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단체들 “한국이 과거 외면하면 일본 역사부정 가속화”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가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80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참석자들과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연합
 

역사 관련 시민단체들이 이재명 대통령의 15일 광복절 경축사의 대일 메시지와 관련해 “역사정의 실현 원칙이 빠졌다”고 비판했다.

 

한-일 과거사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시민단체가 모여 발족한 ‘역사정의와 평화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공동행동’(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역사정의 실현 원칙이 빠진 이재명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경축사에는 일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피해자들이 오랫동안 염원해 온 역사정의 실현이라는 대원칙이 담기지 않았다”며 “대신 일본과의 ‘미래 지향적 관계’만이 강조돼 깊은 실망을 금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실용외교’라는 이름으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전쟁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배상이라는 원칙조차 밝히지 않은 미래 지향은 공허하다”며 “이재명 대통령은 강제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광복 8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못한 역사 현안에 대한 구체적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지금이야말로 일본 정부에 과거사 해결의 원칙을 명확히 제시하고 도덕적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대일 외교에서 주도권을 확보할 수 없다”며 “피해자와 국민이 바라는 것은 단순한 ‘존재 확인’이 아니라, 80년간 지연된 역사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가해 책임을 인정하고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밝혔다.

 

또 이 단체는 “한국 정부가 과거를 외면한 채 미래만을 강조한다면, 일본의 역사부정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며 “실제로 이재명 대통령이 경축사를 발표하는 순간,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조선인 피해자 2만1천여 명이 에이(A)급 전범과 함께 무단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했고, 일본 정치인들은 참배했다”고 지적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도 한겨레에 “광복 80년에 걸맞은 명확한 대일 과거사 원칙이 제시되지 않았다”며 “한일 정상회담 때 과거사 문제 해결 없이는 양국이 진정한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만들기 힘들다는 명확한 원칙이 제시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날 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과 미래지향적인 상생협력의 길을 모색하겠다”고 밝혔지만,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가 과거 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양국 간 신뢰가 훼손되지 않게 노력해줄 것을 기대한다”며 일본의 성의를 바란다는 수준의 메시지를 냈다.                                                               < 신형철 기자 > 

 

‘광복 80년 평화 · 주권 · 역사정의 실현 8·15범시민대회 추진위원회’가 개최

 

 
 
15일 서울 중구 숭례문 앞에서 열리는 8·15범시민대회 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태극기와 각양각색의 깃발을 들고 집회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다. 정봉비 기자
 

“오늘 우리는 탄핵광장 승리 속에 광복 80주년을 맞이합니다. 12·3 계엄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극복한 우리는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승리자입니다.”(윤복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

 

깃발을 든 기수들이 일렬로 무대 쪽으로 이동하자 ‘다시 만난 세계’가 흘러나오며 시민들은 환호했다. 약 5개월 전 경복궁에서 ‘내란 청산’을 외치던 시민들이 또다시 각양각색의 깃발과 응원봉을 들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숭례문으로 모였다. 내란을 딛고 처음 맞이하는 광복절. 이들은 미국의 통상·안보 압박과 일본과 극우 세력의 역사 왜곡,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위기를 극복하고 80년 전 그때처럼 나라의 주권과 평화를 다시 세우자고 외쳤다.

 

자주통일평화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독립유공자유족회 등 시민단체로 구성된 ‘광복 80년 평화·주권·역사정의 실현 8·15범시민대회 추진위원회’(8·15 추진위)는 15일 서울 중구 숭례문 앞에서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집회를 열었다. 시민 약 5천여명(경찰 비공식 추산)은 “평화주권 역사정의 실현하자”, “트럼프의 동맹수탈 저지하자”, “빛의 광장에서 주권과 평화로 나아가자”는 구호를 외쳤다.

 

이날 집회에는 다양한 시민사회 대표들이 무대에 올라와 “유례없는 트럼프의 경제 압박과 일본의 역사 부정, 분단 체제의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 위기 속 평화와 주권, 역사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외쳤다. 윤 회장은 “계엄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전쟁까지 기획하고 혐오를 선동해온 극우 내란세력은 수십년간 분단 체제에 기생해온 세력”이라며 “적대와 대결, 혐오를 강요해온 분단 냉전의 정치 체제 안에서 민주주의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이번 내란 사태가 보여줬다”고 말했다.

