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초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에 지명된 웬디 셔먼 전 대북정책조정관 인준 절차가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다. 공화당 보수세력의 거부로 상원 인준청문회도 열지 못한 상태다. 그뿐이 아니다. 이미 인준청문회에서 높은 평점을 받은 첫 한국계 주한 미국대사 지명자 성 김도 덩달아 인준을 받지 못해 서울 부임이 늦어지고 있다.
공화당의 인준 보류는 최근 오바마 정부의 새로운 대북접근 시도를 가로막으려는 정략적 압박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북-미 관계 개선과 6자회담, 그리고 남-북 관계 개선 전망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다. 셔먼은 클린턴 정권 말기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보좌관과 대북정책조정관을 지내면서 북-미 정책 전환과 북-미 관계 급진전을 주도했던 핵심인물이다.

공화당은 셔먼의 정무차관 지명 직후부터 행정부와 기업, 미국 옥스팸 등에서 일해온 그의 전력들을 들추며 적격성 여부를 문제 삼아 왔다. 그럼에도 셔먼의 전력에서 문제될 만한 것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화당이 가장 크게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셔먼이 올브라이트 장관 밑에서 일했다는 사실 자체라고 한다. 이는 셔먼이 국무부 각 지역국 업무들을 총괄하는 정무차관직에 예정대로 앉을 경우 극적인 대북정책 전환 및 북-미 관계 개선이 이뤄질지 모른다는 데 대한 거부감 때문일 것이다. 2000년 10월 북·미는 올브라이트 장관과 조명록 차수가 평양과 워싱턴을 교환방문하고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 문제를 논의하는 등 수교 직전 단계까지 갔었다. 그러나 그해 말 대선에서 부시의 공화당에 패해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공화당은 최근 미국 국가부채 상한 올리기 협상에서 극도의 편협성을 보이면서 결국 미국 신용등급 하락과 전세계 주가 폭락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북정책에서도 인도적 식량지원마저 거부하면서 북-미 접촉 시도 자체를 반대하는 극우적 편향을 드러내고 있다. 불행하게도 2000년 때와 달리 지금 한국 정부의 대북관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공화당에 무슨 대안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2000년 극적인 북-미, 남-북 화해·협력을 대책 없이 무산시킨 공화당이 이번에 또다시 흙탕물을 끼얹으려고 하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 미국도 중대한 책임이 있는 한반도의 분단 비극을 더는 정략에 이용하지 말기를 촉구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독도 문제에 대해 원론적인 언급만 하고 넘어갔다. “일본은 미래세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칠 책임이 있다”고 말한 것이 사실상 전부다. 일본 정부가 검정 교과서와 방위백서에 또다시 독도를 자국 영토로 명기하고, 자민당 극우 의원들이 울릉도 방문쇼를 벌이고, 미국이 동해의 일본해 단독 표기 방침을 밝히는 등 한-일간 역사 문제가 쟁점화한 상황과 동떨어진 무원칙하고 안이한 대응 태도다.

일본의 무력 지배에서 주권을 되찾은 광복절이야말로 우리 정부가 독도 문제의 역사성을 대외적으로 밝히고, 동아시아를 넘어선 국제적 평화를 위해 일본의 태도 변화를 촉구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잇따른 ‘독도 도발’에 대한 항의 한마디 없이 교과서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데 그쳤다. 독도 문제에 대한 정부의 분명한 입장도, 독도 도발이 되풀이될 경우에 대한 뚜렷한 대응 방안도 밝히지 않았다.
정부의 자세가 이렇듯 애매모호하다 보니 인기주의에 영합한 정치권 등에서 한탕주의식 독도 대책으로 불필요한 긴장만 낳는 일들이 빚어지고 있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그제 “독도에 해안경비대 대신 해병대를 주둔시키자고 정부에 제안했다”고 밝힌 것이 전형적인 사례다. 갑작스러운 군대 주둔은 일본의 즉자적인 군사적 대응을 불러와 독도의 분쟁지역화만 부추길 뿐이다.

