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임시국회가 정부조직 개편안을 처리하지 못하고 어제 폐회됐다. 곧바로 3월 임시국회가 열린다고 하지만 새 정부 구성의 기초가 되는 정부조직법 처리가 무산된 것은 정치가 실종된 우리 국회의 현주소를 잘 드러내 준다. 대통령과 집권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의 본령에서 모두 벗어나 있긴 마찬가지다.
한달여를 끌어온 정부조직법 처리 논란 와중에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의 존재감이 극히 미약했던 점은 정치의 실종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선두에 서서 강경으로 치닫고, 야당은 이에 반발하는 동안, 새누리당은 청와대의 협상 대리인 노릇을 하는 데 그쳤다. 협상 와중에 청와대 정무수석이 새누리당 원내대표실에 나타나 지침을 내리는 듯한 모습이 포착된 것은 현재의 당청관계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어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에서는 무기력한 당 모습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나왔다고 한다. “청와대가 야당과 계속 이야기를 하면 여당의 존재 이유가 없다” “여당이 야당을 설득해 합의안을 만들고 이를 토대로 청와대를 설득해야 한다”는 등 타협과 조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발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의원들 사이에선 박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잇따라 표출됐다. “대통령 담화가 협상 결렬의 한 원인이 됐다” “청와대가 한 말에 구속되지 않고 합리성을 봐서 결정할 수 있다”는 등의 발언이다. 대통령의 강경 방침과 별개로 여당 지도부가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 와중에 이한구 원내대표가 국회 선진화법과 관련해 “지금대로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식물국회가 되는 것 아니냐”며 법 개정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여당의 무기력함은 반성하지 않고 제도를 탓한 것이다. 개정된 선진화법은 여야 합의가 없는 한 국회의장의 본회의 직권상정을 금하고 있다. 선진화법은 여야가 국민에게 약속한 새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다. 이를 두고 벌써 개정 운운하는 것은 약속 위반이다.
 
정치 실종의 일차적 원인은 박 대통령의 일방통행이다. 여권에서 집권 초 대통령의 질주를 막아설 인사나 세력을 찾긴 쉽지 않다. 새누리당 지도부와 청와대의 정무라인은 친박 일색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의 독선을 방치하면 나라가 혼란스러워질 뿐 아니라 여권 전체가 함께 주저앉게 된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지만 당은 그 뒤에도 계속된다. 당이 중심이 돼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새누리당은 청와대와 야당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면서 합리적 타협을 주도할 수 있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명불허전.” 
곧 개봉되는 영화 <링컨>을 미리 보고 느낀 소감이다. 물론 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 명배우 대니얼 데이루이스가 짝을 이뤄 만든 작품이라는 선입견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4년 넘게 6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남북전쟁이라는 미국 역사상 최대 위기를 혼신의 힘으로 돌파해낸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빛나는 리더십이 실재하지 않았다면 영화도 감동도 존재할 턱이 없다. 
미 해군사관학교에 가면 ‘위기 때 가장 좋은 배는 리더십이다’(The best ship in times of crisis is leadership)라는 글귀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현 상황에 딱 어울리는 재치있는 문장이다. 그런데 리더십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나라마다 사정도 천차만별일 터인데, 우리나라 지도자에겐 어떤 리더십이 최선일까? 영화 <링컨>이 그 답을 상당 부분 제공해준다.
 
