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고위직 유언장 존재, 들어본 적 없다회장 유언장·유언은 거론 자체 금기

삼성·현대차·SK·LG·롯데·한진 별세 회장들 대부분 생전에 유언장을 남기지 않아

유언장 부재상속·경영권 분란 흔치 않아 남긴 유언이 가족들간 분쟁 초래도

 

25일 타계한 고 이건희(78) 삼성전자 회장이 과연 유언장 혹은 유언을 남겼을까? 삼성그룹 전·현직 사장급 3명에게 물어보니, 유언장이나 유언에 대해 한결같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며 유언장을 만들어 남겼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6년 넘게 병상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유언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고, 2014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지기 전에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뒀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라는 얘기다. 재벌기업 회장들의 유언장이나 유언의 존재 여부는 가족의 일이라서 입에 담는 자체가 금기시되는 극비 사항이지만, 재벌 회장이 별세할 때마다 승계자 지목과 재산배분·상속 등을 둘러싸고 가족은 물론 그룹 안팎, 나아가 세간에 관심의 초점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아무런 의식 없는데 유언장을 쓸 수 있겠는가?”

26일 삼성 계열사 사장을 지낸 씨는 고 이건희 회장의 유언장 소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유언장이 있다면 20145월 갑작스럽게 쓰러지기 전에 써뒀다는 말이 되는데글쎄. 순전히 상상과 가정일 거 같다. 그날 쓰러진 순간부터 그 이후에 지금까지 의식이 전혀 없었다. 아무런 의식이 없는데 유언장을 쓸 수 있겠는가?” 단지 추측과 풍문에 가까울 것이라는 얘기다. 6년 내내 명료한 의식이나 판단력을 잃은 위중한 상태로 와병 중이었던터라 병석에서 별도의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을 가능성은 극히 낮은 편이다. 다른 두명의 전·현직 계열사 사장도 유언장 존재 얘기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씨는 고인의 의식 상태에 대해서는 서울삼성병원에 있을 때 고인이 병실 안 텔레비전 앞에서 휠체어 타고 있는 모습을 바깥 멀리서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이 있었지만,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당시 운동 차원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쓰러지기 직전에는 1주일에 한번씩 회사에 나와 보고도 받고 점심도 회사에서 먹었다. 건강이 그렇게 왕성하던 차에 갑자기 쓰러졌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보면, 잘은 모르지만 그 전에 사전에 유언장을 써놓았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남긴 유언() 가족 분쟁 초래하기도CJ와 삼성의 갈등

재벌 회장의 유언장은 가까운 가신들은 물론 심지어 자식들까지도 작성돼 있는지조차 잘 모를 수 있고, 감히 입밖에 꺼내기도 어렵다. 이미 타계한 역대 재벌기업 회장들은 거의 대부분 생전에 유언장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바깥에 알려져 있다. 유언장 문서보다는 유지혹은 유언의 형태로 장례 방식이나 가족 화합 메시지를 남긴 경우가 흔하다. 유언장 부재로 인해 자녀들간의 재산 상속·경영권 분란이 빚어지는 일은 많지 않은 편인데, 오히려 남긴 유언()이 가족들간 분쟁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77·타계 198711) 선대 회장은 유언장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비운의 황태자로 불린 장남 고 이맹희(2015년 별세) CJ그룹 명예회장(전 제일비료 회장)1993년에 남긴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유서를 만든 적이 없다. 아버지의 유언은 모두 구두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이병철 회장이 다섯 식구를 한자리에 모아두고 삼성 경영권을 셋째아들 이건희에게 물려준다고 선언했다고 기록했다. 이맹희 회장은 이 책에서 아버지가 후계구도를 밝힌 곳은 용인에 있는 아버지의 거처라고 밝힌 뒤, “아버지는 폐암 수술차 일본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날 밤 가족회의에서 건희의 후계를 처음 언급했다. 운명 직전에 누나, 누이동생, 건희, 내 아들 재현 등 5명을 모아두고 구두로 건희에게 정식으로 삼성의 경영권 이양을 유언했다.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 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그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고 회고했다.

