자학적인 경향이 강화돼 … 종군위안부 같은 옛 적국 프로파간다를 사실로 기술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은… 일본 국가와 일본인의 자화상을 품격과 밸런스를 가지고 그림으로써 선조들의 활약에 감동하게 하고 실패의 역사에도 눈을 돌리게 하는 … 교과서를 만들 것이다.” 역사왜곡으로 해마다 우리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돼온 일본 ‘새역모’의 취지문이다.
새역모가 만든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대해 한국현대사학회 일원인 허동현 교수는 “자긍 과잉과 성찰 결여로 요약된다. 성찰이 결여된 과거사 학습은 한 민족이나 국가의 미래를 잘못된 길로 이”끈다고 비판했다. 이어 왜곡세력이 침략에 대한 반성을 자학이라고 매도하며 역사의 기억에 분칠하려는 이유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주도한 세력의 적자로서 제국 일본의 옛 판도와 영화를 되찾고 싶어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옳은 지적이다. 문제는 새역모 교과서에 대한 이런 비판은 그가 지지하는 교학사 역사 교과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교과서의 필자 권희영 교수는 20세기 역사는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역사라며 우리 근현대사도 자유민주주의 체제 발전의 역사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적 주장이지만, 그의 주장에 비춰 봐도 이 교과서 기술은 이상하다. 자유민주주의를 중시한다면, 역사 평가의 잣대는 인권 보호와 주권재민이란 그 핵심 가치 구현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식민지근대화론에 기대 민족자결권을 유린한 일제와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복권을 꾀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해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만든 위대한 인물로 추어올렸다. 박정희 쿠데타는 미국의 지지 등을 거론하며 그 부당성을 희석했고, 종신지배를 위한 그의 10월 유신은 미-소 데탕트에 대한 대응으로 설명했다. 전두환의 광주학살은 계엄군의 광주 장악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고 얼버무렸다.
왜일까? 그들의 자유민주주의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자유민주주의에 이르지 못하고 냉전적 반공주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부각시키는 북한은 원조로 연명하는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그들 말대로 남·북한 체제 경쟁은 남한의 완승으로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여당 대표가 제1야당을 종북세력의 숙주라고 비난하는 등 여전히 철 지난 반공 칼춤을 추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친일 세력과 쿠데타 세력의 적자인 현 집권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참칭하며 권력을 유지하게 해온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북세력의 진정한 숙주는 자유민주주의를 왜곡해 시대착오적 주사파가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키워온 수구우익세력이다. 
자랑스런 우리 역사는 좌파에 대한 역사전쟁의 승리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과거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더 성숙한 민주국가를 가꿔갈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 한겨레신문 권태선 편집인 >

 

[1500자 칼럼] 목회와 야구 - 2

● 칼럼 2013. 9. 9. 17:08 Posted by SisaHan
지난 번 목회와 야구에 대해서 짧은 글을 썼더니 잘 아는 목사님이 참 재미나게 읽었다고 하시면서 언젠가 당신이 설교하실 때 한번 인용하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한국인 투수 류현진에 대해서도 좀 쓰지 하시는 게 아닌가? 실제로 넓고 넓은 목회의 이야기를 하는데 어찌 원고지 몇 장의 분량에서 야구와 비교를 하겠는가? 그러니 류현진이 아니라 베이브 루스가 와도 다 쓸 수가 없잖는가. 
그러나 존경하는 목사님의 말씀이니 류현진, 현재 한국인의 관심과 미국의 메이저 리그에서 새 별로 떠오르는 그에 대해서 써보려 한다. 물론 선수 개인적인 이야기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지난번에 했던 투수의 이야기를 목회에서 하려는 셈이다. 

어느 구단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각 구단은 언제나 투수에 신경을 쓴다. 투수가 던지는 공에 의해 경기는 거의 결판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 예산에서 많은 경비가 투수에게 투입된다. 물론 타자도 중요하지만 투수만큼은 더욱 신경을 쓴다. 2012년도의 경우를 보면 최고의 경비를 쓴다는 뉴욕 양키스의 사바티아라는 선수는 전체 예산의 11%를 받는다. 투수 혼자에게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것이니 그만큼 투수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볼 때 교회의 투수라고 말했던 목사의 위치나 받는 사례가 왜 그리 집중되어야 하는지도 알게 된다.
어떤 분들은 말한다. 교회 예산의 많은 액수가 목사 혼자에게 집중되는 것이 가장 타당한가 하는 질문을. 그러나 말씀의 책임을 지는 목사로서는 당연할 수밖에 없다. 목사가 잘못되는 날에는 모든 목회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물론 투수는 공을 던지는 것에 대해 혼자서 모든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옆을 잘 바라볼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감독의 사인을 받은 포수의 지도대로 공을 만들고 던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투수는 경기의 운용을 위한 방식을 감독의 아이디어를 따라서 경기를 해야 한다. 지금 투수로 어떤 공을 던지게 해서 경기를 이끌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서 코를 만지거나 귀를 만지작거리면서 포수에게 사인을 보내면 포수는 그 사인을 다시 투수에게 전달함으로 배합이 된 공을 던진다. 

