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의 이적 발표를 보도하는 영국 <스카이스포츠>스카이스포츠

손흥민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과의 작별을 선언했다.

2015년 8월 토트넘에 입단한 지 10년 만에 프리미어리그를 떠난다고 발표하자 영국 언론도 앞다퉈 손흥민이 지금까지 남긴 발자취를 특집 기사로 조명했다.

스카이스포츠는 2일(현지시각) "토트넘의 주장 손흥민이 올여름 팀을 떠날 것이라고 발표했다"라며 손흥민의 이적 소식을 헤드라인에 올렸다.

그러면서 "손흥민은 토트넘의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라며 "그가 지금 세대의 토트넘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아이콘(standalone Spurs icon)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해리 케인이 토트넘 역대 최다 득점자이지만, 손흥민은 토트넘에 남은 선수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케인이 우승을 위해 독일 바이에른 뮌헨으로 떠난 것과 달리 손흥민은 토트넘에 남아 올해 5월 마침내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 우승을 이끌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케인의 많은 골이 손흥민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라며 "통계가 말해주듯 손흥민은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스트라이커 파트너십의 절반을 차지했다"라고 썼다. 아울러 "이 모든 것에 더해 라이벌 팬들조차 반박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캐릭터까지 손흥민은 토트넘의 뿐만 아니라 프리미어리그의 전설"이라고 치켜세웠다.

'절친' 비머 "손흥민 같은 선수 또 보기 어려울 것"

             ▲손흥민의 이적 발표를 보도하는 영국 BBC방송BBC


공영방송 BBC는 "손흥민이 2021-2022시즌 23골을 터뜨리며 리버풀의 모하메드 살라와 함께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오른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되었고, 1년 후에는 아시아 선수 최초로 프리미어 리그에서 100골을 달성했다"라고 소개했다.

손흥민과 토트넘에서 함께 뛰었던 동갑내기 수비수 케빈 비머는 BBC에 "요즘 같은 시대에 한 클럽, 특히 토트넘처럼 빅 클럽에서 10년을 뛰는 것은 매우 특별한 업적"이라며 "앞으로 토트넘에서 손흥민 같은 선수를 또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토트넘의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 우승을 이끌었던 미키 아자르도 "손흥민이 처음 토트넘에 왔을 때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나, 지금은 전설이 되어 떠난다"라며 "손흥민은 영원히 숭배받을 것(always be worshipped)"이라고 극찬했다.

디애슬레틱은 "손흥민은 지난 10년간 토트넘과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꾸준한 활약을 보여준 선수 중 하나"라면서 "손흥민이 토트넘을 떠난다는 것은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손흥민은 유로파리그 우승으로 토트넘이 17년 만에 '무관의 한'을 씻어내는 데 기여하며 팀의 전설로서 지위를 굳히고 떠나지만, 그럼에도 그와 작별 인사를 할 때 슬플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손흥민의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는 이번 경기는 매우 감동적인 장면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손흥민의 10년, 정말 놀라웠다"

손흥민의 이적 발표를 전하는 잉글랜프 프리미어리그 소셜미디어프리미어리그


가디언도 "손흥민은 유로파리그 우승이라는 단 하나의 트로피만 가지고 토트넘을 떠나지만, 수많은 개인상도 따냈다"라며 "그중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2021-2022시즌 살라와 함께 수상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이라고 전했다.

또한 "손흥민은 2020년 번리와의 경기에서 터뜨린 놀라운 골로 그해 최고의 골에 수여하는 국제축구연맹(FIFA) 푸스카스상을 수상했다"라며 "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트넘 '올해의 선수상'을 3차례나 받았다"라고 소개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공식 홈페이지는 손흥민의 이적 발표 소식을 메인 화면에 띄우면서 "손흥민은 토트넘에서 7번째로 많은 출전 기록(454경기)을 세웠고, 5번째로 많은 골(127골)을 넣었다"라면서 "구단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로 떠나게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난 시즌 유로파리그 우승을 이끌면서 토트넘을 위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역대 13번째 주장"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토마스 프랭크 토트넘 감독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손흥민은 토트넘에서 10년을 보냈다. 그냥 10년이 아니라 정말 놀라운 10년"이라며 "그는 모든 면에서 진정한 토트넘의 전설"이라고 말한 것을 전했다.                        < 윤현 기자 >

