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현수 대 빅토르 안

● 칼럼 2014. 2. 24. 13:53 Posted by SisaHan
러시아 소치에서 열리고 있는 겨울올림픽에서 안현수 선수가 빅토르 안이라는 이름으로 쇼트트랙 남자 1500m 동메달을 획득한 데 이어 쇼트트랙 10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개인으로서도 대단한 성취이지만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 기쁜 소식이다. 안 선수가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고 러시아로 귀화하게 된 직접적 이유가 빙상연맹의 고질적 문제로 올림픽 출전이 막혔기 때문이었다고 하니 무척 아쉬운 일이다.
안현수 선수가 빅토르 안이라는 러시아 국적 선수로 러시아의 메달 수를 하나 더 늘리는 것을 보면서, 국적을 바꾼 안 선수의 삶에는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 하는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을 해 보게 된다. 안현수 선수의 한국 국적은 그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는 순간 자동으로 소멸되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이제 그는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중간지대에 서 있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국적을 바꾸는 일이 간단치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안현수는 귀화의 조건으로 매우 좋은 대우를 보장받았고, 금메달을 딴 뒤 러시아의 국민적 환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귀화한 사람으로서 그가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문화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아 보인다. 안 선수가 동메달을 딴 뒤 기자회견에서 우리말로 질문에 답변을 하고 그의 여자친구가 통역을 했더니, 러시아 일각에서 귀화를 했으면서도 왜 러시아말을 쓰지 않느냐고 힐난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갈 안현수는 아마도 다문화인으로서 여러 문화 장벽을 맛보게 될 것이다.
며칠 전 하와이대에서 ‘한인 이민과 다문화’라는 주제로 국제 콘퍼런스가 열렸다. 그곳에는 함경도 출신 이민 5세인 중국 옌볜(연변) 학자, 카자흐스탄 한국계 4세 교수, 하와이의 한국계 이민 3세, 그리고 미국, 중국, 한국, 일본 등 각지의 이민과 관련한 학자와 전문가들이 모여 한국인이란 무엇인가를 논의했다. 보통 이민이라고 하면 이민 1세나 2세를 떠올리기 쉽지만, 세계의 한인 이민들 중에는 이민 3세, 4세, 5세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정체성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꽤 거리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1900년대 초반에 이주한 초기 이민의 후예는 한국과 단절된 상황에서 살아오면서 정체성에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콘퍼런스에 참여한 한 발표자는 논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밝힌다며, “만약 운동경기에서 한국팀과 미국팀이 맞붙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아마 미국 깃발을 들고 응원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다양한 층위의 한인 사회를 고려하면 그들에 대한 효율적 정책을 마련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외국인의 귀화나 다문화 환경에 큰 변화가 생기고 있다. 우리 국적법 제5조는 외국인이 대한민국 귀화 허가를 받으려면 “국어능력과 대한민국의 풍습에 대한 이해” 등 “국민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규정하여 매우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외국인 이주노동자, 다문화 가정 구성원, 또는 탈북 이주민 등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응도 여러 면에서 편견과 차별의 요소를 갖고 있다. 전통적인 우리 사회의 구성원과 다른 사람들을 널리 용인하고 그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잡고 살 수 있도록 좀 더 넉넉한 다문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빅토르 안이 러시아 사회에 동화되어 살아가게 될지, 어느 시점엔가 다시 한국인으로 돌아오게 될지, 아니면 러시아에 살지만 정신적으로는 한국인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빅토르 안의 이민자로서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무척 궁금하다.

< 백태웅 - 미국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 >


이집트 시나이반도에서 16일 저녁 일어난 버스 폭탄 테러로 한국인 3명과 이집트인 운전사 등이 숨지고 한국인 10여명이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희생자 가족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
민간인을 겨냥한 테러는 어떤 경우든 용납할 수 없다. 버스에 타고 있었던 충북 진천 중앙장로교회 신자 31명은 한국인 안내인 2명, 이집트인 안내인 1명과 함께 성지를 순례하던 순수한 관광객이었다. 이들이 테러의 대상이 돼야 할 까닭이 있을 리가 없다. 테러를 저질렀다고 주장한 과격 이슬람 단체는 최근 시나이반도에서 벌어진 여러 폭력사태의 배후로도 지목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어떤 변명을 하건 이번 테러는 반인륜적 범죄행위일 뿐이다.
 
