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와 함께 외길‥ 시사 한겨레 창간 8주년에 드리는 인사말씀

세상을 분별하는 양심적인 신문의 길 되새김
상생과 포용으로 소통과 회복의 만개를 기원

우리 역사에는 ‘지부상소’(持斧上疏)라는 방식으로 직언한 사례들이 많습니다. 좀 섬뜩한 얘기지만, 도끼를 들고 왕 앞에 나아가 “내 말을 듣지 않으려거든 목을 치라”며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했던 충신들의 일화입니다. 
조선 선조 때 의병장 조헌은 광화문 앞에 나가 도끼상소를 올려 왜적의 침탈을 경고했고, 면암 최익현은 일제가 병자수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궁 앞에서 도끼를 품고 여러 날을 꿇어앉아 격하게 부당함을 지적한 근세사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삭막한 광야에서 외친 선지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대가 험하고 사악할 때 바른 소리로 깨우치는 10여명 선지자들의 생생한 기록입니다. 그들은 외롭게 때론 돌팔매를 맞으며 뭇사람들의 질시 속에서도 하나님이 계시하신 정의와 진리를 외칩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정의를 저버리고 불의의 사회로 돌아섰음을 꾸짖었고, 나단은 다윗의 악행과 불륜을 질타합니다. 엘리야는 여호람 왕의 범죄와 타락의 정죄를 예고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식민치하 소외되고 박해받는 빈자와 약자 편에서 사랑과 진리를 전하고 실천했습니다.
 
암울한 시대일수록 달콤한 궤변은 환영받지만 바른 외침은 배척당하고 박해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나서 정의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흑암의 징조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곧 어둠의 질곡을 헤매며 후회하게 됩니다. 비록 외롭고 질시당하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바른 외침으로 세상의 불의를 경고하며 사람들에게 옮고 그름의 분별력을 전하고 깨우치는 용감한 전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네 주변에서 늘 들어온 친숙한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해 어느 순간부터 이 말은 의미심장한 ‘불온단어’ 쯤으로 받아들여 집니다. “당신은 안녕한가”하는 비유적 물음을 던지는 글을 붙이지 못하게 지침을 내리고, 교장이 학생을 고발한 해프닝이 그걸 말해 줍니다.
한 대학생이 학교 게시판에 써 붙인 대자보가 발단이었습니다. 답답한 시대적 상황에 고민하던 그 학생은 전혀 ‘안녕치 못함’ 을 탄식하며 ‘안녕치 못한데도 안녕한 것처럼’ 사는 사람들의 무감각을 일깨웠습니다. 그간 꾹꾹 삭여 온 사람들, 불현듯 안녕치 못함을 자각한 이들의 공감과 동조가 열풍으로 번져, ‘안녕들 하십니까’ 는 이 시대를 관통하는 열쇠말로, 나아가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은유적 질타로 자리매김 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아무 문제없이 편히 살고 있는데 안녕치 못하다니 무슨 허언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인사말이 ‘불온언사’ 취급을 받기에 이른 사회, 아무래도 정상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안녕하냐는 인사조차 눈치를 봐야하고, 그런 인사말을 사시적으로 보는 현실, 특히 대자보라는 비정상적 출구를 통해 외쳐야만 하는 언로(言路)의 폐쇄성이야말로 비정상을 잘 설명해 줍니다. 
실제로 비정상의 현상과 여파는 우리 주변에도 흔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무조건 편가르기를 하고 자신과 다른 견해는 듣지도 않을 뿐더러, 적으로 몰아 부칩니다. 다양한 시각과 균형감각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원인이 여럿이겠으나, 어쩌면 갈등과 분열을 통해 득을 보려는 세력의 간계에 다중이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이성적 판단을 무디게 하고 감정을 부채질하는 집단 최면에 빠진 감이 들 정도입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헛갈림 속에, 정직을 외치며 불의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지탄 속에 묻혀버리는 일이 일상화 되어 갑니다.
 
‘무조건적 감정반응’은 고등동물답지 못한 양태입니다. 인간은 ‘이성적 사유력’을 지닌 지적·영적인 존재입니다. 교육을 통해 배운 도덕과 윤리, 법과 상식과 질서, 그리고 민주적 소양과 이성적 판단, 거기에 더해 양심의 거울에 비춰본다면, 적어도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그리고 합리와 불합리, 나아가 정상과 비정상을 분별하기란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이 율곡은 일찍이 “언로의 열리고 막힘에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다.(言路開塞興亡所係)” 고 가르치며 폭넓은 공론형성을 강조했습니다. 꽉 막힌 언로가 난세를 부추기고, 본령을 잊은 채 비정상에 영합하며 ‘안락의 최면’만을 거는 편향 언론이 설칠 때 세상이 병들고 사람들이 부정해짐을 진작부터 설파한 것입니다.
불의의 때에 핍박 가운데서도 선각자들이 정의를 깨우쳤고, 고난에 담금질 된 의인들이 축복의 통로가 되었듯이, 암울한 시대에는 ‘살아있는 영혼으로’ 세상을 깨우고 밝힐 빛과 소금같은 언론의 존재가 소중하다고 믿습니다.
 
