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Whistle Blower

● 칼럼 2013. 12. 24. 19:40 Posted by SisaHan
Whistle Blower
- 호루라기 부는 사람 -

올해도 한 해가 다 저물어 간다. 유독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바삐 걷던 걸음을 멈추고, 지난 한 해를 되돌아 보며, 잠시라도 생각을 하며,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기쁘고 보람 된 일도 많았겠지만, 적지않은 사람들에게는 슬프고 후회되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늘 이번 겨울이 가장 춥고 길듯, 나는 올 한해가 가장 힘이 들었고, 슬픔 많은 해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루어 놓은 일 하나도 없이….

해가 가면 갈수록 생활은 단조로워지고, 느낌도 생각도 없이 살아지는 것 같다. 내가 사물을 또는 사회를 보는 눈마저 좁아져, 모든 것을 내 좁은 눈으로 보려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남이 선동처럼 하는 몇 마디에 쉽게 흥분하고 그리곤 잊어버리며 그리곤 이내 호수처럼 잔잔해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단조롭고 변화없는 캐나다 생활은 호수처럼 고요하고 민민할 것이다. 그에 비하면 한국사회는 역동적이랄까? 끊임없이 부닥치고 변하는 사회다. 올해 유난히도 깜짝 놀랄 사건들이 많았다. 하나 일이 터지면 그 이유를 생각해 보기도 전에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그렇게 1년이 지났는데도 어느 사건 하나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꼬리를 물고 터져나온 사건 때문에 잊혀졌을 뿐…. 그 어느 해보다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시작한 한해였건만, 한 해가 끝나는 마당에 나는 오히려 더 혼란스럽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몇 명의 개인적인 희생만 있었을 뿐….

영어에, ‘Whistle Blower’라는 단어가 있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호루라기 부는 사람’이란 뜻인데, 정확한 뜻을 번역하자면 그런 뜻이라기 보다 ‘내부 고발자’ 또는 ‘양심선언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 조직내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 내의 잘못과 비리를 외부에 공개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 어느 조직에서나 쉬운 일이 아니다. 마피아 같은 범죄 조직에서는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신을 키워주고 먹여주었던 조직, 그리고 오랜 시간 같이 했던 동료들을 배신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자신의 처지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온갖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며, 때로는 엄청나게 매도되고 나아가서는 생명까지 위협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비리를 폭로한 것은 아니었지만 양심적으로 한 행동과 말 때문에도 조직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특히 위에서 보낸, 보이는 보이지 않는 압력을 거절하는 경우이다. 
그냥 시키는대로 했으면 눈치껏 알아서 했으면, 최소한 그냥 보고도 못본 체 하고 입다물고 있었으면 그들의 자리는 조직내에서 보장이 되고, 앞날은 탄탄대로가 되거나 가속도가 붙어 수직상승을 할지 모른다.

한국사회는 어느 나라보다 유기체적인 사회다. 혈연, 지연, 학연, 그리고 직장(조직)으로 끈끈하게 맺어진 하나의 생명체이다. 만약에 거기서 이탈한다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뿐더러, 밖에서도 서있을 자리를 못찾는다. 
금년 한해에 신문지상에 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오르고 내렸지만, 나는 채동욱, 윤성렬, 그리고 권은희, 이 세사람의 이름이 나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이들은 내부의 비리를 고발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당연히 해야할 일, 그냥 맡은 바 책임을 소신껏 했을 뿐인데,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어쩌면 튀어나온 못이 망치질 당한다고, 한국적인 상식과 정서에 어긋난 행동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시점에서 보면 그 막강한 자리에서, 도덕적 의심을 받아가며 물러나고, 중요한 직책에서 물러나고, 앞으로 또 어떠한 개인적인 불이익 등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 자신도 후회하고 있을지도, 그냥 입다물고 시키는 대로 했을 걸 하며…, 
사실 그들의 행동의 잘잘못을 내가 판단할 처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동이 당당해 보이는 것은 웬 까닭인가?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칼럼] 거 목