남북전쟁 막바지인 1864~65년 무렵, 링컨은 노예해방이 전쟁의 주목적이라는 급진 공화당원과 오로지 연방의 복원을 위해서만 싸워야 한다는 보수 민주당원 사이에 끼여 있었다.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게 되면 당과 정부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거덜날 지경이었다. 마치 북한 핵과 양극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하는 우리의 현 상황과 비슷하다. 갓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 역시 안보를 위해 경제민주화를 외면할 수도, 경제민주화를 위해 안보를 등한시할 수도 없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링컨은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를 확고한 원칙과 소신, 포용과 통합, 소통이라는 종합예술로 타개했다. 당내 대통령 후보 경쟁자였던 윌리엄 헨리 수어드, 새먼 체이스, 에드워드 베이츠를 국무, 재무, 법무 장관에 과감하게 기용해 당내 화합을 이룬 데 머물지 않고 야당, 일반 시민과 끊임없이 소통했다. 
불과 2표 차로 통과된 ‘노예 폐지’ 헌법 제13조 수정안 처리를 앞두고, 여야의 반대 의원을 직접 만나 설득하는 링컨의 모습은 ‘진정성 있는 소통’이 최고의 리더십임을 보여준다. 더 강한 내용의 노예제 폐지 조항을 요구하는 급진파 공화당 의원 새디어스 스티븐스에게 ‘북극성만 보고 가다가는 발밑에 있는 진창에 빠질 수 있다’며 자제를 촉구하고, 전쟁 때 흑인에게 숨진 가족이 있는 민주당 반대파 의원에겐 ‘그런 희생을 노예제 폐지의 숭고한 밑거름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읽고 상대의 공감을 끌어내는 그의 능력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선 여야를 막론하고 걱정이 많다. 신뢰와 원칙은 있는 것 같은데 포용과 소통은 없다는 게 요지다. 최근 관훈클럽의 ‘관훈초대석’에 나온 임채정·김형오 전 국회의장도 나란히 그의 리더십을 비판했다. 임 전 의장은 그가 권력 독점, 통제와 지시, 반대에 대한 억압, 자원의 강압적 동원, 획일과 효율성 만능 사고라는 박정희 시대의 리더십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김 전 의장도 원칙과 신뢰, 헌신과 정도, 품격과 절제가 그를 선택한 이유일 것이나 출범 전부터 밀봉, 불통의 인식을 심어줘 안타깝다고 말했다. 
비교적 소통에 강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이 영화를 보고 “대통령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 결핍증’ 지적을 받는 박근혜 대통령이야말로 링컨한테 배울 게 많을 것 같다. 영화 <링컨>을 보고 나면, 적어도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쥔 채 “물러설 수 없다”고 외치는 게 능사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 오태규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

 

[1500자 칼럼] DO YOU SEE WHAT I SEE?

● 칼럼 2013. 3. 1. 14:44 Posted by SisaHan
남편과 나는 가끔 색깔의 이름때문에 실랑이를 벌이다 웃곤한다. ‘서랍안에 있는 하늘색 지갑안을 찾아 봐요.’ 그러면 남편은 서랍 맨위에 단정히 놓여진 지갑을 옆으로 밀쳐내며 서랍안을 뒤진다. ‘ 없는데... 올라와서 찾아봐.’ 먼 발치에서도 보이는 하늘색 지갑은 이미 몸의 일부가 서랍밖에까지 올라와 있다. ‘ 아니 그 위에 있는 것도 안보여요 ?’ ‘ 이거 ? 이게 하늘색이야 ? 이건 회색이구만…’ 기가 막혀 잠시 말없이 쳐다보다가 서로 피식 웃고 만다. 여기에 영어 표현까지 더해지면 더욱 대책없이 흘러가는데 BURGUNDY와 PURPL에 이르면 우리는 그저 뻘건 이것의 이름이 진홍색이든 자주색이든 개의치 말아야 한다. 고백하건대 나에게 색의 명칭은 무척이나 단순해서 어린 시절 18색이나 24색 크레파스에 딸린 이름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경우 대개 나는 남편에게 지고 마는데 그건 ‘ 내 크레파스는 48개 짜리였다’고 주장하는 남편이 나보다는 더 많은 색깔의 이름을 받아들였으리라 인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40여년전 크레파스 공장 사장님의 과학적 근거 없는 작명술에 의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검은 색의 옷을 즐겨 입는 나는 가끔 검은 울코트와 비스코스가 섞인 검은 울바지와 검은SUEDE구두를 맞춰 입고 각각 다른 검정을 바라보며 고민한다. 맞추어 입었지만 그들이 가지는 색조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색조라고 표현되는 단어는 영어로는 순색에 검정을 더한 SHADE와 순색에 흰색을 더한 TINT, 또 순색에 검정과 흰색이 합해진 TONE으로 다르게 일컬어진다. 순색에 더해지는 색과 양에 따라 우리에게 보이고 감지되는 색은 다르게 인식되고 다른 느낌으로 전달된다. 그러다 보니 같은 푸른색을 같은 장소에서 본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같은 이름이 떠오르기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에 개인적인 경험과 취향이 더해져 어떤 이는 순색인 파랑쪽의 느낌을 강하게 받고, 어떤 이에게는 추가되는 흰색 쪽의 느낌이 강하게 전해지면서 그 색에서 연상되는 느낌은 개인적인 것이 되고 만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바다를 연상하면서 차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고 어떤 사람은 봄기운과 희망이 가득한 하늘을 떠올리며 온기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보여지는 색과 그 인식에 관한 나의 관심은 여행중 비행기에서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 시작되었다. BBC가 제작한 ‘Do you see what I see ?’라는 다큐멘터리는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힘바족을 통해 언어와 감각과 의식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들이 가진 색의 이름은 모두 다섯가지. 모든 색은 이 다섯가지 중의 한 이름을 갖는다. 우유와 물은 다같이 하얀색이며 파랑과 연두는 그들에게 한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그들은 파랑색 중에 섞인 연두색을 구별해내지 못했다. 보지못한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힘바족의 독특한 색의 체계를 통해 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감각을 넘어온 의식의 단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눈에는 다른 색이라 할지라도 한가지의 이름을 가진 것은 감각의 의지를 넘어 인식의 단계에서 그냥 하나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언어가 가진 무서운 힘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사물에 대한 주관적인 개념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너머 더 깊이에 담겨진 무엇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다. 언어는 태생적인 불완전성을 통해 더 큰 세계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파랑과 연두가 같은 이름을 가진 뜻밖의 (?) 세상이 우리 앞에 가능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남편과 나는 이제 색의 이름에 대해 문제삼지 않는다. 이름은 달라도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있으므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결혼기념일에 자기가 사주었던 지갑안을 찾아 보세요.’ 라고.

