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가 지난해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담은 DVD를 이용해 장교와 일반 병사들의 정훈교육을 시킨 사실이 드러났다. 국가보훈처의 안보교육 빙자 DVD와 마찬가지로 군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내용이란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다.
국방부 교육정책국은 지난해 반독재·반유신 투쟁을 비판하고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일방적 퍼주기’로 매도하는 등 편향적 내용의 DVD로 정훈장교와 일반 병사 등에게 교육을 시키고 이를 토대로 시험까지 치렀다고 한다. 11개 묶음의 DVD를 1100여 세트나 제작해 각 군에서 교재로 사용했다니 그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DVD도 국가정보원이 넘겨줬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국정원과 군, 새누리당이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이른바 ‘3각 연계’ 의혹이 점점 짙어지고 있는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국정원 심리전단과 국군사이버사령부 요원들이 함께 새누리당 SNS미디어본부장의 글을 퍼나른 사실은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사이버사 요원들이 국정원 심리전 교육과정에서 파견교육을 받는가 하면 양쪽 요원들이 지난해 8월 말 비슷한 시기에 ‘MB스타일 동영상’을 누리집 게시판 등에 올린 것도 연계 의혹을 뒷받침하는 방증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에 대한 검찰과 국방부의 수사가 게걸음을 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늑장수사와 축소수사로 사실상 증거인멸을 방조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언론을 통해 드러난 선거개입 혐의 사이버사 요원만 18명인데 겨우 7명만 조사하고 있을 뿐 국정원과의 연계 등 다른 의혹들에 대해선 파헤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검찰 역시 수사팀장 교체 이후 수사 확대는커녕 공소유지에 급급한 형편이다. 수사를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장과 차장검사는 수사 의지를 의심받는 상황이어서 검찰 안팎에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철저한 조사와 사법부의 판단이 나오는 대로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으나 ‘철저한 조사’라는 전제 자체가 충족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축소·은폐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 결과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법원이 국정원 심리전단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 글 5만여건에 대한 공소장 변경 신청을 허가한 데 이어 다른 SNS계정도 추가 확인되고 있다. 인터넷 댓글과는 규모와 내용 면에서 대선개입 정도가 확연히 다른 글들이 확인된 이상 일반 요원들을 모두 선처한 검찰조처가 맞는지 의문이다.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는 국정원 인사들의 뻔뻔한 태도를 보면 수사를 전면 확대하고 시효가 지난 선거법은 아니더라도 국정원법 등 다른 죄목을 적용해 엄중 처벌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


올해 정기국회의 국정감사가 마무리되고 예산안 심사를 앞둔 시점에서 현행 제도를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다시 나오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상시국감이나 예결위 상설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실제 개선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정치권은 이번엔 말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상시국감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여야가 대체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정기국회 때 30일까지 국정감사를 하도록 돼 있는 현행법을 고쳐 상임위별로 탄력적으로 국감을 하자는 것이다.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는 내년 2, 4, 6월에 각 상임위가 1주일씩 피감기관을 분리해 국감을 실시하고 정기국회 때 종합국감을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상시국감을 포함해 대정부질문 개선 등 포괄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국정감사는 애초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힘이 약한 입법부가 각종 정부기관의 전횡과 불법을 집중 감시함으로써 행정부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여야간 정권 교체가 실현되는 등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상황에서 특정 시점을 잡아 행정부를 감시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측면이 있다.
여야는 이번에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협상을 진전시켜 내년부터 상시국감 체제가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여야는 언제든 정권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합리적이고 실효성 있는 상시국감 제도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 국감이 과도한 정치공세의 장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입법부의 행정부 견제 기능을 무력화해서도 곤란하다.
 
상시국감과 함께 예결위 상설화도 시급하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예산결산특위를 상설화해 임기 2년, 위원 30명으로 하고 다른 상임위 겸직을 금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수백조원의 국가예산을 두 달 남짓한 시기에 다른 상임위를 겸직하는 예결위원들이 주먹구구로 심의하는 것의 문제점은 오래전부터 지적돼 왔다. 예산 심의의 투명성과 전문성 확보를 위해 예결위 상설화는 더 미룰 일이 아니다.
여야는 이번에야말로 내실 있는 협상을 통해 국회가 내년부터 상시국감, 예결위 상설화 등을 통해 좀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하도록 해야 한다. 여야 원내대표들의 책무가 막중하다.