대통령실 취재 방식 변화가 몹시 불편한 조선일보

● COREA 2025. 8. 3. 11:3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질문 기자 생방송에 부정적 측면만 강조
신규 출입 인터넷 매체도 ‘유튜버’로 폄하
수준 낮은 질문 하는 자사 기자부터 보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이 브리핑룸에 카메라를 추가로 설치해 질문하는 기자의 모습을 생방송으로 공개하기로 했다는 방침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TV 화면 갈무리.
 

윤석열 일당이 일으킨 내란과 외환 음모를 이겨내고 민주시민이 세워낸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지 두 달이 가까워진다. 지난 6월 24일에 도입한 대통령실의 ‘쌍방향 브리핑‘ 제도도 시행 한 달이 넘었다. 새로운 제도의 신선함을 마음껏 느끼고 있다. 질문한 기자들의 고충을 호소한다는 말이 들린다. 얼굴을 가린 채 용기 있는 척 호기(豪氣)를 부리던 기레기들이 익명성에서 누리던 사치를 버려야 하는 괴로움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왜 자신들이 하는 일을 국민께 직접 알릴 수 있는 호기(好機)라는 생각은 못 하는 걸까?

 

“‘비판적 질문한 기자는 공격당해’… 대통령실, 알면서 왜 생중계할까”... 방씨조선일보 김태준 기자가 7월 23일에 쓴 기사 제목이다. 비판과 견제는 정상적인 언론인이 수행해야 할 본연의 책무다. 하지만 아직도 구태에 젖어 본질을 벗어난 채 거들먹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태도가 있다면 마땅히 국민으로부터 비판받아야 한다. 그래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김 기자의 질문 “...왜 생중계할까”에 대해 답하려 한다. 국민의 언론 자유 즉 알 권리를 위해서다.

 

국민주권정부는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발표자와 질문하는 기자를 카메라가 번갈아 비추는 방식의 ‘쌍방향 브리핑’ 제도를 도입했다. 그늘에 숨어 권력과 짬짜미를 즐기던 일부 기레기들이 마치 언론의 자유가 침해되는 듯 수선을 피우지만 그 판단은 국민의 몫이다. 처음엔 낯선 제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일부 시민들이 과격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시간이 가면 그들도 차차 분노를 가라앉히고 제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윤석열 일당의 내란을 막아선 자랑스러운 대한국민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기사 인터넷판 화면 갈무리. 

 

내란수괴 윤석열은 취임 초에 도어스테핑이라며 출근길 문답을 시도한 적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별다른 해명도 없이 6개월 정도에 걸친 반짝 행사로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기자에 대한 질문 제한이나 윤석열의 정제되지 않은 발언 등으로 논란만을 불러일으킨 채 그야말로 허무한 정치쇼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특히 MBC 기자의 발언을 핑계로 기다렸다는 듯이 국민의 알 권리를 저버린 작태는 윤석열 내란 집단의 언론관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당시에도 질문자를 탓하며 언론 탄압을 자행하던 정권에 아부하던 자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방씨조선일보가 브리핑의 질이나 질의·응답 수준이 높아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고 걱정이다. 그런 예를 하나 들어야겠다. TV 조선 최민식 기자가 한 질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이재명 대통령이 노동자 사망사고가 잦았던 SPC 공장을 방문해 가졌던 토론회에서 나온 내용을 비틀어보려 일부러 던진 비뚤어진 질문이다. “앞으로 8시간을 넘어가는 초과 야근은 대한민국에서는 인정되기 어려운 것이라고 보면 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대통령의 뜻이 그런 방향인지 궁금합니다.” 억지나 심술만 가득하다. 질문을 참고 들어야 하는 국민이 화끈거린다. 국민은 그들을 믿고 질문권을 위임한 사람들이다. 이런 엉터리 질문을 해대는 자를 나무라지 않는다면 국민이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

