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늑대가 되자

● 칼럼 2013. 12. 16. 18:03 Posted by SisaHan
There was an unmistakable note of sorrow in it now. It was no longer the loud, defiant howl, but a long, plaintive wail; “Blanca! Blanca!” he seemed to call.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의 위풍당당하던 포효가 아닌 길고 애절한 그 목소리는, “블랑카! 블랑카!” 하며 울부짖는 거 같았다.)

며칠 전에 다시 읽은 ‘커럼포의 늑대 왕, 로보’ (Lobo, The King of Currumpaw, Ernest Thompson Seton)의 문장 일부다. 사랑하는 아내 블랑카를 찾아 울부짖는 로보의 슬픈 하울링(howling)은, 언제나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쨌거나 이 야성미 넘치는 동물에 반해서 좋아하는 동물? 하면 늑대요, 꿩 대신 닭 식으로 한때는 진돗개를 여섯 마리나 기른 적이 있었다. 회색 늑대가 사는 겨울 숲에 대한 기대감이, 캐나다 이민에 대한 선택의 즐거움이 된 것은 당연지사였고. 

늑대인지 코요테인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언젠가 겨울 캠프에서 들어봤던 생생한 하울링은 참 가슴 설레는 울림이었다. 누가 저들을 숲 속의 악마라고 했나, 자연의 정령이지!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얼뜬 시심(詩心)의 과잉 노출이라고 흉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정색을 하며 몇 마디 더 늘어놓고 싶어지는 건, 이 세상은 늑대에 관해서는 온통 잘못된 편견으로 꽉 들어찬 거 같은 묘한 억울함이 있어서다. 

몇몇을 들어보자. ‘늑대 같은 남자 혹은 남자는 다 늑대’라는 표현은, 음흉하고 능글맞은 사기꾼이나 비열하고 난폭한 깡패로 늑대를 간주하는 암시가 엿보이지 않는가? ‘늑대와 7마리 새끼염소, The wolf and the seven little goats’라는 세계명작동화는 이제 동영상으로도 만들어져서,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에 늑대를 사정없이 흉악한 동물로 꼭 새겨주고 있다. 늑대에 대한 몰이해의 극치는 1926년경 미국에서 빚어진 늑대 퇴치 사업일 것이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숲을 만들자는 취지로 늑대를 보이는 족족 죽인 결과, 숲에는 엘크 같은 초식동물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닥치는 대로 풀과 어린나무들을 먹어 치웠다. 그 결과 큰 풀이 자라지 못하게 된 숲에는 작은 새들이 둥지를 틀 수 없게 되었고, 이어서 여러 동식물이 숲을 떠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이유는 포식자의 위치에 있던 늑대가 사라짐에 따라 숲의 생태계가 무너져 생긴 결과였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캐나다에서 공수해 온 늑대를 방사한 뒤 숲은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았다. 미국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에서 있었던 70년 만의 늑대 복원에 관한 일화다. 늑대야말로 평화로운 숲을 지켜주는 핵심종이다.

이런 늑대의 본성을 살펴보면 한결 경이로워진다. 부부가 평생을 함께하는 엄격한 일부일처제로, 1~2년 된 새끼와 일부 개체가 포함된 무리를 이루며 사는데, 무리 안에서 이뤄지는 질서와 생존방식은 이상적인 사회적 공리주의를 연상하게 한다. 가족 간의 정이 특별해서 아비 늑대의 아내와 자식 사랑은 눈물겨울 지경이다. 덫에 걸려 죽은 아내 블랑카를 찾기 위해 죽음도 개의치 않고 사냥꾼의 캠프 근처를 울부짖으며 헤집고 다니던 로보의 순애보처럼. 게다가 독립해 따로 살던 새끼들이 이따금 부모를 찾아오는 효심까지 보여준다니, 늑대의 매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러니 ‘늑대 같은 놈’이란 비난은 ‘참 멋지고 진실한 남자’라는 칭찬이 되는 셈이다.

모국의 대구동물원 늑대 우리에 이런 안내문이 붙어있다고 한다. ‘남자를 늑대 같다고 말하지 마라. 남자들이 늑대만큼 살아간다면 여자는 울 일이 없을 것이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국과 이곳 구분 없이 하루가 멀다고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유명 인사들의 숨겨진 여인, 약물 복용, 배임 횡령 등등 기사를 대하자니 절로 읊조려진다. 남자들이여, 우리 모두 늑대가 되자!