[칼럼] 홍범도 장군 묘소 앞에서

● 칼럼 2013. 11. 10. 18:07 Posted by SisaHan
비행기로 7시간을 날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 도착한 것은 지난달 25일 오전이었다.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이종찬)는 장군의 서거 7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현지에서 추모식을 열고 학술회의를 열었다. 현지 동포와 유지들이 다수 참석하고 저녁에는 동포들이 출연한 연극 <홍범도>가 공연되었다. 연극은 서거 한해 전에 공연되어 홍 장군이 직접 관람해 자신을 너무 추어올리지 말라고 당부한 지 71년 만에 재공연되었다.
이튿날 일행은 국내선으로 90분 거리인 크질오르다 공동묘지의 빛바래고 초라한 묘소를 찾았다. 현지 고려인(조선인) 여성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장군의 묘소에 빨간 장미꽃을 바쳤다. 장군의 넋을 위로하는 헌화와 헌주에 이어 나는 70주기에 맞춰 출간한 졸저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을 헌정하였다. 황량한 벌판에 자리한 묘역은 잿빛 하늘에서 금방 비라도 쏟아질 듯 을씨년스러웠다.
 
홍범도. 머슴 출신으로 일제의 침략에 분연히 일어나 산포수의병으로 시작해 청산리대첩을 비롯하여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서 일제와 줄기차게 싸웠던 빨치산 대장. 일제강점기 무장투쟁으로 30여년을 일관한 항일투사는 그가 유일하다. 그 과정에서 부인은 일본군에 붙잡혀 고문으로 숨지고 장남은 전사하고 차남은 전투중에 병사하였다. 해서 혈육 한점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조국 해방에 바쳤다.
홍범도는 일본군이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 부를 만큼 공포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수십차례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청산리대첩의 승리에는 그의 공이 가장 컸다는 것이 연구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의 국무총리였던 이범석 장군이 자신이 속한 부대를 띄워 올리고 홍 장군을 폄하하면서 공적이 엉뚱한 사람한테 넘어갔다.
홍범도는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계급투쟁이 아닌 민족해방투쟁에 모든 것을 바친 혁명가였다. 그것도 ‘무장투쟁’이라는 가장 힘들고 위험 부담이 높은 투쟁에 헌신한 빨치산 대장이었다. 이들의 존재로 독립운동이 문약에 빠지지 않았고, 한민족의 당당한 패기를 지키게 되었다.
 
국가(왕조)의 온갖 혜택을 입었던 왕족, 대신, 고위 관료들이 친일파가 되어 민족을 배신할 때, 그는 산포수가 되고 의병이 되고 독립군이 되고 빨치산 대장이 되어 일제와 싸웠다. 그리고 1936년 스탈린에 쫓겨 머나먼 카자흐스탄까지 밀려갔다. 그곳에서 극장 수위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1943년 10월25일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75살을 일기로 숨졌다.
독립운동가인데도 아직까지 유해 봉환도 논의되지 않고, 교과서는 친일파들로 채워지는 시대가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가족과 생명을 내걸고 일제와 싸울 때 친일의 대가로 자식을 건사했던 자들이 자자손손 출세하고 호강하는 사회가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친일 후손들만 보호할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안 되는가. 국가보훈처장은 권력에만 기웃거릴 것이 아니라 망각되어가는 항일투사들에게, 국사편찬위원장은 ‘독립운동을 훼방한’ 이승만에게만 넋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에게 정신을 모으기 바란다.
일각에서는 홍범도가 레닌에게서 권총 등을 선물받은 것을 두고 ‘좌파 독립운동가’로 낙인하고 그의 공적을 비하한다. 이분들께 말한다. 일제강점기 좌우 이념 노선과 오늘의 북한 체제를 동일시하지 말 것을. 아울러 독립운동가보다 친일 경력자를 ‘건국의 아버지’ ‘부국의 아버지’ 따위로 추어올리는 몰역사·반역사의 곡필을 중단할 것을 바란다.
홍 장군의 묘역을 떠날 즈음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잘 가라는 이별의 눈물이었을까, 고국의 못난 후손들을 질책하는 눈물이었을까.
< 김삼웅 - 전 독립기념관장 >


우리 인간이, 신이 창조한 자연의 오묘함을 규명하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가 과학이라면 최근의 자연과학의 발달은 그 원래의 목적을 넘어 신의 영역인 창조의 과정에까지 간여하게 된 것 같다. 일반적으로 과학의 발달속도는 기하급수적이어서 현재의 과학 지식들의 90% 가 지난 10년간 발견 또는 개발되어진 것이라고 한다. 컴퓨터의 발전과 응용은 의료부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는 모든 병원에서 일반화 되어버린 CT scan, MRI 는 물론, 많은 기계들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함으로써 인간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의 국방성의 과학자들은 입으면 초능력을 발휘하며 백 kg 이 넘는 짐을 한 손으로 들고 거친 오르막 길을 재빠르게 달릴 수 있는 장비와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는 적외선 특수안경 심지어 공상과학소설 속의 투명외투 등의 기술을 개발 하였고 이미 실용화하고 있다고 한다.