이미 말한 그대로 우리 팀의 감독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포수와 같은 당회를 통해 목사님의 목회에 사인을 보내고 계신다. 그럴 때 투수가 결코 흥분해서 자신의 마음대로 공을 던져서는 안 되는 것처럼 목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명에 순종하고 그 뜻을 밝혀내며 또한 당회와 함께 그 사인을 읽고 경기를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목회를 하다 보면 목회자가 당황할 때도 있고 때로는 용기를 낸다는 것이 만용을 부릴 때도 있고 고집을 피울 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는 위험을 감안해서 장로교회에서는 당회를 통해 함께 업무를 치리하도록 한 것이다. 당회장의 아이디어가 무척 좋고 그대로만 하면 다 잘 될 것 같지만 그래도 함께 의논하고 협력을 구함이 좋은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화목함이 역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투수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경기를 승리로 이끈다. 그래서 비싼 돈을 들여 유능한 투수를 모시지 않는가? 그런데 투수를 마운드에 세워놓고 자꾸만 포수가 이래라 저래라 하고 브레이크를 걸면 투수는 혼미해져서 아무런 공도 제대로 던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목회는 한 사람의 투수로 되는 것도 아니고 포수의 마음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감독의 지시를 받아 모든 경기를 함께 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친일 판정을 받은 인사들이 되살아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가 뉴라이트 성향의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에서 마치 항일 활동을 한 것처럼 미화되었다고 한다. 법원이 “(김성수가) 강압으로 (친일 기구에) 이름만 등재한 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 협력한 것으로” 판단한 것마저 무시했다고 한다. 친일 잔재 청산의 성과를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참으로 부당한 일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김희선(70) 전 의원의 경우가 생각난다. 김 의원은 2001년 국회에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의원모임을 만들어 회장을 맡았다. 이 단체는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했다. 김성수와 방응모 전 조선일보사 사장을 포함해 친일 인사 708명의 명단을 추려 발표했다. 정치인으로서 당대의 언론권력을 건드리는 데는 꽤 용기가 필요했다.
이들의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법적 기구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이 위원회는 2009년까지 1005명의 친일 반민족행위자 명단을 확정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이 동원한 경찰의 습격으로 활동이 중단된 뒤로, 몇 차례 국가 차원의 친일 잔재 청산이 시도됐으나 그때마다 좌절을 겪었다. 프랑스나 독일에서 2차 대전 직후 단호하게 실시한 과거사 청산 작업이 우리는 이 시기에 뒤늦게나마 이뤄진 것이다.
김희선 의원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이 일에 달려들었다고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민주화 물결 덕분에 나름대로 여건도 뒷받침되었다. 
하지만 김 의원은 얼마 못 가 정치적 시련에 부닥치게 된다. 무엇보다 보수언론한테 집중공격을 당했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부친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친일파였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당시 나는 이 논란을 취재하면서, 김 의원의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는가 친일파였는가보다는 김 의원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데 몸을 던진 행위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는 정치적 평판이 추락했고 국회의원 연임에 실패했다. 나중에는 형사 사건에 휘말려 몇 달 감옥살이까지 했다.
 
그는 3살 때 아버지와 생이별하고 삼촌들한테 의탁해 떠돌다가 대전여상 중퇴에 그친, 배경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 정치활동까지 나름대로 당당하게 펼치다가 이제 평범한 생활 여성으로 우리 주변에 되돌아왔다. 그의 평판 추락과 선거 실패에 본인의 부족한 점이 분명히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가 친일 잔재 청산에 앞장섰다가 보수언론한테 집중 공격당한 것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믿는다.
교학사판 고교 교과서는 김성수뿐 아니라 최남선의 친일 행위도 물타기했다고 한다. 이런 행위는 뒤늦게나마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 한 국가적 노력을 거꾸로 되돌리는 처사다. 
친일 잔재 청산에 앞장섰던 김희선 같은 이가 정치적으로 영락하고, 국가기구를 통해 공인되었던 ‘친일 김성수’가 검정 교과서를 통해 항일 인사로 둔갑하는 것은 분명히 시대의 배반이다.
하긴 거꾸로 돌아가는 일이 어디 이것뿐인가. 국가정보원이 대선에 개입했다가 들통나자, 비난과 처벌을 모면하려고 내란음모죄 정국을 꾸몄는데 그것이 뜻밖에 강렬한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은가. 국면이 성공적으로 전환되고 국정원 개혁은 이미 실종되고 있지 않은가.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이 사라지고 남북관계와 평화가 위태로워져도 정부의 인기는 더욱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 박창식 - 한겨레 신문 연구기획실장 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