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불을 질렀다. 화끈하다. 국민 대다수가 ‘속 시원하다’고 환호한다. 하지만 후과는 크다. ‘역대 대통령 중 최초 독도 방문-일본의 국제 영향력 저하 발언-일왕 사과 요구 발언’의 3종으로 이뤄진 대일 강공 세트가 한-일 관계에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이 대통령의 의도와 관계없이 한-일 관계의 재구성은 불가피해졌다. 갈등을 빚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얼렁뚱땅 복원되곤 했던 그런 시대는 갔다. 미국의 전후 냉전전략 아래 불완전한 과거청산과 경제지원의 교환 형태로 성립한 1965년 한-일 협정 체제가 수명을 다한 것이다.
이 대통령이 결정타를 날리긴 했지만, 한-일 관계 1.0판인 65년 체제에 근본 의문을 제기하는 움직임은 사법부에서 먼저 시작됐다.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을 질타하는 2011년 8월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판결,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5월의 대법원 판결이 바로 그것이다. 가장 보수적인 사법부가 이런 판결을 내놨다는 건 65년 체제를 뒤엎으려는 시민사회의 힘을 국가가 더는 외면·무시·억제할 수 없다는 걸 뜻한다. 한마디로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한-일 국력이 100 대 1이던 시절에 맺은 협정을 5 대 1로 좁혀진 시대가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
국력 차의 축소와 함께 민주주의와 인권의식의 성장도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강력한 힘이다. 일본 쪽이 성노예 해결책으로 ‘총리 사과 편지-재정지출을 통한 위로금 지급-주한대사의 피해자 방문 사과’라는 나름의 전향적인 안을 제시했지만 피해자들은 ‘국가 책임’을 요구하며 한사코 거부했다. 금전·인도·정치라는 실리보다 법과 인권이라는 명분이 우선이란 얘기다.
이 대통령의 ‘거사’ 이후 일본 쪽 움직임도 65년 체제를 단순 복원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일본 여야가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배려외교의 중단’은 앞으론 과거에 대한 부채의식에 구애받지 않고 상대하겠다는 선언이다. 한-일 협정 이후 처음으로 꺼내든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53년 이승만 라인 선포 이후 처음 채택된 한국 비난 의회 결의안은 그런 행동의 첫걸음이다. 더욱이 성노예의 국가 관여를 인정한 고노 담화조차 수정해야 한다는 정치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실정을 고려하면, 앞으로 일본의 역주행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태껏 한-일 관계를 규정해온 65년 체제를 대신할 새 체제를 건설하는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시대의 요청이다. 해병대의 독도 상륙훈련 중단과 이 대통령의 일왕 사과 요구 발언 해명과 같은 미봉책과, 물밑 막후 창구 가동을 통한 관계 복원 같은 전통 수법으로는 막을 수 없는 큰 변화가 이미 발밑에 닥쳐왔다. 영토 문제에서 정면대응을 불사하는 중국의 달라진 태도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이 더는 ‘접바둑’을 둬 주지 않겠다고 나온 마당에 우리가 과거의 편의적 관계로 돌아가자고 매달릴 필요는 없다. 새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새 틀을 짜자고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특히, 65년 협정에서 배제한 성노예,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문제에 대한 근본적 책임을 적극 제기해야 한다. 당시 미국의 압박, 국력의 차이와 내부 사정으로 꼼꼼히 챙기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도 재론에 부쳐야 한다.
다음 대통령은 땜질식 처방이 아니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각오로 대일정책 2.0을 들고나와야 한다. 그래야 할 말은 하되 협력할 건 하는 진정한 우호관계가 열린다.
< 오태규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
'●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 새겨들어야 할 전 대법원장의 유신 강의 (0) | 2012.10.02 |
---|---|
[한마당] 정치의 교사와 반면교사 (0) | 2012.10.02 |
[1500자 칼럼] 가을비 내리던 날 (0) | 2012.09.24 |
[사설] ‘측근 비리’ 외면하면서 정치쇄신 되나 (0) | 2012.09.24 |
[사설] 특검 거부는 “피의자가 검사 바꿔달라는 꼴” (0) | 2012.09.24 |
[한마당] 유신의 후예들이 할 수 없는 것 (0) | 2012.09.24 |
[1500자 칼럼] 스쿠발로지 (0) | 2012.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