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외국 문서까지 위조해 간첩사건 조작하나

● 칼럼 2014. 2. 24. 13:5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이른바 ‘탈북 서울시공무원 간첩사건’ 항소심 공판 과정에서 검찰이 “중국 공문”이라며 낸 문서가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주재 중국 영사부는 이 사건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7부가 사실 확인을 요청한 데 대해 최근 회신서를 보내 “한국 검찰이 제출한 3건의 문서는 모두 위조된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엔 중국 길림성 화룡시 공안국 명의의 ‘출입경기록 조회 결과’와 삼합변방검사창(세관)의 ‘유우성씨 출입경기록 정황 설명서에 대한 회신’, 화룡시 공안국이 심양 주재 대한민국총영사관에 발송했다는 공문 등이 포함된다. 1심 때부터 구타와 강압 수사 논란이 제기되더니 급기야 공문서까지 조작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국정원은 여전히 “고등법원에 제출한 자료는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라며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에 대해 유감”이라고 적반하장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검찰 역시 위조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믿기 어렵다. 이 사건 경과를 보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증거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고 법에 따라 엄히 처벌해야 한다.
항소심의 쟁점은 화교 출신 탈북자 유우성씨가 어머니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2006년 5월23일부터 27일 사이 북한을 다녀온 뒤 다시 북한에 들어간 적이 있는지 여부였다. 5월27일 북에 다시 들어갔다가 북한 보위부에 포섭돼 간첩활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검찰은 2심에서 유씨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중국 세관이 발급했다는 ‘회신’을 법원에 제출했다. 이에 변호인 쪽이 반박자료를 내자 이번엔 화룡시 공안국이 한국영사관에 보냈다는 확인서를 추가로 냈다. 그러나 중국 영사부는 검찰이 낸 모든 증거자료가 위조된 것이라며 오히려 “공문 위조 범죄에 대해 조사를 진행할 것이니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다. 국가적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유씨 쪽은 지난해 초 국정원이 조사할 때 중국 영사부가 이번에 ‘진짜’라고 밝힌 출입국기록을 보여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항소심에서 ‘가짜’로 판명된 다른 출입국기록을 냈다면 최소한 국정원은 위조 사실을 알았다고 봐야 한다. 검찰 역시 항소심 법정에서, ‘진짜’ 출입국기록을 수사 단계에서부터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가 번복한 적이 있다는 걸 보면 항소심에 낸 것이 ‘가짜’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사기관이 증거까지 위조해가며 사건을 만들었다면 보통 심각한 범죄행위가 아니다.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조작 간첩 사건이 일어난다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고문 여부까지 포함해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한마당] 비정상의 반복은 안된다

● 칼럼 2014. 2. 24. 10:5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무죄’가 선고되자 법정에선 한숨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보였다. 정작 강기훈씨는 웃지도,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지난 23년간 그는 유서 대필로 동료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죄로 징역을 살았고, 누명 속에 어머니를 잃고, 건강을 잃었다. 남은 건 암으로 수척해진 쉰 살의 병든 몸이다. 재심 재판부는 1991년 당시의 증거를 믿을 수 없다고 이제야 밝혔지만, 검찰은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간 이웃 법정에선 1976년 ‘서울대 의대 간첩사건’의 9명에게 60대가 된 38년 만에 무죄가 선고됐다. 같은 날 부산에선 50대 중반이 된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모두 수사기관의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가 무죄 이유였지만, 부림사건의 담당 검사였던 이는 되레 “좌경화된 사법부”를 탓했다.
서른세 살의 유우성씨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으로 하마터면 그렇게 고통의 세월을 살 뻔했다. 그나마 1심에서 국가정보원의 수사 결과가 믿을 수 없는 증거로 판명돼 무죄를 받았다. 항소심에서 검찰은 중국 공문서들을 증거로 내놓아 반전을 시도했지만, 중국 정부는 이들 문서가 ‘위조’됐다고 밝혀왔다. 조작 사건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유씨 역시 훗날 눈물조차 마른 채 재심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이제 일은 커졌다. 문서 위조 경위를 수사하겠다는 중국과의 문제도 간단치 않거니와, 증거 조작을 의심받는 검찰과 국정원은 존립 기반이 흔들리게 됐다.
검찰은 “국정원이 준 문서”라고 변명했다. 몰랐다는 얘기다. 정말 몰랐을까. 부림사건의 한 피해자는, 검사들이 수사 현장에도 왔었다고 증언한다. 그는 “시멘트 바닥에 군복을 입은 아이들이 초췌한 몰골로 있는데, 그것을 보면 고문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작 스물서너 살 안팎인 시국사건 대학생들의 겁먹은 얼굴과 불편한 몸에서 고문의 흔적을 눈치채지 못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1980년대 한 시국사건의 피해자는 “검사에게 멍든 자국을 보여주며 고문을 당했다고 호소했지만, 검사는 ‘증거가 되냐’며 무시했다”고 말했다. 몰랐던 게 아니라 못 본 척한 것이다.
따지자면 고문 수사나 서류 위조나 증거 조작이긴 마찬가지다. 공안 사건에선 대개 국정원과 검찰이 긴밀히 협의해 수사와 재판을 진행한다. 만약 검찰이 위조를 알면서도 ‘아귀 안 맞는 것 수정하는 일쯤이야…’라는 생각에, 혹은 그런 의심을 애써 밀쳐둔 채 증거로 냈다면 그 역시 명백한 범죄행위다. 2010년 일본 오사카에선 기소 내용에 맞춰 압수물의 날짜를 바꾼 검사는 물론, 이를 묵인하고 허위 보고한 부장·부부장 검사까지 구속 기소됐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광포하게 번진 데는 돈이 큰 이유가 됐다. 마녀로 지목되면 고문 도구 사용료, 고문 기술자와 마녀 재판관의 수당, 처형 비용까지 모두 내야 했다. 화형 뒤에는 전 재산이 몰수돼 나눠졌다. 마녀재판의 관계자들은 다 이해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고문 기술자 가운데는 바늘 끝이 뒤로 밀려나는 장치를 써서 ‘아파하지 않으니까 마녀’라고 억지 마녀를 여럿 만들어 한 재산 모은 자도 있었다고 한다.
 억지 빨갱이 만들기에도 이해관계자들이 있다고 봐야 한다. 국정원이 유씨를 조사하던 지난해 초는 대선 개입 댓글 사건과 국정원 개혁 문제로 들썩이던 때다. 어떻게든 국정원의 존재 가치, 대공수사의 필요성을 입증해 위기를 돌파하려 한 이들은 없었을까. 과거 공안사건 가운데도 권력의 필요에 공교롭게 때맞춘 듯한 사건이 여럿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도록 둘 순 없다. 젊은 강기훈들이 중늙은이가 되어서야 조작의 굴레에서 풀려나는 일이야말로 다시 있어선 안 될 ‘비정상’이다. 국정원이나 검찰이 이런 일을 일상처럼 해왔다면 대수술을 서두르는 게 마땅하다. 개혁 방안이랍시고 ‘국정원 직원의 정부기관 상시 출입 금지’ 따위에 만족할 일이 결코 아니다.
< 한겨레신문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


