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라걱정

● 칼럼 2013. 12. 16. 17:57 Posted by SisaHan
2008년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시대가 끝났다고 주장했다. 폭락하는 집값, 무너지는 금융기관, 치솟는 실업률, 엄청난 정부부채 때문에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시대는 끝난 것 같지 않다. 정치적 대립으로 정부지출이 축소되는 와중에도 올해 미국 경제는 회복 중이고 내년 성장률은 더 높을 가능성이 크다. 실업률은 빠르게 떨어지고 주가는 크게 올랐다.
 
지난 5년 동안 무슨 일이 미국에서 일어난 것일까. 최고의 디플레이션 전문가가 중앙은행의 수장이 되고 사상 최대의 유동성이 시장에 공급됐다. 파산 위기에 몰린 회사들에 유동성이 제공되는 대신 강도 높은 구조개혁이 실시됐다. 정부는 의료보험 대상의 확대를 위해 ‘오바마케어’를 추진하고 관철시켰다. 금융개혁을 통해 은행의 위험을 통제하고 사회적 자원을 금융에서 제조업으로 유도했다. 인재들이 ‘월스트리트’보다 ‘실리콘밸리’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변화와 개혁은 더 강력한 미국 헤게모니를 예고한다. 흥미롭게도 미국이 추진하는 ‘오바마케어’와 금융개혁 법안들은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의 취지와 맥락이 닿아 있다. 문제는 시대정신을 따르고 있는 건 구호뿐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공허하고 엉터리란 것이다. 많은 경제민주화 정책들이 재원 부족을 이유로 공약으로만 남았다. 골목상권을 보호한다며 기업들의 진출을 막는 정책은 단기적으로 소비자 후생을 훼손하고 장기적으로 골목상권 자체도 보호하지 못하는 나쁜 정책이다.
 
한국 경제는 창조성 없이 효율성을 얻기 어려운 단계에 있다. 하지만 창조성은 일사불란함이 아니라 자유분방함 속에 꽃을 피운다. 스티브 잡스가 보여주는 창조적 지성의 수준은 새마을운동으로 달성될 수 없다.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이나 경찰의 수사 조작과 양립할 수 없다. 한 사회가 달성하는 창조성은 자유롭고 개방된 사회의 펀더멘털의 결과이지 심리전으로 보호되는 억압된 사회의 돌연변이일 수 없다. ‘창조경제’가 표류하는 이유다.
일본은 강력한 미국의 귀환을 잘 이해하고 편승하고 있다. 미국이 엔화 약세를 용인하면서 20년을 잃어버린 일본의 시계는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국은 일본이 ‘정상국가’가 되어 중국을 견제해주기 바란다. 일본 경제가 개선될수록 일본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현금인출기 구실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퇴로 없이 경색시켰다. 통쾌하다는 사람들의 인기는 얻었을지 모르지만 전략적이지 않은 어리석은 외교다.
 
핵무기 폐기를 대북 협상의 전제로 내세우면서 남북관계도 교착되었다. 개성공단은 폐쇄되었다가 다시 열렸지만 북한으로부터 얻어낸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1000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가계부채, 향후 가속화될 엔화의 약세, 임박한 중국의 거품 붕괴를 고려하면 남북간의 경제협력은 북한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남북간 경제협력이 현실화되지 않는다면 돌파구가 없는 한국 경제는 4년 뒤 더 어려워질 것이다.
국가의 운명에서 4년은 긴 시간이다. 한 나라가 망가지기에 충분하다. 나는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바라지만 비관적이다. 실패한 정권을 교체하지 못했을 때 이번 정권의 실패는 예고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패하고 부패하고 하고 싶은 대로 막 해도 아무도 견제하고 문제 삼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다. 자연법칙이다. 지역감정이 나쁜 이유는 성과가 나빠도 정권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의 실패를 막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야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는 중이다. 비싼 대가를 치르고. 민주당의 분발을 촉구한다.

