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좌파, 우파 안 한다. 실력파, 실용파” “유능하면 모두가 내 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1일 오후 울산 동구 일산해수욕장 교차로 인근에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6·3 대선을 이틀 앞둔 1일 고향인 경북 안동과 대구, 울산, 부산을 돌며 “반쪽에 의지해 나머지 반쪽을 탄압하고 편 가르는 ‘반통령’이 아닌,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영남은 열세 지역으로 분류되지만, 이 후보는 공식 선거운동 이후 지난 13~14일, 22일에 이어 이날 세번째로 이 지역을 방문하며 공을 들이고 있다.

 

이 후보는 이날 안동 웅부공원 유세에서 “전 안동에서 태어나 안동의 물과 쌀, 풀을 먹고 자랐다”며 “부모님과 조부, 선대 다 여기 묻혀 있고 저도 안동에 묻힐 것으로, 안동은 제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고향 분들은 왜 이렇게 저를 어여삐 여겨주시지 않냐. 선비의 고장 영남에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 편 가르기로 장기집권했다. 독재정권이 하라는 대로, 나라를 팔아먹어도 찍겠다는 사람이 많아지게 돼 안타깝지 않냐”며 통합을 강조했다. 울산 등 유세에서도 그는 “저는 좌파, 우파 안 한다. 실력파, 실용파”라며 “유능하면 모두가 내 편”이라고 말했다.

 

이 후보는 6·3 대선이 ‘내란 심판’이라는 점도 적극 부각했다. 안동 유세에서 그는 “(이번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쿠데타가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제3세계가 될 것인지, 세계가 선망하는 선진강국이 될지 여러분의 손에 많이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어진 ‘보수의 심장’ 대구 동대구역 광장 유세에선 “이번 선거는 지역이니, 당이니 다 떠나서 민주적 공동체를 회복하는 선거다. 국민이 준 권력으로 국민의 권리를 파괴하려 한 내란 세력을 심판하는 선거”라고 했다. “(구 여권이) 국가 안보를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훼손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집권한) 지난 3년간 너무 많은 걸 잃었고, 내일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남북이 강 대 강으로 대치하는 나라가 됐다”며 보수층이 민감한 안보 문제도 제기했다.

 

부산에서 이 후보는 “산업은행 이전은 대통령 권력으로도 3년 동안 못했고, 부산에 특화돼있지도 않다”며 “해양물류산업을 지원할 국책은행으로 ‘동남투자은행’을 만들겠다”고 추가로 공약했다. “대통령실에 북극항로와 해양수산 전담 비서관을 두고 제가 직접 챙기겠다”고도 했다. 기존에 약속한 해운회사 에이치엠엠(HMM) 부산 이전은 “노동자들의 동의를 받되, 끝까지 동의 안 하면 정부 지분이 70% 넘으니 그냥 해야지 어떡하겠냐”고 했다. 해양수산부 이전과 해사법원 설치 역시 빠르게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안동 유세 전 이 후보는 지난 29일 포항 해군 초계기 추락 사고로 순직한 장병 4명을 기리는 묵념을 했다. 그는 “국가를 위한 특별한 헌신엔 합당한 대우를 보장하겠다. 국가유공자와 유가족이 자부심을 느끼도록 예우는 더 깊게, 지원은 더 두텁게 하겠다”며 ‘보훈강국 정책’ 공약도 내놨다.   < 김규남  기자,  안동 대구 울산/고경주 기자 >

 

선거 통해 퇴행적 정치집단의 세력화 막아야

'권리의 정치'를 공화의 마음 지닌 '책임의 정치'로
국가 공공성 역할 없는 규제완화·감세는 자해행위

다가오는 기후위기 티핑 포인트, 경로의존 버려야
새 술은 새 부대에, 대선 뒤 헌법 개정 논의 기대

 

                                                                            정규호 생명학연구회 부회장

 

‘12.3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사회 정치적 혼란과 갈등 속에서 숨 가쁘게 달려 온 지난 6개월의 여정은 ‘6.3 조기 대선’을 통해 한 매듭 지어져야 한다. 낡은 것의 수명 연장을 막고 새로운 시작을 하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선거를 통해 퇴행적 정치 집단의 세력화를 막아내야 미래 지향적 논의에 사회의 집중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온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중요하지 않은 대통령 선거가 없었지만 이번 선거를 맞이하는 유권자들 마음은 남다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시민이 주권자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핵심 수단으로, 민주주의의 ‘꽃’ 또는 ‘축제’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 임하는 유권자들 마음은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은 커녕 짜증과 분노로 비장하기까지하다.

 

제21대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가 끝난 30일 저녁 경기도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종합상황실에서 한 관계자가 관내사전투표함 보관장소 CCTV를 확인하고 있다. 2025.5.30. 연합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후보자와 길거리 선거 운동원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날카로워진다. 그만큼 유권자들의 격앙된 감정과 피로감도 커진다. 입장이 다른 상대 후보와 지지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시민들이 늘어난다. 상대편에 대한 ‘꼴도 보기 싫다’는 마음이 후보의 비전과 공약에 대한 관심을 압도하는 듯하다. 같은 하늘 아래, 대한민국의 한 울타리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선거 과정을 통해 쩍쩍 갈라지고 있다. 다른 이유로 다른 공간에서 만나면 아무 일 없는듯이 서로 정담을 나눌 이웃들을 선거가 원수지간으로 만들고 있다.

