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그들만의 “우리”

● 칼럼 2014. 2. 17. 16:10 Posted by SisaHan
박근혜 정부는 취임 초기부터 성폭력을 큰 범죄로 규정하고 엄단할 뜻을 밝혔다. 하지만 말뿐인가 싶다. 지난해 말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소속 검사들과 출입기자단의 송년회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이 처리되는 과정을 보면서 더욱 그렇게 느낀다.
지난달 대검찰청 감찰본부는 술자리에서 여기자들을 성추행한 이진한 대구지방검찰청 서부지청장(전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사)에 대해 ‘감찰본부장 경고’ 처분을 내렸다. 정식 징계에 해당하지도 않는 솜방망이 처분이라며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지난 6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에서 노골적으로 이 지청장을 감싸고돌았다. 비슷한 사건으로 무거운 징계를 받았던 검사와 왜 처분이 다르냐고 묻자, 황 장관은 “우리 이 차장”이라고 언급한 뒤 “모든 상황을 종합 판단해 징계양정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가 말하는 ‘우리’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검찰의 성 인식은 무척 낙후돼 있다. 2010년 이후 지난해까지 부적절한 언행으로 견책, 면직, 감봉, 정직을 받았다고 공개된 검사만 5명이다. 술김이란 핑계로 공적인 관계를 무시한 채 검사, 기자, 변호사를 ‘여자’, ‘몸’으로 대상화했다. 입 맞춰달라 하고, 블루스 추자고 하고, 신체를 어루만졌다. 하지만 비슷하게 소름 끼치는 일을 겪은 피해자들은 혼자 끌탕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알려진 사건은 빙산의 일각인 셈이다. 그나마 대등한 관계라는 사람들에게 하는 행동이 이럴진대, 일반 국민한테는 오죽할까. 잊을 만하면 터지는 검사 성추문 사건뿐만 아니라, 여성단체들이 해마다 선정하는 ‘여성인권 걸림돌’에도 검사들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을 연애로 둔갑시키거나 피해자를 ‘꽃뱀’ 취급하고, 고소인의 개인정보를 재판정에서 공개하는 등 비슷한 문제가 개선 없이 반복된다. 내부에 성희롱 예방지침도 있고, 교육도 하지만 학습 효과가 없다. 이런 가운데 터져나온 이번 성추행 사건을 보면, 검찰이 각종 성폭력 사건을 공평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2012년 3월 회식 자리에서 여기자 등에게 부적절한 언행을 한 검사는 정직 3개월 처분에 사표까지 냈다. 황 장관은 “사건마다 정도나 양질이 다르다”고 하지만, 검사들 내부에서조차 “징계를 받지 않을 정도인 부적절한 신체 접촉과 강제추행에 해당하는 부적절한 신체 접촉의 경계가 무엇인지” 묻는 일갈이 터져나온다.
 
정답은 황 장관이 말한 “우리”의 경계에 있을지도 모른다. 권력자가 친밀한 관계로서 “우리”를 강조하면, 나머지는 배제되고 만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사건을 수사한 검사들은 줄줄이 좌천됐지만, 사건 축소를 주장하고 ‘살아있는 권력’에 충성한 공안 검사는 성추행을 한 뒤에도 징계 없이 좋은 자리로 갔다. ‘국정원 댓글 직원’은 ‘여성 인권 침해’를 들먹이며 보호해준 반면, 댓글 수사 외압을 폭로한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은 승진에서 탈락시켰다.
정말 우려되는 건, 권력이 이런 식으로 “우리”한테 알아서 협조하라는 간접명령을 온 사회에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눈 밖에 나면 개인의 안온한 삶은 언제든 배척당하고 승인이 취소될 수 있다는 대사회적 경고, 아니 협박성 메시지다. 이쯤 되면 배제된 사람들이 모여 ‘감시 크라우드소싱’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지청장을 비롯한 문제적 인물들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정보를 한데 모으는 것이다. 배제의 범위는 갈수록 넓어질 것이고, ‘그들의 우리’가 아닌 사람들이 가진 눈과 귀와 입은 점점 더 많아질 테니까 자료가 부족할 걱정은 없겠다.

