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만의 강진…사상자 계속 증가할 듯

 

9일(현지시각) 북아프리카 모로코 마라케시 구시가지에서 한 여성이 지진으로 무너진 집 앞에 서서 울고 있다. 지난 8일 늦은 밤 모로코에서는 규모 6.8 지진이 발생했다. 마라케시/AFP 연합뉴스
 

 

규모 6.8의 강진이 발생한 모로코에서 사망자가 2000명을 넘었다.로이터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모로코 국영방송은 10일(현지시간) 내무부 발표를 인용해 지진 사망자가 2012명까지 늘었다고 보도했다. 부상자의 규모도 2059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지에서 구조 작업이 진행 중이라 사상자 수는 계속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8일 밤 11시 11분께 모로코의 유명 관광도시로 잘 알려진 마라케시에서 남서쪽으로 71km 떨어진 하이 아틀라스 산맥에서 규모 6.8 강진이 발생했다. 산간 지역 외딴 마을은 도시보다 건물 내진 설계 등이 미흡한 탓에 이 지역에서 특히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지고 있는 현지 영상을 보면 거대한 산을 배경으로 둔 마을 건물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산산조각 나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이번 지진이 120여년 만에 최대 규모라고 보도했다. 

9일(현지시각) 모로코 마라케시 남서부에서 지진이 발생한 뒤 시민과 구조대가 굴삭기를 활용해 무너진 건물 잔해를 뒤지며 수색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수도 라바트와 카사블랑카를 비롯해 마라케시 남부 여러 지역에서도 지진이 감지됐다. 라바트에서 진앙까지는 약 400km 떨어져 있다. 라바트 현지에 있는 주모로코 대한민국 대사관 관계자는 한겨레에 “집이 무너질 것처럼 크게 흔들려서 많은 주민이 집 밖으로 대피할 정도로 (충격이) 꽤 심했다”라고 전했다.

 

진앙에서 멀리 떨어진 북부 지역을 제외한 대다수 지역에서는 모두 진동을 느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로코 현지에 장기 체류 중인 한국 교민은 모두 360여명이다.

현재까지 한국 교민이나 관광객의 인명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다.

지진 피해로 다친 이들이 병원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모로코 정부는 시민들에게 헌혈을 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리시 수낵 영국 총리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모로코 지진 피해에 대해 원조를 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한국 정부도 현지 상황을 주시하며 지원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베를린/노지원 특파원>

모로코 축구 대표팀 전원 헌혈…“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10일(현지시각) 북아프리카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 아슈라프 하키미(25·파리 생제르맹)가 엑스(옛 트위터)에 헌혈하는 사진을 올리며 헌혈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했다. 하키미 엑스 갈무리

 

“헌혈은 가능한 한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10일(현지시각) 북아프리카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 아슈라프 하키미(25·파리 생제르맹)가 엑스(옛 트위터)에 헌혈하는 사진을 올리며 헌혈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지금은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헌혈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 이강인 선수와 프랑스 리그 파리 생제르맹에서 함께 뛰는 하키미는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에서 모로코를 4강으로 이끈 축구 스타다.

9일(현지시각) 북아프리카 모로코 마라케시 구시가지에서 한 여성이 지진으로 무너진 집 앞에 서서 울고 있다. AFP 연합뉴스

 

앞서 지난 8일 밤늦게 모로코에서 발생한 규모 6.8의 강진으로 이날 기준 2000명이 넘게 사망했다. 부상자 2000여명 가운데 1400여명은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120년 만에 모로코를 강타한 가장 강력한 지진이다.마라케시 지역 헌혈 센터가 지진 희생자들을 돕기 위한 헌혈에 동참해달라고 긴급 호소했다고 모로코 월드 뉴스는 9일 보도했다.

센터는 “모든 시민, 특히 마라케시 시민들은 부상자들을 돕기 위한 헌혈에 동참해달라”며 “많은 부상자에게 상당한 양의 혈액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10일(현지시각) 북아프리카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 왈리드 레그라귀 감독이 인스타그램에 헌혈하는 사진을 올리며 헌혈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했다. 레그라귀 감독 인스타그램 갈무리

 

하키미 뿐만 아니라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 전원이 헌혈에 동참했다. 애초 대표팀은 9일 라이베리아와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전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지만 지진으로 무기한 연기됐다.

아기디르 경기장은 진원지에서 약 260㎞ 떨어져 있어 여진이 발생하더라도 피해가 제한적일 가능성이 크지만 모로코 국민들과 대표팀이 받았을 정신적 고통 등을 고려한 조처였다.이날 경기가 취소되자 대표팀은 자국민들을 위해 헌혈에 나섰다.