다만 이맹희 회장은 재산분배와 관련해선, ‘이 자리에서는 건희에게 삼성을 물려준다는 내용 이외에 삼성의 주식을 형제들간에 나누는 방식에 대한 아버지의 지시도 있었다면서도, ‘가족들끼리의 이야기니만큼 더 이상의 상세한 내용은 덮어두는 것이 좋겠다고 기록했다. 이맹희 회장은 2012년에 이 회장을 상대로 약 1조원 가량의 상속분을 요구하는 이병철 차명재산 상속 소송을 제기하며 갈등한 적도 있다. CJ가 삼성에서 계열분리 뒤에도 삼성과의 갈등은 한동안 지속됐다. 하지만 당시 재판에서 양쪽 모두 유언장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힌 적도 있다.

SK 고 최종현 회장 화장하고 사회에 기부하라유언 남겨

왕 회장으로 불린 고 정주영(86·타계 20013)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유언장과 유언도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별세 당시 여러 설만 무성하게 퍼졌다. 1992년 대통령선거 출마 직전에 유언장을 작성해 가회동 자택의 개인금고 안에 보관해오면서 가끔씩 수정을 해왔다는 소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유언장은 끝내 공개되지 않았고, 존재 여부도 불확실한 상태로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왕 회장은 운명하기 몇 시간 전부터 의식을 잃어 별다른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SK그룹 고 최종현(69·타계 19988) 선대 회장은 유언에 경영권이나 재산 상속 얘기는 남기지 않고, 그 대신에 시대를 앞선 유언으로 화장(火葬) 문화를 이끌었다. 고 최 회장은 폐암으로 갑자기 타계하기 전에 내가 죽으면 반드시 화장하고, 훌륭한 화장시설을 지어 사회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경영권은 최태원 회장으로 별다른 다툼 없이 깔끔하게 이뤄졌고 지금까지 마찰 없이 그룹경영이 지속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201811월에 자신이 가진 SK지분 329만주(4.68%·9600억원어치)를 동생 최재원 수석부회장과 큰아버지인 최종건(1973년 타계) 창업주의 가족 및 4·6촌 등 친척 23명에게 증여했다. SK 쪽은 당시 최 회장이 20년 전 자신이 경영권을 승계한 데 따른 마음의 빚을 갚는 차원에서 가족들에게 지분을 증여했다고 설명했다.

LG그룹 고 구본무(73·타계 20185) 회장도 1년간 투병하다가 연명치료를 거절하고 “50억원을 복지·문화·상록재단에 기부하라. 폐 끼치지 말고 번거롭지 않게 가족장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96912월에 세상을 떠난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도 생전에 유언장을 남겼다는 말은 없다.

먼 훗날 발견된 유언장롯데 후계자 다툼

재벌 회장의 유언장이 먼 훗날에 느닷없이 발견·공개되는 일도 있다. 이미 두 형제간의 경영권 소송·다툼이 일단락된 롯데그룹의 경우 최근에 고 신격호(98·타계 20201) 명예회장의 유언장을 놓고 또다시 작은 다툼이 일었다. 롯데 쪽은 지난 6월 신격호 회장이 20여년 전인 20003월에 자필로 작성해 일본 도쿄 사무실 금고에 보관해놓은 유언장을 공개하면서 한국, 일본 롯데그룹의 후계자를 신동빈 회장으로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주장했다. 지난 1월 신격호 회장 별세 당시 유언장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는데, 최근 유품을 정리하고 치우다가 서랍 속에서 발견됐다는 것이다.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 쪽은 유언으로서 법적 효력이 없다며 신동빈 회장을 후계자로 한다는 내용은 있지만 오래 전 이야기고, 지금은 상황이 크게 변했다고 주장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왼쪽 두 번째)과 공영운 현대자동차 전략기획담당 사장(오른쪽)26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빈소에서 조문을 마치고 나서고 있다.