 

브리핑을 지켜보면서 질문자들이 불편하기는 하겠다고 생각했다. 길지 않은 질의와 응답 가운데서 질문자와 답변자의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질문을 하면서 격에 맞지 않게 “말씀을 주셨다”라느니 “여쭤본다”라느니 하는 말이 튀어나온다. 내란수괴 윤석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외람이’가 쓰는 말투를 다시 듣고 있자니 화가 치민다. 국민은 여과 없이 진실을 밝혀내는 자리에 임하는 당당한 각오를 기대한다. 질문자의 수준이 적어도 세계 민주주의의 표본이 되는 대한국민 정도는 돼야 한다.

 

김 기자는 “어느 정도의 비판은 (기자가) 마땅히 감수해야 할 숙명이기도 하지만 인신공격이나 도를 넘는 조롱까지 견뎌야 할 의무는 없다”며 “특히 여성 기자의 경우 성적 폭력에 이르는 모욕을 겪는 경우도 일반적”이라는 언론노조의 입장을 보도했다. 과연 이 내용이 얼마나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반드시 새로 도입된 브리핑 방식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떳떳하다면 그야말로 언론 자유를 위해서 당당하게 대처하면 될 일이다.

 

김 기자는 또한 “‘본질은 기자가 실명을 밝히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대통령실 브리핑 내용이 충실해지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며 정치권의 입장을 전한다. 슬그머니 수치심이 올라온다. 대한국민의 수준을 함부로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따옴표를 했으니 누군가 이런 말을 직접 했다는 뜻이리라. 이런 인식을 가진 자가 정치권에 있다니 한심하다. 대체 대통령실 브리핑의 본질이 기자 실명을 밝히는 데 있다고 주장할 국민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망상에 빠져 있으니 아무렇지 않게 내란과 외환을 획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선일보 기사 인터넷판 화면 갈무리.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질문하는 기자는 주권자인 국민을 대신하는 것이다. 기자는 국민이 진실을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진실을 찾아내고 알리는 자리는 가시방석일 수 있다. 하지만 언제라도 뜻을 함께하는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또한 추상같은 꾸지람을 내릴 국민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에 하나 기자 개인을 드러내거나 자신이 속한 회사에 충성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 있다는 착각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훌훌 자리를 털고 나가면 될 일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다행히 ‘뉴스공장’, ‘취재편의점’, ‘고발뉴스’가 대통령실에 출입하게 되었단다. 방씨조선일보 주희연 기자가 7월 25일에 “대통령실 기자단에 ‘김어준 유튜브’ 들어간다”는 기사를 썼다. “정치권, ‘좋은 소리만 듣겠다는 것’”이라는 평을 곁들였다. 가난한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몹시 아픈가 보다. 하지만 방씨조선일보의 시샘은 쌍방향 브리핑 제도를 잘 알고 있는 국민에겐 먹힐 리 없다. 이번에 대통령실에 새로 들어가게 된 출입 기자들은 새 바람을 일으켜주길 바란다. 방씨조선일보가 실력이 딸려 정 버티기 어렵다면 제 발로 걸어 나오길 바란다.

 

다시 방씨조선일보는 폐간만이 답이다.    <  이득우 언소주 정책위원·조선일보폐간시민실천단 단장 >

 

독립투사이며 반독재 민주투사 장준하 50주기

● Hot 뉴스 2025. 8. 3. 11:3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평생 반란세력에 항거한 그의 정신을 기리자

 

                                                    고상만 인권운동가(전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 사무국장)

 

장준하 선생은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1944년 중국에서 목숨을 걸고 병영을 탈출했다. 탈출 후 광복군으로 편입돼 미 OSS 훈련을 받고 국내 침투를 계획하다가, 급격히 이루어진 일본의 항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로 환국했다. 장 선생은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사상계> 잡지를 발행하는 언론인으로, 그리고 생애 막바지에는 제7대 야당 국회의원과 재야 민주투사로 줄기차게 박정희 독재에 맞서 싸웠다.