 

여기에는 이번 조기 대선을 둘러싼 여러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느닷없은 비상계엄 사태가 초래한 혼란과 갈등 속에서 ‘내란 세력 심판’과 ‘민주주의의 복원’에 대한 열망이 이번 선거 국면에서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는 비상계엄 선포 행위 자체의 황당함과 그 주도자와 추종 세력의 뻔뻔함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이재명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 속 실종된 정책토론

 

반면에 국민의힘을 비롯한 보수 진영에서는 내란 주도자들이 내세웠던 ‘반국가 세력’ 프레임으로 이재명 후보와 지지 집단을 괴물 독재, 공산당 세력으로 몰아 상황 역전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은 상대 개인의 도덕성 문제를 선거 쟁점으로 삼아 자신들의 집단적 과오를 덮고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엎어치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문제는 선거가 네거티브 방식의 난타전 형태로 흘러가면서 이번 사태를 초래한 문제의 본질은 희미해지고 적대적 진영 정치의 낡은 관성이 또다시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정책 토론을 실종시킨 이번 대선후보 TV 토론은 한국 선거 정치의 불행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제21대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 둘째날인 30일 서울 중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관위 직원들이 관내사전투표함을 보관 장소로 옮기고 있다. 2025.5.30.  연합
 

소용돌이 선거 정치, 무엇을 남겨 놓을까?

 

지금과 같은 선거 정치 행태가 우리 사회에 무엇을 남겨 놓을지 깊이 살필 필요가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열망과 이슈를 통째로 빨아들이는 선거의 소용돌이 정치(vortex politics) 속에서 정책은 실종되고 퇴행적 갈등이 반복되어 왔는데, 결과적으로 정치적 기득권은 공고해지고 공화국의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전망은 더욱 불투명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살려내기 위한 내란 세력 심판론과 3권을 장악한 강력한 ‘독재의 탄생’을 막아내기 위해 ‘내란 유발 세력’을 심판하자는 주장이 충돌하는 가운데,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심리적 내전’ 상태는 선거가 끝나도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이재명 후보 당선되면 나라 망한다?

 

상대 후보가 당선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유포시킨 채 유권자들의 선택을 강요하는 낡은 선거 정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바꿔내야 한다. 선거가 이번 대선으로 끝나지 않고, 26년 지방선거, 28년 총선까지 연이어 진행되는 만큼, 지금과 같은 선거 정치 구조와 행태가 바뀌지 않으면 소위 선거 민주주의가 공화국의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이란 말처럼 안팎의 거대한 도전적 과제들에 직면한 대한민국이 깊어진 내부 갈등으로 전환의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허송세월하는 일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될 일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질적 전환이 필요한 때다.

 

제21대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가 끝난 30일 저녁 경기도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종합상황실에 사전투표 투표율 등 현황이 표시돼 있다. 이번 사전투표 최종 투표율은 역대 두번째 최고치인 34.74%로 집계됐다. 2025.5.30. 연합
 

민주주의의 회복과 정상화를 넘어서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를 위한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을 대가로 대통령 직선제를 이룩했는데, 국민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대형 사고를 친 것이 이번 비상계엄 사태다. 윤석열 정부의 퇴행적 행태는 비상계엄 이전부터 있어 왔다. 불과 3년 전 윤석열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현실을 ‘민주주의 위기’로 진단하고, 근본 원인을 ‘반지성주의’에 두면서, 해법으로 ‘자유’를 강조했다. 하지만 집권 기간 내내 강압적 수단을 통해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다 보니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의 질을 측정하는 민주주의 지수 평가에서 한국은 2020년대 이후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 국가로 자리 잡는 듯했는데, 윤석열 정부가 집권한 후 2024년 조사에서는 아래 단계인 ‘결함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 국가로 강등되었다. 비상계엄 선포는 윤석열의 민주주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민주주의’는 핵심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이재명 후보는 내란 극복과 함께 민주주의의 위상 회복, 민주주의의 부활을 강조하면서 검찰, 사법, 감사원 등 권력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개혁, 직접민주주의 강화를 통한 국민주권 시대 등을 강조했다. 심지어 김문수 후보도 상대를 독재로 몰아세우면서 ‘새로운 민주화 운동’을 이야기할 정도다.

 

과거로의 퇴행을 막고 비정상성을 회복하여 새로운 미래로 가려면 민주주의가 제자리를 잡는 것이 선결 과제다. 하지만 현실의 조건은 결코 녹록치 않다.

 

내란 세력 심판을 위한 압도적 지지를 호소 하지만 지금의 대통령제와 거대 양당이 지배하는 선거 정치 구조에서 어느 한쪽의 압도적 승리는 쉽지가 않다. 내란 주범을 배출하고 옹호한 세력이 내세운 후보의 지지율이 유권자의 1/3을 넘는 현실이 대표적이다. 지금의 승자독식의 선거 구조에서 사표 방지 심리는 제3의 정치세력의 출현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민주주의의 회복을 넘어 정상적인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선거법과 정당법 등의 개정으로 정치 생태계를 더욱 다양화시켜 권력 야합이 아닌 건강한 정치 연합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제21대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가 끝난 30일 저녁 경기도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종합상황실에 사전투표 투표율 등 현황이 표시돼 있다. 이번 사전투표 최종 투표율은 역대 두번째 최고치인 34.74%로 집계됐다. 2025.5.30.  연합
 

민주주의의 전환과 전환적 민주주의

 

그 동안의 선거에서도 그랬지만 특히 이번 대선은 정책 선거가 실종되었다는 진단들이 많다. 한국 정치의 현실과 대의제 민주주의의 특성이 결합된 결과다.