 

이나영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공동대표는 “또 다른 을사년인 올해 우리는 치욕과 아픔의 역사를 직시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해야 한다”며 “아직 어둠 속에 묻혀있는 식민지 전쟁범죄 피해를 총체적으로 밝히고 역사를 교묘히 비트는 극우세력의 조직적 음모를 철저히 분쇄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첫걸음이자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필수 조건”이라고 했다. 이태호 시민평화포럼 운영위원장은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주한미군, 나아가 한미군사동맹의 대응 범위를 한반도만이 아니라 대만까지 포괄하는 주변 지역으로 확대하자 주장한다”며 “대립과 적대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한미일 연합 군사 훈련은 중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집회를 마친 뒤 시민들은 숭례문을 시작으로 시청역과 을지로입구역, 종각역을 거쳐 동십자각 방향으로 행진을 이어갔다. 8·15 추진위는 일본대사관과 미국대사관이 있는 광화문 앞으로 행진할 계획이었지만 경찰의 일부 제한 통고로 동선을 변경했다. 행진 구간 인근인 광화문 광장에서 ‘제21대 대통령 국민임명식’ 행사가 열리고, 외교기관 인근에선 집회·시위를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8·15 추진위는 서울행정법원에 집행정지 가처분을 신청했지만 기각됐다며 “헌법상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처분이며, 광복절에 일본대사관과 미국대사관으로 행진조차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치적 판단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 정봉비 기자 > 

 

‘집사 게이트’ 수사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

 

 
 
윤석열 전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여사의 ‘집사’로 지목된 김예성씨가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
 

김건희 여사 일가의 집사로 불리는 김예성씨가 이노베스트코리아 등 회삿돈 수십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됐다. 민중기 특별검사팀은 김씨가 부당이득을 챙긴 배경에 김 여사와 오래전부터 이어온 친분이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보고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다.

 

특검팀은 15일 밤 12시께 “김씨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노베스트코리아와 자신이 사내이사로 근무했던 아이엠에스(IMS)모빌리티 등의 회삿돈 33억8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는다. 먼저 특검팀은 김씨의 부인이 유일한 사내이사인 이노베스트코리아의 자본 24억3000만원을 조영탁 아이엠에스 대표에게 빌려주는 형태(대여금)로 회삿돈을 빼돌렸다고 보고 있다. 또한 특검팀은 김씨가 이노베스트코리아의 돈을 자녀 교육비 등으로 유용했다며 김씨 아내가 받아간 월급 등을 횡령액에 포함했다. 비마이카(아이엠에스 전신)가 당시 용역을 수행할 능력이 없던 이노베스트코리아 등 김씨와 관련된 법인에 허위 용역비를 지급한 혐의도 있다.

 

김씨는 이날 영장실질심사에서 ‘특검팀이 별건 수사를 하고 있다’고 반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와 김 여사의 연결고리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김씨의 개인 횡령에 초점을 맞춰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특검팀 쪽의 손을 들어줬다.

 

특검팀이 베트남에서 머물다 귀국한 김씨의 신병을 확보하면서 이른바 ‘집사 게이트’ 수사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앞서 특검팀은 아이엠에스가 2023년 카카오모빌리티와 에이치에스(HS)효성 등 기업들로부터 184억원을 투자받은 배경에 김씨와 김 여사의 친분이 있다고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김씨는 기업들이 일종의 ‘보험성 투자’를 하며 회사의 경영상 위험을 해결하려 했다는 의혹의 ‘키맨’인 셈이다. 특검팀은 이 과정에서 김씨가 46억원가량의 부당 이득을 봤다고 의심하고 있다.


김씨는 2010년 무렵부터 김 여사와 인연을 맺고 김 여사가 운영하는 전시업체 코바나컨텐츠 감사로 일했고 김씨의 모친인 최은순씨의 잔고증명서 위조에 가담해 형사처벌을 받기도 했다.                                                              < 
김가윤 기자 >

광복 80주년, 태극기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 Hot 뉴스 2025. 8. 16. 00:2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소음과 폭력으로 오염된 태극기 되찾아와야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우리는 흔히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 조약이 1876년 일본과 체결했던 강화도조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 태극기가 등장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조선이 이 조약을 교린관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조약체결에 반대하는 보수 유생들에게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잇는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하였어요.