독립군 출신으로,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의 숙적일 수 밖에 없었던 그는 박정희 유신독재가 절정을 치닫던 1975년 8월 17일 인적 드문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독재권력이 내세운 공식 사인은 실족사였지만 민주진영에서는 아무도 그 발표를 믿지 않았다. 그의 두개골 후두부에는 둔기로 맞은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직경 6cm의 큰 함몰 자국이 있었다. 그는 조국의 광복과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일생을 바친 ‘대한민국의 진정한 애국자’였다.

 

중앙정보부 기록에서 명백히 드러난 장준하 탄압 흔적

 

나는 지금까지 몇 권의 책을 썼는데 그중에 두 권이 이 분, 장준하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한 권은 그의 40주기 되던 2015년에 쓴 평전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이고, 다른 한 권은 2003년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 조사관으로서 그의 사인 의혹을 추적한 책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이다. 나는 이 책을 쓰기 위해 1960년대 이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작성한 장 선생 관련 미행 사찰과 도감청 기록을 입수하여 샅샅이 살펴봤다. 이를 통해 박정희 독재 정권이 얼마나 악랄하게 장 선생을 탄압했는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고상만 지음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기록 중에는 장 선생이 집 안방에서 통화한 전화통화 내역도 많이 있었다. 일상의 소소한 통화조차도 중정은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장 선생이 어디를 갔으며 누구와 만났는지는 기본이었다. 이처럼 자신이 철저히 감시되고 미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장 선생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집에서 마당 변소간(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감시받으며 살고 있다”고 호소할 정도였다. 특히 1973년 12월 장 선생이 주도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일주일 만에 무려 30만 명의 국민이 참여하는 등 폭발적 반응을 일으키자 그 감시와 탄압은 극에 달했다.

 

그렇게 관련 기록을 읽던 중 나는 한 대목에 이르러 결국 분노로 인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잔인해도 이리 잔인할 수 있을까. 1974년 1월 26일에 있었던 장준하 선생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피의사건’ 증인신문 조서를 읽으면서였다.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꾼 유신 악법을 개정 이전의 헌법으로 돌려놓으라는 요구를 담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한 것이 장 선생의 죄였다. 처음엔 재판을 받는 장 선생이 인간적으로 진심 불쌍하다는 연민을 느끼다가, 마지막엔 독재자 박정희를 향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유죄 정해진 법정에 부인과 자녀를 증인으로 세운 독재정권의 잔인함

 

그러한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된 세 사람이 있었다. 장 선생이 구속되기 전, 74년 1월 11일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 도쿄 특파원 엘리자베스 폰드 기자와 <뉴욕타임스> 도쿄 특파원 비터 휠드 기자를 집에서 만나 유신헌법을 비난하는 인터뷰를 한 사실, 그리고 그에 앞서 74년 1월 9일 미국 대사관 소속 정치담당 2등 서기관 보드만의 숙소에 가서 면담한 사실을 입증할 증인이었다. 그들에게 유신헌법을 비난한 것이 죄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재판의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증인이 장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와 장남 장호권, 장녀 장호경이었기 때문이다.

 

알려진 것처럼 긴급조치 위반 재판은 형식적이었다. 민간인 신분임에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고 기소 자체가 이미 유죄였던 것이다. 그런 재판에 불리한 증언을 하라며 부인과 자식들을 증인으로 끌고 온 독재자 박정희. 그때 법정으로 끌려나온 처, 자식을 바라보고 있었을 장 선생의 심정을 생각하니 나는 정말이지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사랑하는 남편과 아버지의 구명은 고사하고, 해서는 안 될 진술을 강요당하고 있던 그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것을 두고 어찌 박정희 18년 통치를 ‘독재’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죄’로 구속된 장 선생은 군사 재판정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는다. 그의 나이 56세. 선고받은 징역을 다 살고 나오면 71세의 노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음모가 숨어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성인 남성의 평균 수명은 60대 초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건강도 좋지 않은 장 선생이 어찌 15년형을 다 살고 71세에 석방될 수 있을까. 결국 박정희의 진짜 목적은 장 선생을 영원히 감옥에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병중에도 투쟁 멈추지 않았던 장준하 선생

