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광화문에 3.1혁명 기념탑을”

● 칼럼 2014. 3. 10. 17:11 Posted by SisaHan
기미 3.1혁명 95주년을 맞는다. 우리는 이제까지 3.1운동이라 표기하고 3.1절을 국경일로 기념해왔다. 제헌절·광복절·개천절 등 다른 국경일은 그 의미가 명칭에서 충분히 드러나는데 유독 ‘3.1절’은 가치중립적인 숫자로 불러왔다. 정부가 1949년 10월1일 법률 53호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때부터 ‘3.1절’ 호칭은 논란이 많았다. 이제부터라도 마땅히 ‘3.1혁명일(절)’로 고쳐야 한다. 이름을 바로잡는 정명(正名)사상은 나라의 근본에 속한다.
기미년 3~4월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추구하는 가치와 저항, 참여 민중, 세계 피압박 해방운동에 끼친 영향, 한민족이 처한 상황이 그랬다.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의 대혁명,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못지않았다. 세계혁명사에 비해 손색이 없는데도 우리는 스스로 ‘운동’이라 비하해왔다. 어떤 외국인이 ‘스리 콤마 원 스포츠’라고 불렀다는 것을 우스개로 탓할 수만은 없다.
 
3.1혁명은 사망 7500명, 부상 1만6000명, 피검 4600명을 낸 장엄한 피의 혁명이었다. 당시 2000만 국민 중 210만명이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자진해서 항일시위에 참가했다. 이념·성별·지역‥신분에 상관없이 범국민적인 항쟁이었다. 국민의 10분의 1 이상이 항쟁에 나선 것은 세계 식민지 역사상 초유의 현상이다.
3.1혁명이 추구한 가치는 고종의 기일을 기해 거사를 도모했으나 결코 복벽주의가 아닌 민주공화주의였다. 이후 상하이를 비롯해 몇 개의 임시정부가 수립(선포)되면서 내세운 것이 하나같이 민주공화제의 정체로 나타났다. 이것은 4.19혁명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되고 있다. 3.1혁명을 통해 한민족은 개국 이래 최초로 근대적인 시민혁명을 도모한 것이다. 이로써 봉건적 신민(臣民)의식에서 근대적 신민(新民)의식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3.1혁명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출산하고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현행 헌법은 3.1정신과 임시정부의 법통 승계를 명시한 것이다.
 
5년 뒤면 3.1혁명과 임정 수립 100주년이다. 하여 제안한다. 광화문광장에 3.1혁명 기념탑과 근처에 임시정부기념관을 짓자. 친일파들을 기리는 각종 기념사업회·상·기념관은 넘치는데 임정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얼빠진’ 모습이다. 헌법정신의 위배이기도 하다. 지금 광화문에는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두 분 다 우리 민족 구원의 지도자다. 그런데 두 분은 조선왕조 시대의 인물이다. 민국을 세우고도 100년을 앞둔 나라에서 수도 심장부에 민국의 상징이 없다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3.1혁명기념탑(물)은 1919년을 상징하는 조형물이었으면 좋겠다. 박근혜 정부 성향으로 보아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국민 성금으로라도 세웠으면 한다. 다행히 2019년은 새 정부가 들어선다. 지금부터라도 3.1정신을 잇고자 하는 국민·단체들이 뜻을 모으고 아울러 선포 100주년을 앞두고 독립기념관에 보관된 기미독립선언서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도록 준비했으면 한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일본의 군국주의·침략주의 언설이 끊이지 않고, 내부적으로는 친일·독재를 미화하는 교과서 파동이 말해주듯이 일제식민지배를 동경하는 세력이 증대되고 있는 시점에서 광화문 3.1혁명기념탑의 의미는 각별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근원, 민족 정체성의 정립, 국민통합, 근대적 시민사회의 출발, 자주독립정신, 남북통일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1혁명 당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광화문으로 진출하여 일경과 맞섰다. 광화문은 3.1혁명의 성지였다. 3.1혁명 100주년을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을 수 없다.
< 김삼웅 - 전 독립기념관장 >