현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정부가 독도 문제의 역사적 맥락과 현재적 의미를 국제사회에 분명하게 천명하는 일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병탄하기 전 비밀 내각회의를 통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등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노골화했다. 이런 역사성을 지닌 독도에 대해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전쟁범죄에 대한 반성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동시에 아시아와 태평양의 자유·평화를 위협하는 도전행위이기도 하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어제 “반성하지 않은 일본은 동아시아 평화에 위협이며, 동해의 ‘일본해’ 단독 표기 등에서 나타난 미국의 잘못된 판단은 동아시아 평화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밝힌 것은 새겨볼 만한 대목이다.
정부는 독도 문제의 역사적 측면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공감대를 넓혀야 한다. 그래야만 일본의 도발행위에 대한 대응수단의 폭도 넓어지고, 국제적 지지도 얻을 수 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항의하려고 워싱턴의 한국대사관에 전화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한테 얘기하지 말고 미국 국무부나 국방부에 하시오. 제주 기지를 만들라고 우리를 압박하는 게 그들이니까.’” 지난 5일 <뉴욕 타임스> 오피니언 난에 ‘원치 않는 미사일 강요당한 한국 섬(제주도)’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코리아 정책연구소’ 사무국장 크리스틴 안의 글에 나오는 얘기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도 실린 그 글에서 크리스틴 안은, 미국이 밝히길 꺼리지만 제주 해군기지는 미국을 위한 기지라고 주장했다.
그 다음날 <뉴욕 타임스> 오피니언 난에는 ‘파라다이스에 밀고 들어온 군비경쟁’이라는 제목으로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제주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 <미즈> 편집장을 지낸 ‘여성미디어센터’ 공동설립자 스타이넘은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면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 제주도의 환경이 파괴되고, 제주 기지를 중대 위협으로 간주할 중국을 긴장시켜 국제적 안보위기를 촉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타이넘 역시 한국이 미국 국방부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는 걸 걱정한다며 제주 기지가 미국 뜻대로 건설되고 있음을 내비쳤다.

크리스틴 안은 제주 기지 배치 이지스함의 미사일 요격체제로는 북의 저고도 단거리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남한의 북부지역 3분의 2를 지켜낼 수 없다는 1999년 의회 제출 미 국방부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제주 기지는 따라서 중국 남동부 해안지역에 일본과 대만 겨냥 장거리 미사일들을 배치해둔 중국을 겨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중국의 강력한 경제적 도전에 직면한 미국이 동중국해와 그 아래쪽 해역(동남아)에 대해 힘을 행사하는 데 제주 해군기지가 결정적인 구실을 할 것이라고 한 2009년 랜드연구소 보고서도 인용했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대국들 패권경쟁으로 제주도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됐다는 얘기를 크게 실었다. 지난 3월, 엘런 타우셔 미국 국무부 차관은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미국 동아시아 지역 미사일방어(MD) 체제와의 통합을 강화하는 쪽으로 저고도 미사일방어 체제를 확대하도록 한국에 요구했다. 매사추세츠공대 미사일방어 전문가 시어도어 포스털은 “제주도는 일본 방어에 이상적인 최적의 장소”라고 했다. 제주 기지 배치 이지스함들이 한국·일본으로 가는 중국의 탄도탄미사일들을 막아주며, 특히 일본을 중국·북한 미사일로부터 지켜줄 거라고 한 사람은 몬터레이 국제문제연구소 군축 전문가 제프리 루이스다. 이들은 그러나 한국은 별로 그 덕을 못 볼 거라고 했다. 북한 미사일들은 진행 고도가 낮아 남쪽 요격체제가 제대로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가 위험하다!

1999년 미 국방부 보고서도 같은 얘길 했다. 그러니까 전문가들 얘기가 옳다면, 제주기지 건설의 핵심 목적 중 하나는 일본 지키기다. 적어도 미국인들이 제주 기지를 얘기할 때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게 일본 방어라는 건 분명하다. 우리 당국이야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겠지만, 문제는 미국이다. 미국 방산업체 록히드마틴 설계의 이지스체제와 무기들을 장착한 세종대왕함은 미-일 동맹군과의 합동군사작전에 그대로 투입될 수 있다. 타우셔 차관 얘기도 한·일 함정의 미사일 요격 성능을 더 향상시키라는 거였다.
율곡함과 서애 유성룡함도 같은 KDX-3(KD-3)급 이지스함들이다. 대당 1조2000억원이 넘는다. 이지스함들은 미사일방어 체제의 핵심 요소다. 당국은 제주 기지 건설은 미국과 무관하며 세종대왕함에 탑재하는 건 미사일방어용 SM-3 미사일 체제가 아닌 SM-2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우리 해군이 도입한다는 SM-6 장사정 미사일은 미사일방어용으로도 쓸 수 있다.
독도가 리앙쿠르암이 되고 다케시마가 된 건 일본과 결탁한 미국 덕이 컸다. 동해, 한국해가 일본해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필리핀 지배를 위해 일본의 조선 병탄을 보장해줬던 미국은 일제 패전 뒤에도 전범국 일본을 살리고 한반도를 분단했다. 한국은 그들의 동아시아 핵심 파트너 일본 방어를 위한 기지였을 뿐이다. 그 덕에 일본은 아직도 한반도 식민지배가 합법이었고, 독도는 일본 땅이며, A급 전범도 잘못한 것 없다는 파렴치한 주장을 계속한다. 미-일 유착은 레너드 코언의 야유처럼, 부자들이 계속 부자로 남기 위한 전략이다. 그들이 설계한 세계가 지금 무너져내리고 있지만 그들은 금융업자들처럼 아직 멀쩡하고, 분단 반쪽인 우리는 어리석게도 여전히 그들에게 모든 걸 기대고 있다.