[한마당] 우리 내면의 식민사관

● 칼럼 2014. 2. 17. 16:1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1960~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학자의 한 분은 이기백(1924~2004) 선생이다. 그의 <국사신론>(1961)은 낡은 역사서술에 싫증난 우리의 시야를 활짝 틔워준 참신하고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 저서의 서론 부분은 ‘식민주의적 한국사관 비판’이란 제목의 독립된 논문으로 그의 사론집 <민족과 역사>(1971)에 수록되어 있는데, 제목에서 짐작되듯 그의 역사연구는 지난날의 식민주의 사관의 잔재를 털어내고 주체적인 민족사학을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40여년 만에 <민족과 역사>를 새로 들춰보면서 그의 역사관이 나 자신의 사유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물론 식민주의 사관의 극복을 위해 노력한 사학자는 그 혼자만이 아니다. 해방 후 국사학 제1세대라고 하는 천관우·김철준·이우성을 비롯하여 더 선배인 홍이섭, 후배인 김용섭·강만길 등 많은 학자들이, 전공 분야가 다르고 방법론에 차이가 있었지만, 넓은 의미에서 민족사학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수십년 연구에 매진했고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그들이 그토록 넘어서고자 애썼던 식민주의 사관의 실체에 관하여 오늘 다시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만 돌아보자.
 
일제 관변학자들의 한국사 연구는 이미 19세기 말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학 전공자들에게는 상식에 불과한 이 얘기가 일반인들에게는 놀랍게 들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본으로서는 침략을 위해서나 통치를 위해서나 조선 역사와 사회에 대한 조사·연구가 필요했다. 하야시라는 학자의 <조선사>(1892)와 <조선통사>(1912)가 근대학문의 방법론에 입각한 최초의 한국사라는 것은 부끄럽지만 정시해야 할 우리 역사학의 진실이다. 중요한 것은 하야시를 비롯한 관변학자들의 역사연구가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결국 일본의 한국 침략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일본의 군사적 팽창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철퇴를 맞았다. 일본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외국 군대에 점령되었다. 민주주의 평화체제로 나라의 틀이 바뀐 것은 점령국 미국의 강제의 결과였다. 하지만 동아시아에 군림했던 영광의 기억마저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한-일 관계를 바라보는 그들의 심중에는 식민지 지배자의 우월감이 깊숙이 남아 있어서, 망언의 형태로 끊임없이 표출되어 왔다. 패전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1953년에 벌써 한일회담 일본 쪽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는 “일본이 조선에 철도나 항만을 만들고 농지를 조성하여 발전에 공헌했다”는 주장을 폈고, 1965년에는 총리 사토 에이사쿠가 “독도는 예로부터 일본 영토라는 데 의심이 없다”고 발언했다. 그로부터 50년, 60년이 지난 아베 정권 아래서 망언은 날로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한-일 관계에서 문제의 핵심은 일본 정부가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의 강압성·불법성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조선총독부는 합법적 통치기관이었고 3.1운동 같은 총독정치에 대한 저항이 오히려 불법이었다. 이 점에서 일본을 대하는 미국과 한국의 시각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미국으로서는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부터 1945년 종전까지만 일본이 범죄국가인 반면에 우리로서는 적어도 1905년 을사늑약부터 40년간 일본이 침략국가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19세기 후반부터 100여년에 걸친 세계사의 무대에서 영국·프랑스·독일·미국 같은 나라들의 행태와 일본의 그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우리 국민들 다수의 무의식 속에 옛 지배자의 관점, 곧 식민지사관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인관계에서도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의 공격적 심성을 자기화하는 수가 많은 것을 우리는 목격한다. 이 경우 내면의 폭력성을 극복하는 것은 가해자·피해자 모두가 새 삶을 얻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의 민중들은 공동의 과제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진정으로 평화적 민주국가가 되도록 돕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민주주의를 살리는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