< 이유진 -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 >


“우리 힘모아 연방의원 한명 만듭시다!”
한인 유권자 1만명 거주 밀집도 최고 윌로데일 절호기회

필자 스스로도 늘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오늘 감히 펜을 들어 동포들을 향해 이 글을 쓴다. 너무도 답답한 마음에 동참을 권유하고, 아니 호소하고 싶어서다.
근래 우리가 사는 토론토에서 연방하원의원에 도전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는 조성용(Sunny Cho)씨를 모르는 한인은 짐작하건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실제적, 실질적 도움은 너무나도 미미한 상황이다. 조씨가 문자 그대로 ‘단기필마’로 땀을 쏟으며 애태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동포의 한 명으로서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조씨는 차기 연방총선에 토론토 윌로데일 선거구의 자유당 후보로 나서기 위해 3천 명을 목표로 후원회원(당원)을 모집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전국에서 한인의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는 노스욕 지역임에도 동포를 자유당 후보, 더 나아가 한인사회의 숙원이라 할 연방하원의원으로 만드는 대업에 동참하는 사람이, 좀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나 ‘가뭄에 콩 나듯’ 너무나도 저조한 실정이다.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한인 국회의원을 내 손으로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주변에서 열심히 돕고 있는 이들까지도 맥이 풀리는 노릇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땅의 한인이민사는 어언 반세기를 넘어섰다. 하지만 아직도 중앙 정치무대에서 우리를 대표해 우리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줄 ‘선출직 의원’ 한 명 배출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아쉽고도 부끄러운 일이다. 
법조계나 의료계 등 다른 전문분야에서 수많은 한인들이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동포인구가 20만을 내다볼 정도라면 당연히 한인 몫의 연방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한인사회의 위상도 올라가고, 우리의 목소리도 제대로 낼 수 있음은 불문가지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인사회 스스로 정치인을 키우기 위해 힘을 모아야만 한다. 이는 바야흐로 어엿한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모국의 ‘국격’에도 어울리는 일일 것이다.
조씨가 자유당 후보공천을 노리는 윌로데일은 한인 유권자가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산술적으로는 3천 명의 후원자를 확보하는 것은 충분히 달성 가능한 목표다. 3천 명의 당원만 확보하면 자유당 후보가 되는 것은 물론, 국회 진출 역시 ‘따 놓은 당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 지역은 오래 전부터 자유당의 대표적 텃밭 중 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조씨에 대해 개인적 호오(好惡)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조씨만큼 주류정계 진출을 위해 탄탄한 발판을 마련해 놓은 인물도 드문 것이 한인사회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우선 힘을 모아 돕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일단 선량으로 만들어 놓고 한인사회를 위해 일하도록 ‘부려먹으면’ 될 일이다. 평가할 기회는 그 다음에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특히 후보경선에서 투표권이 주어지는 윌로데일 거주 동포들(영주권자나 유학생도 가능)이나 지역업주들은 한인 국회의원을 만들 수 있는 열쇠를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다. 여러모로 생활에 바쁘시더라도 우리 후손과 한인사회에 희망을 안겨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꼭 살려보시길 간곡히 당부드린다. 캐나다 한인이민사에 내 손으로 큰 획을 긋는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소중한 권리를 행사해주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많은 종교단체 및 봉사단체들의 참여도 절실하다. 따져보면 우리의 삶이란 현실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일부 교회들의 경우 조씨 캠프의 도움 요청에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며 등을 돌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그분들께 예수님은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음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다.
거듭 강조하지만 조씨의 도전은 어쩌면 당분간 한인사회에 다시 오기 힘든 천재일우의 기회일 수도 있다. 각계각층의 동포와 지도자들이 힘을 모으고 머리를 맞대 우리 힘으로 ‘연방정치인’ 한번 만들어보자고 진심으로 호소한다. 