 

대의제 선거는 유권자들의 다양한 가치와 열망을 1인 1표에 담아서 총합 된 득표수로 결정하는 방식이다. 대선의 경우 최다 득표한 권력자의 탄생으로 선거 과정에서 표출되었던 다양한 이슈들이 환원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탄핵 국면에서 광장에서 표출되었던 다양한 의제들은 선거 공약에 채 담기지 못한 채 구호 수준으로 머물다 휘발시켜 버리는 ’배제‘의 문제가 심각하다. 지금 당장의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생태적 가치나 미래세대 문제는 대표적인 배제의 대상이다.

 

’과잉 정당화‘의 문제도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 선거 국면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정책들이 패키지 형태로 묶여서 선거 결과에 따라 통째로 정당성을 얻는 방식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이번 조기 대선의 경우 인수위 과정에서 정책 검증과 숙성, 의견 수렴의 과정이 생략되는 만큼, 급조된 선거 공약들의 과잉 정당화로 인한 문제는 클 수밖에 없다. 대선 ’이후‘ 정책들을 정치인과 관료,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둘 수 없는 이유다. 사회적 참여와 공론화 과정을 통해 주요 정책의 우선순위와 핵심 내용, 실행 방안들에 대한 세심한 검토와 피드백이 필요하다.

 

국가 공공성 역할 없는 규제완화와 감세는 자해행위

 

참고로 이번 대선 후보들의 10대 공약을 보면, 타협의 여지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지지율 1, 2위 후보들 간에 공통된 내용이 발견된다. 이재명, 김문수 후보 모두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포함한 경제 성장 의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1호 공약으로 이재명 후보는 ‘세계를 선도하는 경제 강국’을, 김문수 후보는 ‘자유 주도 성장과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강조한다. ‘AI 3대 강국’도 이재명, 김문수 후보가 각각 1호와 2호 공약에 넣어 놨다. 성장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의 기조 아래 기존의 수출주도 성장전략을 AI 기반 성장전략으로 대체한 모습이다. 문제는 성장을 뒷받침하는 방안으로 감세와 규제 완화 및 철폐를 이야기 하면서 ‘공공성’을 위한 국가의 역할에 대한 내용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공성의 담지자로서 국가가 가진 규제와 재분배 역할을 내려놓고 규제 완화와 감세를 강조한다는 것은 국가의 기본 책무를 방기하는 자해적 행위에 가깝다. 대통령을 주인인 국민의 ‘심부름꾼’으로 칭하는 것 또한 주권자의 마음을 사기 위한 겸손한 표현일 순 있어도 국가 지도자로서 감당할 역할과 책임에 비춰볼 때 아쉽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비전과 실력을 갖춘 리더를 필요로 하며, 그렇기 때문에 명확한 평가와 책임을 묻는 민주적 견제 장치가 요구되는 것이다.

 

또한 정치 지도자로 책임 있는 역할을 하고자 나선 사람을 선거 과정에 만신창이로 만들어서 선거 후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는 적대적 선거 정치 구조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바꿔내야 한다.

 

민주주의의 정상화 넘어 새로운 전환으로

 

이번 대선의 일차적 과제인 민주주의 회복과 정상화는 비유하자면 발효되지 못하고 부패해 버린 낡은 술을 덜어내고, 듬성듬성 구멍 난 헌 부대를 기우고 수선하는 일에 가깝다.

 

대한민국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회복과 정상화 수준에 멈춰서는 안될 일이다.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이 새로워져야 한다. 전환은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격으로 새로운 내용을 새로운 형식에 담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전환, 전환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기후 위기와 민주주의의 창조적 진화

 

권력자와 그 집단의 권력 전횡, 이것에 대한 감시와 견제 장치의 미비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회복하고 정상화하는 것은 이번 대선이 가진 시대정신이다. 하지만 보다 심층적이고 전면적이며 지속적인 형태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할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기후 위기 문제가 대표적이다.

 

선거 정치의 혼동 속에서 기후 위기의 티핑 포인트 시간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해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막기 위한 마지막 기회로 ‘탄소중립 2050’ 목표를 정하고 세계 각국의 노력을 촉구한 바 있다. 2050년까지 남은 25년의 시간도 매우 부족한데, 목표 달성의 성패는 향후 5년 즉 2030년까지의 노력에 달려 있다. 우리가 의지해온 삶의 방식에 내재된 ‘중독’과 ‘경로 의존성’에서 벗어나려면 사회적 지지를 바탕으로 집중된 노력이 필요한데, 공교롭게도 차기 정부 임기 기간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이번 대선 과정에서 기후 의제가 다뤄지는 방식과 내용을 보면 이런 시대적 요청에서 한참 모자란다. 지지율 1위인 이재명 후보는 공약 10번째에 ‘미래세대를 위한 기후위기 대응’을 제시하고 있는데, 내용은 산업구조의 탈탄소 전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지지율 2위 김문수 후보는 기후에 대한 별도 공약 없이 재난 대응 차원에서 기후 문제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1970-80년대 국가 폭력의 상징이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재탄생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이재오)는 오는 6월 10일 민주항쟁 38주년을 맞아 정부 기념식과 함께 기념관 개관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사진은 20일 민주화운동기념관 상설전시관 모습. 2025.5.21.  연합
 

단기주의 넘어선 지속가능성 위기 돌파 민주주의

 

