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당신들의 문학은 안녕한가요?

● 칼럼 2013. 12. 24. 19:33 Posted by SisaHan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이 ‘박정희의 유신’과 ‘87년 6월 항쟁’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원로작가 이제하의 소설 연재를 거부했다고 한다. 지난 9월에는 현직 대통령의 해묵은 수필을 들먹이며 몽테뉴와 베이컨 운운하는 황당한 아첨을 해 문학인들의 공분(公憤)을 사더니, 급기야 문학에서 ‘정치’를 추방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계기로 중견작가 정찬이 정치적인 색채가 드러난다는 이유로 장편소설 게재를 거부당했고, 원로소설가 서정인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언급했다는 이유로 연재를 중단당했다는 소식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평생을 문학에 바쳐온 중견·원로 작가들이 황당한 이유와 부당한 권력 앞에서 수모를 당하며 감내해야 했을 절망감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에 앞서 분노가 치민다. 그동안 힘없는 젊은 작가들에게는 또 얼마나 많은 횡포를 부렸을까.
 
소설가 정찬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양숙진 주간은 “<현대문학>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잡지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가시화된 작품을 다루지 않았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가당착적인 논리일 뿐이다. 현직 대통령의 수필을 꺼내들고 소위 ‘박비어천가’를 부르는 것은 ‘순수’이고, 과거의 독재정권을 비판하거나 그것과 맞서 싸운 역사적 과정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모두 ‘정치’라는 것일까? 더구나 이제하의 소설에서 ‘유신’은 단순한 배경일 뿐이라고 하지 않는가? 서정인이 현실참여적인 작가로 분류되는가? 왜 한국의 ‘순수문학’은 항상 문학이 어떠한 정치적 경향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권력의 이데올로그를 자처하는 것일까? 이러한 ‘순수’가 시국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을 쓰지 못하게 한 일제 총독부의 ‘검열’이나 ‘창작지침’과 무엇이 다른가? 
문학의 ‘순수’는 문학이 이데올로기의 전달 수단이나 현실 정치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문학이 정치와 현실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문학의 순수는 ‘정치’가 아니라 ‘권력’과의 거리두기에서만 가능하다.
게재 거부의 이유를 묻는 이제하의 질문에 대한 편집장의 답변도 문제다. 사측에서 미래지향적인 소설, 밝고 명랑한 소설을 원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현대문학>이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
 
잠시 관심을 갖고 주변을 돌아보라. 그러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온통 죽음과 고통만이 난무하는 시대, <현대문학>은 문학의 보편성이 이런 현실에서 눈을 돌림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어두운 시대를 가릴 화려한 포장지일 뿐이다. 
어둠의 시대에 밝고 명랑한 작품을 원한다는 것, 그것은 일제 말 총독부가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던 ‘명랑성’만큼이나 폭력적이다. 어두운 시대에는 어두운 문학이, 죽음의 시대에는 죽음의 문학이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이 어둠과 죽음을 외면할 때, 문학은 지배논리를 강화하는 고급한 상품이 된다.
<현대문학>이 이제하·정찬·서정인의 소설에 ‘정치’라는 딱지를 붙여 게재를 거부하고 연재를 중단시킨 것은 단순한 편집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문학인들에게 자유 없는 문학과 영혼 없는 글쓰기를 요구한 권력의 작가 길들이기였다. 
<현대문학>은 문학인들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 곧 작가들의 문학적 자존심과 문학의 존엄을 짓밟았다.
 
써야 할 것과 쓰면 안 되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편집’이 아니라 ‘권력’이다. 또한 정치권력에 대한 아부는 설령 그것이 문학적으로 잘 포장되었다 할지라도 문학이 아니다. 
이제 이 부당한 권력에 대해 작가들이 응답할 차례이다. 문학인들에게 감히 묻는다. 당신들의 문학은 안녕하신가요?
< 고봉준 문학평론가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1500자 칼럼] 늑대가 되자

● 칼럼 2013. 12. 16. 18:03 Posted by SisaHan
There was an unmistakable note of sorrow in it now. It was no longer the loud, defiant howl, but a long, plaintive wail; “Blanca! Blanca!” he seemed to call.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의 위풍당당하던 포효가 아닌 길고 애절한 그 목소리는, “블랑카! 블랑카!” 하며 울부짖는 거 같았다.)

