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극과 극

● 칼럼 2013. 10. 27. 15:21 Posted by SisaHan
바이올린의 선율을 기억하면서 좋아하는 곡을 추천하라면 모두가 나름대로 이 곡 저 곡을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타이스의 명상곡’을 꼽고 싶다. 
목사여서 그럴까? 프랑스의 문호인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을 소재로 하여 루이 갈레가 각본을 쓴 것을 오페라로 만든 타이스다. 이것은 수도승 아타나엘과 아름다운 무용가 타이스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보이는데 이 명상곡이 오페라가 전개되는 부분 부분에 흐르고 있다.

수도승 아타나엘은 타락한 여인 타이스를 회개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떠나려 할 때 말리는 스승의 만류를 뿌리치고 멀리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전도했으나 타락한 그녀는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녀도 자신이 살아온 퇴폐적인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차였기에 수도승의 정열적인 요청에 마음이 움직였다.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그녀의 삶이란 환락에 찼으나 육체의 만족이나 세월이 결코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기도 하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도승을 유혹하려는 마음을 품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허영과 타락의 삶을 버리고 수도승을 따라나선다. 모든 재물과 자신이 가졌던 우상과 사귀던 남자와 집과 세상을 등지고 수도승과 함께 정결한 생을 위해 사막으로 떠났고, 수도승은 돌아와 그녀를 수도원에 맡기고 자신의 수도를 위해 정진하는데…, 타이스는 마음에 안정을 찾고 신앙의 길에 섰는데 정작 수도승의 마음에는 오히려 그녀를 연모하는 정과 사랑이 생겨 꿈속에서도 그녀가 생각이 나고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수도승으로서는 이래서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사막으로 나가 고행을 하며 참고 견디려 하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찾아가 고백을 하지만 이미 신앙의 길에 들어선 그녀에게는 공허한 소리로 들릴 뿐 죽어가는 그녀에게는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보이고 하나님이 그를 영접하며 기다리신다고 고백하고 죽음을 맞는다.

대강의 줄거리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땅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두 번이나 보여주는 모래시계를 통해 시간과 세월의 흐름, 인간의 향락이 한 순간 뿐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대에서 벌거벗은 남녀가 즐기는 모든 것들은 지옥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첫 장면에서부터 수도사들의 갈등을 표현하는 모습과 함께 주인공 아타나엘의 극과 극의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처음 그가 타이스에게 갈 때는 성자라고 하겠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고 신앙으로 돌아간 그를 잊지 못해 수도사의 신분도 잊고 사랑을 요구하는 모습은 인간 그 자체가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점을 보이고 있다. 수도사 역시 인간이기에 그도 갈등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여인에게 미쳐있는 그 모습을 보고 과거 그를 존경하고 따랐던 수도사들이 사탄이 나타났다고 했겠는가?
인간이 그래서 연약한 존재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과신할 수도 없고 누구를 향해 비판하거나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스스로 시인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극과 극 속에 사는 것이다. 오늘은 우리가 어떤 극적인 존재로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오페라 마지막 장면은 심각하다. 타이스는 죽고 사라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큰 칼이 무대 위로 떨어지면서 꽂히는데 그 칼이 흔들거리고 있는 장면이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그것은 언제나 현재형 임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교육부가 21일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8종에 대해 829건의 내용을 수정·보완하라고 출판사들에 권고한 것은 교학사 교과서 문제를 희석시키려는 ‘물타기 꼼수’일 뿐이다. 교육부는 이제라도 교학사 교과서의 검정을 취소해 사태를 빨리 마무리하기 바란다.
교육부 권고 내용을 살펴보면 물타기 의도가 잘 드러난다. 교육부는 애초 객관적 사실과 표기·표현 오류만 잡아내겠다고 했다가 21일 발표 때는 서술상의 불균형과 국가 정체성을 왜곡할 수 있는 내용을 함께 분석했다고 밝혔다. 이들 내용이 대부분 북한 관련 서술에 집중된 것을 보면 7종의 교과서에서 흠집을 찾으려고 기준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졸속 작업을 하다 보니 권고 내용이 틀린 것도 여럿이다. 게다가 교학사 외의 교과서에서는 오탈자까지 속속 짚어내 오류 숫자를 늘리려고 한 흔적이 뚜렷하다. 그럼에도 교학사 교과서의 오류가 다른 교과서의 2~4배에 이른 것은 이 교과서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8월 말 8종의 교과서가 국사편찬위원회(국편) 검정심사에서 통과된 이후 논란이 집중된 것은 교학사 교과서뿐이었다. 이 교과서는 친일파의 행위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를 노골적으로 미화하는 등 역사 교과서로서 허용될 수 있는 자율성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비판이 많았다. 게다가 사실 관계가 잘못 표현되거나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내용이 수백 곳 지적돼 교과서로서 수준 미달이라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다수였다. 
그렇다면 국편의 검정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 교과서만 검정 취소하면 그만인데도 교육부는 굳이 8종의 교과서 전부에 대해 사실상의 재검정을 실시했다. 부실·역사왜곡 교과서 문제를 좌우 이념 논란으로 치환하려 한 교학사 교과서 저자들과 새누리당 등 여권의 뜻이 그대로 관철되고 있는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올봄 ‘역사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불을 지른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때아닌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교육부의 이번 권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와 관련된 내용이 하나도 포함되지 않은 것은 여권이 역사전쟁으로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들이 나아가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교학사 교과서의 내용을 정통으로 삼자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역사 교과서 내용까지 바꿔버린다면 정권이 달라질 때마다 역사전쟁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이는 역사학계는 물론이고 국민에게도 불행이다. 교육부는 정권이 아니라 국민을 바라보기 바란다.