● 칼럼 2013. 12. 24. 19:37 Posted by SisaHan
여행을 다니면서 정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큰 나무들을 많이 보았다. 
스위스 루체른의 필라투스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 오면서 케이블카 높이만큼 키큰 나무도 보았고, 캐나다의 록키와 미국 서부의 워싱턴주에서의 거목들은 그 굵기가 성인 열 사람은 빙 둘러야 할 정도의 큰 나무도 보았다. 
이런 거목들은 굵고 키가 무척 크다. 서로를 의지하며 경쟁하듯 자라는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가 다른 나무와 같이 크지 않으면 햇볓을 못 받아 스스로 죽어가기 때문에 어떻하든 크기를 맞추어 자라나야 한다. 다행히도 이런 곳은 나무가 자라기 좋은 기후와 토질과 비가 풍족한 곳들이다. 
그러나 진짜 거목은 따로 있다. 특별히 우리나라에는 동네마다 ‘당산나무’라는 나무가 있어서 농부들에게 쉼터가 되어주고, 어린아이들에게 놀이터가 되어 주는 고마운 나무들이 있다. 
특징이 있다면 ‘거목’이라는 것이다. 마음껏 가지가 자라나서 그 큰나무의 그늘은 우리들 마음의 고향이 되어 준다.
 
울창한 나무들이 자라는 숲속의 나무들은 자기의 ‘크기 비례’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다. 수분이 풍족하여 뿌리가 멀리 뻗어나가지 않아도 되는 자연조건도 한 몫을 한다. 어마 어마한 나무가 쓰러져 있는데도 그 뿌리는 너무 작음에 놀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홀로 선 나무들은 그 뿌리가 넓고 깊게 자리잡게 된다. 홀로 바람에 견뎌야 하고, 홀로 선 땅에서 물을 찾아 뿌리를 깊이 내려야한다. 가뭄과 홍수에도 홀로 견뎌야한다. 세월이 지나 거목이라 칭함을 받을 때 쯤은 지축이 흔들려도 나무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다. 잔잔한 호수에서 익숙한 사공이 나올 수 없듯이, 무리와 휩쓸려 삶을 살아가다 보면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없다. 묵묵히 홀로 가는 외로움의 길을 갈 때, 그 길을 견디어 나갈 때 성숙되며 개성이 다듬어지고, 마침내 빛나는 보석같이 변하여 지는 것이다.
‘족적을 남겼다’ 라는 말은 홀로 그 길을 갔기 때문에 그 발자국이 남는 것이다. 
외로움과 두려움, 절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은, 그만의 향기와 그만의 품위와 기상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홀로 있어도 외로울 틈이 없어야한다. 고독하다고 슬퍼 할 것이 아니라 고독을 즐기며 음미 할 줄 알아야 한다.
 
27년간의 감옥생활로 인생의 황금기를 깡그리 말살당하였어도,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고 온 국민으로 부터 추앙을 한몸에 받았던 남아공의 만델라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전 세계의 국가 지도자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모였다. 
그는 진정한 거목이었다. 그 뿌리는 온 지구에 넓게 자리잡았고, 지구를 뚫을 정도로 깊이 박혔기 때문이다. 그 누가 27년의 긴 시간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뜻을 굽히지 않고, 꿈을 버리지 않고, 외로움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거목이 쓰러진 지금, 지구가 흔들렸다. 고인의 강철같은, 아니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인격을 닮고 싶다. 
보내는 아쉬움이 크지만, 우리들도 우리의 미래에 이런 거목이 또 자랄 수 있도록 나의 자녀들부터 과보호의 틀에서 빼어 내 보자. 홀로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자. 서로 키가 더 크지 않으면 죽고 마는 숲에서 탈출해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에도 이런 거목이 많이 자라서, 우리들의 미래 만큼은 지금과 같은 정치판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아니! 반드시 만델라 같은 거목이 나타날 것을 믿는다.