< 김동조 -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저자 >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 삶에 대한 평가가 온전히 드러나나 봅니다. 엊그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한 ‘마디바’(존경받는 사람) 넬슨 만델라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 지도자들이 성명을 통해 애도를 표시했습니다.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추모 성명 내용이었습니다. “그가 없는 나의 인생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장 용기있고 선한 인물을 잃었습니다.” “위대한 빛이 졌다”는 캐머런 영국 총리의 성명도 간결한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특별한 것은 북한이 추모 대열에 참여한 것입니다. 북한은 유엔이 2005년부터 매년 인권결의안을 채택하는 대상국이니, 만델라의 꿈과는 거리가 먼 나라입니다. “(고인은) 남아프리카 인민이 낳은 훌륭한 아들”, “남아공 정부와 인민, 고인의 유가족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4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도 이와 비슷했죠. 오바마 대통령은 그때 “조국에 대한 헌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자유를 위한 개인적 희생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였습니다. 군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를 놓고 많은 갈등을 빚었지만, 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고인과는) 수많은 정상회담을 했으며, 21세기를 향한 양국 관계의 비전과 북한 문제 등에 관해 솔직한 의견 교환을 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일본 정부는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그에게 큰 빚은 지고 있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아마 이렇게 집약될 겁니다. “(고인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납치, 투옥,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투쟁했던 위대한 인물.”(프랑스 일간 <르몽드>)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30년 전에 참혹하게 세상을 뜬 대통령이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부하의 총탄에 절명한 죽음이었으니 더욱 그러했겠지만, 진심이 담긴 추모 성명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그의 죽음을 공식 발표한 직후 이런 한 줄짜리 성명을 발표합니다. 그것도 국무부 대변인 성명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서거를 깊이 애도합니다.” 거기엔 어떤 평가도 추억도 없었습니다. 3시간 전, 그러니까 정부 발표 2시간 전 국무부는 이런 특별성명을 먼저 발표했습니다. ‘어떤 외부 침략도 용납하지 않는 게 미국의 입장.’ 참으로 건조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게 그들의 정서였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아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죽음. 그 사이엔 이렇게 깊은 강이 흐릅니다.
만델라가 추구했던 가치는 자유와 평화와 정의였습니다. 이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삶은 용서와 화해, 관용이었습니다. 그런 만델라를 두고 최악의 흑백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펼치던 백인정권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처벌했고, 그가 몸담고 있었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공산주의를 세뇌시키는 집단으로 매도했습니다. 만델라가 처음 기소될 때 그에게 적용된 법률은 ‘공산주의 활동 금지법’이었습니다. 우리의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법률이었죠. 이후 그를 ‘빨갱이’로 만들려는 공작은 집요하게 계속됐습니다. 1960년 민족회의를 불법단체(우리 식으로는 이적단체)로 규정했고, 1962년 만델라를 불법 국가 탈출(잠입·탈출) 혐의로 5년 징역을 선고했고, 복역중이던 1964년 정부 전복 기도(내란) 혐의로 종신형에 처합니다. 그 시기가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을 앞세워 공포정치를 강화하던 때와 일치합니다. 만델라가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면 아마 빨갱이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항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막히면 종북 혹은 이북! 골칫거리가 등장하면 국정원을 통해 ‘종북몰이’를 하거나, 이북 정보를 악용해 국면 전환과 함께 공안정국을 조성하려 한다는 겁니다. 대통령 후보도 종북으로 몰았고, 선거 부정을 덮기 위해서도 종북 공세를 펼쳤고, 검찰총장까지도 종북으로 매도했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종북 사제단으로 내몰았습니다. 게다가 청와대의 검찰총장 사찰 의혹이 구체화되자 부처간 협의도 되지 않은 북 정보를 터뜨려 궁지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등 북풍 활용에 골몰했으니, 그런 말이 나왔을 겁니다. 북도 실은 이런 정권을 열심히 도왔죠.
이달 초 한 야당 의원은 대통령에게 “조용할 때 시간 내어 내일이 임기 마치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이임사를 미리 써 보시라”고 충고했습니다. 사제들이 매일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가듯이, 대통령직도 내일이 마지막날인 것처럼 생각하고 초심대로 국정을 운영하라는 것입니다. 죽음 혹은 퇴임 앞에서 알량한 자존심과 너저분한 탐욕과 위선,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추모 성명이 기억납니다. “(고인의) 1998년 런던 방문과 그 이듬해 이뤄진 저의 공식 방한 때의 행복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는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분입니다. 슬픔에 잠긴 유가족분들과 한국 국민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합니다.” 
박 대통령도 올해 영국을 국빈 방문했던 터이니, 퇴임할 때건 혹은 훗날 영원한 작별에 이르러 이런 추모가 따르길 기원합니다. 그러자면 빨갱이 혹은 종북 조작의 길에서 떠나, 자유와 평화와 정의의 길을 걸어야 할 겁니다. 장하나 의원의 사퇴 요구를 두고, 마치 유일영도체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해 수하들이 길길이 날뛰는 그런 옹졸한 보스가 되어선 안 됩니다. 선거부정이 있었다면,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주장입니다. 마디바의 타계가 분열과 공작과 독선과 억압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한겨레신문 곽병찬 대기자 >