김우중(83·타계 201912) 전 대우그룹 회장도 별다른 유언장이나 유언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고, 멀리 거슬러 올라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59·타계 19817) 회장도 유언장을 남기지 않았다.

대체로 볼때, 아버지 회장이 따로 남긴 유언이나 유언장이 없어도 경영권 갈등이 일어나는 건 흔치 않다. 큰형이 그룹 회장을 물려받는 장자 승계전통이 있고, 다른 가족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계열 분리로 독립하기 때문이다. 생전에 유언장을 남기지 않을 경우 유족들이 상속세를 뺀 유산을 법정 상속비율대로 골고루 나누어 갖는 방식으로 정리하기도 한다.

반면, 유언이 자녀들간 불화를 간접적으로 초래하는 일도 빚어진다. 한진그룹 고 조양호(70·타계 20194) 회장은 유언으로 가족들과 잘 협력해서 사이좋게 이끌어 나가라고 했지만 유언장은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불분명한유언이 3남매간 경영권·지분 상속을 둘러산 분란의 화근이 됐다는 평도 나온다. 한진그룹은 지금보다 한 세대 전인 창업주 고 조중훈(82·타계 200211) 회장의 유언장을 놓고도 형제들의 난을 겪은 바 있다. 조중훈 회장의 유언장에 대부분의 재산을 장남 조양호 회장이 소유하고 있는 인하학원·대한항공에 전액 기부한다고 적혀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동생들(조남호·조정호 회장)유언장은 조작됐다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조계완 기자


칠레 산티아고 개헌 국민투표 현장 개헌” 78% 압도적 찬성

내년 4월 투표 제헌위원 선출, 2022년초 국민투표 새 헌법 승인

 

칠레 개헌 국민투표가 치러진 25일 수도 산티아고의 프로비덴시아에 위치한 레히나 파시스 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손소독을 하면서 투표 준비를 하고 있다. 산티아고/김순배 통신원

 

피노체트 독재를 무력이 아니라 종이와 펜으로 몰아냈다. 오늘 다시 종이와 펜으로 나라를 바꾸게 됐다.”

25일 칠레의 헌법을 새로 만들지 여부를 묻는 역사적 국민투표의 현장에서 만난 세실리아 시푸엔테스(75) 할머니의 말이다. 할머니는 198810월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의 집권 연장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아니요를 선택했고, 이날은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찬성했다. 이날 국민투표에서 물은 다른 한가지 새 헌법을 쓰는 기구의 구성은 현 국회의원과 국민이 각각 50%씩 참여하는 방식이 아니라, 100% 국민투표로 새로 뽑는 구성을 선택했다. 할머니는 이 선택이 보다 공정한 칠레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시작이 되리라 믿고 있었다.

이날 오전 11시가 넘어가면서, 세실리아 할머니가 투표한 수도 산티아고 프로비덴시아의 레히나 파시스 학교에는 200m 이상 긴 줄이 늘어섰다. 이날 투표율은 50.83%를 기록해, 최근 두번의 대선 투표보다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99.8% 개표 결과, 새 헌법 제정 찬성이 78.27%, 반대가 21.73%였다. 제헌기구 구성방식 역시 국회의원·국민대표 각각 50% 구성이 21.01%, 국민대표 100% 구성이 78.99%로 집계됐다. 두개의 국민투표 문항에 투표자의 80%에 가까운 절대다수가 할머니와 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칠레 국민들은 이날 피노체트의 잔재였던 헌법을 4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청산하기로 결정했다.

