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이 박근혜 정부가 요구하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재연기의 대가로 우리나라의 미국 미사일방어(MD) 참여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그는 제45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 참석차 한국으로 오는 도중 전용기에서 수행기자단과 한 기자회견에서 전작권 환수를 위해 한국군이 갖춰야 할 역량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미사일방어”라고 밝혔다. 미 고위 관리가 우리의 MD 참여를 전작권 환수 문제와 하나로 묶어 협상하겠다는 의사를 이처럼 명확하게 표현한 것은 처음이다.
 
반면, 그는 박 정권이 매달리는 전작권 환수 재연기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릴 상황이 아니다”고 한발 물러섰다. 전작권 재연기를 강하게 요구하는 우리의 입장과 미국 안의 재연기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이용해, 미국의 전략 이익을 최대로 확보하겠다는 계산으로 짐작된다. 이런 흐름은 MD 참여뿐 아니라 최근 무산된 차기전투기(FX) 사업과 내년부터 적용할 제9차 주한미군 방위비분담 특별협정(SMA) 협상 쪽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크다. 사실상 보잉사의 F-15SE로 굳어졌던 차기전투기 사업이 최근 막판에 무산된 데는 중국·러시아 등을 견제할 스텔스기 도입을 원하는 미국 쪽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전작권 협상이 미국의 의도대로 흘러갈 경우, 우리 안보 환경은 전작권이라는 주권 확보도 하지 못한 채 중국·러시아 등만 자극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바로 우리가 미·일 대 중·러의 강대국 대결의 최전선에 서게 됨을 의미한다. 미국과 동맹하고 중국과 협력해 북한을 변화시키겠다는 박 정권 대북정책도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미국이 말하는 MD와 한국형 엠디(KAMD)는 다르다는 한가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다. 박 대통령도 1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킬 체인과 한국형 미사일방어 체계 등 핵과 대량파괴무기 대응능력을 조기에 확보하겠다”고 말했다. 미사일에 대한 기초 상식만 있어도 북한이 쏘는 미사일이 우리 상공에 도달하는 6~7분 사이에 어느 미사일이 어디로 떨어질지 알아낼 수 있는 기술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다 아는데도 말이다.
정부는 미국이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밝힌 이상 미국형, 한국형 MD라는 가공의 개념을 방패로 내세우지 말고, 미국이 참여하는 MD에 참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절대 어물쩍 넘어갈 일이 아니다. 답은 막대한 재정 투입과 미-중 대립을 초래하는 미국 주도의 MD 참여 요구에 단호한 반대 입장을 밝히는 것이다.


미국발 경제위기가 지구촌 전체로 확산된 지난 6년 동안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집권 정당이 바뀌었다. 위기의 구조적 요인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기도 한 현상이다. 그 와중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기민당의 의석수를 크게 늘리며 3선에 성공했다. 경제가 다른 나라보다 순항하는 이유가 크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한마디로 ‘엄마 리더십’으로 불리는 중도적 실용주의의 승리다. ‘유연성, 포용, 신중함’이 그를 수식하는 수사다. ‘뉴라이트’나 ‘네오콘’과는 구별되는 ‘통합형 보수’다.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켈과 가깝다고 하지만 두 사람은 여성이라는 점 이외에 공통점이 거의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유연성 대신 대결, 포용 대신 위계(또는 지배), 신중함 대신 밀어붙이기(본인은 ‘원칙’이라고 할 것이다)를 앞세운다. 게다가 이런 경향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불과 취임 7개월 만에 자신의 복지 공약 가운데 핵심인 기초연금, 4대 중증질환, 무상보육 등의 사안에서 공약 파기를 공식화하고 있다. 여기에 사회적 차원의 진지한 토론도, 야당과의 타협도 없다. 정부가 해직자의 조합원 가입을 이유로 전교조의 노조설립 취소 수순에 들어간 것은 노동 문제에서도 대결 기조로 가겠다는 선언이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역사전쟁’을 사실상 주도하는 사람도 박 대통령이다. ‘역사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불을 지폈던 그는 뉴라이트 성향의 부실 교과서가 큰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이 교과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을 새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대결과 지배의 무대가 역사관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국가정보원의 불법 대선 개입 사실이 속속들이 드러났는데도 사과와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는 야당에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민주당이 서울시청 앞에 천막당사를 설치하고 54일 동안 장외투쟁을 했다고는 하지만, 민주당의 요구 내용은 박 대통령에게 ‘부탁’하는 수준의 온건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야당이 자신의 정통성과 권위에 부당하게 도전하는 것처럼 야당의 굴복을 요구해 왔다.
 