< 송완일 - 토론토 한인합창단 이사장 >




“동포사회와 민족 대변할 정치인 필요”
중국·일본계에 부탁하나? 조성용 씨로 50년 숙원 풀자

6 년 전 한인 동포 사회를 대표하여 중국, 필리핀 커뮤니티와 함께 일본의 위안부 강제 동원과 관련,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보상에 대해 캐나다 정부가 나서 줄 것을 요구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연대의 목표는 캐나다 연방의회에서 캐나다 정부가 일본 정부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동의안을 상정, 통과 시키는 것이었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캐나다 정부가 70 여 년 전 주로 한국에서 일어났던 과거사 때문에 일본 정부의 심기를 자극하는 일에 가담해 불편한 관계 속에 들어 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캐나다 연방의원들이 2 차 세계 대전 당시 아시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에서의 나치 만행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는데,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만행에 대해서는 정말 너무나 무지한 상태였다.
 
그나마 감사했던 것은 그 당시 NDP 당수로 있었던 고 Jack Layton 의 아내인 중국계 Olivia Chow 가 연방의원으로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다른 어떤 연방의원들 보다 위안부 사건에 대해 자기의 문제처럼 느끼며 도와 주었고, Olivia 를 통해 소개 받게 된 Jason Kenny 장관이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 줘 결국 동의안을 통과 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일을 맡아하면서 발견했던 것 중에 하나가 캐나다 연방 의원들이 아시아에 대해 중요한 결정을 아주 많이 하면서도 아시아 전반에 대해 상상 외로 무지하다는 것이었고, 뼈져리게 느꼈던 것 중에 하나는 한인으로써 연방 의회에서 우리 동포 사회와 민족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의원의 필요성이었다.
 
캐나다 연방 정부와 의회는 국가의 헌법을 심의 결정하는 일 외에 이민, 세법, 외교, 무역통상, 복합 문화 등 우리 동포 사회와 민족에게 직결되는 결정을 수없이 많이 하는 곳이다. 이런 중차대한 곳에 우리 동포와 민족을 올바로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큰 손실이다. 소기업 중심의 동포 사회가 매년 민감하게 느끼는 세법도 그렇고, 지금 진행되고 있는 캐나다와 한국의 FTA 협상, 그리고 독도 문제, 동해 표기 문제를 비롯하여 북한 문제, 한반도 평화 통일 문제 등에 대해 누가 한인 동포사회를 캐나다 정부에 대변하겠는가? 중국계 의원이나 일본계 의원이 하겠는가 아니면 영국계 의원에게 부탁하겠는가?
연방 의원 진출은 정말 힘겨운 싸움이라 섣불리 나설 수 없는 것인데, 조성용씨가 나서게 되어 참 감사하다.

오늘 방송을 들으니 다음 선거에서 자유당의 후보Justin Trudeau가 현 Harper 수상보다 더 당선될 가능성이 높게 나온단다. 자유당이 지난 선거 때 보다 더 많은 의원을 배출할 전망이 높은 다음번 선거에 꼭 조성용씨가 자유당 공천을 얻어 지역구에 출마했으면 좋겠다. 공천을 위해 North York 에 사는 한인 동포들이 적극 나서 줘, 캐나다 이민 50 년의 숙원을 꼭 풀 수 있기를 소망한다.