기본권조차 돈이 결정피노체트의 망령 걷어낼 첫발

칠레인들은 세실리아 할머니처럼 국민 스스로 만든 변화에 희망을 걸었다. 투표장에서 만난 호세파 오크만(29)은 지난해 10월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으로 촉발된 뒤 대통령 퇴진과 새 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몇달째 이어졌던 시위의 현장에 나갔다. 호세파는 폭력시위를 벌였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수백만명이 변화를 요구했고, 이제 국민의 힘으로 권력을 되찾고 변화를 시작하는 것이라며, “현 헌법에 가로막혀서 하지 못하던 법률 개정 등 나라의 근본적 변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기대를 걸었다. 투표장 안내를 하던 파올라 발렌수엘라(33)나라의 미래를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라며 새로운 시대에 맞게 헌법을 바꾸도록 국민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4살 아들을 데리고 투표장에 나온 로돌포 세풀베다(29)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의회와 정치권을 대신해 국민들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실리아 할머니도 그동안 칠레가 살기 좋아졌지만 아직 모자란다폭력이 아니라 대화로 칠레를 바꿔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역사적 국민투표에 대한 설렘과 긍지도 느껴졌다. 친구와 투표를 하러 나온 알바로 파라오(45)칠레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역사적인 순간이다.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며 남녀가 동수로 제헌위원에 참여하는 등 새 헌법에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 어두운 역사를 뒤로하고 새로운 방식의 발전과 새로운 나라 건설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계 존 콘트레사스(75) 할아버지도 기대를 걸었다. “오늘 칠레의 미래가 결정되고 그 결실을 맺을 것이라며 그동안 상처받았던 칠레가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나아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날 투표 독려 티브이 광고는 201033인의 광부 구출과 2016년 아메리카컵 축구대회 우승 등 최근 칠레에서 있었던 환호의 순간을 내보내며, 역사적 순간에 동참할 것을 독려했다. 구글 첫 화면은 이날 역사적 국민투표를 기념해, 칠레의 국기와 투표함 모양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칠레 개헌 국민투표가 치러진 25일 수도 산티아고의 프로비덴시아에 위치한 레히나 파시스 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손소독을 하면서 투표 준비를 하고 있다.

군부독재 잔재, 수십년간 지배지금까지는 시장의 헌법이었다

하지만 이날 모두가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찬성하지는 않았다. 마스크 밖으로 흰 수염이 길게 삐져나온 하이메 바르가라(72) 할아버지는 불필요한 일을 벌여서 원하지 않는데도 국민투표가 실시돼 투표하러 왔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새 헌법을 쓰겠다던 대선후보는 지난 대선에서 떨어졌고 혼란은 필요 없다피노체트 때 만든 헌법이 문제라는데, 헌법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젊은이들이 왜곡하고 거짓말을 한다고 비판했다.

할아버지도 1988년 국민투표에서 피노체트의 집권 연장에 반대했다. 할아버지는 당시는 피노체트가 15년이나 군사통치를 했으니, 민주주의 정부를 원했다헌법이 문제가 아니라 일을 해야 세금을 걷고 정부가 지원을 하지, 모든 걸 다 거저 주는 마법은 없다고 비판했다. 자신을 로베르토라고 밝힌 할아버지도 일부 정치세력이 무력으로 이런 상황까지 만들어서 필요 없는 일을 하고 있다며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고 돌아섰다. 이날 투표감독관으로 일하던 파블로 루이스(38)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헌법을 새로 제정할지를 결정하는 의미 있는 투표에서 선거관리 업무를 맡게 돼 뿌듯하다면서도 지난해 이어진 시위와 혼란, 폭력 등에 반대한다. 새로운 헌법도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라며 새 헌법 제정에 반대했다.

