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이산상봉 행사 계기로 만난 북쪽 관계자들 이야기

북 보장성원 “금강산 몇 번째입니까”
제재 완화와 관광 재개 바람 내비쳐
문 대통령 지지율 추이에도 높은 관심
이산가족 상봉 규모 확대에 난색 표하기도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 이틀째인 21일 오전 북쪽 상봉단이 객실 내 개별 상봉을 위해 외금강호텔로 들어서고 있다. 상봉단 뒤로 화폭처럼 펼쳐진 금강산 줄기가 눈길을 끈다.

“금강산 관광이 다시 열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20일부터 금강산 지역에서 남북 적십자의 주관으로 진행되는 2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돕는 북쪽 보장성원(지원인력)이 남쪽 공동취재단 기자한테 한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4·27 판문점 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 채택 이후 북쪽은 아직까지는 금강산 관광 재개를 공식적으로 남쪽에 요구·요청하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금강산은 이번이 몇 번 째입니까”라고 남쪽 기자한테 묻는 북쪽 보장성원한테서 관광 재개의 바람이 짙게 묻어난다. 관광 재개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인 유엔·미국의 대북 제재가 언제쯤이나 완화·해제될지 궁금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외금강호텔 인근 금강약수로 가는 길에서 남쪽 기자를 만난 북쪽 관계자도 금강산관광이 언제쯤 재개될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이 관계자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금강산 지역에 꾸준히 들어오고 있고, 온천장도 이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2008년 7월 이후 발길이 끊긴 남쪽 관광객의 빈자리를 중국 관광객으로 일부 메우고 있다는 뜻이다.

북쪽 관계자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 추이에도 관심이 많았다. 한 관계자는 “기자 선생이 보기에 지지율이 더 떨어질 것 같냐?”, “흩어진(이산) 가족 상봉을 하면 지지율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 “뭘 해야 지지율이 뛰냐?” 따위 궁금증을 쏟아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낮은 지지율에 발목이 잡혀 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 이행에 어려움을 겪은 전례를 걱정하는 듯하다.

북쪽의 한 관계자는 (2016년 4월 한국에 온) 중국 닝보 북한식당 ‘류경’의 여종업원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제 상봉하고 여종업원 문제를 연계해서 상봉이 된다, 안 된다, 그런 말은 쑥 들어간 거 아니겠습니까. 그 문제는 그냥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는 거죠”라고 말했다. 북쪽이 <노동신문> 등을 통해 여종업원들의 북송을 촉구하며 이번 상봉 행사에 악영향이 있을 수 있다고 엄포를 놓은 것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남쪽의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와 규모 확대’ 요구에 대해, 북쪽 관계자들은 “지금 우리 시설에서는 100명 정도 이상은 현실적으로 하기 어렵다”며 ‘규모 확대’에 난색을 보였다.

<금강산/공동취재단, 이제훈 선임기자>


18살에 끌려간 박차순 할머니 등
22명 삶과 육성 담담히 담아내

작년 중국서 관객 550만명 대흥행
한국선 첫 국가 지정 기림일에 개봉

촬영 때 22명 생존자 이제 6명
“한·중 위안부 공동대응 계기 되길”

중국내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인 박차순 할머니와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아시아홈엔터테인먼트 제공

한국말은 거의 다 잊었다. 어릴 땐 기억력이 좋아 어떤 노래든 들으면 바로 따라 불렀는데, 아흔이 넘자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다. 하지만 고향 노래 몇 소절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 발병 난다.”

중국 이름 마오인메이, 한국 이름 박차순(1922∼2017). 생계를 위해 중국에 왔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다섯살 딸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갔다. 할머니 손에 맡겨진 박차순은 18살이 되던 1941년 “큰 양말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꾐에 속아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았지만 고향에 돌아갈 길이 막막해져 중국에 남았다. 중국 총각과 결혼했지만, 위안부 시절 후유증으로 불임이 된 그는 동네 소녀를 양녀로 삼았다. 역사의 흔적이 깊게 팬 신산한 삶을 돌이키며 박차순은 말했다. “너무 오래 살까 걱정이야. 아무 쓸모가 없어.”

한·중 합작 다큐멘터리 <22>는 중국에 생존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육성을 그저 담담히 담아내는 데 집중한다. 제목 <22>는 2014년 촬영 당시 중국에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숫자다. 궈쿼(郭柯) 감독은 어떤 인위적 개입도 배제하기 위해 배경 음악조차 쓰지 않았다. 할머니들의 입으로 ‘삶’을 증언할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이 전부다. 그렇게 4년이 걸려 완성한 <22>는 지난해 8월14일 중국에서 개봉해 55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제작비 대비 60배의 수익을 냈고, 역대 중국 다큐영화 흥행 1위에도 올랐다. 그리고 딱 1년 후인 오는 14일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한다. 8월14일은 고 김학순 할머니가 지난 1991년 방송을 통해 최초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기림일’로, 국내에서는 올해 첫 국가 지정일로 정해졌다.