< 한석현 - 본 한인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14년 후에

● 칼럼 2014. 1. 30. 16:46 Posted by SisaHan
마쉬멜로 실험이란 것이 있다. 마쉬멜로는 서양 아이들이 캠핑을 가서 모닥불에 구워 먹기를 좋아하는 것인데 스탠포드 대학의 월터 미셀이란 학자가 마쉬멜로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지금 먹어도 좋으나 15분만 참으면 하나를 더 줄게.”하고 실험을 했다. 15년이 지난 뒤 그 아이들을 조사한 결과 15분이 흐른 뒤 마쉬멜로를 하나 더 얻은 아이들의 성적이 800점 만점에 평균 125점 이상 더 높았다는 것이다.
2014년을 맞이하면서 나는 공교롭게도 14년이란 숫자가 마음에 들었다. 몇 년 전부터 수요일 저녁에 고린도 후서를 강해하고 있었는데 마침 12장으로 들어가는 날이 바로 14년도에 처음 맞는 수요일이었다. 그런데 이 12장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셋째 하늘(3 층천)에 다녀온 놀라운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는 그 놀라운 체험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내용을 말하지 않았고 그 체험도 14년이 지난 뒤 밝히고 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이 체험을 말할 때는 이유가 있었다.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 같은 교회들이 그가 예수님에게서 직접 불림을 받지 않았다며 사도임을 거부할 때 자신 역시 다메섹 도상에서 불림을 받은 자이고 자신 역시 다른 사도와 비교할 때 결코 모자람이 없는 자라고 당당하게 말했으니 곧 그가 당한 고난과 자신에게 주신 영적 체험이 남달랐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두 가지 면에서 신중했다. 첫째는 자신이 가 본 천국에 대해 결코 그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여러 편지를 쓰면서 성도들의 신앙적인 지도를 하는 입장에서 그 내용이 필요했다면 능히 내가 본 천국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천국은 오직 우리의 소망으로 본향을 그리는 신앙의 길에 유익한 것이지 결코 염세 사상과 함께 천국만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됨을 보인다.
 
둘째 그는 자신이 본 천국에 대해 일절 언급을 않고 있다가 14년이 지난 뒤 입을 열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만일 그런 체험을 가졌다면 입이 간지럽고 자랑스러워서 몇 번이고 간증 집회도 가졌지 않았겠는가? 현대에도 그런 사람이 많으니 말이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불문에 붙이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혜는 함부로 이야기하고 떠벌리며 자신의 자랑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란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바울 사도의 그 신중한 자세를, 14년 뒤에 그 귀한 체험을 나타냈음을 생각하려고 한다. 그가 14년이 지난 뒤 밝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바울 자신에 대한 위로로 주심을 말하여 성도들에게 고난 뒤에 나타나는 위로와 영광을 말하고자 함이나 그런 언급마저도 부득이하여 할 수밖에 없음을 소개할 뿐이지 결코 자랑이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귀한 간증 체험이지만 14년 뒤에 언급한 것을 보면서 우리 역시 신앙생활하는 동안 개인적인 좋은 체험이나 교회를 향한 훌륭한 봉사와 섬김, 대단한 수고나 헌신들이 있다 해도 지금 당장 자랑으로 말하지 말고 14년이 지난 뒤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설혹 14년 뒤에 말할 수 없어도 주님을 향한 그 섬김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또한 무슨 원망이나 불평을 늘어놓고 싶다 해도 14년쯤 기다리면 어떨까? 
당장에 터뜨리고 싶은 것이 있다 해도 마쉬멜로처럼 기다려 보자. 만사를 14년 뒤에 하면 얼마나 좋을까?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설이나 추석같은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어릴 때 추억이 아련하게 밀려오기 때문이다. 
설날이 다가오면 온 동네가 왠지 들뜨고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어른들이 읍내에 장을 보러 가 평소 구경하기 힘든 조기와 갈치같은 생선꾸러미를 하나 둘씩 싸들고 온다. 없는 살림에 양말과 신발, 옷가지 등 설빔도 장만해오면 아이들은 벌써 설맞이 세배준비로 설렌다. 동네 이장 집 앞에는 틈실한 돼지 두 마리가 네 다리를 묶인 채 ‘종말’을 예감한 듯 꿀~꿀~ 신음을 내며 나뒹굴고 있다. 마침내 건장한 일꾼들 몇이 돼지를 붙잡고 예리하게 숫돌에 간 칼로 목에 구멍을 내면 그야말로 멱따는 소리와 함께 꽐꽐 쏟아지는 선지를 벌꺽벌꺽 들이마시는 징그러운 광경…. 어른들 다리사이로 얼굴을 들이밀고 흥미 최고조로 쳐다보던 아이들은 그만 놀란 토끼눈이 되고 만다.
 