모로코축구협회는 이튿날인 10일 유튜브에 선수들의 헌혈 영상을 공개하며 “희생자 가족들에게 깊은 애도를 전하며 부상자들의 빠른 회복을 기원한다”고 밝혔다. 아슈라프 하키미, 압데 에잘줄리, 로망 사이스, 나예프 아게르드, 야신 부누 등 선수들이 기꺼이 팔을 걷어 붙었고, 왈리드 레그라귀 감독을 비롯한 코치진도 헌혈에 동참했다.     < 조윤영 기자>

 

윤석열 정부가 홍범도 장군을 지우려는 이유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가 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해군 잠수함 ‘홍범도함’의 이름을 바꾸고, 홍 장관에 수여된 건국훈장을 취소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가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던 이력을 문제 삼고 있는데요. 정부가 갑자기 홍 장군을 흔드는 진짜 이유는 뭘까요? 권혁철 기자에게 물어봤습니다.
 
[The 1] 정부는 왜 육사에서 홍 장군 흉상을 없애려는 걸까요?
권혁철 기자: 국군의 뿌리가 독립군·광복군이냐 아니면 미 군정 국방경비대냐를 두고 오랜 논란이 있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국군의 뿌리가 독립군·광복군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2018년 독립군·광복군의 흉상을 육사에 세운 것이죠. 하지만 전직 장성, 극우 세력과 역사관을 공유하는 윤석열 정부는 미 군정 국방경비대를 군국의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독립운동의 역사는 자신들의 역사관과 양립할 수가 없다고 보는 거죠.독립운동에는 자유주의, 반공주의 같은 우익만이 아니라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 온갖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윤 정부가 보기에 국군은 한미동맹을 지키고 반공 투쟁을 하기 위해 존재해왔을 뿐이라는 겁니다. 우익 세력의 원죄를 가리기 위해서도 그래야 하고요.
 
[The 2] 무슨 원죄인가요?
권혁철 기자: 친일 부역이죠. 독립운동 역사를 인정하면, 친일의 역사도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선엽 장군이 대표적이죠. 백선엽은 제 발로 (일본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만주군 장교 양성 학교에 입학했잖아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본군 장교로 5년이나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사람입니다. 그러다 일제가 망하니 슬쩍 노선을 바꿔서 한국에서 장군도 되고, 한국전쟁에 나가 공로도 세운 거죠. 해방 후 미국과 반공주의에 올라타 친일파 청산을 피해 살아남은 뒤 각 분야에서 주류가 된 수많은 이들의 행태와 동일하잖아요.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온 2021년 8월15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국가보훈처 건물 벽에 그의 귀환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The 3] 그래도 백선엽 장군이 한국전쟁에선 공을 세우지 않았나요? 정부가 홍 장군 대신 백 장군 흉상을 육사에 세우려 한단 이야기도 군 안팎에서 나오는데요.
권혁철 기자: 백선엽의 공과를 따지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지금 정부는 백선엽이 나라를 구했다고 하지만, 당장 같이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부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1사단장으로, 당시엔 남한이던 개성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이 개성부터 치고 내려왔을 때 1사단은 아무 저항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전날 서울서 열린 육군회관 파티에 가서 술 마시고 자다가 부대로 복귀를 못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백선엽은 평생 대접받고 산 사람입니다. 30대 내내 장군, 40대에는 프랑스·캐나다 대사, 50대에는 교통부 장관과 공기업 사장을 지냈습니다. 60대 이후엔 한미동맹의 상징이자 ‘호국의 별’로 떠받들어졌고요. 하지만 홍 장군은 아버지처럼 머슴과 광산노동자로 전전하다, 추운 만주 전쟁터에서 싸웠고, 나이 들어선 강제로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가 극장 경비 등을 하다 죽었습니다. 두 사람의 삶의 경로를 봤을 때 육사에서 장교들에게 본받으라고 내세울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The 4] 윤석열 대통령도 정치적으로 득이 되니까 홍 장군 흉상을 철거하란 거 아닐까요?
권혁철 기자: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국민적 존경을 받는 홍 장군을 흔들면 선거나 정치에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하잖아요. 양당에 각각 30%의 부동지지층이 있고, 중간에 있는 40% 유권자의 표를 더 많이 가져오는 게 기본 선거 전략이니까요. 하지만 윤 대통령은 일반적인 대통령이 아니에요. 대통령이 되는 것까지만 목표였던 걸로 보여요. 다시 대통령 선거 나올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정책도 없는 거죠. 그냥 전 정권이 한 거 때려 부수고, 검사 때처럼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국가 세력’이라며 벌주는 일이나 하는 거죠. 저출산, 한반도 평화, 기후위기처럼 어려운 문제는 내버려두고요.
 
