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위원회,  보존하되 설명문 두기로 결정

 

보존하기로 한 한국은행 옛 본관(국가사적·현재 화폐박물관)의 머릿돌. 이 돌에 ‘주춧돌을 놓는다’는 뜻으로 새겨진 ‘정초(定礎)’라는 한자는 조선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의 친필 글씨임이 지난해 10월 문화재청 조사로 확인된 바 있다.

 

구한말 일제가 대한제국을 침탈해 강점할 당시 앞잡이 구실을 했던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친필 글씨를 새긴 옛 한국은행 본관(현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아랫부분 머릿돌이 철거를 면하게 됐다.

 

문화재청은 지난 25일 열린 문화재위원회 근대분과 회의에서 국가사적인 서울 태평로 2가 한국은행 본관의 머릿돌 관리 방안을 심의한 끝에 돌을 그대로 두고 설명 안내판을 따로 놓기로 결정했다고 26일 밝혔다. 머릿돌에는 ‘주춧돌을 놓다’는 뜻의 한자 ‘定礎’(정초)가 새겨져 있다. 전문가들은 옛 한국은행 본관을 짓고있던 1909년 당시 주춧돌을 올린 뒤 붙인 것으로 추정해왔다.

 

문화재청 쪽은 “안내판은 머릿돌 주위 화단에 놓게 될 것”이라며 “구체적인 문안과 크기는 따로 소위원회를 꾸려 논의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한국은행은 앞서 문화재위원회에 머릿돌 처리 방안과 관련해 보존과 안내판 설치, 석재로 덮어씌우는 복개, 철거 뒤 독립기념관 이전의 세 가지 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이 지난해 12월 만 18세 이상 국민 1천 명에게 벌인 설문조사에서는 머릿돌을 역사적 기록으로 보존하고 안내판을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52.7%, 이토의 흔적을 지워야 한다는 의견은 47.3%로 나타났다.

 

옛 한국은행 본관의 머릿돌 글씨는 2016년 문화재연구가 이순우씨가 이토의 필적을 뒷받침하는 근거사료를 처음 발굴해 공개한 이래로 학계·언론에서 이토 필적설이 계속 제기되면서 철거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져 왔다.

 

지난해 10월초 문화재청 국정감사를 앞두고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토 친필설을 다시 꺼내며 처리 방안을 질의한 뒤 문화재청이 전문가 조사를 벌여 같은 달 21일 이토 친필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발표한 바 있다. 노형석 기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재건에 1250억원 지원하기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25일(현지시각) 라말라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라말라/AP 연합뉴스

 

미국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사이의 휴전을 안정화하려 시도하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재건에 1억1200만달러(약 1250억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미국은 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폐쇄했던 예루살렘 주재 영사관을 다시 열겠다고 밝혔다. 이스라엘-하마스 무력충돌 와중에 약화한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를 격상하려는 시도다.

 

이스라엘-하마스 사이의 불안한 휴전을 안정시키기 위해 중동을 방문하고 있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25일(현지시각) 요르단강 서안 라말라에서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만난 뒤 이렇게 밝혔다.

 

블링컨 장관은 “가자지구 재건을 위해 7500만달러 규모의 경제개발원조를 의회에 요청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밖에도 가자지구 긴급재난 지원금 550만달러와 팔레스타인 난민을 돕는 유엔 기구를 통해 3200만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블링컨 장관은 “우리가 재건하는 것들을 앞으로 하마스가 더 많은 로켓 공격을 하기로 결심한다는 이유로 다시 잃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어야만” 가자지구 재건이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10일 하마스가 선제공격하자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가자지구에 미사일 폭격으로 응수해 250명 이상이 숨졌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당 내부의 비판 속에도 이스라엘에 가까운 태도를 유지했다.

 

블링컨 장관은 또 “팔레스타인과 관계를 격상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다시 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루살렘 주재 미국 영사관은 미국과 팔레스타인의 소통 창구 구실을 했으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8년 주이스라엘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 그 기능을 축소했다.