 

하지만 박정희의 음모는 무산된다. 1974년 12월 3일, 장 선생이 병보석으로 석방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미국이 장 선생의 즉각 석방을 외교적으로 압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 선생의 반독재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감옥에서 얻은 깊은 병에도 불구하고 장 선생은 감옥을 나오자마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실은 2004년 3월 어느 날, 당시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 조사관으로서 법정 스님을 길상사로 찾아갔을 때 직접 들은 것이다.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 스님의 증언이다.

 

“1974년 12월 말이었어요. 구속되었다가 11개월 만에 석방된 장 선생이 서울 종로 조광현 내과에 입원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습니다. 장 선생이 엄청 반가워하며 안부 인사를 나눈 직후 갑자기 부탁이 있다며 자신의 베개 밑에서 한 뭉치의 서류를 꺼내 저에게 건넸습니다. 그러면서 누구 누구를 만나 서명을 받아달라고 말했지요.”

 

나는 법정 스님의 말씀에 귀가 번쩍 트였다. 다가서며 “그것이 무엇이었나요?”라고 여쭙자 스님은 ‘유신헌법 개정을 위한 제2차 100만인 서명지’였다고 답하셨다.

 

그랬다. 나는 독재자 박정희가 왜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장 선생을 죽일 수 밖에 없었는지 법정 스님의 증언을 듣고 확신했다. 영구집권을 꿈꾸던 독재자에게 장준하는 결코 살려둘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일상생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다가 인적 드문 포천 약사봉에서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의 민주주의 밑거름 된 장준하의 치열했던 반독재 투쟁

 

 

돌아가신 날로부터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렀다. 올해 50주기를 맞이하며 그 분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다양하게 준비되었다. 먼저 8월 11일(월)부터 17일(일)까지 국회 의원회관 3층 로비에서는 ‘장준하 아카이브 사진전’을 연다. 개막식은 11일(월) 오후 2시. 이어 같은 날인 11일(월) 오후 3시부터는 ‘집중 강연, 장준하를 말한다’ 행사가 개최된다. 국회 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리는 이 행사에는 이부영 전 의원(‘장준하와 한국 민주주의’), 손남훈(‘권력에 저항한 시대정신, 사상계’), 고상만 전 조사관(‘장준하 선생은 타살되었다’)이 차례로 강연한다.

 

또한 8월 17일(일) 오전 10시에는 파주 ‘장준하 공원’에서 <장준하 선생 50주기 추모제>가 거행되며, 같은 날 오후 5시에는 서울 안국동 소재 노무현 시민센터에서 ‘내 영혼 노을처럼 번지리’라는 주제로 <장준하 선생 서거 50주기 추모음악회>가 개최된다. 일제 식민지배와 독재권력에 일생을 통해 항거한 고 장준하 선생. 우리 역시 그의 정신을 잊지 않아야 옳지 않겠나. 이를 다짐하는 50주기 추모행사가 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함께 할 것을 기대한다.

다큐 '추적'은 고발한다, 이명박의 4대강 악행

● COREA 2025. 8. 3. 11:2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 다큐멘터리스트의 17년에 걸친 집념의 결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언론 쪽에서 종종 쓰이는 비속어 중의 하나가 ‘다구빨’이다. ‘다구’는 ‘(깡)다구’를 뜻하는 것이고 여기에 ‘빨’을 붙인 ‘다구빨’이란 깡다구를 구사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다구빨이 좋았던 인물은 예컨대 마이클 무어 같은 감독이었다. 그는 자신이 타겟(?)으로 삼은 인터뷰 대상을 향해 무조건 들이대는 인간이다. 그게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하는 질문이든, 화가 나게 하는 질문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원하는 답을 얻어 내는 데 있어 마이클 무어만 한 인간도 없다.

