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텔레비전을 없애고 얻은 세상

● 칼럼 2013. 12. 8. 19:32 Posted by SisaHan
텔레비전을 없앤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꼭 1년 전이었다. 고장 난 텔레비전을 새로 사려 했더니 원하는 모델은 한 달 뒤에나 나온다고 했다. 기다리기로 했다.
남편은 방과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마당에 나가 서성거리더니 책을 들고 드러누웠다. 경제권을 쥐고 있는 내가 ‘난 텔레비전 없으니까 좋은데… 필요한 사람이 돈을 내서 사든지…’ 했더니 모두 ‘나도 없어도 돼. 없는 게 좋은 점도 많아’ 이렇게 집안 여론이 돌아갔다.
시간이 굉장히 많아졌다. 슬슬 보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역사책·소설책·인문학책 종류를 가리지 않고 섭렵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에리히 프롬, 카뮈,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도 다시 읽었다. 조악한 번역에도 감동했던 책들이었지만 다시 읽으니 이 책이, 이 작가가, 이랬던가 하는 새로운 발견으로 흥분되었다.
 
연초에 여행에서 만난 유전자 전공 의사에게서 들은 생명의 기원과 세포의 움직임, 적자생존의 법칙 등은 아주 간단한 이야기들이었지만 줄곧 마음에 와닿았다. 평생 처음 자연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찾아보니 유전자·양자물리학·뇌과학·우주 이런 제목을 단 책들도 한편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우주의 기원과 생명의 탄생, 인간의 기원 같은 것이 왜 지금 시대에 필요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궁극적으로 과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인간의 행태를 파악하고 인류의 미래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새로운 지식의 지형도가 확실하게 다가왔고 공감되었다.
책만이 아니었다. 유튜브라는 신기한 채널은 환상 그 자체였다. 쇼팽을 치면 어떤 피아노곡이든 어떤 연주가의 것이든 골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50년 만에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도 볼 수 있었다. 요절한 첼리스트 재클린 듀프레의 <엘가의 첼로 협주곡>도 마음을 흔들었고 바렌보임과의 이중주는 환상이었다.
 
텔레비전을 없애고 나니 어제가 오늘 같았고 내일이 오늘 같았던 하루하루가 새로워졌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며 ‘왜 이렇게 맛이 없지’ 불평했던 온갖 것들에서 벗어났다. 지겨운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과목을 선택하고 이것저것 찾아 읽고 보고 가고 느끼니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자연과학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자연과학에서는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면 그동안의 가설은 완전히 무너지고 새로 밝혀진 사실에 의해 모든 이론이 새로 쓰여지고 진전한다는 사실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처음으로 내세우기까지는 모든 과학과 이론, 철학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지동설이 나오면서 천동설은 무가치해지고 그동안 천동설에 기반한 가설 아래 세워진 모든 이론은 폐기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왜 텔레비전을 욕하면서 보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한국의 지상파와 종편이 이끌고 있는 90% 이상의 미디어들이 쏟아내는 담론들이 꼭 천동설 시대의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종북몰이가 대표적이다. 국민들에게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붙잡고 체제 불안을 내세우면서 세운 가설들로 주입식 교육을 하고 있으니 식상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방 뒤 이 땅에서 종북으로 간첩으로 긴급조치로 학살하거나 사형시키거나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얻어냈던 사건들이 몇년 전부터 계속 무죄로 판명되고 있다. 보도연맹 사건, 인혁당 사건, 국군의 양민학살 사건, 여주 양민학살 사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진보당 조봉암, 와이에이치(YH) 사건, 긴급조치 위반사건 등 줄줄이 무죄로 판결이 나고 거액의 국가배상금을 내라는 판결이 나오고 있다. 종북몰이는 이미 폐기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교황청은 갈릴레이가 죽은 지 350년이 지나서야 그를 복원시키고 사과했다. 언제 이 짓이 끝날지….
삶도 미디어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시대다. 과학의 발전으로 얻은 인터넷 시대에 주입식 교육은 설 자리가 없다. 오늘 아침에도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하나 찾아냈다. 무슨 빵 이름인가 기웃했던 팟빵이라는 곳에 들어가 <시사요리쇼 밥 한번 먹자>를 보다가 웃음이 빵 터졌다.

