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단행된 검찰과 경찰 인사는 ‘채동욱 찍어내기’의 속편으로 부를 만하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 수사 과정에서 정권의 치부를 파헤친 인사들은 모조리 불이익을 당했다. 법무부는 지난 10일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특별수사팀을 이끌었던 윤석열 여주지청장을 대구고검, 부팀장 구실을 했던 박형철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부장을 대전고검으로 발령했다. 부당한 징계에 이은 비열한 보복인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채동욱 전 총장에 대한 감찰 지시가 부당하다며 반박글을 올린 박은재 대검 미래기획단장은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음에도 부산고검으로 보낸 반면, 국정원 수사에 소극적이었던 이진한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술자리에서의 행실로 감찰 중임에도 불구하고 대구서부지청장으로 이동해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정권에 충성하면 살고 대들면 죽는다”는 메시지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인사다. 또 국정원 사건 수사와 공소유지를 주도하던 박 부장을 지방으로 보내는 바람에, 국정원 요원들에 대한 수사 마무리와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에 대한 공소유지도 차질이 우려된다. 채동욱 전 총장 관련 자료 유출 사건 주임검사인 오현철 서울중앙지검 부부장을 홍성지청으로 보내, 청와대 몸통에 대한 수사는 물건너가게 생겼다. 아무리 정기인사라 해도 중요 사건의 수사 검사들에 대한 이런 인사는 사실상 수사와 공소유지에 대한 방해에 가깝다. 이들뿐 아니라 채 전 총장 때 단행된 인사를 통해 대검과 서울중앙지검에서 활약하던 중견 검사들을 대부분 지방으로 내려보낸 것은 채동욱 그림자 지우기를 통한 ‘검찰 길들이기’란 인상이 짙다.
 
국정원 사건 수사 당시 경찰 수뇌부의 외압을 폭로한 권은희 서울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이 9일 단행된 총경 승진 인사에서 탈락한 것도 마찬가지다. 경찰은 “일선 경찰서 형사과장이 아닌 수사과장이 총경으로 승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해명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사시 출신의 경우 총경까지는 무난하게 진급해왔다는 관례에 비춰 보면 경찰의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누가 경찰의 해명을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박근혜 정부는 이번 인사를 통해 무슨 일이 있어도 검찰과 경찰은 확실히 장악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그러나 국민들이 국정원 사건의 진행 상황을 낱낱이 알고 있는데 아직도 그런 발상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길들이기 인사로 수사기관을 장악하겠다는 구태의연한 생각부터 버리기 바란다.


로마의 시인 페트로니우스는 황제 네로에게 “다른 것은 다 해도 시(詩)만은 짓지 말라”고 호소했다. 박근혜 정부가 국사(교과서)만은 관제화하지 않았으면 한다. 청소년들에게 바른 역사를 가르치는 일은 정부와 기성세대의 엄중한 책무다.
교학사 국사교과서가 학생·교사·학부모들에게 완벽하게 퇴출되었으면 부끄러워하고 반성해야지, 마치 보복하듯이 통째로 뒤엎어 국정교과서 체제로 가겠다는 발상은 역사를 모독하고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처사다.
관변학자들과 보수언론, 정부기관의 총력지원에도 채택률이 0%인 것은 품질이 떨어진 부실덩어리인데다 친일·독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과 4월혁명, 6월항쟁 등을 통해 나라를 세우고 민주주의를 지켜온 국민이 친일·독재를 미화하는 교과서를 용납할 만큼 어리숙하지 않다. 정부와 관변학자들이 지금을 유신시대로 착각하는 데서 ‘교학사 사태’가 일어났다.
 
고래로 한 나라를 멸망시키려면 가장 먼저 그들의 역사를 파괴하거나 날조한다. 만주족이 중원을 정복하면서 중국사서를 소각·변조하고, 일제는 조선사를 왜곡했다. 총독부는 1916년 <조선반도사> 편찬을 시작하면서 “합방된 이 마당에 조선인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읽게 한다면 옛날을 회상케 하여 독립시대의 구몽에 빠지게 할 우려가 있다”며 왜곡을 서둘렀다. 이에 맞서 박은식·신채호 등 민족사학자들이 망명지에서 “나라를 빼앗겨도 역사(국사)만 잃지 않으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며 <조선통사> <조선상고사> 등을 지었다.
사마천은 “역사를 있는 모습 그대로 파악해서 거기에 필주를 가함으로써” 있어야 할 모습을 제시했고, 실학자 성호 이익은 “역사를 쓸 때는 착한 일을 드러내더라도 악한 것을 감추어서는 안 되며 권선만 하고 징악을 하지 않는다면 마치 새의 날개 하나를 떨어뜨리고 수레바퀴 하나를 빠뜨리는 것과 같다”고 설파했다.
실증사학의 대부 랑케도 이념이나 신념, 철학이나 종교에 의해 왜곡되는 역사 쓰기를 거부하고 정확한 사료를 토대로 삼아 과거의 사실 그 자체가 진실로 어떠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과거 사실의 객관성과 독립성이란 정치로부터 과거 사실의 독립이요, 신학으로부터 과거 사실의 독립이요, 철학으로부터 과거 사실의 독립이다. 그리고 이는 곧 역사학의 독립을 의미한다”고 썼다.
 