국방부가 22일 국군 사이버사령부 요원들의 대선 개입 댓글 작성 사건에 대한 합동조사 중간발표를 통해 “별도의 상부 지시는 받지 않았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날부터 사이버사령부 압수수색 등 수사 체제로 전환했다고 덧붙였다.
우려하던 대로 은폐·축소 수사의 분위기가 역력하다.
국방부 조사의 문제점은 한둘이 아니다. 뒤늦게 압수수색을 시작한 것부터가 진상규명 의지가 없는 ‘늑장수사’의 전형이다. 댓글이 삭제되는 상황을 바라만 보다 이제 와서 압수수색을 한다니 은폐할 시간을 벌어줬다는 의혹을 살 만하다. 더구나 이미 신분이 드러난 4명에 대해서만 임의제출 형식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받아 조사했을 뿐 나머지 요원들의 계정은 확인조차 않았다. 또 4명에 대해서도 컴퓨터나 휴대폰 기록 정밀조사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단독 행동’ 취지로 중간발표를 했으니 이를 누가 믿겠는가.
 

수사 체제로 전환하는 것도 눈속임의 술수가 읽힌다. 국방부는 조사본부가 군검찰과 합동으로 수사를 벌인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군검찰조차 독립성을 믿기 어려운데, 그나마 현장수사 대신 법률 검토만 맡는다니 들러리나 마찬가지다.
국방부 발표를 믿기 어려운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다. <한겨레>에 따르면, 사이버사령부가 대선 및 정치개입에 사용한 전용 아이피가 존재하고 여기에서 최소 8명 이상의 군무원이 활동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이외에 ‘숟가락’이란 계정을 사용하는 ㅇ 요원도 블로그와 트위터 등을 이용해 ‘오빤 MB(엠비) 스타일’ 등의 동영상을 퍼나른 것으로 밝혀졌다. 선거 또는 정치 개입에 나선 사이버사 요원들이 국방부가 발표한 4명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더구나 ㅇ 요원은 국정원 심리전단 팀장 이아무개씨가 지난해 8월28일 ‘상부 지시에 따라’ 올린 ‘오빤 MB 스타일’ 동영상을 바로 다음날 블로그 등에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또 사이버사 전용 아이피를 이용한 게시글들은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가 작성한 게시글과 주제 면에서 매우 유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부는 국정원 심리전단과의 연계성을 부인했으나 이를 보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군의 선거 개입은 헌법에 규정된 정치 중립 의무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사이버 쿠데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군의 정치·선거 개입이 어떤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현 정권 인사들도 잘 알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중단하고 철저한 수사를 통해 진상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칼럼] 100살에도… 삶은 계속된다