<한승동 -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7월 1일 캐나다 데이(Canada Day)때 토론토의 중심지에 있는 던다스 스퀘어에서 열린 기념행사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사실 행사라기보다는 하나의 기념공연이었다. 높은 사람이 나와서 길게 하는 지루한 연설은 없었고, 춤을 추는 공연이 주를 이루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댄스로 행사가 시작됐고, 우크라이나, 필리핀으로 이어졌는데 나는 보다가 중간에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념공연에서 나는 아주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처음에 사회자가 캐나다가 특히 토론토가 다민족 사회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토론토는 162개의 언어를 말하는 도시다.”

현재 유엔 가입국이 몇 나라인데 162개의 언어라는 말인가? 물론 언어는 한 나라에서도 여러 개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 반대로 여러 나라에서도, 다시 말해 영국, 미국, 캐나다처럼 영어를, 중남미의 대부분의 나라처럼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2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살고 있다니 실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한편으로 놀라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 또 한사람이 들어와 163개의 언어를 말 할지 모른다.’ 그 만큼 세계가 토론토로 오고 있다는 말도 된다. 또 특이한 점은 다른 민족들이 주최하는 행사가 여름이면 토론토의 거리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나는 올해 처음 서아시아 인들이 하는 행사를 구경 갔다. 규모도 작고 별로 볼거리도 없었지만 자기 나라의 고유의 의상을 입고 걸어 다니는 여인들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날이 갈수록 행사가 그 민족들만의 행사가 아닌 토론토 시민 전체의 행사로 자리 잡고 있음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얼마 전에 길을 지나가는데 한 흑인이 차에 국기를 달고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나라 국기였다. 토론토에 오래 살면 다른 나라 국기에 익숙해진다. 그날 저녁 TV를 보면서 새로 생긴 수단에서 분리한 남수단의 국기라는 것을 알았다. 차에 국기 달기는 월드컵 축구 때면 더욱 심하다. 한 때 다운타운의 이민자들이 주로 사는 아파트에 산 적이 있었다. 축구시합의 결과를 알기는 쉬웠다. 밖이 시끄러워 내다보면 어느 국기를 달고 또는 흔들며 지나가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한 때 캐나다가 월드컵 예선 경기를 할 때, 토론토를 피한다고 했다. 홈경기의 이점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히려 이민자들이 더 많이 와서 응원하기 때문에 Away Game이 되버린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이민자들을 피해서 에드몬튼이나 밴쿠버 부근의 버나비에서 한다고 했다. 그러나 금년에는 축구 전용경기장이 있고 TORONTO FC라는 프로 축구팀이 있어 어느 정도 축구 팬이 형성되어 있는 탓인지 토론토에서 한다고 한다. 어찌 보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데, 돈은 벌어야 하기에 토론토에서 하는지 모른다.

나는 종종 올림픽을 토론토에서 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늘 관중석이 메어져 사람들이 목이 메어라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며칠 전 포드 토론토 시장이 올림픽 유치를 포기한 사실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35년의 이민생활을 하면서 나는 알게 모르게 이 사회의 변화를 보았다.
이민사회를 말할 때, 부정적인 의미지만 Discrimination(차별)을 말하다가, Difference(차이)를 말하다가, 이제는 Diversity(다양성)을 말한다. 내가 사는 토론토가 다양한 사회로 변하는 것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토론토뿐만 아니라 캐나다가 나아가서는 온 세계가 다양해지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우리 모두 함께 사는 사회가 됐으면 참 좋겠다.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