남북 관계도 다시 기약 없는 냉각기에 들어갔다. 현상적으로는 예정된 이산가족 상봉을 북쪽이 일방적으로 연기시킨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 이면에는 대결과 지배를 추구하는 정책기조가 깔려 있다. 새누리당 소속 안홍준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엊그제 “최근 개성공단 가동 재개 협상에서 7차 회담까지 진행된 끝에 북한이 재발 방지에 합의한 것은 북한으로서는 굴욕에 가까운 것이었다”며 “박근혜 대통령 취임 뒤 소신 있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지금은 주도권이 한국에 있다”고 했다. 북쪽이 남쪽의 ‘하위 주체’임을 분명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북 관계도, 핵 문제를 풀기 위한 대화도 필요하지 않다는 이런 태도는 정부 안에서 일반적이다.
재벌과의 관계에서는 위계가 정반대다. 재벌들이 집요한 로비로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 경제민주화 공약들이 후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대통령이 직접 재벌 총수들을 만나 고개를 숙이고 투자를 ‘구걸’하기에 이르렀다.
 
박 대통령은 8월 초 청와대 개편을 전후해 여권 안 수직적 위계질서 구축을 끝내고 이제는 이를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려 한다. 앞서 이명박 정권은 ‘한국 사회 전체의 시장화’를 추구했으나 거센 역풍을 맞았다. 현 정권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굴복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명박 정권보다 더 폭력적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대에 형성된 보수 본류의 본색이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다.
메르켈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 폐기를 선언해 녹색당 바람을 가라앉혔고, 22일 치러진 총선에서는 가정복지 정책 강화와 징병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어 사민당의 표를 가져갔다. 박근혜 정권은 이와 반대로 낡은 보수의 본색을 강화해 나간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당분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큰 대결과 갈등을 불러 부러지거나 내파할 가능성이 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생한 사례다.
< 김지석 -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


[한마당] 메르켈과 박근혜

● 칼럼 2013. 10. 6. 15:01 Posted by SisaHan
며칠 전 끝난 독일 총선 과정에서 최대 화제는 ‘손’이었다. 
집권 기민당이 두 손만 클로즈업한 70m×20m짜리 ‘기괴한’ 대형 선거포스터를 베를린 중앙역 청사에 내건 것이다. ‘독일의 미래가 달린 선한 손’이라는 글귀만 아주 작게 달렸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손 모양”이라 불리는 이른바 ‘메르켈-마름모’ 사진이다. 유심히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항상 배 앞에서 두 손을 아래쪽으로 겸손히 모아 마름모 모양을 만드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손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도대체 ‘손짓’만으로 3선을 확정지으며 세계 최장 여성 총리 자리를 예약한 메르켈은 누구인가.
 
메르켈은 세계 정치무대에서 ‘수수께끼’로 불린다. 누구는 무명의 동독 출신 여성 물리학자가 일약 국제적 지도자가 된 것은 헬무트 콜의 발탁과, 독일 역할이 절대적이었던 유로 위기라는 상황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외부 조건만으로 메르켈을 다 설명할 순 없다.
보수주의자 메르켈의 힘은 ‘실용주의’에서 나온다. 대표적인 게 원전 정책이다. 그는 집권 뒤 전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이 정해놓은 노후 원전 폐기 시기를 더 뒤로 미뤘지만,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진 뒤 전격적으로 탈원전을 결정했다. 물리학 박사 출신이자 환경 및 원전안전 장관을 몇년씩 했던 원전 신봉자였기에 이런 전환은 더 극적으로 비쳤다. 
여성 정책도 마찬가지다. 유럽연합 차원의 기업 CEO 여성 쿼터제 도입에 반대한 것 등을 이유로 그는 ‘반여성적’이라는 비난에 내내 시달렸다. 그런데 지난해엔 독일 기업들을 향해 “여성 쿼터 증가에 자발적 움직임을 기대했지만 이제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고 있다”며 법제화 가능성까지 시사하며 매섭게 경고했다. 
전업주부 대상의 ‘어머니 연금제’가 여성의 사회진출을 저하시키는 보수적 정책이라는 지적이 일자 3살 이하 탁아소의 전면확대 같은 대안도 동시에 내놓았다.
 
이런 그에겐 ‘신념이나 비전이 없는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합의가 형성될 때까지 논쟁이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미리 정답을 정하지 않고 여러 대안을 모색해놓는 신중한 스타일은 그를 차츰 “이데올로그가 아닌 문제해결사”로 불리게 했다. 
“메르켈은 독일 정치의 핵심이 합의와 연합 구축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다. 자신이 지키지 못할 정책을 그가 쉽게 뱉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야당은 언제든 파트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기계적으로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파이낸셜 타임스>)
지난해 12월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한겨레신문사에 들렀던 일이 떠오른다. 편집국을 돌다 마침 내 자리에 놓여 있던 책 제목을 본 그가 웃으며 물었다. 
“그래, 여성이 대통령이 되면 세상이 달라진답디까?” <왜, 여성대통령인가?>라는 그 책의 상당부분은 메르켈 총리 얘기였다.
 