< 김준태 - 시인, ‘시.6.토론토’동인 / ‘시와 시론’으로 등단 >
펜클럽 회원,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이 속한 국민과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 마쳤다면 그는 평안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다. 나는 그런 노력을 했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영원히 잠잘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거인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5일 밤(현지시각) 지상에서의 의무를 다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그의 삶은 자신의 책 제목처럼 ‘투쟁은 나의 삶’이자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이었다. 젊은 시절 엘리트 코스를 밟던 그는 안정된 길 대신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에 뛰어든다. 이 나라에서 처음 흑인 법률사무소를 연 1952년에는 전국적인 불복종 저항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민권운동의 지도적 인물로 부상했다. 이후 지하 무장조직의 초대 책임자로 임명된 그는 64년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90년까지 무려 26년 동안 복역한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이 기간에 그는 자기정진을 통해 내적인 힘과 외적인 권위를 키워 민중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의 진가는 94년 흑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첫 선거에서 이겨 첫 흑인 대통령이 된 뒤에 나타난다. 그가 택한 길은 백인 사회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진실에 기초한 대화합이었다. 흑인에게 심한 탄압과 테러 등을 자행한 사람도 진실화해위원회(TRC)에 출두해 자신이 한 일을 솔직하게 밝히고 용서를 구하면 사면받을 수 있게 했다. 이 위원회에 출두한 사람이 수천명에 이른 것은 만델라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진실화해위 모델’은 부끄러운 과거사를 청산해야 하는 여러 나라에 좋은 본보기가 됐다. ‘화해의 정치’를 실천한 그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던 연임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만델라는 아프리카 지역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 큰 영감을 줬다. 그러나 그의 꿈이 남아공에서 아직 온전하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국민의 80%를 차지하는 흑인은 여전히 가난에 허덕이고 있어 흑백화합이 깨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8월에는 광산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 집회를 경찰이 강제 해산하면서 실탄을 발사해 34명이 숨지기도 했다. 법률·제도적인 차별 철폐를 넘어 사회·경제적인 평등을 이뤄내야 하는 과제가 시급한 상황이다.
만델라의 성취가 혼자만의 것은 아니지만 ‘정의는 반드시 이뤄진다’는 그의 뚜렷한 역사관과 ‘흑인과 백인이 평화적으로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믿음이 큰 구실을 한 것은 분명하다. 여러 요인으로 갈라진 지구촌에 그가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선거 불복’은 정치의 세계에서는 금기 언어다.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도전이요, 유권자에 대한 모독 행위로 간주된다.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문제를 여권이 ‘대선 불복’ 프레임으로 몰아가는 것이나, 민주당이 수시로 ‘대선 불복은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 장하나 의원이 제기한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 후 재선거’ 발언은 선거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져준다. 장 의원의 발언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를 두고는 여러 견해가 가능할 것이다. 종교인 등과 달리 현역 정치인으로서 발언에 좀더 신중을 기해야 옳다는 지적도 나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민주당의 공식 입장과 다른 발언으로 당을 궁지에 몰아넣고 여권에 역풍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 올바른 전략적 선택이었는지에 대한 의문 제기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장 의원이 지적한 대로 지난 대선이 국가기관이 총체적으로 개입한 부정선거였음을 부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선거가 명백한데도 그냥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신을 지키는 최선의 길인가. 게다가 관권 부정선거의 최대 수혜자는 국민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상태다. 장 의원은 이 대목에서 새누리당은 물론 민주당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물음표를 던진 것이다.
사실 제18대 대선과 관련해 맨 처음 ‘선거 불복’을 입 밖에 낸 사람은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다. 대선 당일인 지난해 12월19일 새누리당 선대위 공보단장이었던 그는 박근혜 후보가 질 것 같다는 관측이 나오자 기자회견을 자청해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명의의 불법 선거운동 문자가 전국적으로 뿌려지고 있다. 설령 문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당선무효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 선거 자체가 불법·부정선거여서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는 논리가 장 의원과 뭐가 다른가.
 