 

최승호 PD가 온 ‘다구빨’로 고발한 이명박이란 인재(人災)

 

 

한국에도 그런 인간이 하나 있는데 바로 최승호이다. 그는 대통령 이명박의 코멘트를 따기 위해 ‘뻗치기(카메라를 설치하고 무작정 기다리는 것)’를 하다 결국 질문을 하는 데 성공해 낸다. “이명박 대통령님. 오랜만입니다. (악수) 대통령님. 대통령님이 언론을 망친 주범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런 말을 얼굴에 대놓고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다큐 후반에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이자 4대강 개발론자였던 박석순을 따라붙는 장면도 최승호의 깡다구를 보여 준다. 박석순은 최승호의 질문을 부정하기 바쁘고 (“아, 내가 한 거 아니라니까!”) 최승호는 결국 짜증을 낸다. “아, 거기에 (당신) 직인이 찍혀 있잖아요?” 영화 거의 마지막에서는 감옥에서 겨우 2년여를 살다가 나온, 경호원에게 둘러싸인, 다 늙은 이명박에게 접근해, 역시 이제는 많이 늙은 최승호가 또 들이대기 시작한다. “운하 때문에 강이 저수지가 돼서 녹조가 창궐한다고 얘기합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명박은 공부 더 하고 오라고 그를 타박하고, 주변의 이명박 지지자들은 그를 밀쳐낸다. 최승호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최승호는 그런 사람이다. 다구빨이 좋은 프로듀서이다.

 

저널리스트이자 다큐멘터리스트인, 그래서 다큐 감독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그가 ‘다구빨’ 역작 다큐멘터리를 완성해 개봉한다. ‘추적’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제목 그대로 이명박의 4대강 운하 사업, 4대강 개발사업의 문제를 추적하는 내용이다. 그는 이명박 정권이 일으킨 환경 폐해를 2008년 그가 대통령이 될 때부터 추적해 왔다. 사실상 17년이라는 시간을 들인 작품이다. MBC PD 시절(<PD 수첩>)에 시작해, 해직당하고, 복직한 후, MBC 사장을 2년 지내다, 다시 재야로 나와 ‘뉴스타파’라는 대안 매체의 다큐멘터리 팀에서 고군분투, 와신상담을 통해 완성한 작품이다. 때문에, 이 다큐는 4대강 개발이라는 이명박 발 인재(人災)를 추적하는 얘기일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최승호 자신의 인생역정을 기록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지난 20여 년의 한국 정치사, 현대사를 담아낸 작품이기도 하다.

 

산더미 같은 영상 푸티지가 밝혀내는 이명박의 거짓말

 

 

17년을 한 작품에 매달린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 수 있다. 주변을 지치게 하기도 한다. 돈이 모자랄 때도 많다. 그건 일종이 역경이다. 그러므로 이 다큐는 한 개인이 겪은 역경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다큐가 진행되는 동안 최승호도 점점 늙어 간다. 그 모든 장면을 목도하게 되는 관객은 심각한 표정으로 영화를 보게 되겠지만 관객 틈에서 자신의 작품을 보는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장면 한 장면, 한땀 한땀 들인 자신의 노력이 기억날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진부한 단어로 치부되지만, 진정성이 느껴진다. 다큐 ‘추적’은 진정성의 힘을 지닌 작품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쓰게 되는 말이다. ‘다구빨’이 좋다.

 

20년 가까이 4대강 문제를 추적해 온 만큼 최승호는 무수하게 많은 인터뷰, 무수하게 많은 분량의 촬영을 했을 것이다. 독일 뮌헨의 이자르강까지 다녀왔다. 그 어마어마한 영상 파일들을 보면서 최승호는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원래 제작국 PD는 그림(영상)을 먼저 편집하고 이후 작가가 그 그림을 보면서 원고를 쓴다. 보도국 기자는 기사를 먼저 쓴다. 그리고 거기에 그림을 덮는다. 그래서 보도국 기자는 찍어 오지 않은 그림에 관한 얘기를 글로 쓰면 안 된다. PD와 기자는 영상을 만드는 방식이 다르다. 거꾸로이다. 최승호 PD는 이번에 기자의 방식을 택한다. 그는 이번 다큐를 마치 한 권의 책을 쓰듯 목차를 정하고 텍스트를 먼저 썼다. 아니 썼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추적’은 총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 신화, 2부 거짓말, 3부 추적, 4부 회귀 순이다. 이야기, 서사의 구성을 짜고 자신의 내레이션을 쓰고 또 그리고 그림을 찾아 편집했을 것이다. 그림이 있을지 없을지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푸티지가 있었을 것인가.

