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자녀를 평생 데리고 살 것인가?

● 칼럼 2013. 11. 4. 20:32 Posted by SisaHan
언제부턴가 대학생들이 매우 온순해졌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가 그렇다. 사춘기를 거치지 않은 것 같아서 물어보면 초등학교 5학년 때 “잠시 거쳤다”고 한다. 중3 아들을 둔 제자가 “요즘 애들은 사춘기도 안 거치나요?”라고 물어온 적이 있다. 그는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이다. 그때 나는 답했다. “부잣집 아이들은 안 해. 강아지처럼 잘 따르지.” 또 다른 제자는 자기만 아는 남편에 질려서 이혼을 하려고 아이에게 의논을 했더니, 놀란 기색도 없이 아이가 곧바로 지금 사는 집에 누가 살 것인지만 알고 싶어 하더라고 했다. 자기만 아는 아이를 보고 기가 막혀버린 그는 지금 남편과 계속 살고 있다. 누군가의 표적이 될까 봐 조신하고, 적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늘 유순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 ‘생존’과 ‘안전’에 대한 강박을 가진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누가 날 낳으랬어요?”라며 부모에게 대들던 90년대 학번 형이나 언니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최근 <속물과 잉여>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는데 그 책에서 백욱인 교수는 “애비는 속물이 됐고 그 자식들은 잉여의 나락에” 빠졌다고 말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은 노크도 없이 방문을 덜컥덜컥 여는 부모가 참을 수 없어 부모에게 반항하고 또래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은 부모의 속물성에 편승한다. 운동은 자기들이 대학 때 다 했으니 너희는 공부만 하라는 아버지의 이중성에 놀라지만 그에게 순종하기로 했고, 중학교 때 록 공연에 데려가 준 ‘쿨’한 부모의 ‘관리’가 고맙다며 그들의 기에 눌려 산다. 이들의 삶의 목표는 안정된 직장을 얻고, 제때에 결혼하고 탈 없이 사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 구조로 보면 그들은 잉여적 존재가 될 확률이 아주 높다.
얼마 전 일본 도쿄에서 열린 ‘니트의 날’ 행사에서, 서른살이 가까워진 은둔형 외톨이는 대학 졸업 뒤 겨우 직장을 얻었지만 힘들어 퇴사한 뒤에는 집에 틀어박혀 산다고 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쫓아내려 했지만 잘 버텨내서 지금은 꽤 편하게 지낼 수 있다고 했다. 부모의 연금에 빌붙어 사는 이 친구에게 짓궂은 평론가가 물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려고? 자살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는 그렇게 되면 자살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사실 어떻게 자살할 것인지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청년의 모습은 일본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핫’한 운동권 부모와 ‘쿨’한 신세대 부모들은 자기 방식의 사랑과 투자로 자녀들을 열심히 키웠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들을 평생 먹여 살려야 할 것 같다. 당신은 그럴 만한 경제력과 널브러져 있는 성인 자녀를 보아낼 충분한 덕성을 쌓아놓았는가? 아니라면 지금부터 그들의 자활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주말 서울의 한 청소년 센터에서는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전환과 연대’라는 주제로 청소년 축제가 열렸다. 그 행사에서 청소년들은 폐자전거로 멋진 자전거를 조립하고, 버려진 목재로 의자를 만들며, 태양광 음식물쓰레기 건조기를 제작했다. 퇴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손작업 워크숍에서 소품들을 만들고 요리를 해서 임시 장터에서 팔기도 했다. 노동하는 몸을 발견하고 또한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자리, 그리고 함께하는 즐거움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아이를 평생 먹여 살릴 자신이 없는 부모들은 슬슬 동네에 작업장을 만들고 작업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동네 빈터에 펼쳐둘 평상을 만드는 목공방이나 자전거 공방을 협동조합으로 차려도 좋을 것이다. 청소년들이 자신이 만든 자전거로 동네 심부름도 다니고, 직접 만든 소품을 구청 열린 장터에서 팔고, 동네 어른들과 친해진다면 이들도 자신감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어른들은 아이를 좀비로 만드는 제도 교육을 바꾸어내면서 동시에 새 일거리들을 만들어내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 새 일거리란 실종된 ‘상호 돌봄의 사회’를 찾아내는 일, 그리고 지속가능한 삶을 가능케 할 산업, 곧 에너지와 물, 농사와 집짓기 등과 관련된 적정기술 분야가 아닐까 싶다.

