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목회열매 하나님께 감사”

● 교회소식 2015. 6. 12. 16:52 Posted by SisaHan

은퇴 감사예배에서 은퇴사를 하는 정관일 목사


가든교회 정관일 목사, 은퇴 감사예배서 인사

“모든 분들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가든교회를 앞으로도 잘 섬겨주시기를 부탁합니다“
가든교회를 개척해 26년 동안 시무해온 정관일 담임목사가 성도들에게 마지막 은퇴인사를 하고 강단을 떠났다. 미주 한인예수교장로회(KAPC) 캐나다노회 주관으로 드린 은퇴 감사예배에는 이 교회 성도와 노회소속 목회자들 외에도 정 목사와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타교회 성도들, 동포사회 인사 등 각계 3백여명이 참석해 정 목사의 평생 노고와 목회공로를 위로-축하하고 복된 여생을 축원했다.


부노회장이며 가든교회 임시당회장인 최기정 목사(예본교회 담임) 인도로 드린 예배는 장로부노회장 이경석 장로(빌라델비아 장로교회)의 기도와 가든 성가대 찬양에 이어 노회장 송영인 목사(코너스톤교회 담임)가 ‘택함 받은 종’(시 78: 67~72)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송 목사는 “별 볼 일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기름부음 받은 다윗은 왕의 권세로 못된 일도 많이 했으나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고 회개하며 목자라는 본분을 잃지않아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찬을 들었다”면서 “정 목사님도 선택받은 목자로 평생 수고하며 때론 넘어지고 실수도 있었겠지만 아름다운 모습을 남기고 은퇴하며 하나님께 기쁨을 드려 축하드린다”고 격려하고 “은퇴로 끝남이 아닌 변함없는 목자로 수고를 다하여 착한 종이라는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으시라”고 말씀을 전했다.



허헌 장로가 전별금을 전하고 있다.


은퇴사를 한 정관일 목사는 “오지에서 고생만 하다 천국에 간 분들도 많은데, 한국을 포함해 43년의 목회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기도와 헌신으로 함께 해주신 성도분들께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정 목사는 “아쉬운 단 한가지는 모세처럼 후계자를 잘 세워 이취임을 해야 하는데 후임목사를 모셔놓지 못하고 떠나게 된 것”이라며 후임 청빙문제로 잠시 힘든 과정이 있었음을 비치고 “큰 회사들은 3/4이 후계를 잘못 세워 무너진다고 할 정도다. 서둘지 말고 참 인간,인격자를 세우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 “하나님 주권대로 가면 잘 될 것”이라고 가든 성도들에게 당부했다.


가든교회 허헌 장로는 송사를 통해 “37년간 신앙생활을 함께 해 오신 사랑하는 목사님 은퇴에 섭섭함을 금할 수 없다”고 울먹이고 “눈물의 기도로 교회를 오늘까지 이끌고 성도들 영적 성숙과 진리를 가르치는데 애쓰셨는데, 목회현장은 떠나지만 부디 건강하며 더 좋은 사명 감당하시기 바란다“면서 교회가 마련한 전별금을 전했다. 정 목사는 전별금으로 십일조를 내고 다시 1/10은 아이티 선교에, 그리고 40%가 넘는다는 세금을 제하고 나머지도 선한 일에 쓰겠다고 밝혔다.

교회의 은퇴감사패, 노회의 공로패 등이 전해진 뒤 예배는 참석자들의 ‘내 평생 소원 이 것뿐’(450장) 기립찬송에 이어 김경진 목사(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의 축도로 마쳤다.


< 문의: 416-490-9060 >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든지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주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인생 황혼기에 접어 들면서 나도 부름 받은 성도인가? 반추하게 된다. 그렇게도 많은 은혜 가운데 살았으면서도 원망과 불평 속에 살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가고 있건만 스스로 교만하고 절망하고 낙심하며 때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망각하면서 세상 것만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떠는 불신앙적인 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은혜 앞에서 밝은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미련하게도 험악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낙심하며 아무 뜻도 새롭게 거듭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이제는 주님께서 강한 팔로 때로는 능력으로 붙들어 주셔서 신령한 생활 경건한 생활로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올린다.