[The 5] 여당은 ‘대통령이 국가 기틀을 세우기 위해 표에 도움이 안 되는 일도 하고 있다’고 옹호합니다.
권혁철 기자: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란 솥엔 독립·호국·민주라는 세 개의 다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보훈부는 독립투사, 전쟁공로자, 민주화 유공자 모두 잘 기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을 보세요. ‘독립’과 ‘민주’란 두 다리는 걷어차 버리고 ‘호국’ 다리 하나만 남기려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자신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니 이해하기가 힘들죠. 지금처럼 민주화 된 한국에서 역사를 독점하는 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권력은 역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 김지훈 기자 >

 

백전백승 홍범도 장군의 '첫 패배'

● Hot 뉴스 2023. 9. 3. 12:2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불패였던 홍 장군, 죽어서 후손들에 의해 모독

지금의 한국 현실, 만주벌판보다 더 혹독한 전장

 

내동댕이쳐지는 영웅, 잔혹극의 극치 

불패의 독립영웅 홍범도 장군이 첫 ‘패배’를 당한 것인가. 살아서 백전백승이었던 그가 죽어서 처음 패배를 당한 것인가. 그 한 번의 패배는 그러나 살아서의 백패보다 더한 단장(斷腸)의 고통이다. 그리던 조국에서, 같은 민족에 의해, 게다가 후배 군인들을 키우는 학교 교정에서 내동댕이쳐짐으로써 이 노병은 살아서 겪지 않았던 치욕과 모독을 당한 것이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에게 후손들에 의해 가해진 잔혹극의 극치라고 해야 할 일이다.

2023년 순국 80주기에 당하는 또 한 번의 죽음이다. 동포들이 자신의 어깨에 붙여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의 견장을 떼이듯 가격당하고 난타당했다. 조국에 의해 가해진 만행은 일제의 군경에 의한 어떤 가혹한 형벌보다도 참혹한 고문이다.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2023.8.28. 연합뉴스

 

육사 교정에서 국방의 간성이 될 후배들을 벅찬 심정으로 바라봤을 그의 눈은, 압살당하고 유린당한 그의 영혼은 비분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북간도 벌판을 호령하던 장수의 강철같았던 심장이 갈갈이 찢기고 있다. 일본군이 스스로 '하늘을 나는 장군(飛將軍)'이라고 부를 정도로 일제 관동군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이의 불 붙은 듯 이글거렸을 이 노병의 눈이 비통의 울음을 울고 있다.

그의 육신이 돌아갈 조국이 없었듯 그의 혼백은 다시 속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80년간 천만리 이역을 떠돌던 혼령은 머리 둘 곳이 없게 됐다. 자신이 온몸을 던져 구하려고 했던 고국으로부터, '나라를 버리는 이들'에 의해 참담하게 버림을 받고 있다.

그의 흉상이 육사 교정에 세워진 지 5년, 그의 유해도 이미 2년 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환국은 그것으로 완성된 게 아니라는 것을 이번의 흉상 철거 사태는 보여준다. 그를 모독하는 이들로 인해서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를 아직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잘못 알려졌거나 그의 삶과 공적에 대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너무도 많다.

 홍범도 장군을 42년간 연구해온 이동순 시인이 올해 삼일절에 맞춰 내놓은 평전 『민족의 장군 홍범도』에서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인물이지만 구소련 지역에 머물러 살았다는 점과 유생이 아닌 서민 출신이라는 점 등을 이유로 독립운동사에서 왜곡되고 폄훼되어온 홍범도 장군의 전 생애를 재조명하려 했다”고 말했듯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고의적으로 소외하고 폄훼해 온 그를 대한민국은 아직 진정 모시지 못하고 있다.

그에 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 중 가장 큰 오해는 그가 머슴 출신으로 일자무식이라는 것인데, 낮고 천한 신분 출신인 것은 그의 신화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혁혁한 전과의 경위는 그가 단지 용맹과 사격술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단련시켜 문무 겸비에 이르지 않았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도올 김용옥 교수가 10여 년 전 극동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은 그의 한문 편지 하나가 이를 증거한다. 유학자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 앞으로 보낸 이 서한의 ‘洪範圖(홍범도)’라는 초서체의 선명한 이름 석 자가 드러내는 것은 누구보다 뛰어났던 지략과 전술의 한 이유를 보여준다.   