 

 

이명박이야말로 거짓말을 “아주 노래처럼 하지 않았나”

 

다큐 ‘추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사전 지식을 정확하게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운하와 보, 취수구 그리고 여울에 대해서이다. 특히 보(洑)와 취수구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보는 일종의 작은 댐이다. 수량과 유속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설치하는 구조물이다. 취수구는 강 주변의 전답용으로 또는 식수용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설치하는 파이프라인 같은 것이다. 둘 다 다소 너무 쉬운 내용이라 다큐는 그것에 대한 설명보다는 이 보가 만들어 내는 환경 폐해, 혹은 취수환경이 극악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보다 더 적극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물고기들은 여울을 옮겨 다니며 사는데 보는 여울을 파괴한다.

 

건설업자 출신인 이명박은 4대강(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 운하사업이라는 대토목공사를 통해 재래식의 축재를 꾀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미국산 소고기 파동 등으로 지지율이 급락하자 슬며시 운하란 단어를 개발이란 말로 바꿔치기 한다. 이명박의 가장 큰 문제는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그것을 자기 머릿속에 박제화한 후, 4대강 개발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아무것도 모르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최승호는 자신의 천적인 이명박의 모습을 여러 컷에 나누어 담고 있는데 그중 이명박의 이런 멘트는 실소를 낳는다. “아주 노래들을 해요, 노래들을.”

 

 

다큐 ‘추적’은 이명박의 자가당착의 누추한 거짓말과, 4대강 개발이란 허구에 동원된 어용 언론의 비루한 모습들을 연결한다. 4대강 운하가 반대에 부딪히자 4대강 개발사업으로 둔갑시키는 과정에서 언론을 길들여야 한다는 당시 이명박 정부의 판단은 조중동에게 종편 채널을 몰아주기, 정연주 KBS 사장 쫓아내기, 김재철이라는 정권의 나팔수를 MBC 사장에 앉히기 등등으로 결과했다는 것을 다큐는 두 눈 부릅뜨고 증언하고 있다. 모든 것은 하나의 지점에서 시작하며 그리하여 돌고 돌아 다 연결돼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4대강 문제는 지금의 한국 언론이 지닌 치사한 민낯의 바탕이 됐고, 그런 언론이 거꾸로 박근혜 정부와 윤석열이라는 괴물을 만들게 했다는 자각을 하게 만든다. 이 다큐는 그 흐름과 연결점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추적’이 왜 지난 20년의 한국 현대사 다큐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감독의 육성 경고 “(4대강 폐해) 수백 년 갈지 모른다”

 

 

4대강을 지키는 문제는 환경생태 운동의 차원이면서 동시에 고도의 정치성이 요구되는 것이며 그 때문에 PC(정치적 올바름)가 중요한 문제이다. 다큐 ‘추적’은 그 모든 걸 아우르는 작품이다. 오랫동안 공을 들인 만큼 최승호는 저널리스트로서 이번 다큐에 가장 많이 얼굴을 드러낸다. 자기 생각을 엔딩 부분의 셀프 인터뷰를 통해 드러내기도 한다. 그게 다큐의 정공법인지 편법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말마따나 “(4대강의 폐해는)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미래세대까지 이 문제를 안고 갈지도 모른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한다. 그의 허탈한 웃음이 꽤 자조적이다. 오래 공을 들인 다큐라면 보는 데도 좀 공을 들이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많은 극장에서 개봉하지는 못한다. 세상은 발품을 들여야만 바꿀 수 있다. 이 영화는 8월 6일 개봉된다.                             < 오동진 영화 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