신령하고 경건한 믿음생활의 새로운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오직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도인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고전2:2). 십자가 사건은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인 것이다. 반대로 불신자들 즉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믿는 자들을 미련한 자들로 보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소위 지혜롭고 총명한 믿는 백성이라 칭하며 입과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마음으로 멀리 떠나있고 인간의 지혜와 총명 그리고 계명에 따라 경외한다고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대해 기이하고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고 하시며 그들 중에서 지혜자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사29:14).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고전1:19).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도 없으나 알지 못하게도 하셨다. 철학적, 논리적 지식, 또한 표적 등의 인간적 지혜인 세상 지혜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알 수 없도록 폐하시고는 세상적인 지혜와 총명의 가식적 믿는 자들이 미련한 자들이라고 인정하는 부름받은 믿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십자가의 도 즉 구원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셨다.
오늘날 세상을 바라 보노라면 한마디로 험악한 세상이다. 불법과 불의, 반목과 대립, 거짓과 술수, 더욱이 믿음과 사랑은 조금도 찾아보기 힘든 세상에서 신자나 불신자 모두가 근심과 걱정 좌절로 활력이 없이 어두운 모습의 삶을 볼 때 가슴이 아플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슬픔과 고난을 당함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고달픈 삶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가치도 없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나라가 갑자기 도래하는 날에 그 가치를 인정 받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현세적인 삶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도록 노력해야 하는 순례의 과정임을 깨닫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은혜와 평강 속에서 반드시 승리 해야만 할 것이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7:23-24).

< 이승고 - 토론토 영락교회 장로 >



99명이 행복하고 1명이 불행할 때 자본주의에 물들은 사회는 그 불쌍한 1명을 희생 제물로 삼는다.
사고가 일어나고 적어도 한 번에 몇 백명이 희생당해야 사회가 조금 술렁인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메르스 사태에 현재까지 적은 희생자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가운데 파장이 커지는 이유는, 내가 바로 그 1명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들의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작은 교회 목회를 하다보면 문제 가운데 있는 1명의 성도 때문에 설교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그래서 가끔 상상해 본다. 1명 정도는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많은 성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니면 1명 정도 보이지 않아도 무시하고 설교를 할 수 있는 담대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고민하고 싶지않고 괜한 일에 말려 귀찮은 일을 해야하고 싶지 않다. 1명 정도는 무시해도 교회는 굴러간다.
여전히 성실히 봉사하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있고, 사랑의 교제가 있으며 우리들은 화목하고 교회는 안전하다.
다수결의 원칙이 익숙한 사회와 교회에서 우리는 1명의 불행을 돕기 위해 다수가 희생하는 일들은 쉽게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소수의 부와 권력을 위해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죽음을 강요하는 지배자가 많고 교회 안에서도 존재한다.

성경은 99마리의 양들을 들판에 버려두고 잃어버린 1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예수님의 목양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참 바보같은 결정을 하신 것이다. 99마리를 떠나 1마리를 위해 험한 곳을 찾아다니는 위험과 희생을 선택하신 것이다.
특정한 한 마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 그렇게 백 마리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으로 목회가 이루어지고, 정치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면 아마도 목사의 숫자와 정치가의 숫자는 엄청나게 줄어들 것이다.
99마리에 속해 있으면서 잃어버린 1마리를 위해 희생하는 목회를 따라야 한다면 아마도 성도의 숫자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길을 걸으셨다. 리더는 희생으로 다스리는 것이라고 그 길을 몸소 보여 주시고 제시해 주셨고,
이제 이 땅에 숨 쉬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99마리의 안정을 떠나 잃어버린 1마리를 찾아 나서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 명령에 순종한 분들에 의해 신앙은 전해지고 이어져 우리에게로 왔다.
1마리의 양을 소중히 여기듯 백성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지도자 때문에 우리에게 자유와 평등이 허락된 것이다.
우리들의 기쁘고 풍성한 축제 시간에도 예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1마리의 양을 바라보고 계신다.