< 김유경 시인 - ‘시.6.토론토’동인,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칼럼] 표절에 관대해선 안된다

● 칼럼 2013. 3. 1. 14:42 Posted by SisaHan
박사학위 논문을 두 번이나 쓰고도 학위를 받지 못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20여년 전 미국 테네시대학의 포크너라는 학생은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제출했는데, 주제가 군사기밀에 관한 것이라는 이유로 통과되지 못했다. 미리 학칙을 챙겨 보지 못했던 지도교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자신의 논문을 베껴 쓰도록 허락했고 새 논문은 심사를 통과해 학위가 수여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이 표절이라는 이유로 학위를 취소해 버렸다. 결국 학생은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재판에서 원고는 표절이란 저자의 동의 없이 가져다 쓸 때 성립하는 것인데, 자신의 경우는 저자의 동의가 있으므로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법원은 표절을 원고처럼 정의하면 학위논문의 정직성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면서, 표절을 용인한 지도교수뿐만 아니라 그의 비호 아래 숨으려는 학생의 신뢰도 잘못된 것이라고 판결했다.
 
표절은 저작권 침해와 달리 저자의 동의로도 면책되지 않음을 확인한, 지극히 당연한 판결이다. 논문에 대한 저작권 침해는 친고죄로서 피해자인 저자가 문제 삼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 그러나 표절은 다르다. 표절당한 저자 외에 학계와 독자 전체가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의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했다고 해서 논란이 뜨거운데, 최근 논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어 안타깝다. 미국 교수의 논문을 상당 부분 출처표시 없이 베낀 것은 인정하면서도, 사전 또는 사후 허락이 있었는지에 대한 진실공방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표절당한 사람의 동의나 용서 여부는 표절 성립과 무관하고, 단지 정상참작 사유가 될 수 있을 뿐이어서 낭비적인 논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밖에 표절 의혹 당사자들의 반응으로 당시에는 표절금지윤리가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표절 판정과 자리를 연계하여 시간끌기를 하는 등 다양하다. 최근에는 표절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경우도 등장했다. 
조선조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양반집에 들어간 도적이 훔친 여자의 속곳을 어디에 쓰는 물건인 줄 모르고 벙거지처럼 쓰고 다녔다는 것에 비유하여, 남의 시문을 함부로 가져다 엉뚱하게 쓰는 표절자를 슬갑도적(膝甲盜賊)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남의 글을 자신의 것인 양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는 어제오늘 생긴 것이 아니다.
 
독일은 메르켈 총리 재임 기간 중 장관 두 명이 박사학위 논문 표절로 총리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국방장관은 이미 사임했고, 최근 학위가 박탈된 교육장관도 사임 압박을 받고 있다. 
새 정부가 출범했다. 앞으로 며칠간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논문 표절은 단골 검증 메뉴로 등장하고, 이 과정에서 박사학위가 짐이 될 사람이 분명 나올 것이다. 그런데 표절이 공직 수행에 결격사유가 될 수 없다는 동정론이 등장하고, 정작 파수꾼이어야 할 지식인들이 침묵의 카르텔로 이를 덮어버린다면, 학계와 우리 사회의 도덕 수준은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게 될 것이다. 
마침 졸업철이다. 표절 논란의 근본적인 책임은 과욕을 부린 표절 당사자에게 있을 것이지만, 심사를 허술히 한 대학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최근 논란이 된 사건에서 표절이나 연구윤리 위반이라는 판단을 발표한 대학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바 없어 안타깝다. 

< 남형두 -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저작권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