< 조한혜정 - 연세대 교수, 문화인류학과 >


[한마당] ‘반인륜’까지 계승 하는가

● 칼럼 2013. 11. 4. 20:29 Posted by SisaHan
호칭 때문에 한참 고민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님’을 쓰기도 싫고, 이젠 대통령이란 직책을 호칭 삼기도 싫어졌습니다. 선거 부정과 은폐 조작 축소 문제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법이 심판하기 전에 함부로 떼고 말고 할 것은 아닙니다. 호칭을 고민한 가장 큰 까닭은 다름 아닌, 김석기 한국공항공사 사장 임명이었습니다. 국정원의 선거 부정 논란에 가려 ‘조용히’ 지나갔지만, 김석기씨를 공기관의 책임자로 임명한 것은 이명박 정권의 반인륜성을 이 정권도 승계하겠다는 천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인륜을 포기한 사람을 어떻게 우리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김씨가 누구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당신이 반드시 극복하겠다고 했던, 생명 경시, 서민 멸시, 비열함, 탐욕, 물신숭배 등 이명박 정권의 속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애써 가꾼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던 가난한 이들을 불에 타거나 혹은 유독가스에 질식해 죽게 한 경찰 지휘관이 바로 김씨였습니다. 살아남은 그들의 자식, 이웃들을 방화 살인범으로 몰아 감옥에 처넣었던 이명박 정권의 하수인이었죠.
어떻게 그런 자를 공기업 최고경영자로 앉힐 수 있죠? 더욱이 그는 서류심사에서 꼴찌를 한 인물이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길 바라지만, 당신은 이번 인사로 용산참사 유족들의 울부짖음과 세상 사람들의 경악과 비판을 간단히 비웃어 버렸습니다. 용산참사를 저지른 이명박 정권보다 오히려 더 반인륜의 자세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 공동체의 대표로 모시고 있다는 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지 않을 수 있고, 해서는 안 될 인사를 하면서 당신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간단명료합니다. ‘충성, 오로지 충성!’ 출세에 몸단 자들에게 이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더욱이 김석기씨의 임명과 병행해 원칙에 충실하려 했던 채동욱 검찰총장, 윤석열 특별수사팀장은 찍어냈던 터였습니다. 국민들에 대한 메시지도 분명합니다. ‘잠잠하라, 잠잠하라.’ 권력이 하는 일에 대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2, 제3의 용산참사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건 당연합니다. 현재진행형인 밀양 송전탑 사태는 그 예고편이 아닌가 싶습니다. 765㎸ 송전선로가 지나가는 밀양의 30개 마을 가운데 20개 마을은 송전선과의 거리가 500m밖에 안 됩니다. 역학조사 등을 통해 드러났지만, 고압 송전선로 주변은 사람이건 가축이건 정상적인 생활공간이 될 수 없습니다. 백혈병 등 암환자 발생률이 다른 지역보다 매우 높습니다.가축들은 일쑤 유산하거나 기형아를 낳습니다. 때문에 일단 송전선로가 들어서면 그 지역의 재산 가치는 폭락합니다. 5분의 1로 떨어진다고들 합니다. 선로를 설계하고 공사를 강행하고, 주민들을 억누르는 자들에게 그곳에서 살라고 해보십시오. 그들은 거저 준다고 해도 살지 않을 겁니다. 그곳 주민이나 용산참사 당시 남일당 주변 주민이나 처지가 다를 게 없습니다.
밀양의 어르신들에게 재산 가치 추락 말고도 정든 땅을 떠나야 한다는 건 더 큰 괴로움일 겁니다. 젊다면 모르지만, 80~90% 주민이 노인인데 그분들이 정든 이웃, 정든 땅을 떠나 어디에서 마음 붙이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 노인들에게 이 정부는 3000여명의 경찰을 풀어 사지를 들고 끌어내거나 연행하고 있습니다. 이미 한 할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평생 교육계에 몸담아 교장까지 지낸 고준길 할아버지는 “이 더러운 세상 더 살면 뭐하겠느냐. 하직하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젊은 경찰들과 다투다가 실신까지 했습니다. 그 사정을 잘 알 만도 할 텐데, 아예 눈길도 돌리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김석기씨 임명으로 그에 대한 당신의 답을 대신했는지 모릅니다. ‘용산에서처럼 밀어버려….’
 
지난 주말 문화융성위원회 회의가 있었죠. 거기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창조적 능력은 삶의 근본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앞서 간 문화에 대한 존경에서 나옵니다.”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인문정신 문화가 스며들 수 있도록 더욱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인문정신이란 인간 존중의 정신입니다. 그 뿌리가 되는 것이 이해와 공감입니다. 그건 모든 인간적 가치 창조의 원천입니다. 
알고 한 말인지, 써준 대로 그냥 읽은 것인지….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잘 모르겠다면 가수 루시드폴의 노래 ‘외톨이’를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4집(‘레미제라블-가련한 사람들’)에 포함된 노래입니다. 여유가 없으면 노랫말이라도 한번 읽어보십시오. 1분이면 됩니다.
< 한겨레신문 곽병찬 대기자>


[1500자 칼럼] 극과 극

● 칼럼 2013. 10. 27. 15:21 Posted by SisaHan
바이올린의 선율을 기억하면서 좋아하는 곡을 추천하라면 모두가 나름대로 이 곡 저 곡을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타이스의 명상곡’을 꼽고 싶다. 
목사여서 그럴까? 프랑스의 문호인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을 소재로 하여 루이 갈레가 각본을 쓴 것을 오페라로 만든 타이스다. 이것은 수도승 아타나엘과 아름다운 무용가 타이스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보이는데 이 명상곡이 오페라가 전개되는 부분 부분에 흐르고 있다.