창간 8주년을 맞아 시사 한겨레는 그런 보편적인 분별의 지혜를 구하면서 옳고 바르고 양심적인 신문의 길을 거듭 되새깁니다. 연륜 8년은 아직 미숙하지만 가슴으로, 두 팔로 감싸주시는 든든한 독자분들과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며, 의로움을 바라보고 묵묵히 동행하기를 소망합니다. 어둠에 빛나는 작은 반딧불 처럼, 아니 험한 세상에 울리는 소박한 사랑의 메아리 처럼, 정직하고 따스한 희망의 전령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비정상인 것들이 모두 정상화 되기를 기원합니다. 광야의 외침이나 대자보가 아닌, 다양한 언로의 활성화를 바랍니다. 미움과 적대를 버리고 상생과 포용으로 소통과 회복이 만개하기를 ‘지부상소’의 심정으로 소원합니다. 우리 한인동포들 모두가 안녕한 가운데 번영과 축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김종천 - 발행인 겸 편집인 >


[칼럼] 우리 안의 야스쿠니

● 칼럼 2014. 1. 13. 19:50 Posted by SisaHan
지난달 26일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겨냥해 세계 각국의 비판이 줄을 이었다. 그 대부분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신사에 총리가 참배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미국 국무부는 그런 관점에서 “실망했다”는 성명을 내놨고, 한국 국회도 지난달 30일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명백히 위협이 되는 행위”라는 결의안을 내놨다. 
‘신사 참배는 동북아 안정에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바보 같은 짓이다.’ 아마도 이런 실리적인 견해가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바라보는 평균적인 시선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신사에서 A급 전범이 분사되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특별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은 이방인들에겐 야스쿠니는 어찌되든 상관없는 문제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우리가 야스쿠니 문제를 인류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자인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는 2005년 펴낸 <야스쿠니 문제>라는 책에서 신사의 본질을 ‘감정의 연금술’이라는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아들이 전쟁에 나가 숨지게 되면 어머니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일왕을 통해 야스쿠니에서 아들이 일본을 지킨 ‘군신’으로 모셔지는 순간,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치환되고, 그래서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은 이제는 손자까지도 내놓아야 하는 성스러운 의무로 뒤바뀐다. 그렇게 국민들이 다음 희생과 전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평화는 멀어진다. 이것이 전쟁 시기 야스쿠니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이다.
야스쿠니신사와 나란히 붙은 역사관인 ‘유슈칸’을 방문해 보면, 신사의 이런 기능이 전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엔 지난 전쟁은 침략이 아닌 ‘자위전쟁’이었을 뿐이고 A급 전범들도 범죄자가 아닌 국난이 닥쳤을 때 자신을 희생한 ‘쇼와 순난자’라는 사실을 강변하는 전시물들로 가득하다. 신사 한구석에는 도쿄 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들에게 무죄 의견을 냈던 인도인 라다비노드 팔 판사의 기념비도 찾을 수 있다.
 
지난 전쟁은 어쩔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박물관에 실물 모형으로 전시돼 있는 제로센과 가이텐(인간어뢰)을 타고 자살공격에 뛰어든 선배들처럼 우리들도 그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게 신사의 가르침이다.
가미카제를 칭송하는 과격한 문구들을 보면 ‘우리가 잊지 않을 테니, 너희는 용감하게 나가서 죽으라’고 누군가 등 뒤에서 떠미는 듯한 느낌마저 난다.
그곳엔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자국민 310만명을 숨지게 하고, 이웃 나라들한텐 그보다 더 큰 고통을 안긴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런 무감각과 파렴치함은 사실 인류사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 때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끝내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필요한 전쟁이었다고 강변하는 미국인들의 마음에 어느새 야스쿠니는 똬리 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야스쿠니 문제란 좀처럼 과거를 극복하지 못하는 일본인의 문제임과 동시에 인류가 다 함께 손잡고 고민해야 할 양심과 정의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이기도 하다. 우리가 베트남을 부인하고, 용산을 잊고, 한국전쟁 시기 이뤄진 양민학살을 정당화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거대한 아베 신조가 되는 것이다.
< 길윤형 - 한겨레신문 도쿄특파원 >