이번 테러를 막지 못한 데는 이집트 당국의 책임도 적지 않아 보인다. 최근 들어 이집트에서는 정부군과 경찰, 기독교계 인사 등을 대상으로 한 이슬람 무장세력의 테러가 늘어나는 추세에 있었다. 게다가 테러가 발생한 곳은 이스라엘로 가기 위해 출국 수속을 하는 국경초소 부근이었다. 좀더 신경을 썼더라면 테러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다. 이집트 정부는 시나이반도에서 이번처럼 관광객을 상대로 한 테러는 2004~2006년 120명이 희생된 이후 처음이라는 점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집트 당국은 범인을 철저하게 추적해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
 
관광객들이 안전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7월 이슬람주의자인 무함마드 무르시 전 대통령이 군부에 의해 축출된 이후 시나이반도는 중동 내 이슬람성전(지하드) 세력의 새로운 근거지가 됐다. 이집트 당국도 이 지역의 상황이 ‘치안 불안정’에서 명백한 ‘무장 소요’로 바뀌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우리 정부도 2011년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 퇴진 이후 시나이반도를 2단계 ‘여행 자제’에서 3단계 ‘여행 제한’ 지역으로 상향 조정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을 면밀하게 고려해 일정을 짰다면 테러에 노출될 위험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테러는 지구촌의 평화와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이번 테러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대상이 관광객이었다는 점에서 분노는 더 크다.


이른바 ‘탈북 서울시공무원 간첩사건’ 항소심 공판 과정에서 검찰이 “중국 공문”이라며 낸 문서가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주재 중국 영사부는 이 사건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7부가 사실 확인을 요청한 데 대해 최근 회신서를 보내 “한국 검찰이 제출한 3건의 문서는 모두 위조된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엔 중국 길림성 화룡시 공안국 명의의 ‘출입경기록 조회 결과’와 삼합변방검사창(세관)의 ‘유우성씨 출입경기록 정황 설명서에 대한 회신’, 화룡시 공안국이 심양 주재 대한민국총영사관에 발송했다는 공문 등이 포함된다. 1심 때부터 구타와 강압 수사 논란이 제기되더니 급기야 공문서까지 조작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국정원은 여전히 “고등법원에 제출한 자료는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라며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에 대해 유감”이라고 적반하장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검찰 역시 위조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믿기 어렵다. 이 사건 경과를 보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증거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고 법에 따라 엄히 처벌해야 한다.
항소심의 쟁점은 화교 출신 탈북자 유우성씨가 어머니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2006년 5월23일부터 27일 사이 북한을 다녀온 뒤 다시 북한에 들어간 적이 있는지 여부였다. 5월27일 북에 다시 들어갔다가 북한 보위부에 포섭돼 간첩활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검찰은 2심에서 유씨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중국 세관이 발급했다는 ‘회신’을 법원에 제출했다. 이에 변호인 쪽이 반박자료를 내자 이번엔 화룡시 공안국이 한국영사관에 보냈다는 확인서를 추가로 냈다. 그러나 중국 영사부는 검찰이 낸 모든 증거자료가 위조된 것이라며 오히려 “공문 위조 범죄에 대해 조사를 진행할 것이니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다. 국가적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유씨 쪽은 지난해 초 국정원이 조사할 때 중국 영사부가 이번에 ‘진짜’라고 밝힌 출입국기록을 보여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항소심에서 ‘가짜’로 판명된 다른 출입국기록을 냈다면 최소한 국정원은 위조 사실을 알았다고 봐야 한다. 검찰 역시 항소심 법정에서, ‘진짜’ 출입국기록을 수사 단계에서부터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가 번복한 적이 있다는 걸 보면 항소심에 낸 것이 ‘가짜’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사기관이 증거까지 위조해가며 사건을 만들었다면 보통 심각한 범죄행위가 아니다.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조작 간첩 사건이 일어난다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고문 여부까지 포함해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한마당] 비정상의 반복은 안된다