의견은 갈렸지만, 모두 빠짐없이 마스크를 썼다. 칠레 영주권자인 나도 아침 920, 제일 좋은 한국산 마스크를 골라 쓰고 투표소로 걸었다. 코로나19 탓에 투표소를 늘려, 투표소가 바뀌었다. 선관위 직원이 입구에서 나눠준 알코올 젤을 손에 바르고 학교로 들어섰다. 투표장 번호는 195V. 앞사람이 바깥으로 나온 뒤 들어섰다. 큰 거실 크기의 투표장에서 유권자 명단 앞에 신분증을 놓자, “(), 파란색 볼펜을 갖고 왔어요?”라고 물었다. 펜을 통한 전염을 막기 위해, 각자가 펜을 가져오라고 해서 미리 사왔다. 2장의 투표용지를 손에 들었다. 흰색 용지는 헌법을 새로 제정할지 말지를, 베이지색 용지는 헌법 제정 기구의 구성방식을 물었다. 기표소는 천으로 닫히지 않고 트여 있었지만, 투표감독관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나도 칠레의 변화를 믿었다. ‘찬성칸과 국민대표 100% 구성 칸에 위에서 아래로 쭉 선을 그었다. 기표 뒤 투표용지를 접어 배부받은 스티커로 붙인 뒤, 2개의 투표함에 각각 넣은 뒤 신분증을 돌려받고 나왔다.

칠레 개헌 국민투표가 치러진 25일 수도 산티아고의 프로비덴시아에 위치한 레히나 파시스 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시민들이 알코올 젤로 손소독을 하면서 들어가고 있다.

하루 종일 특별 생방송을 하던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8시 투표 마감 뒤 곧바로 개표 중계가 시작됐다. 새 헌법 제정에 찬성이 나올 때마다 브라보가 터져나왔다. 반대표가 나올 때는 ~” 야유가 흘러나왔다. 1988년 국민투표에서 1997년까지 피노체트의 집권을 연장할지 물었을 때, 54.7%아니요’, 43.0%에 투표해 민주화의 길을 선택했다. 32년 뒤 오늘, 훨씬 더 많은 칠레 국민들이 민주화 이후 민주화를 향한 새 헌법 제정을 선택했다. 그것도 불신받은 국회의원들을 제외하고, 국민들의 손으로 뽑은 새로운 대표가 헌법 제정의 주체가 되도록 했다. 그 길에서, 시위 현장의 도 더 이상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지난해 시위로 계엄령 선포 뒤 군바리라고 비난받던 군인들은 투표소 출입을 도왔다. 시위대를 무력진압한다고 짭새라고 욕먹던 경찰에게 대학생은 길을 물었고, 대학생은 군인의 안내대로 자전거를 세울 곳을 찾았다.

이날 새 헌법 제정에 찬성한 국민들이 원하는 미래는 확실하다. 모두 공정하고 기본권이 보장되는 칠레를 말했다. 친구와 같이 투표한 알렉시스 리소(47)지금까지는 시장의 헌법이었다. 국민이 의료와 교육 등 기본권에 돈을 내고 경제적 수준에 따라 차별을 받았지만, 이제는 달라야 한다돈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좀 더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원한다고 말했다. 세실리아 할머니도 독재가 끝난 뒤 30년간 변화가 있었지만, 교육과 의료 등 더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더 나은 칠레를 기대했다.

한계 있지만 하나씩 정해나갈 것” ‘민주화 이후 민주화실현 갈림길

하지만,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찬성한 이들도 그 한계를 알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새로운 헌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새 헌법의 내용을 놓고 갈등도 빚고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을 걸고 토론하면서 국민들이 하나씩 정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며칠 전, 교육의 자유와 권리를 놓고 벌어진 토론은 다가올 합의의 어려움을 잘 보여줬다. 부모가 자녀를 교육할 방식과 기관을 선택할 자유와 다양한 이념과 운영방식의 교육기관을 설립할 자유와 국가가 양질의 교육을 국민 모두에게 보장할 의무와 그 기본권을 보장받을 권리를 놓고 뜨거운 토론이 붙었다. “지금까지의 자유는 권리를 침해하는 자유였다는 비판이 눈길을 끌었지만, 앞으로 헌법에 담을 내용을 놓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질 것이다. 칠레는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모델과 그에 기인한 불평등뿐만 아니라, 구리 수출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에 따른 국가재정 악화, 페소화 가치 하락에 따른 물가 상승 등 대외적 요인까지 겹쳐 삶이 더 고단해졌다. 칠레대 사회학과 에마누엘 바로세트 교수는 22일 세미나에서 국민들은 지금 당장 큰 변화를 원하지만 헌법을 바꾼다고 모든 사회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내다봤다.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 탓에 정부의 재정여력은 더 열악해졌고, 불평등은 더 악화됐다.