정부는 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시도하지 않아야 한다. 역사(학)의 독립을 보장해야 한다.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민주화운동을 소략·폄하하면서 그 자리에 친일과 독재를 앉히고 미화한다는 것은 역사의 모독일 뿐 아니라 국민에 대한 도전이다. 임시정부의 법통과 4월혁명 계승을 명시한 헌법정신의 위배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국사를 정부가 편찬 관장하고 있는 나라는 북한·러시아·베트남·필리핀 정도다. 정부가 북한처럼 따라 한다면 그들이 즐겨 쓰는 ‘종북’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일본 극우세력이 후소사판 교과서를 제작·배포할 때 우리는 이념적 좌우·보혁을 뛰어넘어 강력히 비판하고 일본 정부와 국민을 경멸했다. 타국의 내정간섭이 아니라 침략주의를 미화하는 내용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교학사가 욕하면서 배운다고 친일·독재를 옹호하는 등 일본을 닮은 데 분노하고 총체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박정희가 유신시대인 1974년 이른바 ‘국적 있는 교육’의 명분으로 국정화한 교과서는 수명이 10년이 못 갔다. ‘유신교육’을 받은 청년학생들이 더욱 활기찬 반유신 세대가 되었다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는 아이러니다. 그런데도 이를 다시 되돌리려는 것은 시대착오다. ‘국가’만 있고 ‘역사’가 없는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면 정부는 ‘관변역사’를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여당과 교육부 관리들이 냉철한 역사인식보다 권력 쪽에만 기웃거리면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교훈을 되새겼으면 한다.
 
< 김삼웅 - 전 독립기념관장 >


[한마당] 경제민주화, 오바마의 경우

● 칼럼 2014. 1. 19. 17:37 Posted by SisaHan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임기 3년을 남겨두고 미국판 경제민주화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해 12월4일 미국진보센터 10주년 행사에서 한 그의 연설은 인상적이다. 그의 ‘불평등’ 연설은 신자유주의의 첨병이었던 미국 대통령 연설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50분을 모두 불평등 문제에 할애한 오바마는 미국 현실에서 출발한다. 1979년 이후 미국 생산성은 90% 향상됐지만 가계소득은 8% 느는 데 그쳤다. 상위 10% 소득은 전체의 3분의 1에서 절반으로 늘었다. 최고경영자 연봉은 노동자의 20~30배에서 273배가 됐다. 이런 불평등 수준은 자메이카나 아르헨티나에 근접한 것이라고 오바마는 토로했다.
오바마는 불평등 심화가 무엇보다 경제에 해롭다고 했다.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성장은 둔화하고 경기침체는 잦다. 성장과 불평등 해소가 상충한다는 통념은 잘못된 것이다. 중산층이 두터워질 때 미국 경제는 가장 잘 성장했다.
 
불평등 해소 방안으로 오바마는 일단 ‘성장’을 강조한다. 경제적 파이가 줄면 불평등 해소가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뒤이어 성장이 ‘성장을 위한 성장’에 그치지 않도록 다양한 정책을 제시한다. 계층 상승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교육, 건강보험과 장기실업보험 등 국민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각종 복지제도의 확충이 그것이다.
오바마는 특히 노동자의 힘을 북돋아야 한다고 했다. 노동자가 더 좋은 근로조건과 임금을 받도록 노조를 조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오바마는 지금이야말로 최저임금을 인상할 때라고 했다.
오바마 연설은 미국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한 대침체 이후 미국은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다. 오바마 연설은 양극화로 고통받는 나라들이 경청해야 할 경제민주화의 교본과도 같다.
 
한국과 미국은 불평등에 관한 한 닮은꼴이다. 지니계수는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심해지는데, 한국은 2011년 0.448이었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 34개 국가 중 멕시코(0.48)에 이어 둘째로 높다. 미국은 0.38로 셋째였다.
미국 대통령이 최저임금 인상을 역설하고 노조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상이다. 한국은 어떤가.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은 민영화, 규제 완화, 노동 배제 등 흘러간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다. 세계가 탈신자유주의로 방향을 트는데 우리는 신자유주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나라를 10년, 20년 후퇴시키려 하고 있다.
박 대통령도 대선 때는 시대의 조류에 밀려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식이다.
최저임금만 해도 그렇다. 대선 때 박 대통령은 ‘최저임금 인상 기준을 마련해 근로자 기본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관심 밖이다.
 
