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경제민주화, 오바마의 경우

● 칼럼 2014. 1. 19. 17:3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임기 3년을 남겨두고 미국판 경제민주화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해 12월4일 미국진보센터 10주년 행사에서 한 그의 연설은 인상적이다. 그의 ‘불평등’ 연설은 신자유주의의 첨병이었던 미국 대통령 연설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50분을 모두 불평등 문제에 할애한 오바마는 미국 현실에서 출발한다. 1979년 이후 미국 생산성은 90% 향상됐지만 가계소득은 8% 느는 데 그쳤다. 상위 10% 소득은 전체의 3분의 1에서 절반으로 늘었다. 최고경영자 연봉은 노동자의 20~30배에서 273배가 됐다. 이런 불평등 수준은 자메이카나 아르헨티나에 근접한 것이라고 오바마는 토로했다.
오바마는 불평등 심화가 무엇보다 경제에 해롭다고 했다.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성장은 둔화하고 경기침체는 잦다. 성장과 불평등 해소가 상충한다는 통념은 잘못된 것이다. 중산층이 두터워질 때 미국 경제는 가장 잘 성장했다.
 
불평등 해소 방안으로 오바마는 일단 ‘성장’을 강조한다. 경제적 파이가 줄면 불평등 해소가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뒤이어 성장이 ‘성장을 위한 성장’에 그치지 않도록 다양한 정책을 제시한다. 계층 상승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교육, 건강보험과 장기실업보험 등 국민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각종 복지제도의 확충이 그것이다.
오바마는 특히 노동자의 힘을 북돋아야 한다고 했다. 노동자가 더 좋은 근로조건과 임금을 받도록 노조를 조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오바마는 지금이야말로 최저임금을 인상할 때라고 했다.
오바마 연설은 미국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한 대침체 이후 미국은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다. 오바마 연설은 양극화로 고통받는 나라들이 경청해야 할 경제민주화의 교본과도 같다.
 
한국과 미국은 불평등에 관한 한 닮은꼴이다. 지니계수는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심해지는데, 한국은 2011년 0.448이었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 34개 국가 중 멕시코(0.48)에 이어 둘째로 높다. 미국은 0.38로 셋째였다.
미국 대통령이 최저임금 인상을 역설하고 노조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상이다. 한국은 어떤가.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은 민영화, 규제 완화, 노동 배제 등 흘러간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다. 세계가 탈신자유주의로 방향을 트는데 우리는 신자유주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나라를 10년, 20년 후퇴시키려 하고 있다.
박 대통령도 대선 때는 시대의 조류에 밀려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식이다.
최저임금만 해도 그렇다. 대선 때 박 대통령은 ‘최저임금 인상 기준을 마련해 근로자 기본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관심 밖이다.
 
올해 시간당 최저임금 5210원은 노동자 한달 생계비에 턱없이 모자란다. 철도노조 탄압과 전교조 법외노조화에서 보듯 비정상의 정상화를 앞세워 노동탄압을 일삼고 있다. 사회적 대타협을 말하지만 실제는 노조를 무력화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자본주의 첨단을 걷는 미국 대통령이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노조를 보호하자고 하는 것은 더이상 자본주의를 이대로 끌고 가기 어렵다는 인식의 대전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건 이후 30년 이상 계속된 빈익빈 부익부의 미국 경제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반성 없이 한물간 신자유주의를 고집할 것인가.
박 대통령에게 오바마 연설문을 일독하길 권한다.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 한겨레신문 백기철 논설위원 >


[1500자 칼럼] 행운을 낚으려면

● 칼럼 2014. 1. 13. 19:5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행복한 새해 되세요.’ 연초에 나누는 동서양 대표적인 덕담이다. 두 덕담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좀 다르지만 자신들의 삶에 복이 함께 하기를 염원하는 마음은 동서양 모두 같은 모양이다. 복의 사전적 의미는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거기서 얻는 행복을 뜻한다.’고 되어있다. 우리들의 삶속에 조그만 행운이라도 함께 한다면 행복은 당연한 수순이니 올해는 행운 낚기에 심혈을 기울일 일이다. 하지만 행운이 원한다고 낚여지는 것일까?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부러워 할 만큼 꽤 괜찮은 행운을 잡은 여인을 유심히 관찰해 본 결과 나름대로 갖게 된 확신이 있다.