● 칼럼 2013. 10. 27. 15:16 Posted by SisaHan
아름다운 노년의 두분을 만났다.
한분은 얼마 전에 백수연을 치른 친구의 어머니, 그리고 또 한분은 <피에타> <뫼비우스>로 화제작을 몰고 다니는 김기덕 감독의 어머니다.
김기덕 감독의 1분30초짜리 <나의 어머니>는 70주년을 맞은 베네치아(베니스) 영화제가 세계적 영화감독 70명의 단편영화를 모아 한편의 영화처럼 만들어 현지에서 상영한 것이다.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감동적인 영상을 만들어냈다. 여든 전후일 것으로 보이는 어머니는 아름다웠고 강인했다. 아들의 방문전화를 받고 어머니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계단을 한단 한단 내려가고 복잡한 건널목을 위태위태하게 건너 시장을 보고 장본 것을 들고 다시 찬찬히 계단을 오른다. 불안한 걸음걸이와는 달리 능숙하게 음식을 만들어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아들과 나누어 먹는다. 혼자 살며 음식도 하고 밥도 하고 장도 보는 어머니의 모습을 카메라는 끈질기게 비추었고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서 보여준 처절함과는 또 다른 처절함이 있었다. 보통의 인간이 나이가 들어가며 육체가 쇠잔해지면서도 일상을 살아내는 평범한 모습의 비범성과 위대성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10월의 하늘이 맑은 날 서울 근교의 마당 넓은 집에서 유경순 여사의 백수연이 열렸다. 지난여름 99세의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하얀 망사장갑이 필요하다고 했다. 웬 망사장갑일까 했더니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손만 보이는데 손이 쭈글쭈글해서 창피하다며 겨울 장갑이 너무 두꺼워서라고 수줍게 말씀하셨다 한다. 백수연에는 일흔이 넘은 아들의 친구들이 껄껄거렸고 각지에서 친척과 자손들이 모여들었다. 한복을 차려입고 화장도 곱게 한 어머니는 혼자 며칠을 끙끙대며 쓰셨을 감사문을 낭독했고 찬송가도 한곡 부르셨다. 교회성가대에서 소프라노를 맡았던 어머니는 고음이 아슬아슬했지만 2절까지 불렀다. 서른다섯에 혼자되어 올망졸망한 삼남매를 간호사를 하며 기른 어머니의 한세기, 백세 삶에는 우리나라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원산 루씨여고 출신 어머니는 전쟁 때 아이들을 끌고 어찌어찌 제주도까지 내려갔다는데 큰아들 부부는 자신들의 딸이 서른다섯이 넘어서야 어머니가 어머니만이 아니고 너무 젊은 나이에 혼자된 여성이기도 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어머니의 여자로서의 삶의 서러움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스웨덴 소설가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노인들을 위한 동화라 할 수 있다. 양로원에서 지역 유지들이 모여 자신의 백세잔치를 벌이기 10분 전 주인공은 창문을 통해 도망친다. 침대에서 이제나저제나 죽기를 기다리는 삶은 그만 살겠다고 결심했다. 기상천외한 모험이 계속되고 복지사회의 대명사로 불리는 스웨덴의 또 다른 그늘이 유쾌하게 블랙코미디로 그려지기도 했지만 백세 노인의 모험은 그대로 <톰 소여의 모험>이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우여곡절 끝에 84살 여자와 결혼하고 날씨 좋은 섬에서 느긋하게 산다는 정말 동화 같은 해피엔딩이다. 모험의 뒤쪽으로는 현대사의 사건과 인물들을 주인공과 조우시킴으로써 개인과 역사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하기도 한다.
100세 노인의 모험담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아마도 장수시대를 맞아 늙음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세계인 모두의 당면한 문제이기 때문일 듯하다. 개인차가 크고 소득과 건강, 사회복지가 천차만별이지만 모두에게 노년의 삶은 당면한 숙제다. 우리나라는 오이시디 국가 중에서 인구 10만명당 100살 이상의 인구가 가장 적은 두명에 불과하지만 지금 같은 고령화 시대가 계속되면 곧 백세 노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든 노인을 볼 때마다 저 노인은 언제 죽을까라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장수 자체를 복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나이 들면 걷지도 못하고 혼자 일상을 해결할 수도 없어서 주변에 짐이 될 가능성이 많아서일 것이다. 밥을 내 손으로 먹을 수 있고 뒤를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날까지 사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소박한 꿈일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살아 있는 한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100살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는 시대를 우리는 맞고 있는 것이다.
< 김선주 -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