수도승 아타나엘은 타락한 여인 타이스를 회개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떠나려 할 때 말리는 스승의 만류를 뿌리치고 멀리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전도했으나 타락한 그녀는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녀도 자신이 살아온 퇴폐적인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차였기에 수도승의 정열적인 요청에 마음이 움직였다.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그녀의 삶이란 환락에 찼으나 육체의 만족이나 세월이 결코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기도 하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도승을 유혹하려는 마음을 품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허영과 타락의 삶을 버리고 수도승을 따라나선다. 모든 재물과 자신이 가졌던 우상과 사귀던 남자와 집과 세상을 등지고 수도승과 함께 정결한 생을 위해 사막으로 떠났고, 수도승은 돌아와 그녀를 수도원에 맡기고 자신의 수도를 위해 정진하는데…, 타이스는 마음에 안정을 찾고 신앙의 길에 섰는데 정작 수도승의 마음에는 오히려 그녀를 연모하는 정과 사랑이 생겨 꿈속에서도 그녀가 생각이 나고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수도승으로서는 이래서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사막으로 나가 고행을 하며 참고 견디려 하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찾아가 고백을 하지만 이미 신앙의 길에 들어선 그녀에게는 공허한 소리로 들릴 뿐 죽어가는 그녀에게는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보이고 하나님이 그를 영접하며 기다리신다고 고백하고 죽음을 맞는다.

대강의 줄거리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땅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두 번이나 보여주는 모래시계를 통해 시간과 세월의 흐름, 인간의 향락이 한 순간 뿐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대에서 벌거벗은 남녀가 즐기는 모든 것들은 지옥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첫 장면에서부터 수도사들의 갈등을 표현하는 모습과 함께 주인공 아타나엘의 극과 극의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처음 그가 타이스에게 갈 때는 성자라고 하겠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고 신앙으로 돌아간 그를 잊지 못해 수도사의 신분도 잊고 사랑을 요구하는 모습은 인간 그 자체가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점을 보이고 있다. 수도사 역시 인간이기에 그도 갈등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여인에게 미쳐있는 그 모습을 보고 과거 그를 존경하고 따랐던 수도사들이 사탄이 나타났다고 했겠는가?
인간이 그래서 연약한 존재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과신할 수도 없고 누구를 향해 비판하거나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스스로 시인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극과 극 속에 사는 것이다. 오늘은 우리가 어떤 극적인 존재로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오페라 마지막 장면은 심각하다. 타이스는 죽고 사라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큰 칼이 무대 위로 떨어지면서 꽂히는데 그 칼이 흔들거리고 있는 장면이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그것은 언제나 현재형 임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교육부가 21일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8종에 대해 829건의 내용을 수정·보완하라고 출판사들에 권고한 것은 교학사 교과서 문제를 희석시키려는 ‘물타기 꼼수’일 뿐이다. 교육부는 이제라도 교학사 교과서의 검정을 취소해 사태를 빨리 마무리하기 바란다.
교육부 권고 내용을 살펴보면 물타기 의도가 잘 드러난다. 교육부는 애초 객관적 사실과 표기·표현 오류만 잡아내겠다고 했다가 21일 발표 때는 서술상의 불균형과 국가 정체성을 왜곡할 수 있는 내용을 함께 분석했다고 밝혔다. 이들 내용이 대부분 북한 관련 서술에 집중된 것을 보면 7종의 교과서에서 흠집을 찾으려고 기준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졸속 작업을 하다 보니 권고 내용이 틀린 것도 여럿이다. 게다가 교학사 외의 교과서에서는 오탈자까지 속속 짚어내 오류 숫자를 늘리려고 한 흔적이 뚜렷하다. 그럼에도 교학사 교과서의 오류가 다른 교과서의 2~4배에 이른 것은 이 교과서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8월 말 8종의 교과서가 국사편찬위원회(국편) 검정심사에서 통과된 이후 논란이 집중된 것은 교학사 교과서뿐이었다. 이 교과서는 친일파의 행위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를 노골적으로 미화하는 등 역사 교과서로서 허용될 수 있는 자율성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비판이 많았다. 게다가 사실 관계가 잘못 표현되거나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내용이 수백 곳 지적돼 교과서로서 수준 미달이라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다수였다. 
그렇다면 국편의 검정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 교과서만 검정 취소하면 그만인데도 교육부는 굳이 8종의 교과서 전부에 대해 사실상의 재검정을 실시했다. 부실·역사왜곡 교과서 문제를 좌우 이념 논란으로 치환하려 한 교학사 교과서 저자들과 새누리당 등 여권의 뜻이 그대로 관철되고 있는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올봄 ‘역사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불을 지른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때아닌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교육부의 이번 권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와 관련된 내용이 하나도 포함되지 않은 것은 여권이 역사전쟁으로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들이 나아가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교학사 교과서의 내용을 정통으로 삼자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역사 교과서 내용까지 바꿔버린다면 정권이 달라질 때마다 역사전쟁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이는 역사학계는 물론이고 국민에게도 불행이다. 교육부는 정권이 아니라 국민을 바라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