기후 문제에 대한 제한된 인식은 대선 TV 토론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사회분야 대선후보자 초청 TV 토론에서 ‘기후’ 의제가 다뤄졌다는 점은 의미 있는 변화였다. 기후 문제 자체가 워낙 심각한 데다 이것을 대선 국면에서 정치 의제화하려는 시민사회의 노력의 결과다. 하지만 막상 토론 내용을 보면 몹시 실망스러웠다. 기후 문제가 탈탄소 관련 에너지 문제로 제한적으로 다뤄지면서 결국에는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으로 흘러가 버렸다. 대한민국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핵심 과제인 기후 위기 문제에 대한 국가 지도자로서 비전과 책임 있는 자세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기후 문제는 대선 ‘이후’ 우리 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기후 재난의 위기와 이것이 초래할 민주주의의 위기 보다 성장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현실을 고려할 때 중요하지만 매우 까다로운 문제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외면하거나 비켜갈 수는 없는 일이다. 기후 문제는 민주주의의 안정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데 현실 민주주의 시스템으로는 복잡성과 긴급성, 지구성을 가진 기후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선거 정치의 단기주의를 넘어 기후 문제를 비롯한 지속가능성 위기의 시대를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재발명이 필요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대선 ‘이후’ 헌법 개정 논의 기대

 

전환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새 술’과 ‘새 부대’가 필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38년의 세월에 내용도 형식도 낡아버린 ‘87년 헌법’을 개정하는 일이다. 탄핵으로 촉발된 헌법의 시간이 헌재 판결로 잠시 멈췄는데 대선 후 개헌 논의 과정을 통해 새롭게 작동시켜야 한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권력 구조 개편을 중심으로 개헌 논의가 다뤄진 점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개헌 내용도 중요한데, 이번 대선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못한 지속가능성과 관련한 핵심 의제들이 개헌 논의 과정을 통해 구체화 되어 우리가 함께 살아갈 대한민국 제7 공화국의 비전으로 담길 수 있기를 바란다. 특히 기후 문제와 관련해서 탄소 중립과 에너지 전환에 초점을 맞춘 ‘완화’ 전략은 물론이고, 다가올 기후 재난 시대에 민주적이고 지속가능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국토, 농업, 돌봄 등 ‘적응’ 전략 영역도 제대로 다뤄질 필요가 있다. 그동안 후자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특히 농업과 먹거리는 기후 위기의 핵심 고리일 뿐만 아니라 이재명 후보가 강조한 ‘먹사니즘’의 실질적 체감 영역이며, 트럼프 행정부의 수입 기준 완화 조치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분야다. 그만큼 이 분야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공감의 영역이 확장될 필요가 있는데, 개헌에 대한 국민적 논의 과정은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권리의 정치를 공화의 마음을 지닌 책임의 정치로

 

또 다른 과제로 선거 후 더욱 격화될 정치 사회적 갈등을 국민적 개헌 논의를 통해 미래 지향적으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 공화국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국민 참여형 개헌 논의는 현안을 둘러싼 다양한 갈등들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차원 변화시킬뿐 아니라 극단주의자들이 서식하고 증식할 환경을 바꿔낼 것이다.

 

민주주의의 전환은 결국 민주공화국 주인인 시민의 인식과 역량에 달려 있다. 대한민국 미래를 위한 개헌 논의 과정에 시민들이 폭넓게 참여하여 공공성에 대한 성찰과 자기 전환으로 권리의 정치를 공화의 마음을 가진 책임의 정치로 확장시켜 내야 한다. 국민 참여형 개헌과 관련해서 이미 우리 사회 일각에서 마을 단위 주민들이 함께 헌법을 공부하고 개헌안을 만들어가는 읍·면·동 원탁회의가 구체적으로 제안되고 시도 되고 있어 희망을 가지게 한다.                                                                        < 정규호 생명학연구회 부회장 >

 
 
 
 

대법관 100명도 과하지 않다

● Hot 뉴스 2025. 6. 2. 01:4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문제의 핵심은 대법원의 업무과중과 부실재판

 

대법관을 지금의 13인에서 30인으로, 아예 100인으로 늘리자는 대법관 증원법안이 한동안 화제를 모았다. 시민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들은 도대체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대법관을 30명, 100명으로 늘리자는 민주당의원들이 제정신이냐고 역정을 냈다. 그런가하면 이재명 후보에 대한 속전속결 유죄취지 판결로 대선에 개입한 대법관들을 민주당의원들이 혼내주기로 작정하고 발의한 대법원 개편법안 아니겠냐며 정치적 배경과 의도를 부각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대법원이 처리해야하는 사건 수에 비해 대법관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누가 봐도 대법관 증원이 필요한데 대법원이 요리저리 피하다 한방 맞은 셈이라며 민주당의원들을 옹호해주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대법관 증원법안의 불씨는 그대로 살아 있다

 

국민의힘과 보수언론은 대법관 대폭증원 법안을 이재명 방탄을 겨냥한 민주당의 사법장악기도로 규정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대법관을 30인으로 증원하면 대선개입목적의 이재명 유죄취지판결에 가담한 대법관 10인보다 훨씬 많은 대법관들을 새로 임명해서 대법원을 장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지난총선에서 입법부를 장악한 데 이어서 이번대선에서 행정부를 장악할 것으로 예상되는 민주당이 이참에 대법원까지 장악하겠다는데 보고만 있겠냐며 유권자들의 견제심리를 자극했다.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민주당 김용민 의원과 장경태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대법관 30명, 100명 증원법안은 선거민심의 역풍을 겁낸 민주당 지도부의 개입으로 며칠 만에 철회됐다.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를 위해 참석해 있다. 2025.5.1 [사진공동취재단] 연합

 