공산당 가입은 독립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를 육사 교정에 둘 수 없다고 트집을 잡는 이들은 그가 공산당에 가입한 것을 전향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에겐 버릴 공산주의라고는 애초부터 없었다. 1922년 모스크바의 원동민족혁명단체회의에 참가했을 때 그를 조선의 독립영웅으로 먼저 만나자고 했던 것은 레닌이었고, 홍범도는 레닌에게 요청해 흑하사변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독립군 대원들을 석방시킬 수 있었다. 레닌과의 만남이든 그로부터 받은 권총 선물이든 모두 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수단이며 방편이었고, 동포들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수송열차에 실려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쫓겨나 남은 생을 한인 극장의 경비원과 방앗간 노동자로 일했던 그에 대해, 소련 치하 카자흐스탄에서 공산당을 탈당하지 않은 것이 용납할 수 없는 죄과라는 것인가.

그의 죽음이 해방을 불과 2년 앞둔 1943년이었다는 것은 이번의 흉상 철거 사태와 겹치면서 마치 스스로 선택한 시간의 죽음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는 해방 이후 조국에서 펼쳐질 통분스런 일들을 예견했던 것이어서 그걸 차마 볼 수 없어 스스로 눈을 감았던 것인가. 그의 유해의 봉환이 78년 만에야 이뤄졌던 것에는 자신의 흉상이 내동댕이쳐지는 치욕을 예감하기라도 했던 것인가.

그에게 안식을 주지 않는 조국, 지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에게 만주벌판보다 더 혹독한 전장이 되고 있다. 꺾이지 않았고 물러서지 않았고 굽히지 않았던 그를 무너뜨리고 유린하는 이들은 과연 누군가.

봉오동, 청산리 대첩 직후 일제 관동군은 비열 잔인한 보복에 나섰다. 간도의 경신대참변에 대해 박은식 선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들은 조선의 민간인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였다.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 도끼로 찍어 죽이고, 산 채로 땅에 묻고, 솥에 삶고, 가죽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고, 팔다리를 자르고, 사지에 못을 박았다. 인간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오락으로 삼았다."

일본군-한국군으로 이어지는 계보

이것은 일본군의 실체이자 이들의 행태를 이어받은 한국군의 한 갈래, 해방 후 저질러진 제주 4.3 사태, 거창 민간인 학살, 광주 5.18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일본군-한국군의 계보의 한 실상이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들어낸 자리에, 일제하에서는 관동군의 후예가 되기를 자처했고, 해방 후에는 국군으로 재빨리 변신해 일본군 때의 수법 그대로 민간인을 살륙하던 인물이 '원수님'으로 추앙돼 그의 동상을 세운다는 흉흉한 소식이 들리고 있다.

그러나 한편 동시에 부하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덮으려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대한민국 군인 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 해병대 군인이 있다.     

한국군은 이 두 갈래 길 중에서 어느 쪽의 길을 갈 것인가. 홍범도 장군, 그리고 또 다른 '홍범도들', 독립항쟁의 산하에서 무명전사로 사라지고 만, 수많은 '홍범도들'이 죽은 육신으로도 감기지 않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 이명재 에디터 >

“동포 50만, 우리도 적이냐” 한국 정부에 따져

 

카자흐스탄 고려인 동포들이 1일(현지시각) 알마티 고려극장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대형 사진 앞에서 흉상 이전 계획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알마티/연합뉴스
 
 

육군사관학교가 교내에 있던 홍범도 장군 흉상을 외부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에 그가 말년을 보낸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동포들이 이전 계획 철회를 촉구하고 나섰다.

리 류보피 카자흐스탄 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 예술감독과 박 드미트리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카자흐스탄 지회장 등 고려인 동포들은 1일(현지시각) 알마티 고려극장에서 흉상 이전 계획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고려극장 안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대형 사진 앞에서 ‘한일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 ‘홍범도 장군 공산당 이력이 문제면 내 가족과 고려인 동포 50만명도 모국의 적인가’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이전 반대의 뜻을 표명했다.

지난 2021년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 현장에 있었다고 밝힌 박 지회장은 “당시 홍범도 장군이 아름다운 해방된 조국의 품에 안겨 영면하시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뿌듯해했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자랑스럽게 느꼈다”며 “그러나 다섯 분의 독립전쟁 영웅 중에서 홍범도 장군의 흉상만 철거한다는 소식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렇다면 공산당원이었던 돌아가신 내 부친도, 옛 소련에서 태어나고 인생의 절반 정도를 소련 체제 속에서 살았던 나도 제거 대상인가. 21세기에 공산당도 소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게 말이 되는가”라고 지적했다.

리 예술감독은 “체제와 정권이 바뀔지라도 홍범도 장군은 우리 민족의 독립전쟁 영웅”이라며 “그가 8천만 겨레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고려극장은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앞서 국방부는 지난달 31일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홍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 등을 문제 삼았다.

독립군 지도자 홍 장군은 스탈린 정권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주한 뒤 1943년 75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는 카자흐스탄 등지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꼽힌다.

< 박고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