올해 시간당 최저임금 5210원은 노동자 한달 생계비에 턱없이 모자란다. 철도노조 탄압과 전교조 법외노조화에서 보듯 비정상의 정상화를 앞세워 노동탄압을 일삼고 있다. 사회적 대타협을 말하지만 실제는 노조를 무력화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자본주의 첨단을 걷는 미국 대통령이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노조를 보호하자고 하는 것은 더이상 자본주의를 이대로 끌고 가기 어렵다는 인식의 대전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건 이후 30년 이상 계속된 빈익빈 부익부의 미국 경제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반성 없이 한물간 신자유주의를 고집할 것인가.
박 대통령에게 오바마 연설문을 일독하길 권한다.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 한겨레신문 백기철 논설위원 >


[1500자 칼럼] 행운을 낚으려면

● 칼럼 2014. 1. 13. 19:57 Posted by SisaHan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행복한 새해 되세요.’ 연초에 나누는 동서양 대표적인 덕담이다. 두 덕담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좀 다르지만 자신들의 삶에 복이 함께 하기를 염원하는 마음은 동서양 모두 같은 모양이다. 복의 사전적 의미는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거기서 얻는 행복을 뜻한다.’고 되어있다. 우리들의 삶속에 조그만 행운이라도 함께 한다면 행복은 당연한 수순이니 올해는 행운 낚기에 심혈을 기울일 일이다. 하지만 행운이 원한다고 낚여지는 것일까?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부러워 할 만큼 꽤 괜찮은 행운을 잡은 여인을 유심히 관찰해 본 결과 나름대로 갖게 된 확신이 있다.

지난해 어느 날 아침, 가게 도우미로 부터 매장에서 빙고가 터졌다는 연락이 왔다. 한 사람의 인생을 역전 시킬 만큼 엄청난 액수는 아니었지만 단돈 3불짜리 티켓으로 보통 직장인의 연봉에 버금가는 5만 불에 당첨됐으니 보통 행운은 넘었다. 무엇보다 내 영역 안에서 그런 행운이 터졌다는 게 신기하여 주인공의 신상에 대해 알아보았더니 인근 법원의 여 판사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력을 듣는 순간 ‘이미 부자인 그 사람 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돌아갔으면 좋았으련만’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리고 가진 자에게 더 몰아주는 불공평한 인생사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을 확률보다 더 낮다고 한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임에도 요행을 바라며 매일 거금으로 지극정성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생계비 조달이란 원초적 목적을 위해 매달리는 하루살이 인생도 부지기수다. 그런 간절한 바람들을 외면하고 파적(破寂) 삼아 던져 본 낚시에 덥석 걸려든 행운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그 비법이 궁금하여 행운의 주인공을 만나보길 원했으나 쉽지 않더니 몇 달 만에 그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날 나는 카운터에서 손님을 맞고 있는 데 건강미가 넘치는 한 중년 여인이 벙글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느닷없이 내손을 잡더니‘덕택에 즐거운 휴가를 보내고 왔노라’며 힘껏 흔드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 복권 공사에서 붙여 준 ‘WINNING 티켓 판매 업소’사인을 손짓했다. 그제야 내가 만나고 싶었던 행운의 주인공임을 알아채고 그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늘씬한 키에 검고 탄력 있는 피부, 상큼한 미소의 소유자인 그는 어디를 보나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자신감은 당연히 판사란 자신의 직책에서 왔을 것이다. 누구나 오르기 어렵다는 그 자리에 서기까지 수많은 난관과 좌절을 극복하며 인고의 세월을 버티어 냈음은 불 보듯 뻔한 사실 아닌가.
 
건강한 에너지를 온몸으로 발산하는 그를 보며, 만약 내가 행운을 관장하는 여신이라면 목전에서 무조건 달라고 애걸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사람에게 먼저 반응을 보일 것이란 생각을 했다. 목적하는 바가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꾸준히 최선을 다 해 밀고 나아가다 보면 좋은 결실은 물론 행운의 여신도 손짓하리라는 확신을 그에게서 터득했다. 
갑오년 새해가 폭설과 한파 속에서 시름하고 있다. 청마의 솟아오르는 기운으로 역동적인 한 해가 되리라는 예상도 무색하게 정초부터 만물을 혹한에 가두고 있는 지금, 강하게 만들기 위한 담금질 과정이란 사실을 인지하며 기꺼이 참아 낼 일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