대법관 증원구상이 찻잔 속의 태풍처럼 끝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대법관 대폭증원을 둘러싼 논란이 짧지만 굵게 진행된 덕분에 이제는 대법관 대폭증원 문제가 아무 때나 공론장의 중요한 의제로 재부상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됐다. 그동안 대법관 대폭증원 안은 대법원의 강력한 반대로 활발한 공론화 자체가 가로막혔다고 할 수 있다. 거대양당과 정치인들은 선거법과 정치자금법, 뇌물죄와 명예훼손죄 등 정치인 관련 사건에서 생사여탈권을 쥔 대법원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대법원의 권위에 잘못 맞섰다가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두렵기 때문에 거대양당과 정치인들은 대법원에 찍히지 않도록 조심한다. 이것이 여야 모두 그동안 대법원개혁법안을 감히 내지 못했던 실질적 이유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은 정치권의 견제에서 벗어난 특권조직이 됐다.

 

조희대 대법원의 대선개입 사법쿠데타에 화들짝 놀란 민주당의원들이 제출한 대법관 대폭증원 법안들은 그간의 정치금기를 과감하게 깨고 대법원을 직접 겨냥해서 발의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용민 법안과 장경태 법안은 철회됐지만 시민의 입장에서는 여야의 진흙탕 싸움이 정리되고 기억은 생생하게 남은 지금이야말로 대법관 대폭증원이 과연 필요하고 바람직한지 차분히 따져볼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글에서 대법원 재판의 실태와 문제점이 어떠하며 그것을 정상화하기 위해 과연 대법관 대폭증원이 필요한지, 아니면, 상고법원 설치나 상고허가제 도입 등 다른 대안이 필요한지, 하나하나 따져보고 대법관 대폭증원에 의한 대법원재판 정상화방안을 옹호할 예정이다.

 

대법원이 연간 다뤄야 할 사건 수는 시민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2023년에 대법원에 접수된 상고본안사건은 민사 12,152건, 형사 21,102건, 총33,254건이었다. 그밖에도 법원의 결정이나 명령에 대한 불복절차인 재항고사건이 2,600건을 넘었다. 2023년 한 해 동안 대법원은 대략 3만 6000천 건을 받았다. 이 모든 사건은 대법관 4인으로 구성된 소재판부(소부) 3개로 넘겨져 전원일치 의견으로 인용이나 기각이 결정된다. 만약 대법관 1인이라도 이견이 있으면 대법원장이 재판장을 맡는 전원합의체로 넘겨지는데 연간 30건을 넘지 않는다.

 

지금의 사건분장시스템에 따라 4인 소부 3개가 처리해야 할 사건 수는 대략 연간 1만2000건, 매월 1천 건이다. 모든 사건에는 주심대법관이 지정되고 그의 책임아래 재판연구관의 검토보고서가 작성된다. 소부의 대법관 4인은 1인당 매월 250건에 대해 주심으로서 책임을 진다. 소부의 4인 대법관은 격주마다 하루씩 대면 합의과정을 온종일 진행한다. 2주마다 돌아오는 합의기일마다 대법관 각자는 주심을 맡은 125건을 처리한다. 소부 전체는 500건을 떨어내야만 사건적체가 늘어나지 않는다. 소부는 합의기일의 8시간 동안 시간당 62.5건, 1분당 1건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이게 대법원재판의 실제모습이다. 물론 사실오인주장이나 양형부당주장처럼 번지수를 잘못 찾은 형사사건들은 30초도 안 걸릴 것이다. 대법관쯤 되면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법리가 명백해서 재판연구관의 검토보고서만으로도 더 따져볼 여지가 없는 심리불속행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1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과거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유죄 취지의 파기 환송 판결을 선고하고 있다. 2025. 05. 01 [MBC 화면 캡처]

 

다퉈볼 만한 사안도 사실상 3분 주심단독재판

 

문제는 법리적으로 다퉈볼 만한 10%쯤 되는 사안들도 3,4분을 넘기지 않고 판결해야한다는 데 있다. 이런 사건들만 해도 연4천 건에 육박하는데 30건 정도 전원합의체로 넘어가는 사건들 외에는 거의 모두가 3~5분 재판대상이다. 지금과 같은 사건과다 구조에서는 주심의 지휘를 받아 재판연구관이 작성한 검토보고서가 사실상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주심이 아닌 대법관 3인은 본인이 맡은 주심사건들을 준비하는 데도 시간이 빠듯해서 다른 대법관의 주심사건에 대해서는 합의기일에 주심대법관의 입을 통해 처음 접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4인 소부재판은 겉모양일 뿐이고 실질은 주심대법관의 단독재판, 그것도 3분 재판인 셈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주심대법관의 3분 단독재판 현실은 법원조직법을 정면으로 위반한다. 대법원은 재적 2/3이상 출석으로 전원합의체에 의한 재판을 하는 게 원칙이고 예외적으로 3인 이상 대법관으로 소부를 구성해서 전원일치로 판결할 수 있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대법원사건의 99.95%를 4인 소부가 재판하고 그나마 주심대법관의 단독재판과 다르지 않으니 법과 현실의 괴리가 이보다 클 수 없다. 이대로 놔둘 수 없는 것이다.

 

대법원의 소임은 법적으로 난해한 사안에서 최종심답게 대법관들의 집단지성을 가동시켜 신중하게 사건을 처리하며 법리의 통일적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법원은 쏟아지는 상고사건에 치여서 현실적으로는 주심대법관의 3분 단독재판을 넘어서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 결과로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현상이 대법관출신 전관예우관행이자 사법불신풍토다. 대법원 개혁이 주심대법관에 의한 3분 단독재판의 실질을 극복하는 일에 최우선적으로 집중되어야 하는 이유다.