< 김선주 - 언론인 >


교육부가 지난달 29일 내년 고교 신입생이 사용할 한국사 검정 교과서 8종 가운데 7종에 대해 41건의 내용 수정을 명령했다. 친일·독재를 미화한 교학사 교과서의 문제를 희석시키려고 다른 교과서를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과거 독재정권 시절 국정 교과서 체제에서나 할 수 있는 조처를 취한 것이다. 권력층의 입맛에 맞춘 반역사적·반교육적 행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수정명령 항목 가운데 가장 많은 내용은 북한과 관련된 부정적 기술을 늘리라는 것이다. ‘북한의 토지개혁 당시 농민이 분배받은 토지에 소유권의 제한이 있었음을 서술’ ‘북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실례 제시’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에 대한 구체적 서술’ 등이 그것이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될 내용을 상술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한국사 교과서를 반공 교과서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과거 정권의 그릇된 행태를 비호하려는 내용도 여럿이다. ‘피로 얼룩진 5.18 민주화운동’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다니!’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부’ 등의 소제목에 대해 “교과서에 사용되는 용어로 부적절하다”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교육부는 ‘각계에서 추천받은 전문가로 수정심의회를 구성해 논의했다’고 하지만 수정심의회는 법적 기구가 아니며 이들 전문가가 어떤 사람인지도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 학계 권위자라면 공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역사인식은 정부의 명령이 아니라 학계의 폭넓은 논의를 바탕으로 해야 제대로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수정명령권을 남용하는 교육부의 행위 자체가 필자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검정제도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초·중등교육법의 시행령인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에 수정명령권을 둔 것이 포괄위임 입법을 금지하는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계속돼왔다.
8월 말부터 시작된 한국사 교과서 논란의 핵심은 친일·독재를 노골적으로 미화하는데다 질적으로 수준 미달인 교학사 교과서의 퇴출과 검정 관련자들에 대한 적절한 문책이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이 교과서를 옹호하면서 다른 교과서의 문제를 침소봉대했다.
 
나아가 교학사 교과서와 연관된 사람을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여권 주요인사들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앞다퉈 주장했다. 교과서 문제를 잘 짜진 정치적 목적의 역사전쟁 도구로 삼은 것이다.
학생들의 역사인식을 권력층의 뜻대로 끌고 가려는 시도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 교학사 교과서의 검정합격을 취소하고 부당한 수정명령은 철회돼야 한다. 그것만이 지난 몇 달 동안 되풀이된 잘못을 바로잡는 길이다.


중국이 새로운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한 이후 동중국해 제공권 장악을 둘러싼 미국·일본과의 갈등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문제를 대화로 풀려는 노력과 함께 뜻하지 않은 충돌을 막기 위한 위기관리체제부터 구축하는 게 현실적인 접근방안으로 보인다.
미국은 중국이 설정한 방공식별구역 안으로 사전 통보 없이 매일 군용기를 출격시키고 있다고 한다. 중국도 전투기와 공중조기경보기 등을 잇따라 방공식별구역 안으로 들여보내고 있다. 또 중국과 미국·일본 모두 동중국해와 그 주변에서 무력을 증강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세 나라의 항공모함(준항모 포함)이 사상 처음으로 남중국해에서 동시에 무력시위를 하는 일도 벌어졌다. 서로 상대의 굴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쉽게 물러서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중국이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했지만 수십년 전엔 미국과 일본이 그렇게 한데다 그때와는 힘의 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힘으로 현상 변화를 꾀하는 중국이나 현상 변화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국·일본 모두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세 나라는 무력시위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생산적인 논의 틀을 만들지 못한다면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에 앞서 위기관리체제를 만드는 것은 사태 악화를 막고 대화로 문제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일정한 구역에서는 모든 항공기의 출입에 대해 관련국에 사전 통보하는 게 위기관리체제의 한 내용이 될 수 있다. 미국 정부가 중국 방공식별구역을 통과하는 자국 항공사들에 비행계획을 사전에 중국 쪽에 알리라고 권고한 것은 위기관리를 위한 긍정적인 움직임이다.
 
우리나라는 이번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 갈등의 주된 당사자가 아니다. 중-일 사이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영유권 분쟁이나 미-중 사이 전략적 경쟁의 한가운데에 뛰어들 이유도 없다. 따라서 이어도 상공 등을 우리 방공식별구역에 포함하는 안을 검토하더라도 전반적인 동중국해 갈등을 악화시키지 않는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어도 상공 방공식별구역 문제는 한·중·일 세 나라 모두 관련돼 있기도 하다.
마침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의 한·중·일 순방이 시작됐다. 미국이 이번 순방을 대중 봉쇄망 강화의 기회로만 활용하려 한다면 갈등 장기화는 피하기 어렵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통의 요소를 찾아가는 구동존이의 자세가 요구되는 때다. 위기관리체제 구축은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1500자 칼럼] 테스트

● 칼럼 2013. 12. 2. 17:59 Posted by SisaHan
영어의 ‘테스트’라는 말은 두 가지로 쓰여진다. 하나는 우리 말의 ‘시험’이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검사’라는 뜻이다. 오늘 토론토의 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하고 싶지 않았던 ‘테스트’를 해야했던 사람들의 경험을 나누는 방송을 하고있다.
 