< 정훈태 - 토론토 동산장로교회 장로 >


한 대학생이 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대자보는 철도파업 노동자 대량 직위해제, 밀양 송전탑 강행,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등으로 하 수상한 시절에 ‘모두들 안녕하신지’를 묻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에 대한 뜨거운 호응이다. 전국 대학생들의 ‘안녕하지 못하다’는 릴레이 대자보가 이어지면서 누적됐던 학생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분출되는 양상이다.
대자보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학생들이 학원 밖의 정치·사회적 현안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대부분의 대학생은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외부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하지만 철도파업 노동자 대량 직위해제 등을 보면서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들이 지속될 경우 자신들의 미래가 불안해질 것임을 자각한 대학생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곧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대자보 릴레이에 참여한 한 학생의 지적대로 “확실한 것은 불안한 사람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뭉쳐 서로를 지켜주어야 안녕을 도모할 수 있다.” ‘안녕하지 못한’ 대학생 300여명이 철도파업 노동자 집회에 참여한 것은 그런 연대의식의 발로다. 예비 지성인인 대학생들이 사회 부조리에 눈뜨고, 억압받는 약자들과 함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건강한 공동체 형성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 대자보 파문이 확산되는 것은 우리 현실이 학생들 눈으로 보기에도 인내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잘못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파업에 참가했다고 8000명 가까운 노동자를 직위해제하고, 주민이 음독자살을 하며 반대하는데도 송전탑 건설을 강행하고, 국가기관이 나서 대대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는 일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더욱이 현 정권은 자신들한테 불리한 말만 하면 종북으로 몰아붙이고, 대통령 사퇴를 주장했다고 국회의원을 제명하겠다며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안녕하지 못한’ 일차적인 책임은 기성세대에 있다.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정치권, 노동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취급하는 기업들, 자식을 출세의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은 부모 등이 모두 공범이다. 기성세대들은 학생들의 주장이 사실 왜곡이니 선동이니 하는 딱지를 붙이기 전에 그들이 쏟아내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이번 대자보 파문을 계기로 ‘모두가 안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성세대와 학생들이 힘을 합하길 기대한다.


북한이 장성택 전 조선노동당 행정부장의 전격적인 처형을 정당화하면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유일 지배체제 강화를 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정은은 장성택 사형이 별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이전과 비슷한 공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북한 당국이 정통성 강화를 위해 동원하는 첫째 논리는 김정은의 혈통을 강조하는 것이다. 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이 하늘에선 수령의 피가 아닌 다른 피를 가진 인간은 숨 쉴 공기도 없다”며 ‘수령에 대해 감히 도전한다면 피를 나눈 혈육이라도 서슴없이 징벌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주장은 북한이 왕조시대의 사고방식을 넘어서지 못하는 후진적 상태에 있음을 재확인할 뿐이다. 김정은 이외의 사람은 어느 때건 처형할 수 있다는 ‘공포정치의 수사’이기도 하다. 헌법에까지 독재를 규정한 나라이더라도 폭력을 남발해서는 정통성을 얻지 못한다. 이는 장성택 세력에 대한 ‘피의 숙청’을 중단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김정은 정권은 앞으로 경제 활성화를 통한 정통성 강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장성택에 대한 판결문을 보면 그가 여러 경협 사업에 깊숙이 관여해왔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이들 사업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오히려 확대하려 할 것이다. 다른 개혁·개방 조처도 내각을 전면에 내세워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쪽으로 가기가 쉽다. 이런 시도는 김정은 체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거부감을 낮추지 못한다면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 공식적으로 ‘장성택 처형은 북한 내부의 일’이라고 선을 긋고 있는 중국도 대북 경협을 확대할 동기가 약하다. 공포정치의 지속과 이로 인한 체제 불안은 경제 개선에도 족쇄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북한의 대외 관계에 대해서는 적어도 당분간은 경색될 것으로 보는 전망이 다수다. 군부를 중심으로 강경파의 힘이 커지는 듯한 상황임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분석이다. 북한이 체제 안정에 실패할 경우 내부 결속을 위해 대외 도발을 시도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런 길은 북한 자신을 위해서도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지금 북한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대외 관계 개선에 신경 써야 할 때다. 공포정치를 지속해선 안 될 또 다른 이유다.
 
김정은이 왜 장성택 처형을 감행했는지 그 구체적인 계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물론 장성택의 권력이 강해지는 과정에서 김정은과 다른 권력자들의 불안감이 커진 게 주요한 배경이 됐을 것이다. 이런 모순에 공포정치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면 김정은 체제는 지구촌의 차가운 눈길을 피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