새누리당은 장 의원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한 양승조 민주당 최고위원에 대한 의원직 제명을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이다. 국회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소신에 따라 대통령한테 쓴소리 좀 했다고 ‘의원직 제명’ 칼을 빼어 든 것은 새누리당의 시대착오적 정신상태를 잘 보여준다. 새누리당은 그런 호들갑을 떨기에 앞서 지난 대선이 공정한 선거였는지부터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선거과정에 흠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 흠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 설명해야 한다. 특히 이정현 홍보수석은 장 의원의 발언에 비분강개하기에 앞서 자신의 ‘대선 불복’ 발언부터 해명하는 것이 순서다.


[칼럼] 나라걱정

● 칼럼 2013. 12. 16. 17:57 Posted by SisaHan
2008년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시대가 끝났다고 주장했다. 폭락하는 집값, 무너지는 금융기관, 치솟는 실업률, 엄청난 정부부채 때문에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시대는 끝난 것 같지 않다. 정치적 대립으로 정부지출이 축소되는 와중에도 올해 미국 경제는 회복 중이고 내년 성장률은 더 높을 가능성이 크다. 실업률은 빠르게 떨어지고 주가는 크게 올랐다.
 
지난 5년 동안 무슨 일이 미국에서 일어난 것일까. 최고의 디플레이션 전문가가 중앙은행의 수장이 되고 사상 최대의 유동성이 시장에 공급됐다. 파산 위기에 몰린 회사들에 유동성이 제공되는 대신 강도 높은 구조개혁이 실시됐다. 정부는 의료보험 대상의 확대를 위해 ‘오바마케어’를 추진하고 관철시켰다. 금융개혁을 통해 은행의 위험을 통제하고 사회적 자원을 금융에서 제조업으로 유도했다. 인재들이 ‘월스트리트’보다 ‘실리콘밸리’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변화와 개혁은 더 강력한 미국 헤게모니를 예고한다. 흥미롭게도 미국이 추진하는 ‘오바마케어’와 금융개혁 법안들은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의 취지와 맥락이 닿아 있다. 문제는 시대정신을 따르고 있는 건 구호뿐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공허하고 엉터리란 것이다. 많은 경제민주화 정책들이 재원 부족을 이유로 공약으로만 남았다. 골목상권을 보호한다며 기업들의 진출을 막는 정책은 단기적으로 소비자 후생을 훼손하고 장기적으로 골목상권 자체도 보호하지 못하는 나쁜 정책이다.
 
한국 경제는 창조성 없이 효율성을 얻기 어려운 단계에 있다. 하지만 창조성은 일사불란함이 아니라 자유분방함 속에 꽃을 피운다. 스티브 잡스가 보여주는 창조적 지성의 수준은 새마을운동으로 달성될 수 없다.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이나 경찰의 수사 조작과 양립할 수 없다. 한 사회가 달성하는 창조성은 자유롭고 개방된 사회의 펀더멘털의 결과이지 심리전으로 보호되는 억압된 사회의 돌연변이일 수 없다. ‘창조경제’가 표류하는 이유다.
일본은 강력한 미국의 귀환을 잘 이해하고 편승하고 있다. 미국이 엔화 약세를 용인하면서 20년을 잃어버린 일본의 시계는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국은 일본이 ‘정상국가’가 되어 중국을 견제해주기 바란다. 일본 경제가 개선될수록 일본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현금인출기 구실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퇴로 없이 경색시켰다. 통쾌하다는 사람들의 인기는 얻었을지 모르지만 전략적이지 않은 어리석은 외교다.
 
핵무기 폐기를 대북 협상의 전제로 내세우면서 남북관계도 교착되었다. 개성공단은 폐쇄되었다가 다시 열렸지만 북한으로부터 얻어낸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1000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가계부채, 향후 가속화될 엔화의 약세, 임박한 중국의 거품 붕괴를 고려하면 남북간의 경제협력은 북한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남북간 경제협력이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돌파구가 없는 한국 경제는 4년 뒤 더 어려워질 것이다.
국가의 운명에서 4년은 긴 시간이다. 한 나라가 망가지기에 충분하다. 나는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바라지만 비관적이다. 실패한 정권을 교체하지 못했을 때 이번 정권의 실패는 예고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패하고 부패하고 하고 싶은 대로 막 해도 아무도 견제하고 문제 삼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다. 자연법칙이다. 지역감정이 나쁜 이유는 성과가 나빠도 정권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의 실패를 막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야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는 중이다. 비싼 대가를 치르고. 민주당의 분발을 촉구한다.

< 김동조 -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