[1500자 칼럼] 화목한 교회를 꿈꾸면서

● 칼럼 2013. 12. 8. 19:34 Posted by SisaHan
나이가 들고 이제 교회에다 간접적으로 은퇴의 시기를 말해놓고 나니 자꾸 과거를 회고하게 되고 또는 예전에 내가 가졌던 꿈은 이루었던가? 또는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섰던가? 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젊은 시절 신학교를 다니면서 강단에 올라 사자후를 토하면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말씀 앞에 꺼꾸러지는 장면들을 연상하지 않았던 목사가 어디 없으랴? 대단한 설교자 또는 부흥사, 대형 교회 웅장한 건물을 꿈꾸며 한 시대를 준비해왔다. 그러면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캐나다의 이민 목회자로 섰다. 물론 그 와중에 한국이나 미국에서 목회할 기회도 있었으나 이제는 캐나다에서 내 목회를 끝낼 것 같다. 

그런데 목회의 종반에 와서 과연 큰 교회 많은 성도 대단한 설교자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결국 그 모든 것은 목회자 개인의 명예나 영광과 같은 것이 되겠고 진정 성도들이 마음을 담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신앙인의 삶을 키우는 목장으로서의 교회와 그 교회를 책임지는 목사로서 온전하게 살았을까? 하는 질문 앞에서 엄숙해진다.

꼭 목회의 종반을 앞 둔 시점에서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나는 십여 년 전부터 교회와 목회를 자주 생각하면서 교회가 크고 재정이 많고 유명인사가 많은 교회도 좋겠지만 아무리 교회가 크고 재정이 많다 해도 교회가 시끄럽고 분쟁에 휘말리고 강단에 오르는 목사를 끌어내리고 목사나 장로가 법정에서 만나는 모습을 볼 때 이건 교회도 아니고 목회도 아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교회는 화목해야하겠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실제로 교회가 화목하지 않으면 성도들이 교회에 오면 이 편 저 편에 눈치를 봐야하고 제직회는 갈등 속에서 편한 회의가 되지 못한다. 서로를 꼬집고 비난하고 회의록에 사인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로 옥신각신을 하고… 이건 교회가 아니다. 세상 사람이 하는 방식을 그대로 쫓아 법정 다툼이나 벌이고 있으니 은혜는 뭐며 용서는 뭔가? 이제는 복음을 위한 순교가 아니라 순교적인 자세로 싸움을 하는 교회가 된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설교 시간에 우리 성도들에게 예전에 우리가 많이 불렀던 동요, ‘이슬비’를 함께 읊을 때도 있었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골목길에 우산 셋이서 어깨를 마주대고 나란히 걸어갑니다.”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이 빨간 우산을 들 수도 있고 파란 우산을 들 수도 있고 코카콜라 회사에서 제공한 우산을 들 수도 있다. 교회는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리고 그 교회에는 찢어진 우산과 같이 인생이나 사업이 그리고 성품이 찢어진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도 용인하면서 함께 인생의 길 교회생활을 해야 한다.

몇 년 남지 않은 나의 목회라 해도 나는 절대적으로 이것을 강조한다. 제발 큰 교회나 많은 재정에 욕심을 내지말고 온화하고 화평한 교회를 이루는 목회를 하면 어떨까? 하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심방을 해도 화(요일)과 목(요일)에 심방을 한다. 물론 다른 날도 하지만.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한마당] 총연 회장 선거와 이중잣대