한 이십 대의 젊은 아가씨 차례가 되었다. 그녀의 엄마는 ‘헌팅턴’이라는 불치의 병을 앓았다고 한다. 헌팅턴이라는 병은 유전으로 전해지는 병으로 뇌의 신경들이 조금씩 죽어가는 병이다. 기억력을 잃는 치매 증상으로 시작 하지만,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천천히 사고력, 감정을 조절 할 수있는 능력은 물론 몸의 근육을 움직이는 능력까지 모두 잃어가는 무서운 병이다. 아가씨는 자신이 열 한살 때 아직 젊었던 엄마는 이미 양로원에 들어가 살아야 했고, 아빠가 딸을 혼자 키우고 아픈 아내도 돌보면서 어려운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 한다. 헌데 헌팅턴 병을 앓는 환자의 자식들은 그 병을 물려받을 확률이 50%나 된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은 유전자 검사를 통하여 환자의 자식 중에 누가 병을 앓을 인자를 보유하고 있는지 알아 낼 수 있다. 그래서 헌팅턴 병을 앓는 사람의 자식들은 모두 유전자 검사를 받기를 권유한다. 지금 방송 중인 아가씨도 오랜 세월 생각은 하면서도 정말 그 검사만은 받고싶지 않아 미루며 살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아가씨도 구체적으로 앞날을 생각 할 때도 되었고, 남자친구도 생겨 미래를 같이 꿈꾸게도 되었다. 이제 삶의 모든 결정은 자신이 병의 인자를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하였다. 어느 날 아가씨는 검사실의 문을 두드렸다.
 
한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다는 일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나의 마음도 떨리기 시작한다. 검사는 끝나고 아가씨는 며칠 후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다시 의사와 만나기로 한 날은 아빠와 남자친구가 동행했다. 작은 방에서 의사를 기다리는 시간은 한없이 길었고 비장한 긴장과 정적이 숨을 조여오는 시간이었다. 젊은 여자 의사가 누런 봉투를 들고 방으로 들어선다. 조심스레 의자에 앉는 의사의 얼굴을 훔쳐보면서 눈이 마주쳤다. 의사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다음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의사는 무언가 말을 했으나 그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기억이 없다. 의사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고, 아빠와 딸은 끌어안고 오열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끝낸 아가씨는 말을 이어가질 못한다. 몇 초의 침묵이 흐른다. 라디오의 정적은 한없이 길게만 느껴진다. 아가씨의 평범한 삶은 라디오의 소리가 멈추었을 때 함께 끝나버린 것 같다. 그것이 2년 전에 생긴 일이었단다.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고, 마음에 맞는 청년과 결혼도 하고 딸을 하나 낳아서 키워보고 싶었던, 또 그 딸과 셋이서 멀리 여행도 다니는 꿈을 꾸던 아가씨는 어디론가 멀어져 갔다. 그 짧은 시간에 그녀는 검사의 결과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몇 군데 검사실을 더 찾아 다니기도하고, 엄마에게 주어진 불행이 모자라 자신에게 까지도 이런 어려움을 겪게하는 신에게 불 같은 울분이 일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거쳐간다는 그 절절한 슬픔을 삭이는 계단들을 지나며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떠나 보냈다.
 
이제 다시 차분한 아가씨의 목소리가 계속된다. 요즈음의 생활을 그녀는 “괜찮다”고 이야기 한다. 무엇보다도 아빠와 남자 친구는 물론, 자신에게 부어지는 주위 사람들의 사랑으로 자기는 앞으로 오랜 동안 지금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가리라는 확신이 있다고 말한다. 진단이 내려지자마자 병원에서는 상담자를 지정해 주었고, 그 상담자는 아가씨의 건강을 지금부터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의료시설과의 연결은 물론이고, 그녀가 의미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중개역도 해주었다. 그 일 중의 하나로 아가씨는 헌팅턴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연구하는 기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아가씨는 이미 반은 전문가가 된 사람 모양 병과 관련된 정보도 많이 알고, 앞으로 자신이 아기를 낳으면 염색체 치료를 통해 그 아이는 자신과 같이 병을 물려받을 필요가 없다고 활발하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녀는 이제 병원이나 양로원에서 간혹 헌팅턴 환자를 봐도 전처럼 가슴이 아프지 않다고도 한다. 그의 말에는 자신만이 간직한 작은 희망의 싹이 숨어 있는 듯 들린다. 나는 딸과 같은 젊은 아가씨가 접한 불행을 들으며 가슴이 저며오는 연민을 느꼈다. 지금 처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며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아픔은 위안으로 대처됨을 느낀다. 후에 아가씨의 삶이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힘들어진다 하여도, 지금 그에게 친지와 가족은 물론, 의학계의 전문의들이, 사회의 시스템이, 모두 같이 “당신의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도 있는 힘을 다 합니다” 하고 말하는것 같아 고맙기 짝이없다. 이렇게 극한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삶은 언젠가 한번은 남에게 의존하고, 남의 사랑과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궁극적인 ‘테스트’는, 온갖 시험에 합격을 하여 많은 것을 쌓아가는 것 보다는, 우리는 모두 언제라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멍에를 안고 살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래서, 남의 불행을 같이 헤쳐가는 일을 몸에 배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김인숙 - ‘에세이 21’로 등단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심코 가톨릭교육청 언어치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