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안녕 못하다’는 학생들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 칼럼 2013. 12. 24. 19:3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한 대학생이 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대자보는 철도파업 노동자 대량 직위해제, 밀양 송전탑 강행,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등으로 하 수상한 시절에 ‘모두들 안녕하신지’를 묻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에 대한 뜨거운 호응이다. 전국 대학생들의 ‘안녕하지 못하다’는 릴레이 대자보가 이어지면서 누적됐던 학생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분출되는 양상이다.
대자보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학생들이 학원 밖의 정치·사회적 현안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대부분의 대학생은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외부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하지만 철도파업 노동자 대량 직위해제 등을 보면서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들이 지속될 경우 자신들의 미래가 불안해질 것임을 자각한 대학생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대자보 릴레이에 참여한 한 학생의 지적대로 “확실한 것은 불안한 사람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뭉쳐 서로를 지켜주어야 안녕을 도모할 수 있다.” ‘안녕하지 못한’ 대학생 300여명이 철도파업 노동자 집회에 참여한 것은 그런 연대의식의 발로다. 예비 지성인인 대학생들이 사회 부조리에 눈뜨고, 억압받는 약자들과 함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건강한 공동체 형성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 대자보 파문이 확산되는 것은 우리 현실이 학생들 눈으로 보기에도 인내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잘못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파업에 참가했다고 8000명 가까운 노동자를 직위해제하고, 주민이 음독자살을 하며 반대하는데도 송전탑 건설을 강행하고, 국가기관이 나서 대대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는 일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더욱이 현 정권은 자신들한테 불리한 말만 하면 종북으로 몰아붙이고, 대통령 사퇴를 주장했다고 국회의원을 제명하겠다며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안녕하지 못한’ 일차적인 책임은 기성세대에 있다.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정치권, 노동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취급하는 기업들, 자식을 출세의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은 부모 등이 모두 공범이다. 기성세대들은 학생들의 주장이 사실 왜곡이니 선동이니 하는 딱지를 붙이기 전에 그들이 쏟아내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이번 대자보 파문을 계기로 ‘모두가 안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성세대와 학생들이 힘을 합하길 기대한다.


[사설] 김정은, ‘공포정치’로는 정통성 얻지 못한다

● 칼럼 2013. 12. 24. 19:3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북한이 장성택 전 조선노동당 행정부장의 전격적인 처형을 정당화하면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유일 지배체제 강화를 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정은은 장성택 사형이 별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이전과 비슷한 공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북한 당국이 정통성 강화를 위해 동원하는 첫째 논리는 김정은의 혈통을 강조하는 것이다. 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이 하늘에선 수령의 피가 아닌 다른 피를 가진 인간은 숨 쉴 공기도 없다”며 ‘수령에 대해 감히 도전한다면 피를 나눈 혈육이라도 서슴없이 징벌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주장은 북한이 왕조시대의 사고방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후진적 상태에 있음을 재확인할 뿐이다. 김정은 이외의 사람은 어느 때건 처형할 수 있다는 ‘공포정치의 수사’이기도 하다. 헌법에까지 독재를 규정한 나라이더라도 폭력을 남발해서는 정통성을 얻지 못한다. 이는 장성택 세력에 대한 ‘피의 숙청’을 중단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김정은 정권은 앞으로 경제 활성화를 통한 정통성 강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장성택에 대한 판결문을 보면 그가 여러 경협 사업에 깊숙이 관여해왔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이들 사업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오히려 확대하려 할 것이다. 다른 개혁·개방 조처도 내각을 전면에 내세워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쪽으로 가기가 쉽다. 이런 시도는 김정은 체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거부감을 낮추지 못한다면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 공식적으로 ‘장성택 처형은 북한 내부의 일’이라고 선을 긋고 있는 중국도 대북 경협을 확대할 동기가 약하다. 공포정치의 지속과 이로 인한 체제 불안은 경제 개선에도 족쇄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북한의 대외 관계에 대해서는 적어도 당분간은 경색될 것으로 보는 전망이 다수다. 군부를 중심으로 강경파의 힘이 커지는 듯한 상황임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분석이다. 북한이 체제 안정에 실패할 경우 내부 결속을 위해 대외 도발을 시도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런 길은 북한 자신을 위해서도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지금 북한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대외 관계 개선에 신경 써야 할 때다. 공포정치를 지속해선 안 될 또 다른 이유다.
 
