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유럽 순방을 수행했던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의 ‘페이스북 폭언’을 둘러싼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프랑스 파리 반정부 시위대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한 그의 발언에 대해 집회 참가자들이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가 하면 미국의 대형 웹커뮤니티 사이트에 관련 기사가 링크되어 국제적 망신까지 샀다고 한다.
문제의 발언은 박 대통령이 파리를 방문한 지난 2, 3일 현지에서 교민과 유학생들이 국가정보원 등의 대선 개입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인 데 대한 것이었다. 당시 집회 참가자들은 ‘박근혜는 한국의 합법적 대통령이 아닙니다’라는 등의 펼침막을 내걸고 집회를 했다고 한다. 김 의원은 이를 두고 ‘통진당 파리지부 수십명이 모여서 했다네요’라는 등의 주장을 편 데 이어 ‘이번에 파리에서 시위한 사람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채증 사진 등 관련 증거를 법무부를 시켜 헌재에 제출하겠습니다’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집권여당의 국회의원이, 외국에서 교민들이 조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며 벌인 반정부 집회를 두고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등의 협박성 발언을 한 것은 경솔하기 짝이 없으며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의 양식을 의문스럽게 하는 행동이다. 헌법에 보장된 집회·시위의 자유를 들먹일 필요조차 없다. 더우기 그들은 집회 시위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선진국에 거주하는 재외국민이다. 현지 한국대사관이 프랑스 당국에 시위를 막아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해 망신을 당했다는 소식과 함께 실로 낯뜨거운 망동이 아닐 수 없다. 국회 법사위 소속 국회의원이 사진 채증 운운하며 헌재에 제출해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한 것은 마치 조폭도 같은 수준이다. 헌재가 무엇을 한다는 것인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되는 겁박에 실소를 자아낼 뿐이다. 시위 참가자들은 통합진보당 파리지부의 집회였다는 김 의원 주장은 명백한 허위사실이라며 정정과 사과를 요구했다. 명확하지도 않은 사실에 입각해 집회 참가자들을 낙인찍고 유형, 무형의 피해를 주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뒷골목 조폭같은 행태일 뿐이다.
 
박 대통령이 방미 때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사건으로 망신을 샀던 게 불과 몇달 전이다. 이번엔 김 의원이 박 대통령의 유럽 순방을 수행하며 과잉충성으로 오히려 화를 자초한 꼴이 됐다. ‘종북 저격수’를 자칭한다는 김 의원이 수준 이하의 발언을 쏟아낸 것은 한두번이 아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맡았던 후배 검사를 운동권 출신으로 몰아붙이는가 하면 채동욱 전 검찰총장과 여성 국회의원이 부적절한 관계가 있다는 등의 막말을 내뱉기도 했다.
김 의원 같은 이가 수준 이하 발언으로 주목받는 것 자체가 우리 정치의 한심한 수준을 보여준다. 정치에도 품격이 필요하다. 김 의원은 당장은 종북몰이로 ‘장사를 좀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수준이 안 되는 정치인은 결국 퇴출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김 의원은 강원 춘천 지역구 주민들의 수준을 너무 얕잡아 봐서는 안 된다.


[한마당] ‘정치검찰’, ‘멋진검찰’