 

세 가지 대안: 상고법원, 상고허가제, 대법관 대폭증원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다. 첫째는 대법원 아래에 상고전담법원을 별도로 설치해서 소송당사자에게 삼세번 재판받을 기회를 보장하면서도 대법원은 사실상 제4심으로서 정책법원 역할을 수행하는 방안이다. 두 번째는 엄격한 상고허가제를 도입해서 ‘묻지 마’ 상고시대를 끝내고 대법원은 고르고 고른 연간 200건쯤의 중대사건만 심층적으로 재판하는, 이른바 영미식 정책법원으로 탈바꿈하는 방안이다. 마지막이자 셋째 방안은 독일의 예를 따라 대법관을 대폭 증원하고 전문재판부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전문성과 효율성을 강화하는 가운데 다툴 만한 사안에 대해서는 집단지성에 의한 질 높은 최종심 재판을 보장하는 방안이다.

 

대법원은 세 번째 대법관 증원방안에는 한사코 반대한다. 고작 4명을 늘려서 소부 하나를 더 만드는 정도라면 몰라도 더 이상은 결사 반대할 게 틀림없다. 대법관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언뜻 보면 상고사건 수가 지나치게 많은데다 해마다 증가추세가 뚜렷해서 대법관의 대폭증원 없이도 삼세번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면서 대법관의 상고심 재판관행을 정상화할 수 있는 묘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법개혁문제, 특히 대법원개혁문제는 법조계나 대법원의 관점보다는 잠재적 이용자인 국민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해법이 보인다. 충실한 재판을 삼세번 받을 시민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대법원개혁안을 찾아내야한다는 뜻이다.

 

상고법원 신설구상은 추진동력을 잃었다

 

상고법원 설치방안은 양승태 대법원장시절에 추진했던 해법이었다. 대법관을 증원하거나 상고허가제를 도입하는 대신 대법원 아래에 상고사건만 전문으로 처리하는 상고법원을 신설하는 방안이었다. 박근혜 정권이 민감하게 여기는 몇몇 중대사건의 판결지침을 청와대와 사전에 협의한 사법농단사태는 상고법원 설치구상을 청와대에 로비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참담한 사태였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그만큼 절박했다. 그의 구상은 3만 건도 넘는 일반적인 상고사건은 고법부장 3인의 대등재판부 여러 개로 구성될 상고법원에 몽땅 떼어주고 대법원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과 판례변경을 요구하는 소수사안만 전원합의체에서 다루는 이른바 영미식 정책법원으로 개편하자는 것이었다.

 

상고법원 신설안은 대법원 아래에 상고법원을 둬서 상고사건의 99% 이상을 최종심으로 처리하게 하되 국가적, 법리적 중대사안은 지금처럼 14인 체제로 유지되는 대법원이 다루게 함으로써 대법관의 권위와 희소성을 최대로 유지하자는 공식적인 4심제 방안이었다. 나름대로 삼세번 재판기회를 충실히 보장하는데다 대법관 다음서열 자리들이 상당수 만들어지고 대법관의 권위와 위상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사법부 내부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사법농단사태와 결부되었기 때문에 양승태 대법원의 몰락과 함께 추진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평가된다.

 

상고허가제는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는다

 

정책법원을 표방하는 영미법계 국가들의 소인수 대법원은 예외 없이 엄격한 상고허가제를 실시한다. 수많은 사건 중에서 국가적, 공적으로 영향력과 파급효과가 큰 사안, 하급심 해석이 들쭉날쭉해서 법리의 통일성을 기해야할 필요가 있는 사안, 기존판례를 변경할 필요성이 부각되는 사안을 대략 50~200건만 골라낸다.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아무리 커도 참을 수 없는 부당함이나 부정의를 결과하지 않는 이상 상고허가이유가 되지 못한다. 상고허가제를 운영할 경우 상고사건의 99% 이상은 상고허가의 벽을 넘지 못하고 항소심 판결로 끝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상고허가제는 삼세번 재판받을 권리를 사실상 한 번의 불복기회를 포함해서 두 번만 재판받을 권리로 축소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2심제를 하자는 대안이다. 우리 국민들이 이런 대안을 지지할지 의문이다.

 

대법원의 사법행정자문회의 산하 ‘상고제도개선특별위원회’가 2021년 5월에 발표한, 상고제도에 관한 국민인식조사결과는 위의 의문에 답하는 데 도움을 준다. 비법률전문가인 일반시민 총1,135명(소송유경험자 926명, 소송무경험자 209명)과 법률전문가 총1,518명(법관 886명, 검사 83명, 변호사 408명, 법학교수 141명)이 응답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최고법원인 대법원에서 더 중점을 두어야 할 기능으로 일반시민의 과반수(50.5%)는 ‘개별・구체적 사건에서의 권리구제기능’을 꼽았다. 정책법원 기능이 중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42.5%에 머물렀다. 이와 같은 여론조사결과에 비춰볼 때 상고허가제를 실시해서 구체적 사건에서 권리구제기능을 희생하고 대법원을 정책법원으로 전환하자는 상고허가제 방안은 국민의 지지를 받거나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여론조사결과는 대법관 1인이 주심으로 처리해야 하는 연간 사건수가 4천 건에 육박한다는 사실을 일반시민들의 70.5%가 ‘모른다’고 응답했다는 점이다. 만약 이런 사실을 일반시민들이 알고 나면 어떻게 조사결과가 바뀔지 생각해보자. 특히 우리나라의 인구대비 법관 수가 44개 유럽 국가의 중위 값에 비해 1/3 수준에 지나지 않을 만큼 적다는 사실을 일반시민이 충분히 알고 나면 어떻게 바뀔까? 우리법관들이 아무리 훌륭해도 유럽국가의 판사 3명 몫을 한다는 게 재판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고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 들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대법관들이 아무리 훌륭해도 대법관 1인당 매년 3천 건 넘게, 매월 250건 넘게, 매일 12건 넘게 판결한다는 게 재판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고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 들 것이다.