김정은이 왜 장성택 처형을 감행했는지 그 구체적인 계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물론 장성택의 권력이 강해지는 과정에서 김정은과 다른 권력자들의 불안감이 커진 게 주요한 배경이 됐을 것이다. 이런 모순에 공포정치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면 김정은 체제는 지구촌의 차가운 눈길을 피하기 어렵다.


[한마당] 당신들의 문학은 안녕한가요?

● 칼럼 2013. 12. 24. 19:3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이 ‘박정희의 유신’과 ‘87년 6월 항쟁’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원로작가 이제하의 소설 연재를 거부했다고 한다. 지난 9월에는 현직 대통령의 해묵은 수필을 들먹이며 몽테뉴와 베이컨 운운하는 황당한 아첨을 해 문학인들의 공분(公憤)을 사더니, 급기야 문학에서 ‘정치’를 추방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계기로 중견작가 정찬이 정치적인 색채가 드러난다는 이유로 장편소설 게재를 거부당했고, 원로소설가 서정인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언급했다는 이유로 연재를 중단당했다는 소식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평생을 문학에 바쳐온 중견·원로 작가들이 황당한 이유와 부당한 권력 앞에서 수모를 당하며 감내해야 했을 절망감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에 앞서 분노가 치민다. 그동안 힘없는 젊은 작가들에게는 또 얼마나 많은 횡포를 부렸을까.
 
소설가 정찬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양숙진 주간은 “<현대문학>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잡지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가시화된 작품을 다루지 않았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가당착적인 논리일 뿐이다. 현직 대통령의 수필을 꺼내들고 소위 ‘박비어천가’를 부르는 것은 ‘순수’이고, 과거의 독재정권을 비판하거나 그것과 맞서 싸운 역사적 과정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모두 ‘정치’라는 것일까? 더구나 이제하의 소설에서 ‘유신’은 단순한 배경일 뿐이라고 하지 않는가? 서정인이 현실참여적인 작가로 분류되는가? 왜 한국의 ‘순수문학’은 항상 문학이 어떠한 정치적 경향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권력의 이데올로그를 자처하는 것일까? 이러한 ‘순수’가 시국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을 쓰지 못하게 한 일제 총독부의 ‘검열’이나 ‘창작지침’과 무엇이 다른가? 
문학의 ‘순수’는 문학이 이데올로기의 전달 수단이나 현실 정치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문학이 정치와 현실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문학의 순수는 ‘정치’가 아니라 ‘권력’과의 거리두기에서만 가능하다.
게재 거부의 이유를 묻는 이제하의 질문에 대한 편집장의 답변도 문제다. 사측에서 미래지향적인 소설, 밝고 명랑한 소설을 원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현대문학>이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
 
잠시 관심을 갖고 주변을 돌아보라. 그러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온통 죽음과 고통만이 난무하는 시대, <현대문학>은 문학의 보편성이 이런 현실에서 눈을 돌림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어두운 시대를 가릴 화려한 포장지일 뿐이다. 
어둠의 시대에 밝고 명랑한 작품을 원한다는 것, 그것은 일제 말 총독부가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던 ‘명랑성’만큼이나 폭력적이다. 어두운 시대에는 어두운 문학이, 죽음의 시대에는 죽음의 문학이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이 어둠과 죽음을 외면할 때, 문학은 지배논리를 강화하는 고급한 상품이 된다.
<현대문학>이 이제하·정찬·서정인의 소설에 ‘정치’라는 딱지를 붙여 게재를 거부하고 연재를 중단시킨 것은 단순한 편집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문학인들에게 자유 없는 문학과 영혼 없는 글쓰기를 요구한 권력의 작가 길들이기였다. 
<현대문학>은 문학인들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 곧 작가들의 문학적 자존심과 문학의 존엄을 짓밟았다.
 
써야 할 것과 쓰면 안 되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편집’이 아니라 ‘권력’이다. 또한 정치권력에 대한 아부는 설령 그것이 문학적으로 잘 포장되었다 할지라도 문학이 아니다. 
이제 이 부당한 권력에 대해 작가들이 응답할 차례이다. 문학인들에게 감히 묻는다. 당신들의 문학은 안녕하신가요?
< 고봉준 문학평론가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1500자 칼럼] 늑대가 되자

● 칼럼 2013. 12. 16. 18:0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There was an unmistakable note of sorrow in it now. It was no longer the loud, defiant howl, but a long, plaintive wail; “Blanca! Blanca!” he seemed to call.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의 위풍당당하던 포효가 아닌 길고 애절한 그 목소리는, “블랑카! 블랑카!” 하며 울부짖는 거 같았다.)