뭉턱뭉턱 인심좋게 잘라 낸 돼지고기는 집집마다 나뉘어 설날 아침 든든하게 밥상을 장식한다. 왁자지껄 이웃 아낙들이 함께 모여 지지고 볶고 메친, 전이며 한과와 떡이 집집마다 그득하니 일년 중 제일 먹거리가 풍성해질 때다. 때때옷 색동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차려입은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이집 저집 어르신들에게 훈계와 함께 받은 세배 돈을 꼬낏꼬깃 호주머니에 모아 넣고는 “내가 더 많다“ ”아니야 내가 더~” 서로 질세라 자랑하며 기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농악단의 꽹과리 소리와 제기차기 널뛰기로 소란스런 동네 앞마당, 골목을 떠도는 구수한 음식 냄새, 웃음과 정이 오가는 사람 냄새…, 하루 해가 어떻게 지는지 몰랐던 우리네 시골의 설날-. 
구정에 즈음해 오랜만에 고국의 연로하신 어머니를 잠시 찾아 뵈려니, 그 옛날 설맞이 세시풍속이 눈물겹도록 그리워진다.
 
세상이 너무 세련됐고 모든 게 기계화, 디지털화한 지금도 그렇게 시골스러우면서 인정 넘치고 푸짐한 고향 설날의 풍정을 찾아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깊은 산골마을에도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버려 그 토속적인 설 풍속은 찾기 힘들지 않을까. 아마 부모찾아 설 쇠러 오는 자식들을 손꼽아 기다리는 촌로들의 체념과 한적함이 두드러지지 않은지, 불효의 큰 죄책감 속에 얼추 짐작해 볼 뿐이다. 
우리 전통 세시풍속에는 공동체의 유대와 인정이 넘쳐났다. 온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명절을 즐기며 화합을 다지고 서로 북돋우며 내일을 위한 힘을 결집하기도 했다. 상부상조(相扶相助)의 미풍양속이란 거기서 연유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명절은 온통 교통체증으로 도로에 정력을 쏟고, 부모와 고향을 찾아 용돈드리고 폼내고 가면 그만 인 세상이 됐다는 한탄도 들린다. 그러니 시골민속에서 보고 익히는 정감과 상생부조(相生扶助)의 전통과 미덕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세상이 갈수록 갈라지고 삭막해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민사회에서 전통명절은 더욱 멀어져간다. 양로원과 일부 교회에서 어른들에게 세배하고 선물드리는 정도로, 또 향우회원들이 한데 모여 저녁 한끼 먹고 즐기는 것으로 설의 명맥이 유지되는 듯 싶다. 
8년 전인 2006년 1월5일에 나온 시사 한겨레 창간호 1면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한 가족의 다복한 모습이 독자들의 눈길을 모았다. 지난 2008년 작고한 토론토의 고 이천욱 옹 집안 식구들이 새해를 맞아 3대가 오붓하게 한자리에 어울린 아름답고 정겨운 사진이었다. 이들 가족은 새해 첫날 아침 세 자녀의 손자들까지 온 식구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 세배를 드리고 훈훈한 가족애를 나눴다. 할아버지가 세 아들과 손자들에게 한 해를 꿋꿋하게 살아가라는 덕담을 건네자 자녀들은 내외의 건강 장수를 기원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안겨 재롱을 부리고, 식구들은 며느리들이 장만한 음식과 함께 이야기 꽃을 피우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듯 했다. 신년 설이긴 했지만, 이민의 삶에서 흔치않은 우리 전통 세시(歲時)의 설을 쇠는(過歲)모습이어서 좋았던 기억이 새롭다.
 
한인 경제마저 침체 일로여서 자꾸만 위축되어 가는 동포사회와 가정마다에, 우리 고유의 방식과 풍습을 재현하고 구수한 인정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모으는 설맞이·추석맞이 행사가 되살아나면 얼마나 좋을까. 디아스포라의 삶이기에 더더욱 집집마다, 또 우리 한인 커뮤니티에서 온가족이 모여 사랑을 나누고 함께 어울려 서로서로 용기를 북돋우는, 그렇게 피부에 와닿는 넉넉한 화합의 민족 전통으로 말이다.
 
< 김종천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