● 칼럼 2013. 11. 17. 20:59 Posted by SisaHan
1998년 4월9일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뒤 처음으로 법무부 업무보고를 받았다.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물었다.
“과거 한보사건 수사 당시 수사 책임자가 교체되고, ‘깃털’만 당하고 ‘몸통’은 빠져나갔다는 국민 비난이 쏟아졌는데 총장은 당시 수사가 공정했다고 생각합니까.”
김태정 총장은 한동안 답을 하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시 검찰로서는 최선을 다한 수사였습니다. 하지만 국민이 불신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데 대해서는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검찰이 법의 파수꾼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은행이 저런 꼴이 안 됐을 테고 기업체의 경쟁력 상실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선다”고 결론을 맺었다.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부는 붓글씨로 액자에 담겨 대검찰청 회의실에 오랫동안 걸려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휘호를 써주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그랬던 김대중 정권도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호남 출신 검사들이 요직을 차지했고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의 눈치를 살폈다. 
정권과 검찰의 상하관계가 대등한 수준으로 조정된 것은 노무현 정권 때였다. 현직 대통령과 검사들이 온 국민 앞에서 맞짱토론을 벌였다. 검찰은 대통령 측근 실세들의 비리를 주저 없이 사법처리했다. 정권에 맞선 송광수 검찰총장, 안대희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은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았다.
거기까지였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검찰은 ‘정권의 충직한 하수인’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검찰의 최근 행태는 너무나 실망스럽다. 마치 집권세력의 정적을 물어 죽이는 사냥개로 전락한 모습이다.
법무부가 내놓은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심판 청구 경위’에는 “1945년 김일성이 주장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북한의 지령에 따라 2011년부터 강령에 편입했다”, “2000년 민노당이 창당할 무렵부터 최근까지 북한은 간첩을 통해 다수의 지령을 하달하여 통진당의 운영에 개입, 결국 상당 정도 현실화했다”는 등의 표현이 나온다. 1980년대 공안정국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만들고 공안검사들이 베껴 쓰던 공소장보다도 수준이 떨어진다. 헌법재판소 심리에서 도대체 이를 어떻게 증명하려는 것인지 궁금하다.
 
새누리당이 “전국공무원노조(전공노)가 조직적으로 문재인 후보 선거운동을 했다”고 물타기 차원의 정치공세를 폈다. 며칠 뒤 검찰이 전공노 홈페이지 서버를 압수수색했다. 검찰의 김무성 의원 서면조사에 대해 야당이 문제를 제기하자, 김무성 의원이 소환조사를 자청했다. 검찰이 다음날 소환 방침을 밝혔다.
검찰은 국정원 사건 특별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여주지청장에 대해 3개월 정직 중징계를 청구하고 수사를 가로막은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은 징계하지 않기로 했다. 민현주 새누리당 대변인은 “합당한 결정”이라고 장단을 맞췄다. 검찰과 새누리당은 ‘검여(검찰과 여당) 동일체’로 움직이고 있다. 뻔뻔한 정도가 양심을 아예 갖다 버린 것 같다.
해방 이듬해 이승만 정권에서 감찰위원장이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검찰에 고발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270만원을 받은 혐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소하지 말라고 검찰에 압력을 가했지만 최대교 서울지검장은 임영신 장관을 배임 및 배임교사, 수뢰 등 혐의로 기소했다. 법원은 이례적으로 특별재판부를 구성해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에 대통령의 입김이 미치던 시절이다. 최대교 지검장은 항의의 뜻으로 사표를 던졌다. 리크루트 스캔들과 록히드 사건을 파헤친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의 모토는 ‘거악(巨惡)이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하라’였다. 검찰은 역시 살아 있는 권력과 당당하게 맞설 때가 멋지다. 멋진 검찰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인터넷 사용자들이 만드는 위키백과는 ‘정치검찰’을 “검찰 본연의 임무보다 정치적 활동에 치중하는 검찰을 이르는 말이다. 검찰의 정권 눈치 보기, 권력에 줄서기 문화를 빗대어 검찰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인다”고 정의하고 있다. 
검찰의 지금 모습은 ‘멋진 검찰’일까, ‘정치검찰’일까.
< 한겨레신문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


[1500자 칼럼] WHO DO YOU THINK YOU ARE?

● 칼럼 2013. 11. 10. 20:07 Posted by SisaHan
WHO DO YOU THINK YOU ARE?
- 당신은 누구인가? -

올해 노벨문학상을 캐나다의 엘리스 먼로(Alice Munro)가 수상했다. 나로서는 조금 뜻밖의 일이었다. 캐나다 문학, 특히 소설을 공부하며, 3명의 여류 작가에 대해 글을 쓰려고 준비한 적이 있었다. 마가렛 로렌스(Margaret Laurence), 마가렛 에드우드(Margaret Atwood), 엘리스 먼로의 세명의 작가에 대해서였다. 내가 보기에는 비교적 캐나다의 소설이 세계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심한 경우 그 존재마저 의심받지만, 이 세 명의 작가가 그런대로 문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썼고, 캐나다의 소설을 대표하지 않나 생각 들었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THE DIVINER’와 ‘THE STONE ANGEL’을 쓴 마가렛 로렌스가 가장 훌륭한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투병 생활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했다.