 

요컨대 한국법관의 업무과중 사실을 아는 시민들이 많아질수록 지금의 1심, 2심, 3심 재판 모두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강해질 것이다. 자연스레 하급심법관 수와 대법관 수를 대폭 늘려서 모든 심급에서 충실한 심리와 재판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봇물 터질 게 틀림없다.

 

재판연구관 의존도가 높은 것도 문제다

 

우리 대법원은 소인수 대법관으로 운영되면서도 상고허가제를 실시하지 않고 상고사건만 연간 3만 건을 넘게 처리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대법원이다. 우리국민들은 일단 소송을 제기하면 소송을 삼세번은 해봐야 한다며 대법원판결까지 받아보자는 생각이 강하다. 대법원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엄격한 상고허가제를 운영해서 소송사건의 99%를 사실상 2심제로 끝내고 대법원을 정책법원으로 재편하자는 얘기를 꺼내지 못한다. 앞으로도 상고허가제 대안은 하급심재판의 충실화에 대한 확실한 보장책이 없는 이상 시민들이 거들떠보지 않을 게 틀림없다.

 

상고허가제를 하지 않는 대신 우리나라는 대법원에 재판연구관을 130명이나 배치해서 대법관들의 재판업무를 보좌한다. 재판에 투입되는 대법관 12인에게는 1인당 부장판사를 포함한 2인의 전속 재판연구관이 지원되고 나머지는 공동재판연구관으로 활용한다. 전속연구관이건 공동연구관이건 검토보고서를 쓰는 재판연구관은 판결문초안까지 작성하는 게 업무의 일부다. 대법원이 상고허가제도 없이 무려 3만 건도 넘는 상고사건을 받아서 모든 사건을 3개의 4인 소부에 회부하고 모든 사건이 4인 소부의 재판을 받는 것 같은 외관을 만들어내는 비결은 출중한 경력판사 100명과 유능한 헌법연구자 30명으로 구성된 130명의 헌신적인 재판연구관 덕분이다. 대법관의 재판연구관 의존도를 낮추고 대법관의 직접책무성을 높이는 것이 대법원 개혁목표의 하나다.

 

대법원 전경. 2025. 05. 09.

 

대법관을 10여 명 늘려서는 '3분 주심재판' 관행을 못 바꾼다

 

3만 건이 넘는 상고사건 외에도 재항고사건이나 명령규칙처분 심사사건 등 대법원이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상고 외 사건들이 연간 3천 건에 육박하고 상대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많다. 대법원이 처리해야 할 법정사건 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대법관을 고작 5명이나 10여 명 늘리는 방안으로는 모든 사건의 99.9%도 넘게 처리하는 4인 소부재판의 실질적인 주심단독재판 변질사태를 피할 길이 없다. 우리나라 대법원도 법리적으로 다퉈볼 만한 대략 10%쯤 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사법선진국들처럼 5인 대법관으로 구성된 소부에 맡기되 5인 대법관 전원이 최소한 상고이유서와 검토보고서를 읽어본 후 판결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재판효율을 위해 5인 소부의 합의방식은 대륙법계의 다인수 대법원들이 그렇듯이 겉치레 대면합의 대신 서면회람에 의한 서면심리를 허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심리불속행 결정 등 간이기각절차도 지금처럼 4인 소부의 형식 아래 주심과 재판연구관에 사실상 일임할 게 아니라 간이하게 3인 소부에 맡기되 주심이 아닌 대법관 2인도 검토보고서를 서면 회람으로 읽어보고 서면으로 동의여부를 판단하게 함으로써 대법관의 책무성을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법원의 성격을 이렇듯 충실한 권리구제 최종심으로 정하면 필요한 대법관 수를 어느 정도 계산할 수 있다. 최소한 지금보다 50명 넘게 늘려야만 5인 전문재판부를 10개 이상 더 만들어서 사건처리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제고할 수 있다. 요컨대, 대법관을 늘리려면 왕창 늘려야 한다.

 

독일의 성공적인 다인수 대법원 운영사례

 