 

블링컨 장관이 이같은 지원 방안을 내놓은 것은 무장정파인 하마스에 견줘 팔레스타인에서 지도력이 약화된 아바스 수반의 입지를 넓혀주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블링턴 장관은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휴 총리도 만나 지역 안정을 논의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하마스가 국경을 넘어 로켓 공격을 해올 경우 “매우 강력한 대응”을 하겠다고 말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아사드 7년 임기 대통령 당선 기정사실

반세기 집권 ‘아사드 부자’ 정권은 건재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한 남성이 대통령 선거 투표를 마친 뒤 잉크가 찍힌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다마스쿠스/로이터 연합뉴스

 

2010년 ‘아랍의 봄’ 이듬해 시작된 내전이 10년째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에서 26일 임기 7년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열렸다. 내전 희생자는 38만명을 넘지만 반세기에 걸쳐 시리아를 철권통치 중인 ‘아사드 왕국’은 건재하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입증했다.

 

26일 실시된 대선에서 이미 21년째 집권 중인 바샤르 아사드(56) 대통령 4선이 확실시된다고 <에이피>(AP) 통신 등 외신이 전했다. 아사드 가문의 시리아 지배는 이미 51년째다.

아사드의 아버지인 하페즈 아사드가 197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그의 사망 뒤 바샤르 아사드가 대통령을 이어받았다.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오전 7시에 투표소 문이 열리자 수천명이 투표를 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통신은 전했다. 아사드 대통령이 등장하는 대형 포스터와 “우리는 미래를 선택한다. 우리는 바샤르 아사드를 선택한다” 같은 문구가 적힌 펼침막이 거리 곳곳에 걸렸으나, 상대 후보 2명의 포스터가 걸린 곳은 적었다고 덧붙였다.

 

선거 전부터 아사드의 당선은 기정사실과 다름없었다. 시리아 헌법재판소는 대선 후보 신청자 51명 중 아사드 대통령을 포함해 3명의 후보 등록만 허용했다. 연속 10년 이상 시리아에 거주하지 않은 사람의 후보 등록을 금지해 망명 중인 야권 인사들의 출마는 원천 차단했다.

아사드 정권은 내전 중인 지난 2014년 대선 때도 아사드가 89% 득표율로 승리했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투표는 아사드 정권 통치력이 미치는 지역에서만 치러졌으며, 쿠르드족이 장악한 북동부에서는 진행되지 않았다.

 

정부군이 장악한 남부 다라 지역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번 선거가 “적법하지 않다”며 보이콧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독일 <도이체 벨레>는 “국제사회는 이번 선거를 우롱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독일·영국·이탈리아 외무장관은 공동으로 이번 대선이 “공정하지도 자유롭지도 않다”는 성명을 냈다.

 

 

아사드는 아버지인 하페즈 아사드가 2000년 6월 69살 나이로 숨진 지 한달 만에, 35살에 유일한 대선 후보로 나와 97% 득표율로 당선됐다. 두달 뒤인 9월 지식인 100여명이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한 ‘다마스쿠스의 봄’ 사태가 벌어지자, 이듬해 10여명을 체포하며 탄압했다. 하지만 이는 더 큰 탄압의 전주곡이었을 뿐이다.

 

2010년 말 튀니지 노점상 모하마드 부아지지 분신 이후, 중동 각국에서 민주화 시위인 ‘아랍의 봄’이 일어났다. 이듬해인 2011년 3월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등에서 아사드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다. 아사드 정권은 군을 동원해 잔혹하게 탄압했고 시민들은 반정부 무장 투쟁으로 맞섰다. 시리아 내전의 시작이었다.