마가렛 에트우드는 오래 전부터 국제적으로 알려져, 캐나다 작가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소설가이지만, 시인, 문학 평론가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의 작품 ‘THE HANDMAID’S TALE’은’ 시녀이야기’로 오래 전에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그런 이유로 캐나다에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면 마가렛 에트우드가 아닐까 생각했다. 엘리스 먼로는 이번 수상자로 예상되기는 했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그녀는 주로 단편소설만을 써왔기 때문이다. 장편은 되고 단편은 안된다는 법은 없지만, 여지껏 주로 장편 소설이 노벨문학상에 뽑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처음에는 단편으로 시작하여 장편으로 옮겨 가는 경우가 많은데, 작가생활 꾸준히 단편소설을 쓰는 경우도 드물다. 아마 장편이 베스트셀러로 팔려야 돈이 되는 경제적 이유가 아닌가 생각하며, 요즘 단편을 발표할 지면이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엘리스 먼로는 온타리오 주위 윙햄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런던에 있는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을 다녔다. 그녀의 작품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쉽지 않다. 몇 편의 장편이 아닌 수백편의 단편소설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마치 자신의 체험담을 이야기하듯, 특히 성장과정을 이야기하듯, 일상적인 생활 속에 한 소녀가 또는 여자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부닥치는 일들에 대해 담담하게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강의 시간에 어떤 학생이 그녀의 이야기가 작가 자신의 체험담이라고 우기던 일이 생각난다. 그럴 정도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 그녀의 작품의 특징이다. 장편과는 다른 단편소설의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단편의 성격상, 영웅보다는 소시민의 일상을 그리기 쉬운 법이다. 그런 까닭에 큰 사건이나 큰 인물은 없다.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이며, 그녀는 화자로 일인칭 ‘나’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작가의 경험담으로 착각하기 쉽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많은 소설들이 그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는지 모른다.

내가 처음 접한 그녀의 책은 ‘WHO DO YOU THINK YOU ARE?’이다. 이 소설집은 재미있는 것이 단편집이지만, 각기 다른 단편이 이어져서 하나의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온타리오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란 소녀가 여류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성장 과정을 그렸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일생에 관해 쓴 자서전처럼 오인하기 쉽다. 십여 편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마저 로스(Rose)로 똑 같고, 소설의 순서마저 나이순으로 배열되어 있어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소설집의 제목이 상징적이다. 물론 개인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공부할 당시만 해도(90년대 초), 캐나다 문학의 제일 중요한 주제는 정체성이었다. 캐나다 문학은 과연 존재하는가? 물었듯…. 사실 영국문학과 미국문학이라는 두 거인들 틈에 끼어 미미한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엘리스 먼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없던 캐나다 문학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더욱 분명한 모습으로 세계 문학 한 가운데 서리라 생각한다.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정의와 양심의 수난

● 칼럼 2013. 11. 10. 20:04 Posted by SisaHan
“우리는 과연 전체주의적 색깔이 농후한 ‘조직’만이 있고 ‘양심’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에서 살고 싶은 것인가?”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에서 ‘한국 종교와 철학’을 12년째 가르치며 자신의 이름도 아예 한국식으로 고친 한국통 학자인 박노자(Vladimir Tikhonov) 교수가 한국정부의 ‘전교조’ 불법(법외노조)화 선언을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교직사회에서 전교조가 ‘양심’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전교조 교사들은 고질적인 사학 비리에 맞서왔고, 또 촌지와 같은 악질적 관행의 근절에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바른 것을 교육하려 노력하는 등 학원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학생들에게 양심을 가르치는데 힘써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들 단체를 법 밖으로 내모는 것은 국제노동기구의 권고를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양심에 따른 행동을 제재함은 물론 동료를 배신하고 학생들에게는 양심을 가르치지 말라는 탄압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의 말대로 한국은 이제 양심이 불가능한 사회로 급속히 달려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양심을 지키며 핍박을 받느냐, 아니면 양심이니 정의니 하는 고상한 단어는 접어두고 당장의 안락한 삶을 위해 조직외압에 타협해 버리느냐는 고민의 기로에서 번민해야 하는 사람들이 단지 교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못한 권력 행사에 겹겹이 에워싸여 양심의 갈등을 겪는 소시민, 소직업인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에라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잠시 마음이 불편해도 무사히 살 것이라는 편안함의 유혹은 대다수의 삶을 옭아맬 수밖에 없다.
 