그 동안 우리가 알던 육백만 불의 사나이나 원더우먼 등의 초능력인간의 이야기가 오늘날 현실이 되어 최근에는 사람들이 필요한 신체의 각 부분을 컴퓨터화한 인공 장기들로 대체하고 있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팔 없는 이가 이식수술 대신 인공 팔을 옷 입듯이 입으면 컴퓨터 칩이 뇌파를 받아 그가 뜻하는 대로 그 팔을 움직이게 하는 기술이 개발되었고, 사고로 다리가 절단된 여인이 마치 부츠를 사 신듯 몇 벌의 인공 다리 ( prosthetic limbs)를 사서 매일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갈아 신고 아무 불편없이 보통사람 보다 더 완벽하게 걷고 뛰는가 하면 이것 덕분에 키가 커졌음을 부러워하는 이들이 일부러 다리를 절단하고 인공다리를 달고자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는 황당한 소식들도 들려온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뇌에 컴퓨터를 이식하고 전기자극을 가하여 파킨슨병이나 강박신경증 등의 난치병들을 치료하는 방법이 실용화 되고있으며 이곳 캐나다에서도 뇌에 전자기(電磁氣) 자극을 주어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치료 하는 TMS (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 경두개 자기자극술) 등이 이미 실시되고 있다. 따라서 공상과학소설에서만 보았던 cyborg 등은 더 이상 공상 속의 이야기가 아니며 앞으로는 뇌를 포함한 인간의 신체를 기계로 치환할 때, 어디까지를 얼마나 기계로 바꾸었을 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등, 인간과 기계에 대한 정의 조차 모호해질지 모른다. 더 오래, 더 건강히 잘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니 최근에는 노화방지 및 수명연장에 대한, 그야말로 진시황이 찾던 불로장생의 기술들도 연구되고 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인공자궁이 실험단계에 있으며 앞으로 태어날 아기들을 원하는 스펙에 맞추어 아기의 눈, 머리, 피부 색 등 신체조건은 물론 지능, 성격, 재능 까지 선택하여 디자인하고 인공자궁에서 배양하여 전달하게 되는 아기공장의 산업화가 조만간 이루어지리라는 보도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과학의 발달은 신의 영역인 생명탄생에 인간이 관여하여도 되는가에 대한 물음,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놀랍게도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여성들의 반정도가 여성도 난자만 제공하면, 임신과 출산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남성처럼 사회활동과 여가를 즐길 수 있으므로 이러한 아기공장의 설립에 찬성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술을 개발하고 주창하는 이들은 과학기술이 우생학적인 면에서 장애아의 출산을 막고 우수한 인간을 계속 선택하여 인류발전에 공헌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명이란 우연한 배합에 의하여 태어나며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전제로 한다고 할 때 과연 이런 것이 없는 삶이 최선의 삶일까를 생각해보게 한다.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인 죽음을 거부할 때, 질병을 치료하고 환자를 고통에서 해방시킨다는 면에서는 환영받아 마땅한 의과학의 발전이, 태어날 때부터 계획되고 선택되어 삶을 완전히 지배한다면, 그 프로그램 대로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재미없을까? 우리의 삶은 살아가면서 우연히, 뜻하지않게 부딪히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 사건 사고들, 어려움에 도전하고 장애를 극복하는, 그러면서 더 기쁘고 슬프고 풍요롭고 행복하여지는 것은 아닌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천국에서의 삶이라면 지루함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겠다는 어떤 이의 말이 생각난다. 최근의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여 가는 과학 기사들을 접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자연의 작은 한 부분임을 인식하여 생로병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다가 떠나간, 신의 섭리에 순응했던 옛 선인들의 지혜가 더 절실히 마음에 와 닿는 이유는 내가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낡은 세대이기 때문인가?

< 김영제 - 시인, 시.6.토론토 동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