이제 칠레는 내년 411일 투표에서 제헌위원 155명을 새로 선출한다. 9개월간 헌법을 새로 쓰고, 필요하면 3개월 더 연장된다. 이후 2개월 뒤인 2022년 상반기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이 다시 승인을 결정하게 된다. 202111월 대선과 맞물려, 내년 하반기 칠레는 더욱 뜨거운 논쟁이 달아오를 것이다. 칠레는 이날 1990년 민주화 이후에도 독재의 잔재로 남았던 헌법을 역사 속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제 토론은 그 낡은 헌법에 기초한 신자유주의 국가운영 모델을 어떻게 뜯어고치고, 지난 30년간 이루지 못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가 될 것이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이날 저녁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를 내다보자고 강조했다. 지난해 시위로 뜨거웠던 산티아고의 이탈리아 광장과 칠레 곳곳에서는 승리의 축포와 환호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산티아고/김순배 통신원(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원전 폐쇄박근혜 정부 때는 맞고 문재인 정부 때는 틀리다?

월성1호기 경제성 저평가폐쇄 명분 없다탈원전 총공격

  박근혜 정부 때는 당대표, 지역의원, 시장까지 영구정지 찬성

 

최재형 감사원장이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법무부, 대법원, 감사원, 헌법재판소, 법제처 종합감사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연합뉴스

       

감사원의 월성1호기의 경제성이 낮게 평가됐다는 감사 결과 발표를 놓고 보수 야당이 조기 폐쇄 명분이 없어진 것이라며 탈원전 정책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면서, 앞서 이뤄진 고리1호기 영구정지 과정이 비교 대상으로 소환되고 있다. 고리1호기는 박근혜 정부 때인 20156월 한국수력원자력이 1차로 20176월까지 연장된 수명의 추가 연장을 시도하다 포기하면서 20176월 영구정지됐다.

보수 야당은 한수원이 월성1호기의 경제성을 축소해 조기 폐쇄했다는 의혹을 제기해 지난해 9월 국회의 감사 요구안을 관철시켰다. 계속 가동 때의 이용률을 낮게 전망하고 전기판매 단가를 과도하게 낮추는 등 자료를 조작해 월성1호기의 경제성을 과소 평가했다는 것이었다.

감사원은 지난 20일 야당이 제기한 이런 의혹을 일부 사실로 확인한 감사 결과를 내놨다. 감사원은 국회에 보낸 감사보고서에서 최근 강화된 규제환경 등을 고려할 때 중립적 이용률 60% 그 자체는 적정한 추정 범위를 벗어나 불합리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기판매 단가와 관련해선 월성1호기 이용률 산정에 고려한 규제 강화 등이 반영되지 않은 전체 원전의 이용률(84%)을 전망단가 추정에 그대로 사용하면 실제 판매단가보다 낮게 추정되는 사정을 알면서도 보정하지 않아 계속가동시의 전기판매수익이 낮게 추정됐다고 지적했다.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감사원은 한수원의 경제성 평가 용역보고서에서 월성1호기의 즉시 가동중단 대비 계속가동의 경제성이 224억원(중립적 이용률 60% 기준)으로 분석되는 등 계속가동의 경제성이 불합리하게 낮게 평가됐다고 결론지었다.