 

1882년 조미조약 체결 때 성조기와 함께 처음 등장한 태극기

 

그러므로 청과의 사대외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이후, 조선은 청의 속방이 되었어요. 그에 따라 청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독립국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내정과 외교는 자주국이었습니다. 사대외교는 전근대 사회에서 강대국과 약소국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방식이었어요. 조선의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강화도조약 1조에서 조선이 ‘자주지방’이라고 한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그들은 독립과 자주를 분리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라고 종용한 것도 청이었고 1881년에 「조선책략」을 통해 미국과의 수교를 주선했던 것도 청이었어요. 그들은 오히려 이런 기회를 통해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것을 세계적으로 과시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청이 조미수호조약 체결과정에 개입하려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속방이라는 문구를 넣으려는 이홍장의 요구도 거절했습니다. 따라서 1882년 5월 22일 조약이 체결될 때, 태극기가 미국의 성조기와 함께 게양되었어요. 조선은 엄연히 독자적인 국가라는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 측 대표였던 슈펠트가 보관하고 있던 문서를 통해서도 확인이 되었는데요.

 

미국에서 1882년 발간된 [Flags of Maritime Nations]에 실린 태극기.

 

이후에도 1883년 영국과 수호조약을 맺을 때, 1886년에 프랑스와 수교를 했을 때에도 태극기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조선이 제공한 태극기가 그들의 외교문서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1883년 미국에서 루시어스 푸트 공사를 조선에 파견한 것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과 홍영식 등의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되었습니다. 이들은 9월 19일 숙소였던 보스턴의 호텔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걸었어요.

 

독립의 상징 독립문 위에 새겨진 태극기

 

태극기가 조선의 국기로 제정된 것은 1883년 1월 27일이었습니다. ‘이미 국기가 제정되었으니 팔도와 사도에 알려 사용하라’는 고종의 지시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그에 앞서 1882년 9월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개화파 박영효가 고베의 숙소에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그가 남긴 기록에는 ‘일찍이 임금에게 명을 받았던 것이다’라고 해서, 독자적인 시도가 아님을 알 수 있지요.

 

고종이 1880년대에 미국인 고문관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 후에도 청은 끊임없이 세계 외교무대에서 조선이 속방이라는 것을 강조하려 들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태를 유길준은 양절체제라고 설명했는데요. 그것은 청에게는 속방이면서 세계 각국과는 독립국으로 조약을 체결한 모순적인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고종은 청의 속방론에 맞서 일본과 미국에 상주 외교사절을 파견했어요.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두 나라가 맺었던 시모노세키 조약의 결과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철회하였고 조선은 이제 독립국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독립은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어진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청의 간섭 없이 조선에 대한 보호국화 정책을 시도했던 것인데요. 그러나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의 개입으로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을 소개한 프랑스 주간지

 

아관파천으로 인해 러시아의 영향력이 극대화 되었음에도 고종의 정치적 주도권이 회복되었어요. 당시 갑오개혁의 주역들은 살해, 유배, 망명을 당했지만 구미세력과 가까웠던 개화파들이 정권에 참여하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를 구성했습니다. 이들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독립문의 건립을 추진했어요. 그래서 독립문 위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태극기는 당연히 금지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태극기는 곧 국권회복의 상징이 되었고 1919년 3.1 운동에서도 전국적으로 한국인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따라서 일제는 태극기를 '불령선인'의 상징으로 보아 제조 및 소지를 금지하였어요. 따라서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가 진관사, 백양사 등에 보관되어 훗날 발견되었습니다.

 

진관사에 보관되었던 태극기

 

3.1 운동 때도, 임시정부도, 독립군도 사용한 한국인 공통의 상징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면서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대한이라는 국호와 태극기라는 국기를 그대로 사용했어요.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독립군도, 미국에 이주한 동포들이 설립한 대한인국민회도 태극기를 한국의 국기로서 활용했습니다. 태극기는 한국인이라는 동질성을 확인하는 공통의 상징이 되었어요. 따라서 해방의 날을 맞이했을 때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 3.1절 2주년 기념식

 

1945년 12월 중앙문화협회가 발행했던 「해방기념시집」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24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요. 그 가운데 ‘아침’을 썼던 창원 출신의 김달진 시인은 “천길 만길 깊은 바다 밑에/ 긴 밤을 어둠 속에 몸부림 치며/ 큰 열을 가슴 속에 쌓고 달구었더니/ 집집마다 추녀 끝에 태극기 나부낀다/ 거리마다 지축을 울리는 함성/ 오늘 이땅 산천은 크게 웃었다”라고 했습니다.