그 책을 이후 박 대통령이 읽었는지 확인한 바는 없지만, 책 없이도 박 대통령 본인은 메르켈을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을 것 같다. 이달 초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는 두 사람이 반갑게 악수하는 사진이 보도됐다. 2000년 각각 야당이던 시절 만나 친분을 유지한 이래 벌써 네번째 만남이란다.
자국의 첫 여성 지도자이면서 이공계 전공자, 보수 야당을 집권당으로 올려놓았다는 점 등 공통점이 적잖은 두 사람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메르켈의 힘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USA투데이>는 메르켈을 두고 “도그마의 수렁에 빠지지 않는 보수정치인이 어떻게 사회를 분열시키지 않고 이끌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고 말했다.
< 한겨레신문 김영희 문화부장 >


[1500자 칼럼] 신(新) 현모양처

● 칼럼 2013. 9. 30. 10:59 Posted by SisaHan
얼마 전, 한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사회자가 연예인 참가자들에게 장래희망을 일일이 물어보았다. 일부는 진지하게 또 소수는 오락적인 답변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중에 가장 반전을 일으켰던 장래희망은 요즘 대세를 이룬다는 걸 그룹 중의 한 멤버가 대답한 ‘현모양처’였다. 상상외의 답변에 좌중은 웃음바다를 이루었으나 정작 본인은 진지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가 보인 진지함 마저 오락적 연출인지 아닌지 불분명했지만 화려함의 극치에 있는 소녀의 답변에서 나는 한 생각을 키워보았다. 현대적 감각을 가진 현모양처는 어떤 모습일까, 혹시 이웃의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고. 
 
요즘 눈여겨보는 젊은 여인이 있다. 향기로 말한다면 바닐라나 오렌지 향보다 라벤더 향에 가깝고, 꽃으로 치면 목련이나 장미보다 해바라기 꽃 같은 건넛집 여인이다. 
그녀는 서른 중반의 연령대에 S라인 몸매를 가졌으며 미모라고 할 수는 없으나 세련미를 겸비했다. 사회생활을 한다면 전문직에 종사할법한데 전업주부로 돌아와 육아에 전염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그렇게 특별하다고 할 수 없지만 가정을 이끌어 가는 솜씨는 수십 년 경력자인 나 보다 훨씬 월등해 보인다.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차고 안을 우연히 들여다보면서 부터였다. 흔히 창고로 사용하는 차고의 벽면을 마치 상품 진열장처럼 깔끔하게 손질 해 놓은 살림솜씨는 가히 일품이었다. 집안에서 가장 허접한 물건들이 모이는 곳임에도 주부의 손길이 자주 미치지 못하는 곳이 창고이다. 하지만 그곳조차 삶의 군더더기를 허용 않는 그녀의 성품은 생활 곳곳에서 나타났다. 정원 일을 하는 날은 하루 종일 숙련된 조경사의 솜씨로, 집 외관을 손 볼 때는 남편과 똑 같은 역할을 하며 적극적으로 주어진 일을 처리한다. 
 
또한 그녀는 대인과의 교류를 절제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손님의 방문도 그렇다고 외출도 잦지 않다. 자신의 대외활동으로 인해 가족들이 혹시 모를 불편을 겪게 되거나 그들을 소홀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깔려있음이리라. 대신 언제 어디서나 네 식구가 똘똘 뭉쳐 무엇이든 함께 하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그녀의 일과 중에 가장 내 마음에 드는 부분은 여가시간 활용이다. 정오가 되면 나는 집안일을 대충 마무리 하고 출근길에 오르지만 그녀는 대문 앞 돌계단에서 태양열을 쪼인다. 차를 후진하면서 온몸으로 태양 에너지를 흡입하는 그녀를 훔쳐보는 것은 부러움이면서 즐거움이다. 
보통 홀로 자유를 만끽하는 그 시간엔 신문이나 책을 읽으며 차를 마시던 그녀가 오늘은 웬일로 한 뼘도 안 되는 핫팬츠에 끈 달이를 걸쳤고 챙 넓은 밀짚모자를 얼굴에 가렸다. 그리고 다리는 최대한 벌린 상태로 상체를 뒤로 젖힌 포즈가 여느 때와 사뭇 다르다. 포즈가 다소 강렬해도 그녀는 요염하거나 헤프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힘겨운 오전이었음을 연상하게 한다. 그녀만의 독특한 치유법인 셈이다.

현모양처의 변화된 모습은 매사 소극적에서 적극적으로, 절대 희생에서 상생으로 그리고 자부심과 열정으로 건강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그녀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