[1500자 칼럼] 역사(국사) 교과서

● 칼럼 2014. 2. 17. 16:1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지난 한 해 한국은 여러가지 사건들이 많아 정신이 없었다. 사람에 따라 관심사가 달라, 무엇을 더 관심있게 지켜보았는지가 다를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역사교과서’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역사교과서가 아니라 국사교과서이다. 그 단어가 주는 의미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나라의 국사라면, 국민에게 정체성과 자부심을 불어 넣어주는 역사여야 한다. 한마디로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이 자기 나라 역사교육의 목표다.
나는 한 때 역사를 좋아해서 이곳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역사를 전공하느냐 문학을 전공하느냐 를 놓고 망설인 적이 있었다. 결국 역사는 부전공이 됐지만…더욱이 내가 주로 공부했던 분야는 한국, 중국, 일본의 근현대사였다. 그리고 가능하면 힘이 들지만, 이왕 밖에 나와서 서양교수 밑에서 공부하는 것, 객관적으로 보는 눈으로 공부하려 노력하였다.
 
이번에 문제가 된 교학사 교과서를 직접 구해 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올라 온 것을 보며,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은 ‘친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독립된 한 나라의 국사 교과서에서 식민지 시대를 통해 근대화가 됐고, 더 잘 살게 됐다는 이론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일본이 한국에 철도를 놓아줌으로 인해, 한국 사람들은 먼 곳으로 여행도 가능하게 됐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정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옛날에 학교 다닐 때 배운 서양역사 학자의 말이 생각났다. “한국은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단검이다.” 아마 그는 한국이 놓여있는 지정학(Geopolitics) 때문에 그런 말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한국은 중국에게 있어 ‘등을 노리는 단검”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 반도, 중국은 대륙, 일본은 섬이다. 이 서로 다른 지리적 특성이 근대에 들어서기 전까지, 몽고의 일본 침략과 임진왜란을 제외하고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조 말에 들어와서,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 동양 3국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 일본이 대륙을 침략하려면, 반드시 한국을 거쳐야 한다. 러시아가 대양으로 뻗어나가려면 또 한국을 거쳐야 한다. 해방 후에는 미국과 소련까지 합세해, 보이게 보이지 않게 한국을 사이에 두고 영향력을 행세하려 한다. 오늘날 중국과 미국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또 중간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한국에 철도를 놓은 주된 이유가 자신들의 대륙 침략에 군인을 이동시키고 공급선을 만들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지, 한국사람들의 먼 곳으로의 여행을 위한 것일까? 지도를 보아도 일본이 왜 철도를 놓았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일본에서 만주로 가는 최단거리로 철도가 놓여있다. 그리고 당시에 대한민국 국민의 몇 퍼센트가 한가롭게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여행을 다닐 수 있었는지, 그 때의 상황에서 보았을 때 몇 명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일본식민지가 됨으로서 빨리 근대화가 되고 더 잘 살게 되었다는 논리에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럼 아프리카는 어떠한가? 영국의 식민지가 됨으로 근대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더 잘 살게 되었다면, 그들은 계속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야 할까? 한국이 일본이 없었다면 근대화가 될 수 없었다는 논리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요지다. 당시 중국은 물론, 러시아도 노리고 있었고, 그 밖의 나라들이 러시아를 막기 위해 노리고 있지 않았는가? 한국의 경제 발전도 그렇다. 일본은 인적 자원이나 물적 자원이 넉넉한 나라가 아니다. 중국과 동남아 그리고 미국과 전쟁을 치르기에 초기에 기습적 공격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장기전으로 계속 전쟁을 수행하기에 국가적으로 인적 물적 자원이 턱없이 부족한 나라다. 자신들 능력이상으로 벌려 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의 인적 물적 자원을 최대한으로 강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쟁말기의 우리의 경제는 그들의 전쟁 물자를 보급하는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식민통치 기간에 한국의 경제가 발전했다는 한국사 학자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일본의 국사학자라면 모를까? 또 일본의 적지않은 일본사(국사) 학자들은 지금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의 식민 통치기간이 있어 한국이 근대화 되었다고.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