 

1945년 해방기념시집

 

하지만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던 조선총독부 국기게양대에 나부낀 것은 성조기였어요. 9월 8일에 들어온 미군이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입니다. 태극기가 올라간 것은 1946년 1월 14일이었는데요. 김구 주석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들이 귀국했을 때에도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을 했습니다. 이어서 열린 모든 행사에서도 태극기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깃발이 되고 있었어요.

 

북한에서도 1948년 7월 10일까지 태극기를 사용했음이 당시의 모든 영상자료를 통해 확인됩니다. 그런데 1947년 소련 측이 불만을 제기하여 결국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요. 그 결과 1948년 7월 10일에 열린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로 교체했습니다. 태극기의 근거가 된 주역이 미신이며 일정한 표준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어요.

 

1948년 7월 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는 국기로 태극기를 정식으로 채택하였습니다. 다만 대한민국 국기를 태극기로 한다는 조항은 헌법에는 넣지 않기로 했어요. 그런데 태극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도안인지는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할 필요가 있어서 1949년 1월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마침내 1949년 10월 15일에 「국기제작법」 고시가 확정되어 규격이 확정되었어요.

 

‘국기에 대한 맹세’ 강요한 박정희, 태극기에 발포한 5.18 계엄군

 

박정희 정부는 특히 새마을운동을 통해 태극기를 보급하고 국기에 대한 예절교육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유신 선포와 함께 국기게양식과 강하식을 진행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하여 강제로 외우게 하였지요. 1978년 국군의 날부터는 전국의 모든 방송을 통해 국기강하식과 함께 애국가를 내보냈습니다. 이는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권위를 뿌리내리려는 의도가 있어 반발을 사기도 했어요.

 

그러나 이에 맞선 민주화운동 세력들도 태극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항쟁에서는 태극기를 앞세워 자신들이 국민주권을 대변하고 있음을 나타내려 했어요. 오히려 계엄군이 시민군이 태극기를 달고 다니는 것을 폭도의 행동으로 매도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태극기로 희생자들을 담은 관을 감싸며 애도했어요. 태극기를 든 시위대에게 발포한 것은 계엄군이었습니다.

 

5.18 당시 시신을 감쌌던 피에 물든 태극기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1989년에 규격화나 훈련을 통한 길들임을 의도한다는 비판을 받고 국기하강식은 폐지되었어요. 그리고 ‘국기에 대한 맹세’도 간소화되었습니다. 김영삼 정부에서 국기의 존엄성만 강조하지 않고 국민과 가까이 하는 상징물로 만들어가겠다고 밝힌 이후에 디자인화가 권장되었어요. 그것이 가장 극대화된 것은 2002년 월드컵에서 대대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성조기와 함께 등장한 ‘태극기 부대’

 

그런데 2016~2017년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탄핵 반대 집회와 박근혜 지지 집회를 주도하면서 ‘태극기 부대’가 나타났어요. ​이후에도 문재인 정부 퇴진 운동, 윤석열 지지 등 극우 성향의 시위와 집회에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들은 태극기뿐 아니라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기를 흔들며 집회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를 통해 보수적 개신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극기 부대의 정치적 영향력은 응집력과 목소리가 크기 때문에 보수 정치권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최근 직접적 영향력이나 주도권은 크게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들이 동원한 대중들이 대단한 것 같아도 선거에 참여한 세력들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극기 부대’가 일으키는 소음과 폭력은 태극기라는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어요.

 

‘애국보수’를 자칭하지만 실제로는 한미동맹을 맹신하면서 친미사대주의를 보이고 있으며 독도나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 보상금 등 문제에서 일본에 대한 비판을 저지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더구나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를 신봉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있어요. 따라서 이들은 애국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태극기를 모독하고 있는 것인데요.

 

<태극기 함께 해온 나날들> 특별전에서 태극기 소중함 되새깁시다

 

이제 저들에 의해 오염된 태극기를 민족 정체성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되찾아 와야 합니다. 우선 저들에게 ‘태극기 부대’ 또는 ‘태극기 집회’라는 명칭을 부여하지 말아야 해요. 더 이상 이들이 태극기를 대표하는 왜곡된 사회현상을 방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시대착오적인 극우 사대주의자들이 모인 것에 불과하며, 민주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곧 소멸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럴 때 우리 역사에서 태극기가 갖는 의미를 다시 한번 알아보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지금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11월 16일까지 <태극기 함께 해온 나날들>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중요하고 뜻깊은 자료들을 많이 모아서 보여 주고 있어요.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관람해 보시기를 추천드릴게요. 특히 청소년들에게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