‘탈북 화교 출신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된 국가정보원의 문서가 위조된 것으로 사실상 확인됐는데도 국정원과 검찰 쪽은 이치에 닿지 않는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검찰 진상조사팀이 국정원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를 통해 빨리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특검 도입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중국 정부는 이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3건의 문서가 모두 위조된 것이라는 확인 공문을 2월 중순 우리 정부에 보내온 바 있다. 피고인 유우성씨가 북한 보위부에 포섭됐다는 시기에 중국에서 북한으로 갔다는 내용의 ‘출입경기록’, 중국 화룡시 공안국이 이를 발급해준 사실이 있다는 ‘사실조회서’, 유씨 변호인 쪽이 이 두 문서가 왜 잘못됐는지를 설명한 ‘정황설명서’에 맞서 국정원•검찰이 나중에 제출한 ‘정황설명에 대한 답변서’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정황설명서와 답변서는 모두 중국 삼합변방검사참(세관)이 발급한 것으로 돼 있는데, 대검 디지털포렌식센터의 조사 결과 두 문서의 도장이 다른 것으로 28일 드러났다. 사실상 답변서가 위조됐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국정원은 ‘도장이 다른 것과 문건의 진위 여부는 별개 문제’라든가 ‘같은 기관이라도 도장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도장을 찍을 때 힘의 강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등의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이 답변서가 우리 정부의 공식 협조요청 공문이 중국 정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발급된 것으로 날짜가 적힌 점도 조작 의혹을 높인다. 검찰은 그동안 이 문건 등에 대해 ‘공문을 통해 정식으로 발급받은 것’이라고 말해왔다. 게다가 답변서는 출입경기록 및 사실조회서와 맥락상 연결돼 있어 답변서가 위조된 것이라면 다른 두 문서도 위조됐다고 볼 수 있다.
 
문서가 위조됐다면 국정원이 주도했을 것이지만 국정원과 손잡고 유씨를 기소한 검찰도 공범일 수밖에 없다. 사실상 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수사·공판 관여 검사들은 일상 업무를 계속하고 있으며 나아가 증거조작 의혹 재판에도 참여하고 있다. 검찰의 탈법적인 제 식구 감싸기 행태다. 또한 검찰은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확인 공문의 내용이 분명하지 않다는 등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간첩을 잡아야 할 국정원이 문서 조작 등을 통해 간첩을 만들어내고 정의를 모토로 삼는 검찰이 이에 동참하는 것은 있어선 안 될 일이다. 검찰이 이제라도 불명예를 덜 길은 국정원과 검찰 내부를 막론하고 철저한 수사를 통해 신속하게 진실을 밝혀내는 것뿐이다. 검찰은 현실을 직시하기 바란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지역·민족 사이 갈등 고조와 외세의 개입 등으로 복잡한 국면을 맞고 있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성숙한 대처가 중요한 때다. 러시아와 미국, 유럽연합 등 관련국들은 분열을 부추기지 말고 평화적 해법 마련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지금 관심의 초점이 되는 곳은 러시아계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데다 러시아 흑해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크림자치공화국이다. 러시아가 수천명의 병력을 투입해 크림자치공화국의 주요 시설을 장악한 것은 잘못이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동의하지 않은 병력 투입은 사실상 침공에 가깝다. 러시아군의 크림반도 주둔이 두 나라 사이의 협정에 따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많은 병력을 주둔지가 아닌 곳에 배치한 것은 불법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즉각 주둔지 바깥의 병력을 철수하기 바란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물러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의회와 과도정부를 장악한 친서방 세력에 두려움을 가진 크림자치공화국이 친러시아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림반도에 있는 우크라이나군 병력 다수도 크림자치공화국 쪽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게다가 크림자치공화국은 사실상 독립을 지향하는 자치 확대 여부를 두고 오는 5월 주민투표를 치를 예정이다. 지금은 지역·민족 갈등이 크림반도를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우크라이나 정국을 주도하는 과도정부와 의회는 사태의 엄중함을 직시해야 한다. 나라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는 행동을 자제하고 적극적으로 국민 화합을 꾀해야 한다. 러시아의 제2공용어 지위를 박탈하기로 한 의회의 법률 폐지안에 대해 대통령 권한대행이 2일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적절한 결정이다. 다른 나라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나친 개입을 삼가야 한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4일 서둘러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것은 친러시아 세력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특히 군사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까지 나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위험하다. 과거 서방 나라들이 본의든 아니든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악화시킨 사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500자 칼럼] 노모(老母)의 깊은 뜻은

