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스마트폰과 인간의 퇴화

● 칼럼 2015. 3. 7. 18:0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얼마 전에 시내에서 저녁을 사 먹을 일이 있었다. 작은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청소년 남매와 어머니로 보이는 일가족이 들어왔다.
그들은 음식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각자 스마트폰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고 말없이 무언가에 열중했다. 음식이 나오고 그것을 다 먹을 때까지 30여분 동안 그 가족은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조용히 음식값을 치르고 식당 문을 나설 때까지 그 가족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말은 음식을 주문하는 소리와 어머니가 작업 중에 외부의 누군가와 통화한 것뿐이었다.
그들은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앉아 귀찮은 밥 문제를 각자 해결하고 있었던 셈이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70%를 넘었다거나 이미 5천만대가 보급되어 있다고 하는 우리 현실에서 이런 풍경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고 훨씬 충격적인 일들도 다반사다.
대학 1학년인 딸아이가 방학 동안 집에 와서 하는 일을 보면 이해가 될 듯하다. 녀석은 자정이 넘도록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받다가 머리맡에 둔 전화기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잠자리에 드는 게 생활화되어 있다. 농촌의 겨울인지라 아침 식사가 늦음에도 녀석은 가족과 함께 밥 먹는 것을 귀찮게 여기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면 머리를 맞대고 밥을 함께 먹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나로서는 꽤 당황스런 일이었다.
스마트폰이 생활화된 아이들에게는 함께 살아가는 가족도 식구가 아닌 것 같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밥 먹는 일조차도 함께해야 할 일로 여기지 못하는 이들에게 연대나 공동체, 더 근본적으로는 타인과의 ‘관계’와 같은 낱말들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스마트폰이 일반화되면서 사람들은 참고 기다리거나 궁금해하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궁금한 것들은 무엇이든 자판기처럼 즉석에서 답을 얻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전한 소식에 응답을 기다리는 일이나 낯선 곳을 찾는 것도 그렇고 모르는 지식을 알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다.
불과 한 세대 전에 그랬듯 친구에게 편지를 띄우고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그의 삶을 궁금해하며 그를 그리워하는 것은 마냥 헛된 일일까. 목적지를 찾지 못해 주민에게 길을 묻고 그의 친절한 안내에 고마워하는 일은 없어져야 할 불편일까.
고성능 카메라를 겸하고 있는 스마트폰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한다. 맛있게 차려진 음식을 보면 그 맛을 음미하기보다는 사진 찍기에 바쁘고, 아름다운 경관 앞에서나 문서화된 지식 앞에서도 그렇다.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 나중에 다시 꺼내보기 위해 눈앞의 것들에 몰입한 뒤 놓아주는 대신 자신만의 창고에 쌓아두느라 바쁘다.


나는 최소한 중학교까지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아이들의 생활은 물론 학습에서도 쓰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정신과 육체는 별개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자라야 한다. 글씨는 손으로 써야 하고 몸을 부딪치며 뛰놀아야 하고 도구를 손에 쥐고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길게 보면 아이의 지적 성장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학교의 교육과정은 절반 이상이 예체능을 포함해서 몸을 쓸 수 있는 활동으로 채워져야 마땅하다.
 나는 어려서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연필을 참 많이 깎았다. 연필 깎는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칼과 연필을 쥔 양손이 유기적인 협조를 이루어야 멋지게 해낼 수 있다. 샤프 연필이 나오면서 연필을 깎아야 하는 수고는 사라지게 됐지만 오랫동안 연필을 깎았던 손놀림은 어린 시절에 균형과 조화에 대한 감각을 기르는 데 꽤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 김계수 언론인 >



“아름답고 멋진, 좋은 교회를 간구”

● 교회소식 2015. 3. 7. 17:5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주만기 담임목사 위임식에서 서약하는 샬롬한인장로교회 성도들.


샬롬장로교회 주만기 담임목사 위임예배 드려

샬롬 한인장로교회(274 Weston Rd. Toronto, M6N 3P5)가 주만기 담임목사 위임 감사예배를 지난 2월22일 주일 오후 성도들과 축하객 등이 모인 가운데 드렸다.
대한 예수교장로회(대신) 캐나다노회(노회장 김성수 몬트리올 한인사랑장로교회 담임목사) 주관으로 드린 이날 예배는 김진현 목사(화평교회 담임)의 사회로 김시철 장로가 기도하고 노회장인 김성수 목사가 ‘하나님을 스폰서로 삼아라’(롬 4:17~18)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확고하게 믿으며 기도로 간구하면 하나님이 스폰서가 되셔서 상상할 수 없는 큰 축복을 부어주신다”면서 “하나님을 스폰서 삼아 승리하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라“고 말씀을 전했다.