지난해 어느 날 아침, 가게 도우미로 부터 매장에서 빙고가 터졌다는 연락이 왔다. 한 사람의 인생을 역전 시킬 만큼 엄청난 액수는 아니었지만 단돈 3불짜리 티켓으로 보통 직장인의 연봉에 버금가는 5만 불에 당첨됐으니 보통 행운은 넘었다. 무엇보다 내 영역 안에서 그런 행운이 터졌다는 게 신기하여 주인공의 신상에 대해 알아보았더니 인근 법원의 여 판사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력을 듣는 순간 ‘이미 부자인 그 사람 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돌아갔으면 좋았으련만’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리고 가진 자에게 더 몰아주는 불공평한 인생사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을 확률보다 더 낮다고 한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임에도 요행을 바라며 매일 거금으로 지극정성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생계비 조달이란 원초적 목적을 위해 매달리는 하루살이 인생도 부지기수다. 그런 간절한 바람들을 외면하고 파적(破寂) 삼아 던져 본 낚시에 덥석 걸려든 행운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 비법이 궁금하여 행운의 주인공을 만나보길 원했으나 쉽지 않더니 몇 달 만에 그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나는 카운터에서 손님을 맞고 있는 데 건강미가 넘치는 한 중년 여인이 벙글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느닷없이 내손을 잡더니‘덕택에 즐거운 휴가를 보내고 왔노라’며 힘껏 흔드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 복권 공사에서 붙여 준 ‘WINNING 티켓 판매 업소’사인을 손짓했다. 그제야 내가 만나고 싶었던 행운의 주인공임을 알아채고 그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늘씬한 키에 검고 탄력 있는 피부, 상큼한 미소의 소유자인 그는 어디를 보나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자신감은 당연히 판사란 자신의 직책에서 왔을 것이다. 누구나 오르기 어렵다는 그 자리에 서기까지 수많은 난관과 좌절을 극복하며 인고의 세월을 버티어 냈음은 불 보듯 뻔한 사실 아닌가.
 
건강한 에너지를 온몸으로 발산하는 그를 보며, 만약 내가 행운을 관장하는 여신이라면 목전에서 무조건 달라고 애걸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사람에게 먼저 반응을 보일 것이란 생각을 했다. 목적하는 바가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꾸준히 최선을 다 해 밀고 나아가다 보면 좋은 결실은 물론 행운의 여신도 손짓하리라는 확신을 그에게서 터득했다. 
갑오년 새해가 폭설과 한파 속에서 시름하고 있다. 청마의 솟아오르는 기운으로 역동적인 한 해가 되리라는 예상도 무색하게 정초부터 만물을 혹한에 가두고 있는 지금, 강하게 만들기 위한 담금질 과정이란 사실을 인지하며 기꺼이 참아 낼 일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의로운 반딧불, 험한 세상 사랑의 메아리로…

● 칼럼 2014. 1. 13. 19:5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독자와 함께 외길‥ 시사 한겨레 창간 8주년에 드리는 인사말씀

세상을 분별하는 양심적인 신문의 길 되새김
상생과 포용으로 소통과 회복의 만개를 기원

우리 역사에는 ‘지부상소’(持斧上疏)라는 방식으로 직언한 사례들이 많습니다. 좀 섬뜩한 얘기지만, 도끼를 들고 왕 앞에 나아가 “내 말을 듣지 않으려거든 목을 치라”며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했던 충신들의 일화입니다. 
조선 선조 때 의병장 조헌은 광화문 앞에 나가 도끼상소를 올려 왜적의 침탈을 경고했고, 면암 최익현은 일제가 병자수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궁 앞에서 도끼를 품고 여러 날을 꿇어앉아 격하게 부당함을 지적한 근세사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삭막한 광야에서 외친 선지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대가 험하고 사악할 때 바른 소리로 깨우치는 10여명 선지자들의 생생한 기록입니다. 그들은 외롭게 때론 돌팔매를 맞으며 뭇사람들의 질시 속에서도 하나님이 계시하신 정의와 진리를 외칩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정의를 저버리고 불의의 사회로 돌아섰음을 꾸짖었고, 나단은 다윗의 악행과 불륜을 질타합니다. 엘리야는 여호람 왕의 범죄와 타락의 정죄를 예고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식민치하 소외되고 박해받는 빈자와 약자 편에서 사랑과 진리를 전하고 실천했습니다.
 