● 칼럼 2014. 3. 4. 13:39 Posted by SisaHan
한밤에 하릴없이 집안을 맴돕니다. ‘정신이 멀쩡한 엄마를 요양원에 보낸다.’ 고. 막내 동생의 울음 섞인 한마디가 가시처럼 박혀서 편치 않은 하루를 보낸 끝입니다. 이런 밤은 차라리 어둠이 편할 것 같아 실내등을 끄니 전나무 숲 그림자가 마루 깊숙이 들어와 앉았었군요. 현란한 전등불 아래 감춰졌던 초롱초롱한 달빛이 발길을 창으로 이끌어갑니다. 
쭉쭉 뻗은 전나무 숲 끝에 이제 막 솟아오른 보름달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군요. ‘설은 나가서 쇠어도 보름은 들어 와 쇤다.’는 정월 대 보름달을 우러르니 고향, 고향집, 그리고 연로하신 어머니가 그대로 떠오릅니다. 
근데 웬일인가요. 고향집 문설주가 파르르 떨리며 고향도 어머니도 휘청거려 보입니다. 모두 떠난 빈 둥지를 외롭게 지키시던 어머니, 기력이 쇠하여 이젠 더 버틸 재간이 없다고 하십니다. 항상 뒷모습만 보였던 못난 자식은 어머니가 안 계실 고향, 고향집이 여간 당혹스럽지 않습니다.
 
연로한 어머니의 마지막 거처를 위해 고국의 오남매는 연일 머리를 맞대었나 봅니다. 합리적인 사고의 아들들은 최신의 의료시설을 갖춘 요양원에 모실 것을 고집하고 비합리적인 딸들은 부족하지만 자식들이 모셔야 한다는 의견이었지요. 하지만 냉철한 이성과 허물거리는 감성 사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어머니의 노환은 요통, 허리통, 관절통 할 것 없이 깊어져 갔고요. 보다 못한 어머니는 아들들의 손을 들어주었다는군요. 
자손들의 화합을 위해서라면 아무려면 어떠리, 하고 내리신 결정이었겠지요. 열외에 있는 저는 이 소식을 접하곤 가슴이 무너져 내립니다. 평생 자식들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육남매에 둘러싸여 울고 웃으며 보내고 싶다는 속내는 왜 감추셨는지요. 아니, 노모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저희들이 모두 바보 멍텅구리입니다. 긴 세월동안 지극 정성으로 할머니를 모시던 당신의 모습을 보며 자란 우리들인데, 왜 그때의 영상은 끊어져 버린 걸까요. 인생을 통 털어 육친의 정이 가장 절실한 시기에 타인에 의한 어머니의 요양원 생활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한동안 부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던 옆집 서양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연로하여 의식불명 된 친정 부모님을 널싱 홈에 모셨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곧바로 아버지를 집으로 모셨습니다. 아무리 의식이 없는 부모지만 마지막 길을 타인에게 맡기는 게 자식 된 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한 분 돌아가시고서야 알게 되었답니다. 자신도 여러 가지 병을 달고 살면서 아버지의 숨이 멎는 날까지 이동식 침대를 뒤뜰로 향하게 하고 옆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신문을 읽으며 마음의 대화를 나누던 그녀가 참으로 위대해 보였습니다.
어머니! 육신이 기울어진다하여 정신까지 놓으시면 안 됩니다. 셋째가 어머니의 곁을 지킬 때 까지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기억 떠올리기는 최고의 명약이랍니다.
 
어머니, 그때를 기억하시는지요. 그날도 오늘처럼 정월 대보름 밤이었지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전, 동네 아이들과 보름맞이 놀이를 위해 뒷산으로 갔습니다. 온 동네를 돌며 모은 삭정이며 널빤지들을 얼기설기 맞대어놓고 성냥을 긋는 순간 치솟는 불꽃을 보며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지요. 하지만 전 동생들과 불꽃 유희에 열중해 있다가 아랫동네 아이들이 걸어오는 싸움 돌에 맞아 머리를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감싸며 집으로 달려가던 때의 두려움과 어머니를 봤을 때의 안도감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였습니다. 어머니의 손길로 말끔해진 전, 달밤의 아름다움을 다시 알게 된 어린 시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신이며 우주이신 어머니, 부디 쇠락의 길을 조금만 늦추십시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