● 칼럼 2013. 12. 8. 19:33 Posted by SisaHan
많은 한인동포들이 그런 자리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한인회 총연합회장’, 즉 ‘총연 회장’선거가 말썽을 낳았다. 
평소 유명무실해서 ‘그들만의 감투’였던 캐나다 총연 제17대 회장 선거에 이진수 토론토 한인회장이 출마를 밝혔다가, “의견조율이 전무한 상태에서 수개월 전에 일방적인 독단에 의하여 이미 사전 합의된 천도와 세습의 결정”을 이유로 후보를 사퇴해 버리자 전직 총연 회장을 지냈던 몇 인사들이 들고일어나 “이런 불공정은 묵과할 수 없다”며 격앙했다. 
‘천도와 세습을 끝낸 한인회총연의 왕권’ 이라는 이진수 회장의 표현대로 총연 회장자리가 ‘왕권’에 해당될 만큼 대단한 자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천도와 세습’의 의혹을 낳고, 선거절차가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고발이 알려지면서 총연회장 선거는 하기도 전부터 불법과 무효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 회장이 차기 회장 후보사퇴는 물론 이사장직도 그만두고 아예 손을 떼겠다며 제기한 문제점을 요약하면, 평소 총연이 독선적으로 사조직처럼 운영되고 있다는 것과 수차례 회칙개정이 불투명하게 이뤄진 점, 제17대 회장 선거가 사전에 지역 한인회장들과 전혀 상의 없이 장소와 절차 등 모든 것이 일방적으로 결정됐고, 선거 전에 이미 차기회장이 담합에 의해 내락된 정황이라는 것 등이다.
 
초창기 총연에 간여했던 전직 회장 가운데는 “총연이 한인을 대표하는 단체가 아니라 사조직처럼 운영되고 개인적 명예욕과 모국의 대접만을 즐기는 몇몇 사람의 사익단체가 됐다”며 “이런 식으로 불공정한 선거는 무효이며, 총연은 차라리 해체하는 게 낫다“고 맹비난 했다. 
이들의 지적을 빌리지 않아도, 글자그대로 한인회 총연합회는 각 지역 한인회가 모두 참여하는 모임체라는 뜻이고 그래야 마땅하며, 그래야만 한인회들 곧 한인동포의 대표기구로 위치할 수 있다. 당연히 각지 한인회 대표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협의를 통해 총의가 결정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캐나다 총연의 모든 절차들, 특히 차기 회장을 뽑는 선거일정과 장소, 선거규정 등이 ‘토론토 한인회장도 모르게’ 결정되고 더구나 선거 한참 전에 차기회장이 ‘세습’ 혹은 ‘담합’으로 이미 정해졌다는 의혹이 있다면 분명 불공정하다는 지적이 맞다. 그 것은 불법이고 무효임은 물론 진상규명이 필요한 반민주적, 반 동포적 행태라고 봐야한다.
‘천도와 세습…총연의 왕권’ 이라는 표현은 솔직히 난해할 뿐더러 얼핏 북한 정권을 묘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민주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라는 뜻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선거가 사전 각본에 의해 치러지고, 당선자가 세습처럼 사전 내정이 되어있다면 왕정이나 독재국가가 아닌 바에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명명백백히 진상을 가려서 민주적 방식의 선거와 선출이 이뤄지도록 바로잡고, 앞으로 그런 전통을 지켜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공정한 선거는 민주주의의 뿌리이며 토대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는 바로 직접, 비밀, 평등하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민의를 제대로 수렴할 때 가능한 일이다. 선거에 절대 개입해서는 안되는 정부기관들이 공공연히, 혹은 은밀하게 여당후보 두둔 선전과 야당후보 비방에 나서고, 정부시책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적으로 몰아 비난하는 공작에 몰두한 선거는 공정했다고 볼 수 없다.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선거결과가 정당성을 상실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모국의 지난 대통령선거가 그랬다는 증거들의 하나가 검찰이 일부나마 밝혀낸 ‘국정원 트윗 121만건’이다. 그런데도 그런 사실을 무조건 덮고 입막으려 무리수에 강경일변도로 버티다보니, 새 정부가 출범했어도 1년이 지나도록 나라가 시끄러운 것이다.
캐나다 총연회장 선거와 모국 대통령선거가 비록 ‘격’은 다를지 몰라도, 민주적이고 공정하게 치뤄져야 한다는 선거의 대원칙에서는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불공정하다면 분명히 바로잡아야 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일부 인사처럼 모국 대선의 불공정에 대해서는 ‘종북의 트집’이라 폄훼하고 총연 선거에만 핏대를 올린다면 그런 모순과 위선이 따로 없는 이중적 행태다. 
정보기관이 ‘정보’는 뒷전인 채 불법 선거공작을 ‘주업’으로 삼을 바엔 해체하는 게 낫다는 호통도 ‘종북’이라 호도하고, 정황이 뚜렷한 대선 불공정 외침을 모두 ‘종북’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은 빨강과 파랑을 구분할 줄 모르는 색맹들이 아닐까, ‘네가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 같은, 참 어이없는 불랙코미디가 횡행하는 시대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