암울한 시대일수록 달콤한 궤변은 환영받지만 바른 외침은 배척당하고 박해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나서 정의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흑암의 징조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곧 어둠의 질곡을 헤매며 후회하게 됩니다. 비록 외롭고 질시당하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바른 외침으로 세상의 불의를 경고하며 사람들에게 옮고 그름의 분별력을 전하고 깨우치는 용감한 전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네 주변에서 늘 들어온 친숙한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해 어느 순간부터 이 말은 의미심장한 ‘불온단어’ 쯤으로 받아들여 집니다. “당신은 안녕한가”하는 비유적 물음을 던지는 글을 붙이지 못하게 지침을 내리고, 교장이 학생을 고발한 해프닝이 그걸 말해 줍니다.
한 대학생이 학교 게시판에 써 붙인 대자보가 발단이었습니다. 답답한 시대적 상황에 고민하던 그 학생은 전혀 ‘안녕치 못함’ 을 탄식하며 ‘안녕치 못한데도 안녕한 것처럼’ 사는 사람들의 무감각을 일깨웠습니다. 그간 꾹꾹 삭여 온 사람들, 불현듯 안녕치 못함을 자각한 이들의 공감과 동조가 열풍으로 번져, ‘안녕들 하십니까’ 는 이 시대를 관통하는 열쇠말로, 나아가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은유적 질타로 자리매김 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아무 문제없이 편히 살고 있는데 안녕치 못하다니 무슨 허언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인사말이 ‘불온언사’ 취급을 받기에 이른 사회, 아무래도 정상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안녕하냐는 인사조차 눈치를 봐야하고, 그런 인사말을 사시적으로 보는 현실, 특히 대자보라는 비정상적 출구를 통해 외쳐야만 하는 언로(言路)의 폐쇄성이야말로 비정상을 잘 설명해 줍니다. 
실제로 비정상의 현상과 여파는 우리 주변에도 흔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무조건 편가르기를 하고 자신과 다른 견해는 듣지도 않을 뿐더러, 적으로 몰아 부칩니다. 다양한 시각과 균형감각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원인이 여럿이겠으나, 어쩌면 갈등과 분열을 통해 득을 보려는 세력의 간계에 다중이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이성적 판단을 무디게 하고 감정을 부채질하는 집단 최면에 빠진 감이 들 정도입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헛갈림 속에, 정직을 외치며 불의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지탄 속에 묻혀버리는 일이 일상화 되어 갑니다.
 
‘무조건적 감정반응’은 고등동물답지 못한 양태입니다. 인간은 ‘이성적 사유력’을 지닌 지적·영적인 존재입니다. 교육을 통해 배운 도덕과 윤리, 법과 상식과 질서, 그리고 민주적 소양과 이성적 판단, 거기에 더해 양심의 거울에 비춰본다면, 적어도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그리고 합리와 불합리, 나아가 정상과 비정상을 분별하기란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이 율곡은 일찍이 “언로의 열리고 막힘에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다.(言路開塞興亡所係)” 고 가르치며 폭넓은 공론형성을 강조했습니다. 꽉 막힌 언로가 난세를 부추기고, 본령을 잊은 채 비정상에 영합하며 ‘안락의 최면’만을 거는 편향 언론이 설칠 때 세상이 병들고 사람들이 부정해짐을 진작부터 설파한 것입니다.
불의의 때에 핍박 가운데서도 선각자들이 정의를 깨우쳤고, 고난에 담금질 된 의인들이 축복의 통로가 되었듯이, 암울한 시대에는 ‘살아있는 영혼으로’ 세상을 깨우고 밝힐 빛과 소금같은 언론의 존재가 소중하다고 믿습니다.
 