며칠 전에 다시 읽은 ‘커럼포의 늑대 왕, 로보’ (Lobo, The King of Currumpaw, Ernest Thompson Seton)의 문장 일부다. 사랑하는 아내 블랑카를 찾아 울부짖는 로보의 슬픈 하울링(howling)은, 언제나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쨌거나 이 야성미 넘치는 동물에 반해서 좋아하는 동물? 하면 늑대요, 꿩 대신 닭 식으로 한때는 진돗개를 여섯 마리나 기른 적이 있었다. 회색 늑대가 사는 겨울 숲에 대한 기대감이, 캐나다 이민에 대한 선택의 즐거움이 된 것은 당연지사였고. 

늑대인지 코요테인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언젠가 겨울 캠프에서 들어봤던 생생한 하울링은 참 가슴 설레는 울림이었다. 누가 저들을 숲 속의 악마라고 했나, 자연의 정령이지!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얼뜬 시심(詩心)의 과잉 노출이라고 흉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정색을 하며 몇 마디 더 늘어놓고 싶어지는 건, 이 세상은 늑대에 관해서는 온통 잘못된 편견으로 꽉 들어찬 거 같은 묘한 억울함이 있어서다. 

몇몇을 들어보자. ‘늑대 같은 남자 혹은 남자는 다 늑대’라는 표현은, 음흉하고 능글맞은 사기꾼이나 비열하고 난폭한 깡패로 늑대를 간주하는 암시가 엿보이지 않는가? ‘늑대와 7마리 새끼염소, The wolf and the seven little goats’라는 세계명작동화는 이제 동영상으로도 만들어져서,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에 늑대를 사정없이 흉악한 동물로 꼭 새겨주고 있다. 늑대에 대한 몰이해의 극치는 1926년경 미국에서 빚어진 늑대 퇴치 사업일 것이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숲을 만들자는 취지로 늑대를 보이는 족족 죽인 결과, 숲에는 엘크 같은 초식동물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닥치는 대로 풀과 어린나무들을 먹어 치웠다. 그 결과 큰 풀이 자라지 못하게 된 숲에는 작은 새들이 둥지를 틀 수 없게 되었고, 이어서 여러 동식물이 숲을 떠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이유는 포식자의 위치에 있던 늑대가 사라짐에 따라 숲의 생태계가 무너져 생긴 결과였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캐나다에서 공수해 온 늑대를 방사한 뒤 숲은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았다. 미국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에서 있었던 70년 만의 늑대 복원에 관한 일화다. 늑대야말로 평화로운 숲을 지켜주는 핵심종이다.

이런 늑대의 본성을 살펴보면 한결 경이로워진다. 부부가 평생을 함께하는 엄격한 일부일처제로, 1~2년 된 새끼와 일부 개체가 포함된 무리를 이루며 사는데, 무리 안에서 이뤄지는 질서와 생존방식은 이상적인 사회적 공리주의를 연상하게 한다. 가족 간의 정이 특별해서 아비 늑대의 아내와 자식 사랑은 눈물겨울 지경이다. 덫에 걸려 죽은 아내 블랑카를 찾기 위해 죽음도 개의치 않고 사냥꾼의 캠프 근처를 울부짖으며 헤집고 다니던 로보의 순애보처럼. 게다가 독립해 따로 살던 새끼들이 이따금 부모를 찾아오는 효심까지 보여준다니, 늑대의 매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러니 ‘늑대 같은 놈’이란 비난은 ‘참 멋지고 진실한 남자’라는 칭찬이 되는 셈이다.

모국의 대구동물원 늑대 우리에 이런 안내문이 붙어있다고 한다. ‘남자를 늑대 같다고 말하지 마라. 남자들이 늑대만큼 살아간다면 여자는 울 일이 없을 것이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국과 이곳 구분 없이 하루가 멀다고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유명 인사들의 숨겨진 여인, 약물 복용, 배임 횡령 등등 기사를 대하자니 절로 읊조려진다. 남자들이여, 우리 모두 늑대가 되자!

< 김준태 - 시인, ‘시.6.토론토’동인 / ‘시와 시론’으로 등단 >
펜클럽 회원,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