한중이 함께 위안부 문제를 담은 <22>를 만들게 된 사연에 대해 제작사 아시아홈엔터테인먼트 김원동 대표는 “운명”이라고 했다. 이미 위안부 영화 <소리굽쇠>(2014)와 방송 다큐 <소녀를 만나다>(2014) 등을 제작했던 김 대표는 박차순 할머니를 만나러 중국 후베이성을 찾았다가 궈쿼 감독 일행과 마주쳤다. “우리는 박 할머니를 고향으로 모시기 위해, 또 그 과정을 방송 프로그램으로 찍기 위해 중국에 갔고, 궈쿼 감독은 영화 <22>를 촬영 중이었던 거죠.” <22>를 위해 살던 원룸까지 처분한 궈쿼 감독의 열정, 꼼꼼한 기획력과 사전 취재분에 김 대표는 감동을 받았고 곧 그와 의기투합했다. “궈쿼 감독 기획대로 영화를 제작하기로 하고 저희 쪽 제작비를 몰아줬어요. 딱 한 가지 조건은 박차순·이수단 할머니 사연을 비중 있게 다뤄달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열정만 가지고는 촬영 마무리도 개봉도 쉽지 않았다. 제작비는 곧 바닥났고, 양국의 어떤 배급사도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한국에선 조정래 감독의 위안부 영화 <귀향>이 큰 흥행을 했는데, 궈쿼 감독이 <귀향>을 본 따 크라우드펀딩을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하늘도 감동했는지 펑샤오강 감독을 비롯해 배우·제작자 등 의식 있는 셀럽들이 에스엔에스를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홍보에 참여해줬어요.” 그렇게 3만2099명이 참여해 100만 위안(1억6천여만원)의 목표액을 모금했고, 영화도 기록적 흥행에 성공했다.

이런 인연으로 <귀향> 조정래 감독은 지난해 8월 궈커 감독의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했다. 조 감독은 “도착하자마자 저를 후베이성에 있는 박차순 할머니 묘소로 데려가더라고요. 따님(양녀)이 할머니 영정 앞에서 ‘엄마가 그렇게 보고파 하던 고향에서 사람들이 왔다’고 했어요. 함께 붙들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라고 회상했다.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는 영화 <22>를 통해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위대한 중국’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위안부 문제처럼 아픈 역사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해 8월은 한한령(한류금지령)이 위세를 떨치던 때라 중국에선 한중 합작이라는 점을 드러내기도 힘들었어요. 한국 개봉을 계기로 이 문제는 국경을 넘어 한중이 함께 대응해야 할 문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2>는 장가이샹(1925~2014) 할머니의 장례식으로 마무리된다. 눈 덮인 무덤엔 어느새 초록색 잔디가 돋아나며 봄이 온다. 시간의 흐름은 눈 깜짝 할 사이다. 22명이던 중국 내 생존자 할머니 수는 4년 만에 6명(2018년)으로 줄었다. “마음이 조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죠. 흥행이 안 될 걸 알면서도 영화계 극성수기인 8월14일 개봉을 고집한 것은 그 뜻을 기리자는 의미예요. ‘또 위안부 문제냐’는 비난이 제일 가슴 아파요. 위안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늘 끝내지 못한 숙제를 계속하는 기분이라고들 해요. 모두 함께 거들면 이 숙제도 더 빨리 끝나지 않을까요?”(김원동 대표)

<유선희 기자>


국방부 군사안보지원사령부령 입법예고
새 사령부령엔 정치적 중립 규정 마련

11일 오후 경기 국군기무사령부로 차량이 들어가고 있다. 박종식 기자

국군기무사령부를 폐지하고 대신 새로 창설되는 부대의 이름이 6일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정해졌다.

국방부 당국자는 이날 “국군기무사령부를 폐지하고 대신 군사안보지원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오늘 국군기무사령부령 폐지(안)과 군사안지원사령부령 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고 말했다.

국방부가 이날 전자 관보에 입법 예고한 내용을 보면, 군사안보지원사령부는 “군사 보안, 군 방첩 및 군에 관한 정보의 수집·처리 등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국방부 장관 소속으로 설치”한다고 돼 있다. 기본 원칙으로는 “사령부 소속 군인 및 군무원의 직무수행 시 법령 및 정치적 중립 준수 규정 마련”이 제시됐으며, 조직에 대해선 “사령부에 사령관, 참모장, 감찰실장 각 1명을 두고, 참모부서와 사령관 소속으로 군사안보지원부대, 군사안보지원학교 등을 설치”한다고 했다.

국방부는 또 기존의 국군기무사령부령 폐지(안) 입법예고에선 “군사보안, 군 방첩 침 군에 관한 첩보의 수집·처리 등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국방부 직할부대로 설치한 국군기무사령부를 군 조직 개혁의 일환으로 폐지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국방부는 이 폐지(안)이나 제정(안)에 의견이 있는 단체 또는 개인은 9일까지 통합입법예고시스템(http://opinion.lawmaking.go.kr)을 통해 온라인으로 의견을 제출하거나 오프라인으로 국방부 장관 앞으로 의견서를 제출해 달라고 밝혔다.

<박병수 선임기자>


가족에 2통·드루킹 특검수사 관련 1통
“경공모에 두차례 걸쳐 4천만원 받아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정상적 절차 밟아야했는데 그리 못해
정의당과 나를 아껴주신 분들께 죄송”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23일 숨지기 전 총 3통의 유서를 남긴 것으로 확인됐다. 노 대표는 2통에는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남은 한 통은 최근 ‘드루킹’ 특검 수사와 관련한 내용이었다.

노 대표는 이 유서에서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천만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노 대표는 이 과정에서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라고 덧붙였다.

청탁과 대가가 없었지만 정치자금 수수 자체에 대해서는 ‘후회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라고 적었다. 이에 대해 노 대표는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라고 후회했다.

특검 수사 이후 노 대표는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도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서에서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정의당과 나를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이다“라며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라고 밝혔다. 그가 깊은 죄책감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는 당원들에게는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라고 남겼다.

그는 끝으로 국민들에게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라고 당부의 말을 남겼다.

<정환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