창간 8주년을 맞아 시사 한겨레는 그런 보편적인 분별의 지혜를 구하면서 옳고 바르고 양심적인 신문의 길을 거듭 되새깁니다. 연륜 8년은 아직 미숙하지만 가슴으로, 두 팔로 감싸주시는 든든한 독자분들과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며, 의로움을 바라보고 묵묵히 동행하기를 소망합니다. 어둠에 빛나는 작은 반딧불 처럼, 아니 험한 세상에 울리는 소박한 사랑의 메아리 처럼, 정직하고 따스한 희망의 전령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비정상인 것들이 모두 정상화 되기를 기원합니다. 광야의 외침이나 대자보가 아닌, 다양한 언로의 활성화를 바랍니다. 미움과 적대를 버리고 상생과 포용으로 소통과 회복이 만개하기를 ‘지부상소’의 심정으로 소원합니다. 우리 한인동포들 모두가 안녕한 가운데 번영과 축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김종천 - 발행인 겸 편집인 >


[칼럼] 우리 안의 야스쿠니

● 칼럼 2014. 1. 13. 19:5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지난달 26일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겨냥해 세계 각국의 비판이 줄을 이었다. 그 대부분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신사에 총리가 참배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미국 국무부는 그런 관점에서 “실망했다”는 성명을 내놨고, 한국 국회도 지난달 30일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명백히 위협이 되는 행위”라는 결의안을 내놨다. 
‘신사 참배는 동북아 안정에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바보 같은 짓이다.’ 아마도 이런 실리적인 견해가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바라보는 평균적인 시선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신사에서 A급 전범이 분사되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특별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은 이방인들에겐 야스쿠니는 어찌되든 상관없는 문제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우리가 야스쿠니 문제를 인류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자인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는 2005년 펴낸 <야스쿠니 문제>라는 책에서 신사의 본질을 ‘감정의 연금술’이라는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아들이 전쟁에 나가 숨지게 되면 어머니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일왕을 통해 야스쿠니에서 아들이 일본을 지킨 ‘군신’으로 모셔지는 순간,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치환되고, 그래서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은 이제는 손자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성스러운 의무로 뒤바뀐다. 그렇게 국민들이 다음 희생과 전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평화는 멀어진다. 이것이 전쟁 시기 야스쿠니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야스쿠니신사와 나란히 붙은 역사관인 ‘유슈칸’을 방문해 보면, 신사의 이런 기능이 전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엔 지난 전쟁은 침략이 아닌 ‘자위전쟁’이었을 뿐이고 A급 전범들도 범죄자가 아닌 국난이 닥쳤을 때 자신을 희생한 ‘쇼와 순난자’라는 사실을 강변하는 전시물들로 가득하다. 신사 한구석에는 도쿄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들에게 무죄 의견을 냈던 인도인 라다비노드 팔 판사의 기념비도 찾을 수 있다.
 
지난 전쟁은 어쩔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박물관에 실물 모형으로 전시돼 있는 제로센과 가이텐(인간어뢰)을 타고 자살공격에 뛰어든 선배들처럼 우리들도 그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게 신사의 가르침이다.
가미카제를 칭송하는 과격한 문구들을 보면 ‘우리가 잊지 않을 테니, 너희는 용감하게 나가서 죽으라’고 누군가 등 뒤에서 떠미는 듯한 느낌마저 난다.
그곳엔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자국민 310만명을 숨지게 하고, 이웃 나라들한텐 그보다 더 큰 고통을 안긴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런 무감각과 파렴치함은 사실 인류사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 때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끝내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필요한 전쟁이었다고 강변하는 미국인들의 마음에 어느새 야스쿠니는 똬리 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야스쿠니 문제란 좀처럼 과거를 극복하지 못하는 일본인의 문제임과 동시에 인류가 다 함께 손잡고 고민해야 할 양심과 정의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우리가 베트남을 부인하고, 용산을 잊고, 한국전쟁 시기 이뤄진 양민학살을 정당화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거대한 아베 신조가 되는 것이다.
< 길윤형 - 한겨레신문 도쿄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