감사원은 경제성이 합리적으로 평가될 경우 즉시중단 대비 계속 가동의 경제성이 얼마나 더 늘어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 참고값으로, 전체 원전 이용률을 84%에서 70%로 낮추면 전기판매 전망단가가 연도별로 최소 4.07/kWh에서 최대 5.94/kWh 상승한다는 재산정 결과를 제시했다. 한수원의 경제성 평가보고서에 적용된 평균 전망단가 51.52/kWh보다 7.9~11.5% 높은 값이다.

2011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고리 원전 1호기는 차단기 고장으로 멈춰 섰다. 당시 환경운동연합 등 환경단체 회원들은 고리 1호기 인근 해안에서 폐쇄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부산/연합뉴스

한수원의 경제성 평가 최종보고서는 이용률 60%51.52/kWh의 평균 전망단가를 적용해 2022년 말까지 계속가동 할 때의 전기판매수익을 7511억원으로 잡았다. 여기에 감사원이 참고치로 제시한 전망단가 상승률 최대치를 대입하면, 계속가동 때의 전기판매수익은 약 864억원 늘어난다. 투입 비용에 변화가 없다고 가정할 경우 즉시 가동중단 대비 계속가동의 경제성은 224억원에서 1088억원으로 불어나는 셈이다.

이 경제성 규모는 사실 2017년 영구정지된 고리1호기의 수명을 10년간 2차 연장해 계속 가동할 때의 경제성보다는 작은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2015612일 한수원에 고리1호기의 계속 운전을 추진하지 말도록 권고하며 발표한 보도자료를 보면, 당시 고리1호기는 2차 수명연장을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이 비해 최소 1792억원, 최대 2688억원 이득이라는 경제성 분석 결과가 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정부는 고리1호기의 경제성, 안전성, 국민 수용성, 전력수급 영향과 미래 해체산업 대비 등을 종합 고려해 고리1호기 영구정지를 한수원에 권고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계속 가동하는 것이 경제적으론 이득이라는 분석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정부의 정책적 판단으로 고리1호기의 불을 끄기로 결정한 것이다. 2018년 한수원 이사회가 월성1호기 폐쇄를 결정한 사유와 크게 다르지 않은 2015년 정부 발표는,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은 물론 야당까지 환영했다. 이는 당시 한수원이 고리1호기의 수명연장 신청을 포기해 20176월 영구 정지로 이어지게 했다.

2017619일 부산 기장군 한국수력원자력 고리원자력본부에서 열린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당시 보도를 보면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부산지역 국회의원 13명은 에너지위원회 개최 사흘 전 당시 윤상직 산업부장관을 만나 고리1호기 폐로를 공식 건의했다. 당시 울산시장이던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시의회에서 고리1호기 수명연장이 경제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와 있는데도 고리1호기 재연장은 안전성, 경제성, 주민수용성, 전력수급 측면에서 명분이 없다며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하태경 의원은 국회예산정책처에 별도로 고리1호기 계속 운전에 대한 경제성 분석을 의뢰한 결과를 토대로 수명연장을 하면 한수원이 예측한 수익이 아니라 3천억원대의 손실이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SSC 투아타라, 최고 시속 508km 주행 성공

 

양산차 세계 기록을 경신한 SSC 투아타라의 주행 장면. SSC노스아메리카 제공

 

시속 500km를 달리는 하이퍼카(슈퍼카 중의 슈퍼카)가 탄생했다. 기록 경신을 위해 특수제작한 차량이 아닌 일반 시판용 차량의 속도가 시속 500km를 넘은 것은 세계 양산차 126년 역사상 처음이다.