● 칼럼 2014. 2. 24. 10:58 Posted by SisaHan
‘무죄’가 선고되자 법정에선 한숨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보였다. 정작 강기훈씨는 웃지도,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지난 23년간 그는 유서 대필로 동료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죄로 징역을 살았고, 누명 속에 어머니를 잃고, 건강을 잃었다. 남은 건 암으로 수척해진 쉰 살의 병든 몸이다. 재심 재판부는 1991년 당시의 증거를 믿을 수 없다고 이제야 밝혔지만, 검찰은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간 이웃 법정에선 1976년 ‘서울대 의대 간첩사건’의 9명에게 60대가 된 38년 만에 무죄가 선고됐다. 같은 날 부산에선 50대 중반이 된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모두 수사기관의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가 무죄 이유였지만, 부림사건의 담당 검사였던 이는 되레 “좌경화된 사법부”를 탓했다.
서른세 살의 유우성씨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으로 하마터면 그렇게 고통의 세월을 살 뻔했다. 그나마 1심에서 국가정보원의 수사 결과가 믿을 수 없는 증거로 판명돼 무죄를 받았다. 항소심에서 검찰은 중국 공문서들을 증거로 내놓아 반전을 시도했지만, 중국 정부는 이들 문서가 ‘위조’됐다고 밝혀왔다. 조작 사건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유씨 역시 훗날 눈물조차 마른 채 재심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이제 일은 커졌다. 문서 위조 경위를 수사하겠다는 중국과의 문제도 간단치 않거니와, 증거 조작을 의심받는 검찰과 국정원은 존립 기반이 흔들리게 됐다.
검찰은 “국정원이 준 문서”라고 변명했다. 몰랐다는 얘기다. 정말 몰랐을까. 부림사건의 한 피해자는, 검사들이 수사 현장에도 왔었다고 증언한다. 그는 “시멘트 바닥에 군복을 입은 아이들이 초췌한 몰골로 있는데, 그것을 보면 고문이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작 스물서너 살 안팎인 시국사건 대학생들의 겁먹은 얼굴과 불편한 몸에서 고문의 흔적을 눈치채지 못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1980년대 한 시국사건의 피해자는 “검사에게 멍든 자국을 보여주며 고문을 당했다고 호소했지만, 검사는 ‘증거가 되냐’며 무시했다”고 말했다. 몰랐던 게 아니라 못 본 척한 것이다.
따지자면 고문 수사나 서류 위조나 증거 조작이긴 마찬가지다. 공안 사건에선 대개 국정원과 검찰이 긴밀히 협의해 수사와 재판을 진행한다. 만약 검찰이 위조를 알면서도 ‘아귀 안 맞는 것 수정하는 일쯤이야…’라는 생각에, 혹은 그런 의심을 애써 밀쳐둔 채 증거로 냈다면 그 역시 명백한 범죄행위다. 2010년 일본 오사카에선 기소 내용에 맞춰 압수물의 날짜를 바꾼 검사는 물론, 이를 묵인하고 허위 보고한 부장·부부장 검사까지 구속 기소됐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광포하게 번진 데는 돈이 큰 이유가 됐다. 마녀로 지목되면 고문 도구 사용료, 고문 기술자와 마녀 재판관의 수당, 처형 비용까지 모두 내야 했다. 화형 뒤에는 전 재산이 몰수돼 나눠졌다. 마녀재판의 관계자들은 다 이해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고문 기술자 가운데는 바늘 끝이 뒤로 밀려나는 장치를 써서 ‘아파하지 않으니까 마녀’라고 억지 마녀를 여럿 만들어 한 재산 모은 자도 있었다고 한다.
 억지 빨갱이 만들기에도 이해관계자들이 있다고 봐야 한다. 국정원이 유씨를 조사하던 지난해 초는 대선 개입 댓글 사건과 국정원 개혁 문제로 들썩이던 때다. 어떻게든 국정원의 존재 가치, 대공수사의 필요성을 입증해 위기를 돌파하려 한 이들은 없었을까. 과거 공안사건 가운데도 권력의 필요에 공교롭게 때맞춘 듯한 사건이 여럿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도록 둘 순 없다. 젊은 강기훈들이 중늙은이가 되어서야 조작의 굴레에서 풀려나는 일이야말로 다시 있어선 안 될 ‘비정상’이다. 국정원이나 검찰이 이런 일을 일상처럼 해왔다면 대수술을 서두르는 게 마땅하다. 개혁 방안이랍시고 ‘국정원 직원의 정부기관 상시 출입 금지’ 따위에 만족할 일이 결코 아니다.
< 한겨레신문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