며칠 전에 다시 읽은 ‘커럼포의 늑대 왕, 로보’ (Lobo, The King of Currumpaw, Ernest Thompson Seton)의 문장 일부다. 사랑하는 아내 블랑카를 찾아 울부짖는 로보의 슬픈 하울링(howling)은, 언제나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쨌거나 이 야성미 넘치는 동물에 반해서 좋아하는 동물? 하면 늑대요, 꿩 대신 닭 식으로 한때는 진돗개를 여섯 마리나 기른 적이 있었다. 회색 늑대가 사는 겨울 숲에 대한 기대감이, 캐나다 이민에 대한 선택의 즐거움이 된 것은 당연지사였고. 

늑대인지 코요테인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언젠가 겨울 캠프에서 들어봤던 생생한 하울링은 참 가슴 설레는 울림이었다. 누가 저들을 숲 속의 악마라고 했나, 자연의 정령이지!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얼뜬 시심(詩心)의 과잉 노출이라고 흉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정색을 하며 몇 마디 더 늘어놓고 싶어지는 건, 이 세상은 늑대에 관해서는 온통 잘못된 편견으로 꽉 들어찬 거 같은 묘한 억울함이 있어서다. 

몇몇을 들어보자. ‘늑대 같은 남자 혹은 남자는 다 늑대’라는 표현은, 음흉하고 능글맞은 사기꾼이나 비열하고 난폭한 깡패로 늑대를 간주하는 암시가 엿보이지 않는가? ‘늑대와 7마리 새끼염소, The wolf and the seven little goats’라는 세계명작동화는 이제 동영상으로도 만들어져서,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에 늑대를 사정없이 흉악한 동물로 꼭 새겨주고 있다. 늑대에 대한 몰이해의 극치는 1926년경 미국에서 빚어진 늑대 퇴치 사업일 것이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숲을 만들자는 취지로 늑대를 보이는 족족 죽인 결과, 숲에는 엘크 같은 초식동물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닥치는 대로 풀과 어린나무들을 먹어 치웠다. 그 결과 큰 풀이 자라지 못하게 된 숲에는 작은 새들이 둥지를 틀 수 없게 되었고, 이어서 여러 동식물이 숲을 떠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이유는 포식자의 위치에 있던 늑대가 사라짐에 따라 숲의 생태계가 무너져 생긴 결과였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캐나다에서 공수해 온 늑대를 방사한 뒤 숲은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았다. 미국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에서 있었던 70년 만의 늑대 복원에 관한 일화다. 늑대야말로 평화로운 숲을 지켜주는 핵심종이다.

이런 늑대의 본성을 살펴보면 한결 경이로워진다. 부부가 평생을 함께하는 엄격한 일부일처제로, 1~2년 된 새끼와 일부 개체가 포함된 무리를 이루며 사는데, 무리 안에서 이뤄지는 질서와 생존방식은 이상적인 사회적 공리주의를 연상하게 한다. 가족 간의 정이 특별해서 아비 늑대의 아내와 자식 사랑은 눈물겨울 지경이다. 덫에 걸려 죽은 아내 블랑카를 찾기 위해 죽음도 개의치 않고 사냥꾼의 캠프 근처를 울부짖으며 헤집고 다니던 로보의 순애보처럼. 게다가 독립해 따로 살던 새끼들이 이따금 부모를 찾아오는 효심까지 보여준다니, 늑대의 매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러니 ‘늑대 같은 놈’이란 비난은 ‘참 멋지고 진실한 남자’라는 칭찬이 되는 셈이다.

모국의 대구동물원 늑대 우리에 이런 안내문이 붙어있다고 한다. ‘남자를 늑대 같다고 말하지 마라. 남자들이 늑대만큼 살아간다면 여자는 울 일이 없을 것이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국과 이곳 구분 없이 하루가 멀다고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유명 인사들의 숨겨진 여인, 약물 복용, 배임 횡령 등등 기사를 대하자니 절로 읊조려진다. 남자들이여, 우리 모두 늑대가 되자!