 

반군 연합체인 자유시리아군(FSA)는 수니파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받으며 아사드 정부군과 맞섰다. 아사드 정권은 시아파지만 시리아 국민의 다수는 수니파다. 반군은 2012년 시리아 제2의 도시 알레포 등을 장악하며 공세를 펼쳤지만, 아사드 정부군은 2013년 중반부터 반격에 나섰다. 미국, 사우디, 터키, 러시아의 개입 그리고 이슬람국가(IS)까지 얽히며 시리아 내전은 복잡한 국제전 양상으로 번졌다. 2018년께부터는 아사드 정부군의 우세가 굳어졌다. 내전 초기 시리아 국토 30% 정도밖에 통제하지 못했던 아사드 정권의 영향력은 이제 전 국토 3분의 2가량으로 확대됐다.

 

이번 대선은 시리아 내전의 승자가 아사드로 굳어져 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싱크탱크인 뉴스라인 인스티튜트의 니콜라스 헤라스는 <에이피>에 “아사드가 자연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이유로 사망하지 않는 한, 과거 그리고 미래의 시리아 대통령일 것”이라며 “그와 그의 동맹은 이 사실을 밀어붙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10년에 걸친 내전 과정에서 38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2011년 내전 발생 이후 660만명이 난민이 됐고 670만명은 국내에 흩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합치면 1300만명 이상이 전쟁으로 고향을 떠난 셈인데, 시리아 전체 인구 2100만여명(2011년 기준)의 절반이 넘는 수치다.

 

아랍의 봄 때 민주화 요구 시위로 중동 독재 정권 상당수가 무너졌다. 튀니지의 자인 엘아비딘 벤 알리,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가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현재 아랍의 봄으로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된 곳은 튀니지 정도밖에 없다. 이집트에서는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압둘파타흐 시시가 정권을 잡았고 예멘은 내전 중이다.   조기원 기자

닉슨 독트린, 백곰 그리고 ‘미사일지침’ 폐지

● 칼럼 2021. 5. 27. 09:5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합의가 아니라 한국이 스스로 지키겠다고 통보한 ‘미사일 개발 자율규제 서한’

 

미국은 1969년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인끼리’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1971년 경기 동두천에 있던 주한미군 제7사단도 철수했다. 당시 한국이 군인 5만명을 베트남에 파병해 미국을 도왔지만, 미국은 한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7사단 철수를 강행했다.

미국을 믿을 수 없게 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에 나섰다. 군 전력 증강 사업인 ‘율곡사업’을 시작하고 비밀리에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착수했다. 무기 개발은 보안을 위해 ‘위장 사업명’을 사용한다. 1974년 미사일 개발 사업은 ‘항공공업계획’이란 사업명으로 대통령 재가를 받았다. 유도탄연구소는 ‘대전기계창’, 충남 태안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ADD) 안흥 비행시험장은 ‘안흥측후소’로 위장했다.

 

1978년 9월26일 미사일 공개 시험 발사에 성공해, 한국은 세계에서 7번째 미사일 개발국이 됐다. 첫 국산 미사일은 미국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개조한 지대지 미사일이었다. 이 미사일 별칭이 ‘백곰’이었다. 겨울에 폭설을 맞으며 안흥 비행시험장 야외에서 일하던 연구원의 모습이 마치 북극곰 같아서였다.

 

백곰 발사 뒤 주변 강대국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백곰을 핵무기 운반체로 본 것이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핵 개발과 연관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고, 소련 국방부는 “남한의 핵 개발을 경고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도 “탄도미사일 개발 뒤에는 핵을 개발할 것이냐”고 한국 정부를 추궁하고 “미사일 사거리를 서울에서 평양 타격이 가능한 180㎞로 제한하라”고 압박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 미국 정부 특사까지 국방과학연구소를 찾아와 미사일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1979년 7월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미사일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그해 9월 노 장관은 ‘(미국이 용인 가능한) 사거리 180㎞ 이내, 탄두 중량 500㎏ 이내로 개발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종료된 ‘미사일 지침’의 시작이었다. 그동안 ‘한-미 미사일 지침’으로 불렸는데 ‘미사일 지침’이 정확한 명칭이다. 양국 합의가 아니라 한국이 스스로 지키겠다고 통보한 ‘미사일 개발 자율규제 서한’이기 때문이다.    권혁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