거대한 정부기관인 국가정보원의 대통령선거 개입 단초가 된 댓글수사로 영-욕(榮辱)의 격랑에 휩쓸렸던 권은희 수사과장은 경찰관 신분으로 양심이냐 정의냐, 눈감고 굴종이냐의 기로에 섰을 근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경찰조직이라는 유무형의 압박 속에서도 결연한 선택을 했다. 불법을 덮는 거대권력에의 순응이 정의가 아닌 이상 양심에 어긋난 행동은 안된다는 ‘행동하는 양심’을 실천했다. 검찰은 물론 청와대와 국정원을 포함해 더 큰 권력의 압박에 대항한 소신수사로 역시 영욕의 희비를 겪은 윤석렬 검사 또한 수사법관의 양심으로 조직의 부정의(不正義)를 고발했다. 
당사자들의 육성고백은 없어도 그들이 얼마나 심한 고충과 심적 갈등에 시달렸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조직과 권력의 생리를 모를 리 없고, 조직논리를 거스른 자가 걸어야 할 길이 가시밭길임은 수많은 권력의 희생자들이 앞서 걸으며 입증했기에 그렇다. 
‘양심선언’의 시대와도 같았던 90년대, 재벌들의 비위와 감사원의 은폐를 폭로한 이문옥 감사관, 그는 양심을 지킨 죄로 ‘국가기밀 누설죄’ 라는 엉뚱한 죄목으로 구속되는 신세가 됐다.
국군보안사가 사찰한 야당 정치인들을 포함해 재야, 종교계 인사 등 1300여명의 개인 정보와 기록을 담은 디스크를 들고 탈영한 윤석양 이병은 군과 동료들의 질시로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92년 군 부재자 공개투표 등 군내 부정선거를 고발한 이지문 중위도 불명예제대에 취업이 막히는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조차 무차별 도감청을 폭로하고 최근 러시아로 임시 망명한 에드워드 스노든을 비롯해, 이라크전 기밀문서로 전쟁의 무모성에 경종을 울린 브래들리 매닝 일병 등 내부의 양심적인 고발자들은 똑같이 험한 수난을 당하고 있다. 
부정과 부패의 고리 단절과 사회정의를 깨우치는 지대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그 흔한 공로상 한번 주었다는 이야기도 못듣는다. 한낱 ‘용기있는 비양심 사회의 희생자’들로만 기억되는 비정하고 불의·부도덕한 인간사회의 속성이다. 
용감한 양심의 사람들이 대우 받기는커녕 ‘배신자’로 손가락질을 받는 세태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양심적 선언과 행동들은 비정상적이고 후진적인 상황, 정의롭지 못한 정치현실에서 이뤄진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는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나오지 않는 게 상식이다.
정의와 도덕률, 심지어 진리마저 ‘내게는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으로 아전인수 적용과 이기적인 강요로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더럽히는 권력의 행패. 화려하게 포장된 민주주의 문명국 뒤안길의 헌법에 규정된 양심의 자유 묵살과 추잡한 전체주의적 양태들이 빚어내는 양심과 도덕의 실종 현상들이다.
어려서부터 “정의롭게 양심적으로 살라”고 가르치기 보다는 “일류대에 들어가라,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돈 많이 벌어라”라는 교육이 자리잡은 지금, 어느 것이 정의이고 양심적인 것인지 ‘정의와 양심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는 세상이니, 갈수록 양심행동은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정의를 향한 양심의 고독한 싸움은 소중하고 위대하며, 마땅히 대우받아야 한다. 한 마리 제비가 봄소식을 알리듯, 긴긴 겨울에도 어김없이 희망의 전령이 찾아오는 자연의 섭리와 정의의 생명력을 기억하며-.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