미국의 하이퍼카 제조업체 SSC 노스아메리카(SSC North America)의 새로운 하이퍼카 ‘SSC 투아타라’(SSC Tuatara)는 지난 10일 오전 화창한 날씨 속에 라스베이거스 외곽의 11.2km(7마일) 고속도로 구간에서 `마의 벽'으로 통했던 시속 300마일(483km)을 넘어섰다. 투아타라는 이날 고속도로 구간 왕복주행에서 평균 시속 316.11마일(508.73km)를 기록했다. 서울~부산 거리를 400km로 잡고 단순 계산해보면 서울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분도 안돼 도착할 수 있는 속도다. 투아타라는 특히 돌아오는 길에서는 최고 시속 331.15마일(532.93km)을 찍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중국 상하이의 자기부상열차 최고 기록(시속 431km)보다 무려 100km나 빠른 것이다.

SSC 투아타라의 속도 측정은 7마일 구간에서 진행됐다.

이날 기록은 현재 최고 기록인 스웨덴의 고성능차량 제조업체 코닉세그의 아제라RS가 업그레이드한 엔진으로 2017년에 세운 왕복 평균 277.87마일(447.19km)을 시속 60km 이상 웃돈다.

SSC 투아타라의 엔진룸.

공기역학 설계, 7단 변속기, 탄소섬유 등 첨단 기술의 승리

1894년 최초의 양산차인 독일 벤츠의 벨로가 달린 최고 속도는 시속 19km(12마일)였다. 시속 100마일을 돌파한 때는 그로부터 50여년이 흐른 1946, 시속 200마일은 다시 이로부터 40여년이 흐른 1987년이었다. 이제 또 다시 30여년이 흐른 2020300마일 돌파와 500km 돌파라는 두 대기록이 동시에 수립됐다.

이날 기록은 하이퍼카 최고 수준인 0.279의 항력계수를 달성한 공기역학 디자인, 1750마력의 8기통 엔진, 7단 컴퓨터 수동 변속기, 가볍고 강한 탄소섬유 모노코크(보디와 프레임이 하나로 돼 있는 차체 구조) 기술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성과이다.

제트훈련기, 헬리콥터 등을 동원해 역사적인 주행 장면을 촬영했다.

15GPS 위성 동원해 측정100대 한정 생산키로

사실 2010년대 중반 이후 부가티 시론, 헤네시 베놈 F5, 코닉세그 제스코 등 세계적인 하이퍼카들은 시속 300마일 돌파에 도전해 이론상으론 이를 구현했다. 그러다 지난해 부가티가 처음으로 최고 시속 304.77마일(490.48km)300마일 벽을 넘어섰다. 하지만 기록 인정에 필요한 왕복 주행이 아니라 편도 주행이어서 공식 기록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으려면 1시간 내에 왕복주행이 이뤄져야 한다.

미국 워싱턴주 SSC의 투아타라는 이날 한 시간 안에 같은 구간을 왕복 주행함에 따라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았다. 첫 출발 주행 기록은 시속 301.07마일(484.53km), 그 다음 복귀 주행 기록은 시속 331.15마일(532.93km)이었다. 이날 투아타라 운전대를 잡고 역사적인 주행을 한 전문 카레이서 올리버 웹(Oliver Webb)은 보도자료를 통해 "조건만 더 좋았다면 더 빨리 달릴 수도 있었다""시속 331마일에 이르렀을 때 투아타라는 5초간 무려 시속 20마일을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SSC노스아메리카 창업자인 제롯 셸비(왼쪽)와 레이서 올리버 웹이 공식기록인증판을 들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자동차 속도를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으려면 기록 인증 요원 2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제 고객이 쓰는 차량과 타이어, 연료를 사용해 공공도로에서 주행해야 한다. SSC노스아메리카는 이날 투아타라의 정확한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 15개의 위성을 이용한 GPS 측정을 진행했다. SSC는 또 아음속 제트훈련기 T-33과 헬리콥터, 드론으로 구성된 항공촬영팀을 동원해 이날 투아타라의 주행 장면을 영상에 담았다.

SSC 노스아메리카는 SSC 투아타라를 100대 한정 생산할 예정이다. 곽노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