< 김준태 - 시인, ‘시.6.토론토’동인 / ‘시와 시론’으로 등단 >
펜클럽 회원,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이 속한 국민과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 마쳤다면 그는 평안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다. 나는 그런 노력을 했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영원히 잠잘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거인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5일 밤(현지시각) 지상에서의 의무를 다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그의 삶은 자신의 책 제목처럼 ‘투쟁은 나의 삶’이자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이었다. 젊은 시절 엘리트 코스를 밟던 그는 안정된 길 대신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에 뛰어든다. 이 나라에서 처음 흑인 법률사무소를 연 1952년에는 전국적인 불복종 저항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민권운동의 지도적 인물로 부상했다. 이후 지하 무장조직의 초대 책임자로 임명된 그는 64년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90년까지 무려 26년 동안 복역한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이 기간에 그는 자기정진을 통해 내적인 힘과 외적인 권위를 키워 민중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의 진가는 94년 흑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첫 선거에서 이겨 첫 흑인 대통령이 된 뒤에 나타난다. 그가 택한 길은 백인 사회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진실에 기초한 대화합이었다. 흑인에게 심한 탄압과 테러 등을 자행한 사람도 진실화해위원회(TRC)에 출두해 자신이 한 일을 솔직하게 밝히고 용서를 구하면 사면받을 수 있게 했다. 이 위원회에 출두한 사람이 수천명에 이른 것은 만델라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진실화해위 모델’은 부끄러운 과거사를 청산해야 하는 여러 나라에 좋은 본보기가 됐다. ‘화해의 정치’를 실천한 그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던 연임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만델라는 아프리카 지역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 큰 영감을 줬다. 그러나 그의 꿈이 남아공에서 아직 온전하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국민의 80%를 차지하는 흑인은 여전히 가난에 허덕이고 있어 흑백화합이 깨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8월에는 광산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 집회를 경찰이 강제 해산하면서 실탄을 발사해 34명이 숨지기도 했다. 법률·제도적인 차별 철폐를 넘어 사회·경제적인 평등을 이뤄내야 하는 과제가 시급한 상황이다.
만델라의 성취가 혼자만의 것은 아니지만 ‘정의는 반드시 이뤄진다’는 그의 뚜렷한 역사관과 ‘흑인과 백인이 평화적으로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믿음이 큰 구실을 한 것은 분명하다. 여러 요인으로 갈라진 지구촌에 그가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선거 불복’은 정치의 세계에서는 금기 언어다.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도전이요, 유권자에 대한 모독 행위로 간주된다.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문제를 여권이 ‘대선 불복’ 프레임으로 몰아가는 것이나, 민주당이 수시로 ‘대선 불복은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 장하나 의원이 제기한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 후 재선거’ 발언은 선거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져준다. 장 의원의 발언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를 두고는 여러 견해가 가능할 것이다. 종교인 등과 달리 현역 정치인으로서 발언에 좀더 신중을 기해야 옳다는 지적도 나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민주당의 공식 입장과 다른 발언으로 당을 궁지에 몰아넣고 여권에 역풍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 올바른 전략적 선택이었는지에 대한 의문 제기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장 의원이 지적한 대로 지난 대선이 국가기관이 총체적으로 개입한 부정선거였음을 부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선거가 명백한데도 그냥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신을 지키는 최선의 길인가. 게다가 관권 부정선거의 최대 수혜자는 국민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상태다. 장 의원은 이 대목에서 새누리당은 물론 민주당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물음표를 던진 것이다.
사실 제18대 대선과 관련해 맨 처음 ‘선거 불복’을 입 밖에 낸 사람은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다. 대선 당일인 지난해 12월19일 새누리당 선대위 공보단장이었던 그는 박근혜 후보가 질 것 같다는 관측이 나오자 기자회견을 자청해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명의의 불법 선거운동 문자가 전국적으로 뿌려지고 있다. 설령 문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당선무효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 선거 자체가 불법·부정선거여서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는 논리가 장 의원과 뭐가 다른가.
 
새누리당은 장 의원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한 양승조 민주당 최고위원에 대한 의원직 제명을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이다. 국회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소신에 따라 대통령한테 쓴소리 좀 했다고 ‘의원직 제명’ 칼을 빼어 든 것은 새누리당의 시대착오적 정신상태를 잘 보여준다. 새누리당은 그런 호들갑을 떨기에 앞서 지난 대선이 공정한 선거였는지부터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선거과정에 흠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 흠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 설명해야 한다. 특히 이정현 홍보수석은 장 의원의 발언에 비분강개하기에 앞서 자신의 ‘대선 불복’ 발언부터 해명하는 것이 순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