대법원이 정책법원 역할에 치중할지, 권리구제 최종심 역할에 치중할지는 영미법계와 대륙법계에 따라 해법이 다르다.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영미법계 대법원은 엄격한 상고허가제를 통해서 정책법원을 지향하기 때문에 대법관을 20인 이내로 두고 연간 200건 이내의 중대한 사안만 다룬다. 반면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대륙법계 대법원은 하급심의 법리오류 제거와 개인권리 구제를 지향하기 때문에 최고법원에 두는 대법관 수가 믿기 어려울 만큼 많다. 예컨대, 독일에는 연방에만 320명의 최고법관이 민형사사건을 다루는 대법원과 전문분야를 다루는 4개의 최고법원에 흩어져있다. 이탈리아는 350명, 프랑스는 120명, 스페인은 80명의 대법관을 둔다. 한마디로 영미법계는 소인수 대법원, 대륙법계는 다인수 대법원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영미법계 국가들은 헌법재판소를 따로 두지 않기 때문에 대법원이 사실상 헌법재판소를 겸하며 정책법원의 역할을 독점적으로 수행한다. 예를 들어 영국대법원의 관할사항 1호는 ‘헌법적으로 중요한 사안’이다. 헌법재판소라는 뜻이다. 대조적으로 대륙법계 국가들은 대법원과 별도로 헌법재판소를 두는 경우가 많아서 대법원을 굳이 정책법원으로 운용할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 적지 않은 유럽나라들의 대법원이 50명 넘는 대법관들을 두고 다수의 전문화된 재판부들을 운영하며 질 높은 권리구제 최종심으로 기능하는 이유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대표적인 보기다. 놀랍게도 오스트리아 대법원의 평균사건처리기간은 3.7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사법신뢰도 국제비교조사에서 하위권을 맴도는 우리 사법부와 달리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사법부는 언제나 상위권에 포진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법시스템의 성공사례는 일각의 강력한 반발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세부설계를 하기 나름으로는 대법관 대폭증원 안이 사법신뢰성과 사법전문성을 동시에 강화할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컨대, 대법관 대폭증원 법안은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대법원을 겁주고 혼낼 목적으로 즉흥적으로 제출한 터무니없는 법안이나 야비한 보복법안으로 볼 것만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정확한 현실진단 아래 사법특권의 급소를 찌른 본격적인 사법개혁 법안이자 오랫동안 쉬쉬해온 근본문제에 대한 정면대결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절차적으로는 반드시 충분한 공론화과정을 거쳐야 맞고 내용적으로는 종합적인 사법개혁패키지의 일부로 추진되어야 맞다.

 

대법원개혁은 대법원이나 정치권이 앞장서면 안 된다

 

14인 대법관체제를 유지하면서 영미식 정책법원으로 가기 위해 권리구제기능을 사실상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대법관을 100명으로 증원해서라도 최종권리구제 기능을 실질화할 것인지는 국회와 대법원에만 맡기기에는 국민생활에 너무나 중대한 사안이다. 대법원 개혁입법에 관한 한 대법원은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라서 이해충돌문제가 있기 때문에 발언권이 너무 강해서는 곤란하다. 거대양당과 국회의원의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정치권 역시 이해당사자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린 소송이 적지 않아서 생사여탈권을 쥔 대법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회도 사법개혁 입법권을 독점적, 배타적으로 행사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 바람직한 논의주체로 등장하는 것이 대통령직속 사법개혁위원회다. 판검사, 변호사, 법학교수, 사법감시단체, 사법피해자단체 등 다양한 전문가들로 구성해서 최소한 1년 이상 운영하며 공론화과정을 이끌고 종합적인 권고안을 내게 하는 익숙한 방식이다. 나는 전문가 의견만으로는 부족하고 추첨시민의회를 한 번 더 거쳐서 장시간 학습과 숙의 끝에 나온 시민눈높이 의견을 꼭 들어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대통령이나 국회는 사법개혁위원회의 종합권고안을 추첨시민의회의 숙의과정에 붙여 시민눈높이 권고의견까지 받아본 후 필요한 사법개혁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 이렇게 다단계 민의수렴 입법절차를 밟아야만 그나마 여야정치권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상대적으로 수월할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대통령직속 사법개혁위를 띄우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의회, 공론조사, 정책배심 등 다양한 숙의적 참여방식으로 대법원개혁을 포함한 본격적인 사법개혁방안에 대해 진지한 공론장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한다.  <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

“꼭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 백성과 우리나라를 좋게 잘 살게 해주세요.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주세요.”

 
 
전북 전주의 90살 이정례 어르신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에게 보낸 편지. 이재명 후보 페이스북

 

“사랑하고 종경(존경)하고 좋아하는 이재명 대통령 후보님. 90살 먹은 내가 이럭게(이렇게) 편지를 쓰고 간절하게 빕니다.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주세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31일 페이스북에 공개한 한 통의 편지가 화제다. ‘전북 전주에 사는 90살 이정례’라고 밝힌 90대 어르신이 대선을 앞두고 간절한 마음을 한 자 한 자 눌러 담은 손편지다.

 

“사랑하고 종경하고 좋아하는 이재명 대통령 후보님”이라는 말로 연 편지에서 이정례씨는 “그동안 어린 시절부터 얼마(얼마나) 노력하고 힘들게 일해서 이 자리까지 오셨습니까”라고 인사를 건넸다. 이정례씨가 이 후보에게 바라는 바는 간단하지만 간절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부디부디 꼭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 백성과 우리나라를 좋게 잘 살게 해주세요.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주세요. 90살 먹은 내가 이럭게(이렇게) 편지를 쓰고 간절하게 빕니다.”

 

이정례씨는 짧은 편지를 이 후보의 건승을 빌며 마무리했다. “한늘(하늘)에 도우심으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모드 이루어지기를 기원드립니다. 언제나 건강하세요. 늘 응원합니다. 2025년 5월23일 전주에서 이정례가 올림니다(올립니다).”

 

이 후보는 편지를 공개하며 “90세 이정례 어르신께서 보내주신 이 편지에는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이 더는 없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서툰 맞춤법과 떨리는 글씨에서 어르신께서 걸어오신 인생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며 “얼마나 고심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내려가셨을지…. 그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져 한동안 마음이 먹먹했다”고 밝혔다.

 

이 후보는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어르신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어르신의 당부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엄지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