< 임함남 목사 - 베다니침례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연리지 나무

● 칼럼 2015. 6. 12. 16:45 Posted by SisaHan

은퇴를 하자고 조른 건 나였다. 남편은 그런 내 생떼를 3년간이나 잠자코 견뎌냈다. 아마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서양 명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부활절)이 오면 서툴지만 서양식 명절식단을 마련하려고 애를 썼었다. 이 나라의 풍습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이곳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했었다. 내 자식들에겐 이 캐나다가 모국이니 말이다. 그런데 번번히 만찬을 차려놓고도 네 식구가 함께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의 자리는 늘 비어 있었고, 가게를 닫은 한밤중에서야 혼자 늦은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20년을 훌쩍 넘기고 보니 어느 새 자식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었다. 왜, 무엇을 위해, 온 가족이 식사도 같이 할 수 없는 생업을 지속해야 하는지 그 명분을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아직 건강할 때, 더 늦기 전에, 그간 잃어버린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누려보고 싶은 갈망만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은퇴하면 무엇을 하며 살까 고민하던 남편의 주저는 기우였다. 날마다 얽매인 스케줄로부터의 자유, 가게 운영상에 생기는 문제로부터의 자유, 무엇보다도 시간적으로 여유로우니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피로하면 아무 때나 쉴 수가 있고, 오랫동안 미뤄놨던 일들도 처리할 수 있었다. 아침이면 토스트, 요구르트, 과일을 곁들여 커피 한잔과 느긋하게 들며 새벽에 배달된 신문을 자세히 살펴 읽는 즐거움도 컸다. 가끔 창 밖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벗삼아 호숫가와 숲 속을 산책하는 여유도 싱그러웠다. 식사 때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그 나머지 시간은 아래층과 위층에서 각자 다른 생활을 한다. 간간히 친구가 생각나면 전화를 잡고 수다도 떤다. 저녁에는 함께 한국인 드라마로 다양한 삶의 모습을 접하며 메마른 감성을 적셔보기도 한다. 몸이 뿌듯하면 운동 삼아 탁구도 치고 골프도 함께 간다. 손주들이 보고 싶으면 영상통화를 하거나 장거리를 달려가 만나는 기쁨도 나눈다. 이 모든 일들은 은퇴하지 않으면 절대로 누릴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니, 얼마나 적절한 때 은퇴를 결단했는지 퍽 다행스럽기만 하다.


언젠가부터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 부부의 모습이 연리지(連理枝)나무를 연상케 한다. 연리지 나무란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진 이웃 나무끼리 가지가 서로 붙어서 결이 하나로 이어진 것을 말한다. 일명 사랑나무로 불리며 연인과 부부의 영원한 사랑을 상징한다. 두 나무의 가지가 만나면서 서로 문질러 껍질이 터지고 생살이 뜯기면서 점차 상처가 아물어 같은 나이테를 갖는다는 연리지. 그 과정에서 껍질이 파괴되고 안쪽으로 밀려나 맨 살끼리 닿게 되면서 서로의 나무세포가 갈라지는 고통을 인내해야 한다. 이런 고통을 10년이나 견뎌야 비로소 연리지 나무의 특징인 서로의 영양분을 공유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신비로운 자연의 조화인가. 마치 남녀간의 사랑이 많은 장벽을 거치면서 완성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나무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그것은 수십 년 동안 갖은 불화와 갈등을 아우르며 평탄하게 살아가는 노년의 부부모습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실제로 다정스런 노부부를 보면 성격도 얼굴도 많이 닮아 보인다. 그 이유는 모난 돌이 세월에 닦여 동글동글한 조약돌로 변형되듯, 서로 부딪히면서 인내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며 타협을 배우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연리지 나무 같은 결혼생활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은 철저하게 각자의 영역을 구분하며 서로 구속하지 않는 결혼생활에 가치관을 두는 것 같다. 우리 세대처럼 인내와 희생을 무조건적으로 하지 않고 쉽게 이혼을 결정하는 경향이 아닌가. 어쩌면 무턱대고 참고 견딤을 미덕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우리세대가 비합리적일 수도 있겠다. 하여, 근래에 부쩍 많아진 황혼이혼도 충분히 이해가 갈만도 하다. 다만 은퇴 후 나의 일상은 한 나무가 부실할 때 서로 영양분을 주고 받으며 공생하는 연리지 나무를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요즈음 와서야 깨달아가고 있을 뿐이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뀔 세월을 함께 산 부부이니 오죽하겠는가. 한때 상대방을 위해 살아가는 줄만 알고 억울해 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 역시 나 자신을 위한 길이었으니, 얼마나 새로운 깨우침인가. 이제서야 남편의 건강과 행복을 내 것인 듯 챙긴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