[사설] 한국인의 건강한 역사의식

● 칼럼 2014. 1. 13. 19:49 Posted by SisaHan
친일•독재를 미화한 교학사 역사 교과서의 채택률이 사실상 0%를 기록한 것은 우리 국민의 건강한 역사의식을 잘 보여준다. 애초 전국 고교의 1% 미만인 10여곳이 이 교과서를 선택했으나 학생·학부모·동문 등의 거센 비판을 받아 대부분 다른 교과서로 바꾸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교과서 사태를 주도한 정부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 문제가 불거진 배경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 그는 6일 새해 기자회견에서 기존 교과서의 대표적인 이념편향 사례로 ‘일부 교과서에서 불법 방북을 처벌한 것을 탄압이라고 한 것’을 꼽았다. 하지만 지금의 어느 교과서에도 이런 내용이 없다. 청와대 쪽은 이전의 한 교과서에 비슷한 기술이 있었다고 변명하지만 무책임한 태도다. 박 대통령의 발언은 ‘역사전쟁’의 불씨를 댕긴 지난해 6월 발언과 같은 맥락에 있다. 그는 당시 ‘고교생 응답자의 69%가 6.25를 북침이라고 응답한 충격적인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며 교육현장의 역사왜곡을 질타했으나 정치적 목적으로 사실을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응답자들이 북침이란 말을 북한의 침략이란 뜻으로 오해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6월 발언 이후 국사편찬위원회가 교학사 교과서를 검정에서 통과시키고 교육부가 이 교과서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역사전쟁이 본격화했다. 교육부는 심각한 사관의 문제뿐만 아니라 도저히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오류가 드러난 이 교과서를 살리려고 온갖 편법을 동원했다. 그 중심에는 서남수 장관이 있다. 그가 이 교과서의 문제점을 몰랐다면 그 자체가 큰 문제이고, 알면서도 청와대 등의 눈치를 보느라 지금까지 왔다면 교육부 수장으로서 자격이 없다.
대통령이 부적절한 사례까지 들며 기존 역사교육을 비난하는 데는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부각시키려는 등의 이유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자와 소수 기득권층의 입맛에 따라 역사 기술이 좌우돼서는 안 된다. 박 대통령은 ‘역사는 민족의 혼’이라고 했지만, 교학사 교과서 채택률 0%에서 보듯이 국민이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더 잘 알고 있다.


‘민영화’ 때문에 연말에 철도노조가 파업을 하더니, 연초에는 의약계가 들썩이고 있다. 의사들은 이미 집단휴진 투쟁을 예고했고, 약사들은 5일 “대재벌 살리려고 동네약국 다 죽인다”며 ‘영리법인약국 저지’를 결의했다. 민주노총 보건의료노동조합도 6일부터 100만명 서명운동을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박근혜 정부가 지난해 12월13일 발표한 투자활성화대책 때문이다. 이 정책의 핵심은 단연 의료법인의 영리자회사 허용이다. 자회사는 투자와 배당이 가능한 주식회사로, 거의 모든 의료 관련 사업에서 돈을 벌 수 있다. 정부는 자회사가 돈을 벌어 경영난에 시달리는 병원의 숨통을 틔워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그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자회사의 수익은 다름 아닌 병원 환자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자회사가 병원에 건물을 임대해서 수익을 남기려면 병원은 그 임대료를 벌기 위해 의료비를 높여야 한다. 또 자회사가 의료기기와 의료용품, 의약품 등을 빌려주거나 공급하는 사업에서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는 병원이 그만큼 환자들한테서 의료기기와 의료용품 사용료를 더 받아야만 한다. 의료비가 오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의료비 상승만이 아니라 부적절한 강매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자회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헬스클럽, 온천장, 바이오산업은 물론 건강식품, 화장품 사업까지 포함돼 있다.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해 필요하다며 이런 물품이나 시설을 권유할 경우 약자인 환자들은 거절하기 쉽지 않다. 병원이 환자를 치료하는 공익적 비영리기관에서 돈 버는 게 주목적인 ‘의료종합상사’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투자활성화대책은 이밖에도 병원 인수합병을 허용하고 있다. 대기업의 막강한 자본력으로 동네병원은 다 죽고 체인형 영리병원이 들어설 가능성이 크다. 약국의 영리법인 허용은 약제비 인상을 초래할 것이다.
 
더욱이 정부는 의료제도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는 제도인데도 법 개정 없이 시행령과 시행규칙만 바꿔 추진할 생각이라고 한다. 국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며 최소한의 법적 절차도 무시하는 행위다.
철도나 의료는 국민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누려야 할 공공서비스다. 이런 분야까지 대기업이 돈벌이를 할 수 있도록 던져주는 것은 국가로서의 기능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철도노조가 파업을 철회했다고 정부 정책이 국민들로부터 승인받았다고 판단하면 오해다. 하물며 우쭐한 기분으로 의료분야까지 강공책을 밀고 나간다면 국민적 저항이 철도 때와는 또 다를 것이다. 정부는 의료영리화 정책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