이어 김성수 목사 집례로 위임식이 이어져 주만기 목사와 교우들의 서약이 있은 뒤 김 목사가 기도하고 선포했다. 송창규 목사(한인 등대교회 담임)가 권면을 통해 하나님만 바라보고 목회에 헌신할 것을 조언했으며, 유윤호 목사(성산장로교회 담임)가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주 목사는 인사에서“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성된 종으로 헌신하며 성실한 목회에 최선을 다하여 아름답고 멋지고 좋은 교회를 만들어가겠다”면서 많은 기도와 격려를 부탁했다. 예배는 한태관 목사(오로라 광성교회 담임)의 축도로 마쳤다. 이날 남성중창단 라파체와 성산교회 난타팀이 축가와 연주를 했다.


주만기 목사는 한국 관동대학교를 졸업하고 틴데일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M.Div)를 받았으며, 풀러신학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샬롬장로교회에서 전도사 및 강도사로 사역했고 성산장로교회에서 부목사를 맡아왔다.


< 문의: 416-898-0908, 416-766-8665 >




캐나다 외환은행(KEBOC: 행장 방기석)이 최근 리치몬드힐 지점(지점장 이창희: 9625 Yonge St.)과 베이뷰 출장소(출장소장 강영분: 22 Rean Dr.) 개설을 자축하는 그랜드 오프닝 기념식과 만찬을 2월27일 오후 다운타운 리츠칼튼 호텔에서 모국 본행에서 통합이 추진되고 있는 하나금융그룹(지주)의 김정태 회장과 권오훈 본행 부행장, 이우공 이사회 의장 등과, 이진수 한인회장 등 한인사회 각계인사, Chungsen Leung 연방의원을 비롯한 정계인사 등 150여 명을 초청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했다.


이날 세레모니는 권오훈 부행장의 환영사로 시작, 방기석 KEBOC 행장이 지점개설에 대한 경과보고를 하고 지점장들을 소개했으며,각계 축사에 이어 김정태 회장 등이 단상에 늘어서 박수 속에 리본을 커팅,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홍보영상과 축하공연 등으로 분위기를 돋운 KEBOC는 이 자리에서 Godwin Chan 리치몬드힐 시의원에게 기념패를 전했고, 조성준 토론토시의원 등은 축배를 제의했다.
KEBOC는 이번 지점 증설로 GTA 6곳을 비롯, 밴쿠버(4)와 캘거리(1) 등 캐나다 전국에 모두 11곳의 지점을 갖게 됐다.

< 문의: 416-227-5595>



[기쁨과 소망] 비겁과 비굴, 그리고 비천

● 교회소식 2015. 3. 7. 17:3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비’자로 시작되는 단어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이 중에 둘은 아주 안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하나는 좋은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비굴하다는 것과 비겁하다는 것은 비슷한 의미처럼 혼용해 사용하고 있지만, 사전적 의미로는 어감이 다르다고 한다. 풀어본다면 비굴이라는 말은 ‘자신의 주장이나 지조를 버리고 남을 따르기 쉽다’는 의미이다. 반면 비겁하다는 말은 ‘성품이 너그럽지 못하고 생각이 좁고 성품이 고상하지 못해 천박하며 무서워하는 마음이 많다.’를 의미한다. 우리 한국 문화는 절대 권위, 절대 아부의 문화라고 볼 수 있다. 수직적 문화 속에서 형성된 우리들 삶의 모습이다. 그래서 귄위를 가진 자는 비겁하기 쉽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실력이나, 성품이 아니라 권위를 내세우는 일이다. 자리가 주는 권위를 이용하여 아랫사람들을 누르려고 한다. 즉 비겁하게 행동한다.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비겁함이다.


그러나 권위를 대하는 아랫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것은 바로 비굴함이다. 권위 앞에서 아부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절대적 아부를 드러내려고 한다. 자신의 개성이나 권리까지 포기하면서 상관의 뜻에 굴복하려고 한다. 이것이 비굴함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눈치 빠른 사람, 알아서 기는 사람만이 생존할 수 있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능력 있는 부하는 제거 당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비겁한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왜 갑과 을의 갈등이 생겨날까? 바로 이러한 사회적 구조 때문이다. 강하게 해야 말을 듣는다는 사회구조, 아부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사회구조 속에서는 갑과 을은 항상 긴장과 갈등의 상황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서로 협력관계, 상호동반관계가 아니라 대적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천’이라는 말을 하나 해결책으로 제시해보았다. 이 비천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나온 말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 빌립보서 4:12에서 사용한 말이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 바울의 이 말은 자신이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고 또 부요하게 살아도 비겁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 말은 바로 을의 위치에 있어도 기죽지 않고 또 권위의 자리, 갑의 자리에 있더라도 교만하지 않고 비겁한 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비결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11절에서 이미 말씀하고 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는 말에 답이 있다고 본다. 자족한다는 말은 어떠한 자리, 어떤 환경,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능력이 넘쳐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자신감이다.


이러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남을 배려할 줄 안다. 자신의 모자람을 알기 때문이다. 남을 배려하는 사람은 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비겁, 비굴이라는 부끄러운 모습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극도의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는 모습을 본다. 자기 중심사회는 배려가 없는 사회이다. 가난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또 부요한 사람까지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에 행복의 자리가 들어갈 공간이 있을 것이다.

< 강성철 목사 - 우리장로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